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하심 – 계시록 강해 5

구원하심 (계 7:13-14) 이국진 목사

계시록 6장과 7장은 두루마리의 인봉을 하나씩 뗄 때마다 어떤 재앙들이 닥치게 될 것인가를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흉년이 들고, 물가가 너무 뛰어 살기 힘든 세상이 되고, 지진이 나고, 하늘이 말려버리고, 태양은 어두워지고, 달은 핏빛으로 변하고, 별들이 떨어지고, 산과 섬들이 움직이는 일들이 얼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 여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많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교훈이 있다면 마지막 때는 그 누구도 모르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올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재난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하거나, 언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 사도 요한에게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는 그런 공포감에 시달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일들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면, 그 고통이 너무 커서 다른 곳이 건강하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마지막 때에 재앙이 닥치면 우리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러한 상황이 온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이다.

144,000명이 인침을 받은 자라고 하는 말은 많은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구원의 문이 너무 좁아서, 그 안에 들어가려면 도대체 내가 얼마나 더 많은 노력을 해서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144,000명의 인침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구원받을 사람들이 소수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첫째, 이는 어림수 또는 상징수로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숫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계시록 7:9에 보면 유대인들 144,000명 외에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계 14:3-5에 보면 144,000명은 첫 열매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첫 열매가 맺히면 그 뒤에 많은 열매가 뒤따라 맺히듯 더 많은 구원받은 자들이 있을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점이다.

아무런 공로도 없는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이들이 외칠 것이다. “구원하심이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말이다. 우리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뛰어난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고 말이다.

계시록 6장
계시록 7장

요한 계시록 강해: bit.ly/계시록강해

경배와 찬양 – 계시록 강해 4

나무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다 보면 숲을 보지 못한다. 성경도 그렇다. 특히 요한 계시록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요한 게시록에 있는 표현들 하나하나가 무슨 의미일까에 신경을 쓰다보면, 그 그림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놓칠 수 있다.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4장은 하나님의 보좌 주위로 24장로가 등장하고 네 마리의 생물이 등장한다. 이러한 환상에서 묘사되고 있는 각각의 요소들이 무엇을 나타내려고 하는지를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해석들도 그저 사람의 주관적인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체적인 메시지는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이 로마 황제가 다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사도 요한에게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시는 것은 아무리 이 세상이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통치하고 게심을 바라보고 담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요한계시록 5장은 하나님의 오른 손에 두루마리가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두루마리는 일곱 인이 박혀서 아무도 능히 열어볼 수 없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크게 울었다. 아무리 천상이 화려하고 아름답다 할지라도 자신이 그 안에 포함된다는 확신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보배로운 말씀이 그 안에 있더라도 읽을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인을 예수님께서 떼실 수 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고, 예수님으로 성경을 해석할 때 제대로 해석될 수 있다.

요한계시록 4,5장은 천상에서 하나님께 예배가 있을 것을 묘사한다. 그 장면은 정말 영광스러운 장면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이나 올림픽 시상식이 가슴벅찬 사건이듯이, 그 날 저 천국에서의 예배는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때가 오기 전에 우리는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천상의 기쁨을 조금씩 맛보는 자리이고, 다시 힘을 얻고 세상을 향해 나갈 용기를 얻는 자리가 된다.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세상은 완전히 엉망진창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감사와 찬송을 부르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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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교회 – 계시록 강해 3

일곱 교회 (계 1:20) 이국진 목사

마하트마 간디는 “나는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당신들 크리스천은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말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그들이 비종교적이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교회가 순수한 신앙을 오염시키는 발암물질처럼 생각되기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여기에 우리들의 고민이 있다.

교회가 타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흔히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한다. 사도행전 2:43-47에서 그려주고 있는 것처럼,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예루살렘 교회도 완벽한 교회가 아니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사람도 있었고, 교회의 구제 사역에 불만도 터져 나왔다. 교회는 완벽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어차피 교회는 나와 똑같은 죄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사악한 모습을 본다고 해서 그런 공동체를 떠나는 것은 현명한 것이 아니다. 마치 부모님이 완고하고 성질을 잘 부린다고 해서, 집을 떠나 거지들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이 옳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사랑은 고립된 채 존재할 수 없고, 은혜는 홀로 받을 수 없고, 소망은 외로이 자랄 수 없다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말처럼 말이다.

