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감동으로 (딤후 3:14-17)

2017.5.28 주일오후예배 설교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신앙강좌 제3강

1. 성경은 누가 기록했는가? 성경에는 여러 명의 인간 저자가 있다. 모세오경은 모세가 썼고, 바울서신은 바울이 썼고, 이런 식으로 인간 저자가 성경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이 인간 저자의 글인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을까? 성경적인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영감을 통해서 오류로부터 자유롭게 보호하셨다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 저자가 쓴 책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동시에 하나님의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의지할만한 책이 되는 것이다.

2. 실제적으로 성경에 오류가 있어 보이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첫째, 우리가 오해한 결과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른 이해를 위해 겸손한 태도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둘째, 성경은 다양한 문학적 장르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문학적 장르에 맞는 해석을 해야 한다. 셋째, 성경은 영적인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세상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세상의 언어는 영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그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불변하면서 이해해야 한다. 넷째, 성경은 원문이 영감된 것이지, 사본이나 번역본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본이 원문을 거의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번역이 원문의 의미를 거의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지만, 결국 최종적인 권위는 원문에만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더하거나 제하지 말라 (계 22:18-19)

2017.5.14 주일오후예배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신앙강좌 제2강

1.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대한 최고의 기준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던져지는 질문은 과연 성경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어떤 책들이 성경인가? 천주교의 성경은 개신교의 성경에 7권의 책이 더 많다. 유대교는 구약만을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이슬람교는 모세오경과 시편과 복음서만을 성경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정말 누구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사실 어떤 책이 성경이고 어떤 책이 성경이 아닌가를 결정할 권한이 사람에게 있지 않다. 만일 사람이 성경이 무엇인가를 결정할 위치에 있다면,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를 사람이 가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을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2. 성경 66권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성경이다. 그래서 성경이 탄생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 책을 성경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무엇이 성경이고 무엇이 성경이 아닌가를 구분할 수 있는 어떤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처음부터 성경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성경인 것이고, 어떤 책은 처음부터 성경으로 주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성경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성경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는데서 발생한다. 어떤 초대교회 이단종파는 오직 누가복음과 바울서신만이 성경이고 구약이나 다른 신약성경은 성경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성경을 결정할 권한은 없지만, 무엇이 진짜 성경이고 무엇이 아닌가 구별할 기준을 요구하게 된다. 1546년에 천주교에서 성경에 추가시킨 7권의 책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성경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원래 기록된 책이 아니다. (2) 책 자체에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3)  유대교에서 성경으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 (4) 4세기 이후에야 교회 안에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5) 신약에서 권위가 있는 구약성경 말씀으로 인용된 적이 없다. 

3. 우리는 성경 외에 다른 책들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추가해서는 안 된다. 성경 66권 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우리 신앙과 생활에 대한 최고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오직 성경으로 (시 119:105)

2017.4.30 주일오후예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신앙강좌 1강

1. 중세의 가톨릭 교회가 타락했던 것은 성경을 몰랐기 때문이다. 성경을 떠나 그저 교회의 전통과 관습 속에서만 신앙생활을 할 때 교회는 타락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은 성경을 다시 발견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500년전에 출발한 것이지만, 사실은 그 이전 원래 진짜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도 잘못된 길로 걸어가고 있는 것은 성경을 떠났기 때문이다. 

2. 우리의 신앙생활이 과연 성경적인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분별해야 한다. 그 어느 것도 성경보다 높은 권위를 가지는 것이 없다. 

