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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 (요 19:3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셨던 7개의 말씀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는 가운데, 오늘은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여섯 번째와 7번째 말씀은 서로 어느 것이 맨 마지막이었는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다 이루었다”를 여섯 번째 말씀으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긴다”라고 하는 것을 일곱 번째 말씀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순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고요. 오늘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시며 돌아가신 주님의 그 모습을 한번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 “아, 망했다”가 아니라, “실패했다”가 아니라,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며, 운명하신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엄청난 장벽 앞에서, 그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모든 것을 멈추어 버릴 수밖에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죠. 원대한 계획을 세웠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정말 많은 것들을 이루어 놓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들이 죽음이라고 하는 그 관문 앞에서는 다 멈추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사람이 계획을 아무리 잘 세운다고 할지라도,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호흡이 끊어지면 당일에 그 모든 도모가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죽음이라고 하는 강력한 그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라고 하는 그 강력한 장애물 앞에서 “아, 내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아쉽다.” “아, 내가 했던 모든 것들이 다 이제 실패로 돌아가버리는구나.” “아, 망해버렸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다 이루었다.” 성취를 선언하시면서, 목숨을 내어놓게 된 것을 오늘 말씀 가운데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셨다고 하는 말씀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사역을 다 이루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늘 위에 계신 우리 주님께서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천한 몸을 입으시고 3년의 공생 기간을 지내고, 혹은 4년의 공생의 기간을 지낸 이후에, 자신께서 이루시고자 했던 그 모든 계획을 모든 구원의 사역을 다 이루셨다고 하는 뜻이 “다 이루었다”라고 하는 말 가운데서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구원의 사역을 이루기 이전에는, 언제나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그리고 불완전한 것이었고, 상징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구약시대 때 사람들이 실수를 하고 죄를 짓는다고 한다면,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서 제사장 앞에 나아가 짐승을 잡고, 그 피를 드림으로,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 죄 용서를 받게 되는 그런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짐승에게 자신의 손을 얹고, 자신의 죄를 전가시켜서, 내 죄를 대신하여 이 짐승을 잡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마치 죽임을 당하는 것 같은, 내가 지은 죄를 이제는 그 짐승이 대신 지고 죽음으로써, 내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죄가 용서되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속죄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짐승을 대신하여 죽인다고 해서 인간의 생명을 대신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사람의 가치와 짐승의 가치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수천 마리, 수만 마리의 짐승의 값을 준다고 해도 한 사람의 생명과는 바꿀 수가 없는 것이죠. 따라서 짐승을 잡아서 사람의 죄를 대신 씻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원래부터 가능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제사의 제도를 우리들에게 주신 것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먼 훗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것을 기다리게 하고, 또한 바라보게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속죄의 제사를 제정하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할 때마다, 속죄제를 드려서 용서를 받기는 했지만, 그 용서가 완전한 것일 수가 없기 때문에,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또 나가고 또 나가고 또 나가서, 속죄제를 다시 한 번 드리고, 또 드려야만 하는 그런 반복적인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그것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아무 죄가 없으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우리의 모든 죄가 단번에 완전히 모든 죄를 다 사하시게 되는 그런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다 갚아버렸다.” “모든 죄를 다 청산했다”고 하는 청산의 메시지를 선언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우리가 지불해야 될 대가가 남아 있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빌렸을 때, 그 돈을 빌리면 이자가 불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엄청난 이자를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는데요. 그런데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다 갚는다고 해도, 그 채무를 다 갚기가 정말 어려운 일들이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나의 그 채무를 완전히 다 갚아준다고 한다면, 그래서 그 채무 증서를 찢어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더 이상 내가 갚아야 할 것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지은 죄의 삯은 사망일 수밖에 없는데, 그 사망의 죗값을 예수님께서 다 갚아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갚아야 할 채무가 없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의 죄가 지은 그 채무를 다 지불해 버렸기 때문에, 다 갚았다고 하는 채무 청산 그런 도장을 찍어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드려야 할 제사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저희는 종종 교역자 교역자들이 같이 식사를 점심 때마다 하게 되는데요. 한 번은 어느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우리 교회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권사님들과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그리고 식사를 다 마친 다음에, 그리고 계산을 하러 나가다 보면 식당 주인께서 그러시는 거예요. “아까 그분이 돈 계산하고 갔어요.” 그러면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가지고, 그래서 그냥 당당하게 걸어 나올 때가 있는데요.

