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 (눅 16:19-31)

2017.6.11 주일오전예배 설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읽다보면 혼란스럽다. 도대체 왜 부자는 지옥에 가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가게 되었을까? 25절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죽어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부요하게 산 사람은 죽어서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일까? 기독교 일부에서는 그렇다고 주장한다. 크리스천은 가난하게 살아야 하며 부자가 되는 것은 죄악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가난한 자라고 해서 무조건 천국에 간다는 것도 없고, 반대로 부자 중에서도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는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는가를 말해주는 비유는 아니다. 성경 전체적인 교훈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이 비유는 여러가지 교훈을 주고 있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두 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첫째, 우리의 인생은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 복된 인생인가는 마지막에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교훈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이 세상의 삶으로만 끝나지 않고 죽음 이후에 영생 또는 영벌이 있다는 것을 안다. 성경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스칼은 불신자들을 향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 것이 없다고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없고 천국과 지옥도 없다는 쪽으로 믿고 자신의 인생을 걸었는데, 죽어보니 정말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아주 큰 낭패를 낭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의 삶으로만 끝난다면 부자처럼 사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의 삶이 이 세상으로만 끝나지 않고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면, 누가 복된 사람인가? 마지막이 좋은 사람이 복된 사람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든지 (부자로 살든 가난하게 살든), 마지막에 천국에서 사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든지, 마지막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습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습 때문에 교만할 것도 아니다. 우리의 삶은 마지막이 어떠할 것인가에 따라서 평가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약 1:5-8)

2017.6.5 주일오전예배 설교

야고보서 1:6-8에서 기도할 때에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고, 결코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의심하는 자는 응답받을 생각도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일까?

그런데 전혀 의심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의심하지 않고 전적으로 믿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우리가 전적으로 믿고 기도한다고 해서 우리가 기도한 그대로 100% 응답되는 것도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해로운 것을 구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구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허락해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내가 구하면 구한대로 응답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외면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여야 한다.

시험을 당하거든 (약 1:1-4)

2017.5.28 주일오전예배 설교

1. 시련은 재수 없는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련과 고통을 만나게 되면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당황스러워 할 것이 아니다(벧전 4:12).

2. 고통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미신적인 대답은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배우자를 잘못 선택하고, 묘지를 잘못 선택하고, 이사날짜나 결혼날짜를 잘못선택하면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있으니까, 사주팔자를 보아야 하고 명당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게 미신적인 대답이다. 그런 미신적인 대답의 연장선상에 성격차이가 있는 배우자를 만났다는 것이 있다. 하지만 성경은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 다양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3. 우리는 “왜”보다는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고 싶다. 시련과 고통이 닥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적인 권면은 기뻐하라는 것이다(약 1:2; 벧전 4:12-13).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고통스러워하고 절망하고, 더 나아가 그 원인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면서 비난한다. 그게 죄성이 많은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성경은 기뻐하라고 가르치신다. 그 이유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약 1:3; 롬 5:3-4). 더 나아가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콘트롤 하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롬 8:28). 따라서 우리는 기뻐해야 할 것이다. 

아벨의 믿음 (히 11:4)

2017.5.21 주일오전예배 설교

1. 예배가 제사인가? 한편으로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once for all)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희생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에(히 10:11-14), 우리는 더 이상 구약에서 규정하고 있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필요가 없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방식은 다르지만 구약에서 규정했던 제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린다는 점에서는 제사라는 표현으로 비유할 수 있다. 성경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찬송의 제사를 드려야 하며(히 13:15), 신령한 젯가를 드려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벧전 2:5).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한다는 점에서, 예배는 제사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를 통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대한 교훈을 얻는 것은 가능하다.

2.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벨이 더 좋은 제물을 드렸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곡물로 드리는 제사도 받으시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가 피의 제사였기에 받았다고 해석할 수 없다. 또한 가인의 제사가 정성스럽지 않았던 것이라는 뉘앙스가 없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가 정성스러운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다. 그런데 히브리서 11:4에서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제사는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예배를 멋있게 드리는 것도 중요하다. 무시할 것이 아니다. 하지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3. 우리가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먼저 모든 것을 주셨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쏟아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