예수 복음 중심의 교회 (요 5:39-40)

예수 복음 중심의 교회 2017.2.26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가르치는 종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라고 가르치는 종교이다. 이 중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종교는 우리의 본성에 딱 들어맞는다. 우리들의 마음에는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지가 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을 좋아할 수 있지만, 더더욱 기쁜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을 때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어한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 또는 지고선(至高善)에게 나아가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 중에서 대표적인 종교가 불교일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또는 수양으로 자신을 비우는 것을 통해서 해탈 또는 성불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기 위해서 참선을 하기도 하고 묵언수행을 하기도 한다. 방향은 정반대이지만 불교와 비슷한 종교 시스템을 가진 것이 샤머니즘일 것이다. 샤머니즘에서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의 복을 추구하는 것인데, 그러한 복을 얻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정성을 통해서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서로 다른 목표를 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러한 목표를 이루는 방법은 원론적으로 비슷하다. 내가 최선의 노력을 통해서 우리가 흐망하는 목표를 얻을 수 있다고 이런 종교 시스템에서는 가르친다. 

이러한 종교 시스템의 장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종교의 장점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이다. 도를 닦고 또 닦으면 그만큼 인격이 고매해질 수 있다. 묵언수양을 하고, 참선을 하고, 여러가지 수행을 통해서 높은 경지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고매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충분히 거룩해져서 하나님에게까지 도달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도토리 키재기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뛰어날 수 있겠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의 기준에는 도무지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은 아무리 높이뛰기를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제2 롯데월드 꼭데기까지 뜀뛰기로 올라갈 수 없다. 몇년을 연습해도 불가능할 것이고, 몇대에 걸쳐서 계속 뜀뛰기를 연습해도 이룰 수 없다. 물론 높이 뛰기 연습을 전문적으로 하는 선수들은 일반인들에 비하여 훨씬 더 높이 뛸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2롯데월드 꼭데기까지 뛸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문제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서는 결코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관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노력하고 도를 닦아서 해탈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 약간의 변화가 가능하고 더 나아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이 방법이 정말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좀 더 열심히 수련하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나아갈 만큼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다른 방법을 제시하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만일 완벽하게 착한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격이 없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의 손을 내미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남편을 배반하고 음탕한 여인을 끝까지 건져주고 아내로 받아들이는 호세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자격이 없는 우리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또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아버지를 배반하고 집을 떠난 자식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참된 복음은 아무런 가망성이 없는 우리들을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엡 2:8).

이러한 “오직 은혜로만 구원얻는다”는 가르침은 종종 율법폐기론으로 연결되곤 했다. 즉 이제는 우리가 무슨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생각이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이러한 구원파적 사고방식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제대로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더욱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옳다. 그래서 바울 서신은 대부분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우리가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한 후에, 후반부에서는 그러므로 이제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세상의 다른 종교와 비슷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고, 예수님을 선포하지 않고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종종 교회에서 듣는 메시지는 이런 메시지들이다. “여러분,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분,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치 이 세상의 종교가 스스로 노력하면 복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열심히 도를 닦으면 결국 신의 경지에 올라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교회도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하게 되면 결국 복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메시지 속에는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놀랍게도 설교 가운데 예수님의 이야기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기도 한다. 그냥 여러분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만 들릴 뿐이다. 놀랍게도 유대인처럼 살면 우리도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들리고 있고, 그런 식의 쉐마 교육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교회에서 크게 울려 퍼지고 있다. 유대인처럼 사는 것이 우리의 문제의 해결이라면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했겠는가?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사용했지만, 그 속에서 예수님의 필요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얻으려고만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철저한 무능을 발견해야 하고, 그래서 철저하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셨다(요 5:39-40). 이게 오늘날 우리가 자주 목격하는 모습이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님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공로사상만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이다. 성경 속에서 인생의 성공비법만을 찾는다면, 그것은 성경을 오용한 것이다. 아무리 성경에 보화가 가득하면 무슨 소용인가? 서울에 올라간 시골쥐가 서울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그저 쓰레기통만 뒤지면서, 서울도 별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세상의 다른 종교와 비슷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고, 예수님을 선포하지 않고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종종 교회에서 듣는 메시지는 이런 메시지들이다. “여러분,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분,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치 이 세상의 종교가 스스로 노력하면 복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열심히 도를 닦으면 결국 신의 경지에 올라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교회도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하게 되면 결국 복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메시지 속에는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놀랍게도 설교 가운데 예수님의 이야기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기도 한다. 그냥 여러분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만 들릴 뿐이다. 놀랍게도 유대인처럼 살면 우리도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들리고 있고, 그런 식의 쉐마 교육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교회에서 크게 울려 퍼지고 있다. 유대인처럼 사는 것이 우리의 문제의 해결이라면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했겠는가?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사용했지만, 그 속에서 예수님의 필요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얻으려고만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철저한 무능을 발견해야 하고, 그래서 철저하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셨다(요 5:39-40). 이게 오늘날 우리가 자주 목격하는 모습이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님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공로사상만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이다. 성경 속에서 인생의 성공비법만을 찾는다면, 그것은 성경을 오용한 것이다. 아무리 성경에 보화가 가득하면 무슨 소용인가? 서울에 올라간 시골쥐가 서울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그저 쓰레기통만 뒤지면서, 서울도 별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칠 때에도 율법적인 신앙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복음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흔히 자녀들에게 신앙생활의 법칙만을 가르치곤 한다.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하지 말라. 여러 가지 윤리와 도덕들을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은 분명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져야 할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복음이 빠진 채 율법만 가르치게 되면, 결국 사람들은 율법주의자가 되고 바리새인이 되고 말 것이다. 참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만 치장하는 위선적인 신앙인이 되고 말 가능성이 많이 있다. 그리고 율법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다.

율법을 가르치는 것의 문제는 우리가 결코 완벽해질 수 없다는 데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 자녀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부모에게서 이중성을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부모에게서 위선적인 모습을 보면서 신앙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완벽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잘못을 저지르면 왜 잘못을 저질렀느냐고 윽박지르며 훈계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도 똑같이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음을 고백하면서 바로 이러한 모습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것을 기대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우리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그들에게 매력적인 것들이 더 이상 교회에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교회보다 교회 밖에 더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는 단순히 부모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오지만, 성장하면서 세상을 향해서 달려 나가는 것이다. 기독교의 참된 핵심인 복음 자체의 맛을 느끼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단순히 과자나 놀이와 같은 즐거움에 이끌려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를 맛보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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