전주를 기점으로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교회

전주를 기점으로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교회 2017.6.26

교회를 배에 비유한다면 교회는 어떤 배일까? 유람선, 전투선, 화물선, 여객선, 도대체 어떤 배에 비유할 수 있을까? 사실 교회는 다양한 기능들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배에만 해당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교회는 유람선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유람선을 타고 즐기며 쉼을 얻는 것처럼,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친목을 나눈다. 그런 측면이 교회의 아주 중요한 측면이기도 하다. 또한 교회는 여객선과 같은 기능도 있어서, 사람들을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는 천국이라는 목표지점을 향해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교회의 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전투선과 같은 기능이다. 사탄의 지배를 받아 죽음 가운데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들을 영적인 전투를 통해 살려내고 구원해내는 구원선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에는 교회가 무엇보다도 유람선이길 원하는 마음이 있다. 우리끼리 행복하고 우리끼리 즐거우면 된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물론 교회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고 돕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는 비단물결 같은 목소리로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마음에는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해서 평안함과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께서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산 위에서 계속 있기를 소원했던 베드로처럼 우리들은 그냥 이 상태로 여기에 머무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란 동네로 가셨을 때였다. 거기서 예수님을 귀신을 내어 쫓으셨고 베드로의 열병을 고쳐주셨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예수님께서 계속 그들과 함께 있기를 소원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동네로 가시겠다고 하셨다.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종종 사명을 망각해버리고 그냥 우리가 즐겁고 재미있는 것으로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처럼, 그 달란트를 땅 속 깊은 곳에 감추어버리고 사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만 잘 되고, 우리 교회만 성장하는 것은 기뻐하는데, 복음이 전 세계로 전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망각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존재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주인이신 주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 성경적인 교회들이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일에 함께 해야 한다. 여러 부대들이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하겠지만, 결국에는 모든 부대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개교회 이기주의에 사로잡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마음을 함께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28:18-20). 이러한 사명은 역시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우리가 있는 곳인 전주를 기점으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본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가면서 돌보아주었던 것처럼, 영적으로 강도만난 것과 같은 사람들을 우리가 외면하면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외면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우리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세상에는 목마르고 굶주리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외면한 채 우리까지 잘 지내는 것은 옳지 않다.

초대교회 시절에 안디옥 교회는 놀라운 결정을 했다. 그것은 사울과 바나바를 기도하는 가운데 따로 세워서 선교사로 파송하는 일이었다. 사실 이들을 파송해 보내지 않고 안디옥 교회를 위해서 일하게 했더라면 어떤 유익이 있었을까? 안디옥 교회에 아주 큰 영적인 유익이 있었을 것이다. 위대한 설교자이며 성경교사인 바울은 안디옥 교회를 더욱 든든한 믿음 위에 세우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사랑이 많고 이해심이 많은 목회자였던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좀더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디옥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이들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그리고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 이것은 자기 교회만의 유익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결정이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개교회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전 세계의 영적인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만 경도되어 있는 모습이 많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영적인 것을 탐욕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기 교회가 크고 성장했다는 자기만족을 누리려는 잘못된 욕심일 경우가 많다. 우리는 우리 교회라고 하는 좁은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예전에 미국에서 목회를 할 때였다. 당시 우리 교회 안에는 유학생 사역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분들이 많이 있었다. 유학생 사역을 열심히 했었는데, 사랑을 주고 정을 주었지만 결국 그들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또는 다른 지역으로 가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을 했던 것이다. 이들에게는 아무리 정을 많이 주더라도 결국 우리 교회의 교인이 될 수 없는 뜨내기 성도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에, 유학생 사역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로지 교민들을 중심으로 사역을 펼쳐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설명을 했다. 한 나라가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부대가 필요하다. 전투부대도 필요하고, 의료부대도 필요하고, 신병교육대도 필요하다. 그런 부대들이 모두 최선을 다해야 한 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병교육대에서 일하는 군인들이 아무리 병사들을 잘 훈련시켜도 결국 우리 부대의 병사들이 되지 않고 다른 부대로 전출갈 수밖에 없으니 대충 교육시키자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하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들이다. 우리가 뿌린 씨앗이 우리 교회에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자. 이들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곳에 가서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발견하고 열심히 유학생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우리가 당장 열매를 따야 한다는 조급함을 버려야 한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5-6) 우리는 당장 눈앞에 우리에게 유익한 결과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전주를 기점으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 교회 주변에서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어쩌면 그렇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모여들어서 교회가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중국에서, 베트남에서, 필리핀에서, 등등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현장을 소홀히 할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1:8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은 예루살렘에서 먼저 복음을 전한 후에, 유대로 가고, 유대에서 복음을 먼저 전한 후에 사마리아로 가고,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먼저 전한 후에 땅 끝까지 가라는 말씀이 아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동시에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복음을 증거하는 데에는 모든 곳이 최전방이다.