제대로 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누군가 나를 대신하여 돈을 내버리면 더 이상 우리가 그 식당에서 갚아야 될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지은 죄는 우리가 청산해야 될 빚이 있는 것이고, 우리가 청산해야 될 그 빚은 죽음으로서만 갚을 수 있는 것인데, 그 죽음의 빚을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대신 갚아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갚아야 될 채무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하는, 채무 청산의 선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영생의 선물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죄가 사라지게 되었고,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되어서 이제는 아무것도 더 이상 우리가 갚아야 할 채무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기억하며, 감사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도 안타깝게도 우리 교회 내에서, 아직도 우리가 청산해야 될 죄의 대가가 있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하는 가르침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교회 내에서 역사상 계속해서 반복되어 왔습니다. 중세 천주교에서 늘 가르쳤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우리가 금식도 해야 하고, 우리가 제사도 드려야 하고, 계속해서 우리가 종교적인 열정을 다해야만, 그래야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가르침을 성경과는 전혀 다르게 가르쳐 왔기 때문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내 죄를 청산하기 위한 고행의 길로 가야만 했었던 것이죠.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기쁨이 없고, 정말 고행으로 내 죄를 씻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또 노력을 다해야만 하는 그런 엄격한 종교 생활로 우리의 신앙을 바꾸어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미션이라고 하는 그런 영화가 있었는데요. 아주 오래전에 나온 벌써 한 3~40년 됐나요? 그 전에 나온 그 아주 감동적인 영화가 있는데, 거기에 주인공이 보면 맨 첫 장면에 절벽 위를 올라가는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근데 그 절벽 위로 올라가는 그 장면 가운데, 그 주인공이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가요. 무거운 짐을 지고 계속해서 올라가는 것이죠. 올라가다가 넘어지면 또다시 올라가고, 그 짐이 떨어지면 다시 그 짐을 갖고 또 올라가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지었던 그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내가 고행을 하고, 내가 이런 힘든 그 과정을 거치면, 내 죄가 용서받을 수 있고, 내가 씻음을 받을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그런 고행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그런 식으로 우리를 향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체투지를 해가면서, 108배를 하면서, 정한수를 떠놓고 1천일 동안, 100일 동안 그렇게 정성을 다하고 최선의 정성을 다할 때, 그래야 우리가 무엇인가 얻을 수 있고, 우리가 모든 것을 씻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종교적인 열정들을 불러일으키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 놀랍게도 우리 사람들의 심리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열심히 고행을 하고 열정적으로 종교 생활을 해야만 그래야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내가 무엇인가를 대단한 노력을 해야만 그래야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에 우리들의 마음은 너무나도 쉽게 끌려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해주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다 치렀다.” “너희들이 당해야 될 그 고난과, 너희들이 당해야 될 그 아픔, 그 죽음을 내가 다 짊어지고, 내가 십자가 위에서 다 해결했으니, 이제는 자유롭게 해방의 삶을 살으라”고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선언해 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난주간이라고 하는 것은 1년 내내 평생 자유롭게 살다가 마음대로 죄를 짓고 살다가 고난 주간이 되면 내가 고난을 당해야 되겠다. 내가 정말 나 자신을 힘들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그래서 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물론 그런 걸 통해서 주님께서 얼마나 큰 고난을 당하셨는가를 느끼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내가 주님의 고난을 조금 덜어드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것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고난 주간은 주님께서 얼마나 큰 은혜를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셨는가, 주님께서 얼마나 큰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는가, 그리고 그 결과로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를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되는 놀라운 은총의 시간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고 하는 말씀은 이제부터는 우리가 마음대로 죄를 지으며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조금 전에 우리 기독교 역사상 아직도 우리가 치러야 될 그런 죄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고행을 하고 우리가 고난을 하고 금식을 하고 온갖 그런 일들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씻어보려고 하는 그런 일들이 우리 교회 역사상 계속해서 내려왔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많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렸는데요. 정반대로, 정반대의 그런 역사가 반복되어 왔는데, 그 반복된 역사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다 해결해 주셨으니까, 이제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죄를 지어도 괜찮고,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에 가게 된다라고 하는 그런 방임주의가 또 기독교 역사상 계속해서 흘러내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다 씻어주셨다며,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마음대로 살아도 아무 문제 없겠구나라고 하는 그런 자유 방임주의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그 죄 그 죄사함의 역사가 우리의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현재의 죄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다 씻어주셨다고 한다면, 마음대로 죄지어도 괜찮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오늘날 구원파의 그런 잘못된 주장들이 그런 식으로 나타나고 있는데요. 