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 2017.3.15

사람은 예배하는 존재이다.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부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 예배의 대상이 각각 다를 뿐,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예배하게 되어 있다. 문제는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한다면 우리는 기쁨을 얻게 될 것이고,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상을 예배한다면 우리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상은 항상 우리들에게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약속하지만 단 한 번도 우리에게 그 화려한 것을 선물해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화려한 약속으로 우리를 유혹한 뒤 우리를 착취하고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만일 내 마음 속에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고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도 우상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자녀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거룩한 목적들도 우상이 될 수도 있다. 선교나 부흥이라는 거룩한 목적도 어느 순간에 우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옛날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상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신앙생활을 개인적으로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예배하는 공동체로 모인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된다. 함께 모일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가운데 회복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맛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예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심지어 부부싸움을 했더라도 예배의 자리로 나와야 한다. 마음에 불편한 일이 생기면 생길수록 예배의 자리로 더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의 자리에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호주에 집회를 갔을 때였다., 어떤 부부가 있었는데, 그 부부는 그 주에 서로 싸움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의 많은 분들이 걱정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분들이 예배의 자리로 나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부부싸움을 하면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지 않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싸웠으면서도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다. 그래서 그들은 회복이 되었다. 이번 한 번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겠지만, 이들은 예배를 통해서 많은 유익이 있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항상 우리에게 유익하다.

교회가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교회의 존재목적이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교회가 사교클럽의 수준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놀랍게도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또는 사람들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모인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과연 나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오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내가 예배받기 위해서 교회에 오고 있는가? 내가 교회에 오는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배받기 위해서 오는 순간, 우리의 신앙생활은 고통스럽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누가 더 큰가를 놓고 다투었다. 주님을 따르기로 처음 결심할 때에는 겸손하게 주님만을 바라보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데 급급했던 것이다. 마르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 자체가 기뻤다. 하지만 마리아를 바라보는 순간 자신과 마리아를 비교하기 시작했고,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비교가 있고,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생겨난다. 이러한 욕구는 자신이 예배받기를 원하는 욕구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오해하지 말자. 그러니까 교회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칭찬하고 박수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 내에서 서로 선행을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축복하는 것은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을 소망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예배하는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그런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표현은 좀 애매한 것 같다. 이럴 때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짜라고 생각한 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에 반하여, 예수님은 이 산이냐 예루살렘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비본질적인 것을 절대화해서 목숨을 거는 일이 많다. 예배의 각 요소들이나 순서들이나 형식들이 전통으로 굳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사실은 그런 형식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러한 형식을 고수하려고 했고, 이것 때문에 많은 싸움이 있어왔다. 기타나 드럼을 사용할 것인가? 오르간을 예배 중에 사용할 것인가? 찬송가만 불러야 하는가? CCM을 부를 수 있는가? 예배 중에 박수를 칠 것인가 말 것인가? 놀랍게도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런 문제 때문에 서로 싸우고 분열이 되어 왔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적인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와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물이라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문화와 전통 속에서 살아가면서 마치 그것이 본질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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