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갱신을 통해 삶의 전 영역을 새롭게 하는 교회

회개와 갱신을 통해 삶의 전 영역을 새롭게 하는 교회 2017.7.31

구원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구원이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는가 받지 못했는가를 질문하고,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구원에 대한 개념이다.

구원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로만 판단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우리가 어떤 입장권을 손에 넣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어느 날 몇 시에 열리는 축구 경기의 입장권을 손에 넣었다면, 더 이상 축구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서 더 해야 할 일이 없다. 축구 경기가 열리기 전에 어떤 삶을 살든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중에 입장권만 확인하고 우리를 그 경기장 안으로 넣어줄 것이니까 말이다. 천국에 가는 것도 즉 구원을 받는 것도 천국 입장권을 확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마지막 날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반쪽짜리 구원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원 개념을 가지게 될 경우, 이 세상에서의 삶이란 아무런 중요성을 가지지 못하게 되며,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율법폐기론 또는 율법무용론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초대교회 시절에 복음을 이런 식으로 오해한 경우가 있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전했을 때, 사람들은 그러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고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바울 사도의 대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였다.

구원은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는 입장권을 확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점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탕자의 비유이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그 결과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다. 나중에 탕자는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 탕자를 다시 맞이하여 예전의 아들의 신분으로 온전히 회복시켜 주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으니 다시 아버지의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게 삶을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 됨의 신분을 누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참된 믿음과 참된 구원을 단순히 예수님을 믿어 나중에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어 그 관계가 주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자애로움 때문이다. 아무리 탕자가 철저하게 타락했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사랑은 그 아들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인가 내놓을만한 장점이 있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의 축복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야 한다. 다시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청혼하여 결혼에 성공한 이후에는 이제 배우자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가? 마치 물고기를 잡은 후에는 더 이상 미끼를 던지지 않는 것처럼? 만일 그렇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결혼의 목적은 결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의 목적은 함께 같이 살아가면서 행복을 누리는데 있다.

교회 안에는 물론 참된 성도와 거짓 성도가 있다. 장인어른의 돈을 노리고 사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속여 결혼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성도들 중에는 거짓 성도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거짓 성도들의 삶에서는 참된 회개의 열매가 나타날 수 없다. 하지만 참된 성도의 삶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당연히 나타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전 영역에서 회개와 갱신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삶을 개혁해 나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다 된 줄 알거나, 선 줄로 안다면 넘어질 것이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서 잘못한 것이 있으면 회개해야 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017.7.31

교회와 가정과 직장과 쉼의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

교회와 가정과 직장과 쉼의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 2017.7.13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중세 시대에는 성(聖)과 속(俗)의 이원론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신부가 되거나 수녀가 되는 것을 거룩한 일이고 아주 고귀한 일이지만,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는 것은 세속적인 일이며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능하면 사람들은 종교적인 일을 하기를 원했다. 신부가 되거나 수녀가 되거나 수도사가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미사(예배)를 드리는 것은 거룩한 일이지만 생업에 매어달리는 것은 세속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한 편으로 바람직한 생각이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가져왔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에서의 것들이 결국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오로지 이 세상의 것들만을 추구하며 세속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안타까운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노아 시대에 살던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홍수가 나기 전까지, 그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삶만을 살았을 뿐, 영적인 일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영적인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사모해야 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는 그런 점에서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영적인 일에 관심을 쏟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성전 문지기로만 살면 다 되는 것일까?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찬송하고 기도하는 일에만 매어달리면 다 되는 것일까? 그러면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일까? 중세 시대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농사짓는 것보다 성직자가 되는 것이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세상일은 가치가 없는 일이지만 종교적인 일이야말로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스라엘 민족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매어 달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드리는 제사를 싫어하셨다. 이사야 1장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울 왕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가인도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철저하게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구제도 했지만, 위선자들이라고 책망을 받았다. 제사장이 되면 다 된 것이 아니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었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될 수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딤후 3:5). 입술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같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었던 것이다(사 29:13).