그런데 우리가 정통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도 ,그런 생각이 종종 실제적인 자유방임주의 실제적인 구원파적인 생각들이 우리들 마음 가운데 많이 놓여져 있는 겁니다. 내가 죄를 지어도 “뭐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가겠지” 내가 마음대로 살아도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셨다며?” “예수님께서 대가 다 치러주셨다며?” 우리가 음식점에서 아무리 많은 밥을 먹어도 아무리 많은 것을 먹었어도, 누군가 나를 위해서 계산해버렸다고 한다면, 그러면 내가 자유롭게 나갈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예수님께서 다 죗값을 치러주셨으니까,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엉뚱한 생각들이 이단적인 생각 가운데도 나타날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우리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도, 죄를 지으면서 그렇게 심각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하는 말씀은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마치 입장권을 회복하는 것처럼 생각을 해서 입장권만 내가 획득하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어도 입장권만 가지고 있으면 운동장에 들어갈 수 있고 콘서트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천국 입장권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 입장권만 확보하면 이 세상에서 무슨 짓을 해도 천국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착각을 가지고 있는데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은 그렇게 장소를 이동하는 것의 개념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망가진 관계를 회복하는 개념으로 이해하시는 것이 옳고, 우리가 예수님과 우리가 주님과 그 결혼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식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두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서 그리고 서로 존중하면서 서로 도와주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야 그게 결혼인 것처럼, 호적 신고만 결혼 신고만 하고 그래서 결혼했다고 하는 그런 이름만 주민등록에 올라가기만 하면 그게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게 진짜 결혼인 것처럼,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을 인정받았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가운데 행복하게 영적인 삶을 계속해서 살다가 하나님 앞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것만이 아니라, 사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주님과 함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때, 천국을 지금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의 감격을 가진 사람은 기쁨으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신 것은 우리 주님께서 늘 주님의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는데, 그렇게 한 것은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바른 관계 자체가 존재 자체고 기쁨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탕자가 집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그다음 날 일어나서 아버지 잘못했어요. 그다음 날 또 일어나서 아버지 또 잘못했어요. 말하면서 하는 게 아니라, 탕자가는 이제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면, 다시 떠나지 않아야 되는 것이지, 아버지의 집에서 그 안에서 아버지의 말씀의 그 상황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다 치르셨다고 하는 그 이야기는 그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자유롭게 방중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한 이야기인데요. 미국에 유학을 오신 어떤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미국에 유학을 와서 열심히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드디어 학업을 다 마치고 졸업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졸업을 한다고 하니까 너무나도 좋잖아요? 그래서 부모님들이 한국에서 축하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마침 그때가 특별새벽기도회 주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교회에 먼저 가서 사역을 위해서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그 사모님이 한국에서 오신 시어머님과 함께 교회로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이 운전면허가 정식 운전면허가 아니라, 운전연습하는 운전면허였던 것인데요. 그러다가 제대로 운전을 잘 하지 못하시는 분이라 새벽기도회를 가다가 사고가 나서 시어머니가 사망하게 되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게 됐습니다. 운전면허가 제대로 됐다고 한다면, 그냥 슬픈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는데, 운전면허가 없는 사람이, 연습 면허만 가지고 있던 사람이 운전하다가 동승했던 시어머니가 사망함으로 말미암아, 미국에서는 과실치사 혐의가 적용이 됐습니다. manslaughter case로 기소가 되었고, 그래서 결국 죄값 죄로 인해서 기소를 당하게 된 겁니다. 죄가 있다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변호사들을 고용해서 방어를 하는데, 변호사들에게 가서 해봤자 늘 돈만 뜯기지, 제대로 된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가운데, 아무튼 많은 고난을 당하다가 결국 판결을 받았는데, 사회봉사 명령을 받게 됐습니다. 정말 슬픈 일인데, 사회 초범이기 때문에, 고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 아무튼 징역형이 아니라 사회봉사 명령을 받게 되어서, 몇 시간 동안 사회봉사를 해야만 하는 그런 일을 받게 됐습니다. 그래서 고속도로에 나가서, 오렌지색 옷을 입고 고속도로에 쓰레기를 줍는 일들을 하고, 장애학교 봉사로 바꾸어서, 나중에는 장애학교에 가서 그 사모님이 봉사도 하고, 그래서 몇 시간 동안 그 사회봉사 명령을 다 채우고 다 채워서, 그래서 법원에 그동안 사회봉사를 이렇게 이렇게 해서 다 치렀다고 다 했다고 하면서 증명을 해가지고 법원에 갔더니 법원에서 도장을 하나 꽝 찍어주는 겁니다. “다 갚았습니다.” 빨간 도장으로 Paid in Full. 더 이상 치러야 될 게 없이, “다 치렀습니다”라고 하는 그 도장을 보는 그 순간에 너무나도 감격돼서 기뻐서 울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어느 목사님을 통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짓는 죄악, 우리가 매일 범하는 그 악한 것들, 그래서 그 죄의 싹은 사망일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paid in full. “다 이루었다.”라고 하는 선언, “다 이루셨다”고 하는 그 선언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들이 받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죄를 또 지으며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 감사하며 믿음으로 감사 가운데,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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