비단물결 같은 목소리로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교회 (빌 2:1-4)

비단물결 같은 목소리로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교회 2017.3.12

우리는 어떤 교회를 꿈꾸는가? 우리는 교회에서 위로받기를 원하고 힘을 얻기를 소망한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교회에서 푸대접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먼저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기를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기 원하고 위로를 받기 원하면서, 정작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비난을 일삼는다면 아주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칭찬할 점을 찾기보다는 단점을 찾는 것이 쉽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다른 사람이 정말 잘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의 관점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해심이 부족한 게 우리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쉽게 비난의 말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똑똑한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은데, 실상은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사랑이 부족한 아주 저급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우리는 어떤 교회를 만들어나갈 것인가? 비단물결 같은 목소리로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세워주는 교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바리새인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일에 앞장섰을 뿐이고 영적인 교만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예수님을 이들을 향해서 책망하셨다. 결코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인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우리 교회에 영적인 리더십 그룹을 선택할 때가 있을 텐데, 우리는 비난과 책망을 일삼고 잘난척하는 사람들이 선출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불만을 표시하는 교만한 불평분자들에 따라 움직이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안타깝게도 교회의 역사가 길어지면,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없이 그저 신앙생활에 전문가가 되어버린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교회의 주도권을 잡는 경우가 생긴다. 우리는 그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문제는 모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잘 안다.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먼저 참고 인내해야한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먼저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의 문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우리의 문제는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을 향해서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내가 손을 먼저 내밀어야 하는데,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참고 인내해야 하는 순간에 폭발해버리는 것이 우리의 한계이다. 희생해야 할 순간에 나의 욕심만을 찾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예수님이 필요하다. 이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를 쏟으신 예수님의 은혜뿐이다.

더욱 큰 문제는 나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으면서 상대방에게만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한 없이 관대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해서는 아주 까다로운 엄격한 기준을 들이미는 한, 그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 그 어느 누구도 그러한 비판적 관점에서 자유로울 완벽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전한 관계의 출발점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며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있다.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득실대고 있다. 자신들의 신앙생활은 아주 뛰어난 것으로 착각하면서, 상대방을 향해서는 비난을 일삼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우리는 교회가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공동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마치 병원에는 환자들이 몰려드는 것처럼, 예수님은 영적인 병자들을 모으셨다. 성도들은 우리들의 유일한 영적인 의사이신 예수님에게 나아가 치유를 받아야 한다. 그 치유는 마지막 날에야 완성될 것이다. 지금 이 때에는 완벽하게 완성된 사람은 없다. 여전히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사랑으로 감싸주어야 한다. 약점과 단점들을 보게 된다면, 비난거리로 삼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감싸주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반창고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비단물결 같은 목소리로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면서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가도록 돕는 일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 다양한 사람들 중에는 안타깝게도 적극적으로 공동체의 관심사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밖에서 비아냥거리고 불평하고 비난하는 일을 주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사회에든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비아냥거리며 딴지를 걸 때,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커서 그들의 주장에 이끌리기 쉽다는데 있다. 그런데 정말 성경적으로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목소리에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 교회의 정책과 목표와 방향을 설정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순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 이들의 말에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 광야의 이스라엘 민족들는 그들 사이에서 불평을 일삼던 잡족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의 교회에서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옆에서 비난하고 책망하는 사람들의 말 속에도 선한 의도가 들어 있을 수 있다.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살펴본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교회를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성도를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된다는 일종의 신념도 있었다. 하지만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옆에서 비아냥거리고 책망하고 비난하는 방법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며, 오히려 역효과만을 가져 왔다는 점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예의가 결여된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처럼,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고 내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교회를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정당화한다고 착각하곤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어떤 방법이든지 다 괜찮다고 착각하곤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강간이나 스토킹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듯,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상대방에게 예의바르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선물을 할 때에는 좋은 포장지에 싸서 전달한다. 좋은 선물을 쓰레기통에 넣어서 주지 않는다. 내가 교회를 위해서 또는 가정을 위해서 또는 공동체를 위해서 좋은 제안이 있다면, 예의를 갖추어 전달해야 한다. 책망과 비난으로 진리를 전달하는 것은 쓰레기통에 선물을 던져넣는 것과 같다. 우리 교회는 서로 예의를 갖추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내가 혼자 잘난 것처럼 교만한 자세로, 또는 주장하는 자세로 비추어져서는 안 된다. 항상 겸손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비단물결 같은 목소리로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