우리들은 직분을 사모하는 경향이 있다. 목사가 되고 사모가 되면 가장 최고의 신앙의 단계에 올라가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장로, 집사, 권사가 되는 것을 열망하기도 한다. 가족 가운데 누군가 임직을 하게 된다면 정말 신앙적으로 최고의 영예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다. 우리가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는가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의 가치를 평가절하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종교적인 일을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쌍둥이 생각으로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고, 그저 직업이 가지는 가치란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 헌금을 하여 주님의 일에 동참하게 되면 그때에서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정생활을 하는 것도 이것은 단순히 이기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쉼을 누리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린도전서 10:31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예배하는 자리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과 같은 일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쉼도 하나님의 축복이다. 물론 게으름이나 나태함은 옳지 않은 것이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을 향해서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면서 책망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망각하거나 외면해버리고 나태함을 보인다면 그것은 악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6일간의 청지창조 후에 쉬셨다. 그리고 제7일을 거룩하게 하셨다. 쉼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방편이다. 쉼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며, 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가정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며 사명이다.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가는 것, 성경적인 가정을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며,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고, 성경적인 부부상을 세워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대로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다. 시편 19:1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하였다. 어떻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맞게 움직일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의 현장은 교회만이 아니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부모는 자신들에게 맡겨진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양육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직장에서도 우리가 성실하게 일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안식하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다.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할 것은 단순히 교회의 성장과 부흥만이 아니다. 사실 교회는 어떤 단체를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이다. 어떤 단체로서의 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부흥이라기보다는,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이 진정 참된 교회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단체로서의 우리 교회의 성장과 발전이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다. 건물도 있으면 좋겠고, 더 넓은 주차장도 있었으면 좋겠고, 더 좋은 시설들도 있었으면 좋겠고, 교인들도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하지만 교회가 성장해 가는데, 그 구성원이 영적인 성장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한민국이 세계 몇 대 경제대국이 되어 가는데, 그 국민의 생활수준은 여전히 비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전인적인(holistic) 성장이다. 교회의 영역에서만 열심을 내고 그래서 단체로서의 교회가 성장하는 것 같은데, 성도들이 정작 6일 동안 살아가는 직장에서와 7일 동안 살아가는 가정에서 실패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된 성장이라 할 수 없다. 세속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영적인 일을 등한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일상의 중요성을 망각한 채 그저 종교적인 일에만 열정을 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의 현장이 어디인지 우리는 분별해야 한다. 그래서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사명의 현장이 교회이든, 가정이든, 직장이든 그 어디이든 말이다.

2017.7.13

전주를 기점으로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교회

전주를 기점으로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교회 2017.6.26

교회를 배에 비유한다면 교회는 어떤 배일까? 유람선, 전투선, 화물선, 여객선, 도대체 어떤 배에 비유할 수 있을까? 사실 교회는 다양한 기능들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배에만 해당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교회는 유람선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유람선을 타고 즐기며 쉼을 얻는 것처럼,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친목을 나눈다. 그런 측면이 교회의 아주 중요한 측면이기도 하다. 또한 교회는 여객선과 같은 기능도 있어서, 사람들을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는 천국이라는 목표지점을 향해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교회의 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전투선과 같은 기능이다. 사탄의 지배를 받아 죽음 가운데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들을 영적인 전투를 통해 살려내고 구원해내는 구원선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에는 교회가 무엇보다도 유람선이길 원하는 마음이 있다. 우리끼리 행복하고 우리끼리 즐거우면 된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물론 교회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고 돕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는 비단물결 같은 목소리로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마음에는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해서 평안함과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께서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산 위에서 계속 있기를 소원했던 베드로처럼 우리들은 그냥 이 상태로 여기에 머무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란 동네로 가셨을 때였다. 거기서 예수님을 귀신을 내어 쫓으셨고 베드로의 열병을 고쳐주셨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예수님께서 계속 그들과 함께 있기를 소원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동네로 가시겠다고 하셨다.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종종 사명을 망각해버리고 그냥 우리가 즐겁고 재미있는 것으로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처럼, 그 달란트를 땅 속 깊은 곳에 감추어버리고 사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만 잘 되고, 우리 교회만 성장하는 것은 기뻐하는데, 복음이 전 세계로 전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망각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존재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주인이신 주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 성경적인 교회들이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일에 함께 해야 한다. 여러 부대들이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하겠지만, 결국에는 모든 부대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개교회 이기주의에 사로잡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마음을 함께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28:18-20). 이러한 사명은 역시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우리가 있는 곳인 전주를 기점으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본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가면서 돌보아주었던 것처럼, 영적으로 강도만난 것과 같은 사람들을 우리가 외면하면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외면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우리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세상에는 목마르고 굶주리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외면한 채 우리까지 잘 지내는 것은 옳지 않다.