소아시아에는 7 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들은 장점들도 있었고 단점들도 있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만 받은 반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 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그 7개 교회를 모두 소중하게 보셨다는 사실이다. 금촛대와 같다고 하셨다. 교회는 모든 것이 완벽하여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응접실이라기보다는 엉망진창인 거실과 같다. 사람들은 그 중에서 잘못된 모습의 사람들을 보고 비난하고 교회를 떠난다. 하지만 아무리 같이 다닌다 해도 갈매기가 낚시배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런 사람들은 교회의 진정한 구성원일 수 없다. 그 모습을 보고 교회를 혐오하고 떠나야 할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는 소아시아 교회의 모든 상황을 모두 알고 계셨다. 그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도, 그들이 절박한 위험에 빠진 것도 알고 계셨다. 더 나아가 겉으로는 괜찮은 척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도 다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런 교회들을 귀하게 보셨다. 우린 혼자가 아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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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 계시록 강해 2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계 1:12-20) 이국진 목사

또한 사도 요한은 그 금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인자 같은 이는 곧 예수님을 뜻하는데, 인자라는 말은 仁慈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人子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신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물론 그냥 사람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신적인 존재를 뜻하는 人子는 다니엘의 환상에서 처음 등장한다. 다니엘이 본 환상에서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즉 하나님께 인도되었는데,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이 바로 그 인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인자 같은 이가 다시 사도 요한의 환상 속에서 보여졌다. 그 모습은 아주 특이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머리 털은 양털같이 하얗고, 눈은 불꽃 같은 눈이었다. 이 환상을 통해서 보여주시려는 것은 우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는데,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셨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교회는 답답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고 있어서,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니라, 교회들 사이에서 운행하고 계시는 모습을 본 것이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환상을 보았다. 제일 먼저 본 것은 일곱개의 금촛대였다. 이 일곱 금촛대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었다(계1:20). 교회를 촛대에 비유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마 5:14, 16)에 비추어볼 때, 적절한 비유이다. 그런데 그 촛대가 보통 촛대가 아니라, 금으로 만든 촛대라고 주님께서 보여주셨다. 즉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고귀한 존재임을 보여주셨다. 이러한 환상은 아주 의미있는 것인데, 실제 그 당시의 교회는 핍박을 받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벌레보듯이 교회를 바라보았고 핍박했는데, 주님께서 보시는 관점은 아주 고귀하다고 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들고 계신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계심을 뜻한다. 교회가 로마 황제의 명령 하나에 흔들릴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풍전등화와 같은 모습으로 있는데, 알고보니 주님께서 교회를 붙들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요한 계시록은 흔들리는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위로의 메시지이다.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았고, 지금도 너희를 지키고 게시며, 귀하게 보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요한 계시록이 쓰여지던 시대의 사람들처럼 불안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사는 것 같고, 이제는 더 이상 로마 황제와 같은 위협이 사라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맘몬(돈)이라는 황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 앞에 굴복하지 않으면, 그 앞에 양심을 팔아버리지 않으면 망할 것 같은 그런 위협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상황에서 믿음을 제대로 지키고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어쩌면 믿음을 지킨 결과 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이 세상은 맘몬(돈)이라는 황제가 지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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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의 말씀 – 계시록 강해 1

예언의 말씀 (계 1:1-3) 이국진 목사

요한 계시록은 어려운 책이다. 그런데 수많은 이단들이 이 책을 애용하였고, 잘못된 해석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해왔다. 그래서 바른 설명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서점에는 요한 계시록에 대한 엉터리 해설집과 설교집들이 넘쳐나고 있다. 반면, 유진 피터슨, <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은 요한 계시록에 대한 좋은 해설서이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이 책이 미래에 관한 예언이라는 오해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예언이라는 말 자체는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해주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선포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 가운데 미래의 일이 포함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한다. 성경은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을 철저하게 금하고 있다(신 18:14).

사실 미래의 일을 알고 싶어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일 경우가 많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우리들의 복을 추구하려는 동기가 그것이다. 물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복된 일이지만, 복 자체가 목적이 되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은 추악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증오하시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은 미래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중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한 말씀이다.

중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라고 하신다. 읽는다는 것은 그냥 아무런 감정 없이 그냥 몇 독을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종종 철자화된 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생생한 음성과 숨결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사람들을 정죄하곤 하였다. 성경은 몇 독을 하고, 몇 번 필사를 하고, 몇 구절을 암송했다는 자랑과 성취의 수단과 명예가 되기 쉽다. 우리는 성경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실패하곤 한다.

연애편지는 그렇지 않다. 애인이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가슴이 설레고 뜨거워진다. 단순한 글이 아니라, 그 글을 읽으면서 숨결을 느끼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 즉 예언의 말씀도 우리는 그렇게 읽어야 한다. 그게 복이다. 예언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자체가 복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바라보실 때,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바라보지 않으셨다. 한 사람 한 사람 애정의 눈으로 보셨다. 아무런 감정없이 종교생활을 할 게 아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만나고, 교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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