초대교회 시절에 안디옥 교회는 놀라운 결정을 했다. 그것은 사울과 바나바를 기도하는 가운데 따로 세워서 선교사로 파송하는 일이었다. 사실 이들을 파송해 보내지 않고 안디옥 교회를 위해서 일하게 했더라면 어떤 유익이 있었을까? 안디옥 교회에 아주 큰 영적인 유익이 있었을 것이다. 위대한 설교자이며 성경교사인 바울은 안디옥 교회를 더욱 든든한 믿음 위에 세우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사랑이 많고 이해심이 많은 목회자였던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좀더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디옥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이들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그리고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 이것은 자기 교회만의 유익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결정이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개교회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전 세계의 영적인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만 경도되어 있는 모습이 많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영적인 것을 탐욕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기 교회가 크고 성장했다는 자기만족을 누리려는 잘못된 욕심일 경우가 많다. 우리는 우리 교회라고 하는 좁은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예전에 미국에서 목회를 할 때였다. 당시 우리 교회 안에는 유학생 사역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분들이 많이 있었다. 유학생 사역을 열심히 했었는데, 사랑을 주고 정을 주었지만 결국 그들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또는 다른 지역으로 가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을 했던 것이다. 이들에게는 아무리 정을 많이 주더라도 결국 우리 교회의 교인이 될 수 없는 뜨내기 성도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에, 유학생 사역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로지 교민들을 중심으로 사역을 펼쳐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설명을 했다. 한 나라가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부대가 필요하다. 전투부대도 필요하고, 의료부대도 필요하고, 신병교육대도 필요하다. 그런 부대들이 모두 최선을 다해야 한 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병교육대에서 일하는 군인들이 아무리 병사들을 잘 훈련시켜도 결국 우리 부대의 병사들이 되지 않고 다른 부대로 전출갈 수밖에 없으니 대충 교육시키자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하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들이다. 우리가 뿌린 씨앗이 우리 교회에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자. 이들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곳에 가서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발견하고 열심히 유학생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우리가 당장 열매를 따야 한다는 조급함을 버려야 한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5-6) 우리는 당장 눈앞에 우리에게 유익한 결과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전주를 기점으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 교회 주변에서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어쩌면 그렇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모여들어서 교회가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중국에서, 베트남에서, 필리핀에서, 등등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현장을 소홀히 할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1:8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은 예루살렘에서 먼저 복음을 전한 후에, 유대로 가고, 유대에서 복음을 먼저 전한 후에 사마리아로 가고,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먼저 전한 후에 땅 끝까지 가라는 말씀이 아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동시에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복음을 증거하는 데에는 모든 곳이 최전방이다.

비단물결 같은 목소리로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교회 (빌 2:1-4)

비단물결 같은 목소리로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교회 2017.3.12

우리는 어떤 교회를 꿈꾸는가? 우리는 교회에서 위로받기를 원하고 힘을 얻기를 소망한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교회에서 푸대접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먼저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기를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기 원하고 위로를 받기 원하면서, 정작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비난을 일삼는다면 아주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칭찬할 점을 찾기보다는 단점을 찾는 것이 쉽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다른 사람이 정말 잘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의 관점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해심이 부족한 게 우리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쉽게 비난의 말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똑똑한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은데, 실상은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사랑이 부족한 아주 저급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우리는 어떤 교회를 만들어나갈 것인가? 비단물결 같은 목소리로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세워주는 교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바리새인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일에 앞장섰을 뿐이고 영적인 교만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예수님을 이들을 향해서 책망하셨다. 결코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인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우리 교회에 영적인 리더십 그룹을 선택할 때가 있을 텐데, 우리는 비난과 책망을 일삼고 잘난척하는 사람들이 선출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불만을 표시하는 교만한 불평분자들에 따라 움직이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안타깝게도 교회의 역사가 길어지면,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없이 그저 신앙생활에 전문가가 되어버린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교회의 주도권을 잡는 경우가 생긴다. 우리는 그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문제는 모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잘 안다.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먼저 참고 인내해야한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먼저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의 문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우리의 문제는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을 향해서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내가 손을 먼저 내밀어야 하는데,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참고 인내해야 하는 순간에 폭발해버리는 것이 우리의 한계이다. 희생해야 할 순간에 나의 욕심만을 찾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예수님이 필요하다. 이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를 쏟으신 예수님의 은혜뿐이다.

더욱 큰 문제는 나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으면서 상대방에게만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한 없이 관대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해서는 아주 까다로운 엄격한 기준을 들이미는 한, 그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 그 어느 누구도 그러한 비판적 관점에서 자유로울 완벽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전한 관계의 출발점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며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있다.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득실대고 있다. 자신들의 신앙생활은 아주 뛰어난 것으로 착각하면서, 상대방을 향해서는 비난을 일삼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우리는 교회가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공동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마치 병원에는 환자들이 몰려드는 것처럼, 예수님은 영적인 병자들을 모으셨다. 성도들은 우리들의 유일한 영적인 의사이신 예수님에게 나아가 치유를 받아야 한다. 그 치유는 마지막 날에야 완성될 것이다. 지금 이 때에는 완벽하게 완성된 사람은 없다. 여전히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사랑으로 감싸주어야 한다. 약점과 단점들을 보게 된다면, 비난거리로 삼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감싸주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반창고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비단물결 같은 목소리로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면서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가도록 돕는 일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 다양한 사람들 중에는 안타깝게도 적극적으로 공동체의 관심사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밖에서 비아냥거리고 불평하고 비난하는 일을 주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사회에든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비아냥거리며 딴지를 걸 때,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커서 그들의 주장에 이끌리기 쉽다는데 있다. 그런데 정말 성경적으로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목소리에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 교회의 정책과 목표와 방향을 설정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순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 이들의 말에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 광야의 이스라엘 민족들는 그들 사이에서 불평을 일삼던 잡족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의 교회에서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옆에서 비난하고 책망하는 사람들의 말 속에도 선한 의도가 들어 있을 수 있다.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살펴본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교회를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성도를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된다는 일종의 신념도 있었다. 하지만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옆에서 비아냥거리고 책망하고 비난하는 방법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며, 오히려 역효과만을 가져 왔다는 점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예의가 결여된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처럼,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고 내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교회를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정당화한다고 착각하곤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어떤 방법이든지 다 괜찮다고 착각하곤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강간이나 스토킹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듯,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상대방에게 예의바르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선물을 할 때에는 좋은 포장지에 싸서 전달한다. 좋은 선물을 쓰레기통에 넣어서 주지 않는다. 내가 교회를 위해서 또는 가정을 위해서 또는 공동체를 위해서 좋은 제안이 있다면, 예의를 갖추어 전달해야 한다. 책망과 비난으로 진리를 전달하는 것은 쓰레기통에 선물을 던져넣는 것과 같다. 우리 교회는 서로 예의를 갖추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내가 혼자 잘난 것처럼 교만한 자세로, 또는 주장하는 자세로 비추어져서는 안 된다. 항상 겸손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비단물결 같은 목소리로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수용과 변혁을 추구하는 교회 (마 15:1-11)

수용과 번혁을 추구하는 교회 2017.3.5

변하는 것이 좋을까? 변하지 않는 것이 좋을까? 한편으로 생각하면 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사랑은 변하지 않고 영원해야 한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기로 서약하고 결혼을 하는 것인데, 만일 그 사랑이 변해버린다면 정말 슬플 것이다. 사랑은 변하지 않아야 좋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것이 나쁠 수도 있다. 귀엽고 예쁜 어린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전혀 성정하지 않고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축복일 수 없다. 아무리 예쁘고 귀여운 아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해야 좋은 것이고, 세월이 차면 부모의 곁을 떠나 독립해야 좋은 것이다.

변하는 것이 모두 다 좋을 수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이 모두 다 좋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변하지 않아야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변해야 좋은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변해버리고,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는다면 문제다. 그런데 사람들은 변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종종 혼동한다.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알고 보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를 수호하는데 목숨을 거는 경우가 많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어야 한다는 하나의 규칙을 금과옥조처럼 여겼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제자들을 비난했다. 사실 손을 씻어야 한다는 장로들의 규칙은 아주 유익한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전통이 하나의 법칙이 되어버리고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자신들의 전통으로 사람들을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이고 문화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비본질적이고 문화적인 것마저도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몇 달 전에 호주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설교를 하면서 신약성경 한 구절만을 읽고 설교를 했다. 그랬더니 호주 교회의 성도 한 분이 이것을 아주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서양의 전통에서는 교회력에 따라서 예배 시간에 구약 한 구절과 신약 한 구절을 읽고 설교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전통에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런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없는데,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문화적이고 전통적인 것을 따르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비본질적이고 문화적인 것이 마치 절대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인 양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고기는 자신이 살고 있는 그 물에서 떠나보지 않고는 물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물은 언제나 항상 존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 진공상태에서 신앙생활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교문화와 여러 가지 토속신앙의 배경에서 그리고 한국적 삶의 방식을 가진 채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전통들이 다 신앙적인 것이고 성경적인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단면들이 성경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인 것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현재 환경을 떠나 보면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수 있다.

내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였다. 한국에서만 살았던 내가 처음 미국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이 한국과는 달라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모든 것들이 한국과는 정 반대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트럭은 1차선으로 다닐 수 없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트럭이 1차선을 마음대로 다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오토바이들도 고속도로를 마음대로 활개치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화폐의 디자인은 하나로 통일 되어 있어야 한다는 관념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같은 액수의 화폐인데도 여러 가지 종류의 화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미국의 뉴햄프셔 주에서는 안전띠를 매는 것이나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는 것이 법으로 강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한국에서처럼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한국에서 하는 방식과는 정반대로 해도 되는구나! 내가 한국을 떠나 미국에 갔을 때 느끼게 된 것이었다.

우리가 지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일 수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미국 교회에 갔더니 목사님이 양복을 입고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편한 복장으로 나와서 설교를 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심지어 청바지를 입고 나와서 설교하기도 했다. 성경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양복을 입고 설교하라는 구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양복을 입지 않으면 큰 문제처럼 여겨질 것이다. 우리는 비본질적이고 문화적인 것에 목숨을 거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와 다른 방식으로 신앙생활한다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과연 내가 하는 이 방식이 성경적인 것인가?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나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심지어 자신이 만들어놓은 틀과 법칙의 노예가 되는 경향도 있다. 전통이나 문화적 관습들을 절대적인 법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우리가 알고 행하고 있는 것들이 정말 성경적인 것인가? 혹시 문화적 관습에서 온 것은 아닌가?

진리는 수호해야 하겠지만, 문화적인 것이나 관습적인 것들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들이다. 유럽의 교회들은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려고 했다. 사실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들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 결과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교회란 진부하고 자신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교회는 진리를 붙든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진리가 아닌 자신들이 만든 전통을 붙들다가 쓰러져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 즉 진리는 확고하게 붙들어야 하겠지만, 문화적인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맞추어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새 술을 거부하면서 말했다. 오래된 술이 더 맛있다고 말이다. 인생을 오래 살다보면, 경험도 생기고 여러 가지 경험에서 오는 지혜들이 생긴다. 그래서 아직 경험이 부족한 세대를 바라보면 늘 불안한 마음을 가진다. 그들이 실수할까 염려한다. 하지만 새로운 길과 방법을 시도하지 않고는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패를 무서워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어른들이 젊은이들의 생각을 가로막고 어른들의 방식대로만 고집하면 그 집단은 망하게 되어 있다. 한국교회가 망해가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 입었던 갑옷과 칼이 다윗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들의 생각이 새로운 세대에는 전혀 맞지 않고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다윗에게는 물맷돌이 더 어울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골리앗을 결코 물리칠 수 없을 것이다.

스펜서 존슨이라는 작가가 쓴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을 보면 매일 맛있는 치즈를 창고C에서 얻을 수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창고가 텅 비어 있는 것을 알게 된 후 각각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스니프와 스커리라는 두 마리의 생쥐는 치즈를 찾기 위해서 다른 창고를 찾아나셨다. 꼬마 인간 허도 결국 다른 창고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꼬마 인간 헴은 자신에게 맛있는 치즈를 제공해주었던 창고C를 떠날 수 없었다. 다른 곳을 찾아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예전에 풍성하게 치즈를 제공했던 창고C를 철저하게 고수하는 것만이 치즈를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 이런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예전에 썼던 방법, 예전에 부흥을 일구었던 바로 그 방법을 고수하면 다시 교회가 부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시대가 변했고 사람들이 변했건만, 그러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예전에 썼던 방법들을 다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사실 유럽 교회가 텅텅 비어간 것은 바로 이러한 옹고집 때문이었다. 젊은이들의 생각이 바뀌었고 생활방식이 바뀌었는데, 유럽의 교회들은 그 젊은이들의 관심사와는 무관한 예전의 방식만을 그대로 고집하다가 젊은이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우리나라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진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진리가 아닌 문화적인 것, 충분히 변해도 괜찮은 것들마저도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유럽의 교회들처럼 텅텅 비어갈 것이다.

미국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교회를 변화시킨 교회들은 성장하였다. 예를 들면 뉴욕에서 엄청난 부흥을 일구고 있는 리디머 교회 같은 경우에는 복음의 핵심은 철저하게 고수하면서도, 문화적인 면에서 젊은이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교회는 세상 끝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어떤 지역교회가 망하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나 에베소 교회나 안디옥 교회들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 잘 적응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던 새로운 교회들이 생겨났고, 그렇게 교회는 생명을 이어나갔다.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 가운데 우리 교회가 지속적으로 사용되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용과 번혁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