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가정과 직장과 쉼의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

교회와 가정과 직장과 쉼의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 2017.7.13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중세 시대에는 성(聖)과 속(俗)의 이원론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신부가 되거나 수녀가 되는 것을 거룩한 일이고 아주 고귀한 일이지만,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는 것은 세속적인 일이며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능하면 사람들은 종교적인 일을 하기를 원했다. 신부가 되거나 수녀가 되거나 수도사가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미사(예배)를 드리는 것은 거룩한 일이지만 생업에 매어달리는 것은 세속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한 편으로 바람직한 생각이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가져왔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에서의 것들이 결국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오로지 이 세상의 것들만을 추구하며 세속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안타까운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노아 시대에 살던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홍수가 나기 전까지, 그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삶만을 살았을 뿐, 영적인 일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영적인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사모해야 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는 그런 점에서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영적인 일에 관심을 쏟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성전 문지기로만 살면 다 되는 것일까?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찬송하고 기도하는 일에만 매어달리면 다 되는 것일까? 그러면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일까? 중세 시대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농사짓는 것보다 성직자가 되는 것이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세상일은 가치가 없는 일이지만 종교적인 일이야말로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스라엘 민족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매어 달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드리는 제사를 싫어하셨다. 이사야 1장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울 왕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가인도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철저하게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구제도 했지만, 위선자들이라고 책망을 받았다. 제사장이 되면 다 된 것이 아니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었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될 수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딤후 3:5). 입술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같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었던 것이다(사 29:13).

우리들은 직분을 사모하는 경향이 있다. 목사가 되고 사모가 되면 가장 최고의 신앙의 단계에 올라가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장로, 집사, 권사가 되는 것을 열망하기도 한다. 가족 가운데 누군가 임직을 하게 된다면 정말 신앙적으로 최고의 영예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다. 우리가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는가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의 가치를 평가절하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종교적인 일을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쌍둥이 생각으로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고, 그저 직업이 가지는 가치란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 헌금을 하여 주님의 일에 동참하게 되면 그때에서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정생활을 하는 것도 이것은 단순히 이기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쉼을 누리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린도전서 10:31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예배하는 자리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과 같은 일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쉼도 하나님의 축복이다. 물론 게으름이나 나태함은 옳지 않은 것이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을 향해서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면서 책망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망각하거나 외면해버리고 나태함을 보인다면 그것은 악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6일간의 청지창조 후에 쉬셨다. 그리고 제7일을 거룩하게 하셨다. 쉼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방편이다. 쉼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며, 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가정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며 사명이다.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가는 것, 성경적인 가정을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며,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고, 성경적인 부부상을 세워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대로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다. 시편 19:1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하였다. 어떻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맞게 움직일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의 현장은 교회만이 아니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부모는 자신들에게 맡겨진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양육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직장에서도 우리가 성실하게 일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안식하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다.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할 것은 단순히 교회의 성장과 부흥만이 아니다. 사실 교회는 어떤 단체를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이다. 어떤 단체로서의 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부흥이라기보다는,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이 진정 참된 교회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단체로서의 우리 교회의 성장과 발전이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다. 건물도 있으면 좋겠고, 더 넓은 주차장도 있었으면 좋겠고, 더 좋은 시설들도 있었으면 좋겠고, 교인들도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하지만 교회가 성장해 가는데, 그 구성원이 영적인 성장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한민국이 세계 몇 대 경제대국이 되어 가는데, 그 국민의 생활수준은 여전히 비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전인적인(holistic) 성장이다. 교회의 영역에서만 열심을 내고 그래서 단체로서의 교회가 성장하는 것 같은데, 성도들이 정작 6일 동안 살아가는 직장에서와 7일 동안 살아가는 가정에서 실패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된 성장이라 할 수 없다. 세속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영적인 일을 등한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일상의 중요성을 망각한 채 그저 종교적인 일에만 열정을 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의 현장이 어디인지 우리는 분별해야 한다. 그래서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사명의 현장이 교회이든, 가정이든, 직장이든 그 어디이든 말이다.

2017.7.13

주님의 사랑으로 선한 영향을 끼치는 교회

주님의 사랑으로 선한 영향을 끼치는 교회 2017.3.18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9-31)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사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다. 요한일서 4:20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야 가능하다.

이사야서를 읽어보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알 수 있다. 이사야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를 거부하시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스라엘 민족이 헛된 제물을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였지만, 정작 그들의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이웃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면서 악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셨다.

어쩌면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이스라엘 민족의 문제와 닮았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가 되지 못하고, 탐욕적으로 돈을 추구하며 우상을 섬기는 것도 문제이다. 또한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배받기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는 것도 문제이다.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이다. 제대로 하나님께 예배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이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선한 영향을 끼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가리켜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3-16).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보내주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다고 하셨다(마 5:16).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방법은 성도들을 통해서이다. 성도가 빛이 되고 소금이 되면, 사람들이 맛을 보게 되고 빛을 보면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성도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답답해서 묻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이다. 하나님이 있다는 증거를 제발 보여 달라고 말이다. 그 말은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도무지 느낄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책임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쳤다. 자신들에게 그를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도와주었다. 그는 아무 할 일이 없는 한가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도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똑같이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 때문에 멈추어 섰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뜻하지 않은 사명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여행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재정 운용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그로 인하여 모든 것이 망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강도만난 사람을 돕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다. 그 사랑은 일만 달란트처럼 큰 것이다. 그런데 백 데나리온처럼 작은 사랑의 행위를 이웃들에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하신 이웃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따뜻한 사랑으로 그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때에만 가능하다. 팀 켈러(Tim Keller) 목사님은 <센터처치>라는 책에서 어떻게 커다란 바위를 폭파시킬 수 잇는지에 대해서 쓴 적이 있다. 커다란 바위를 폭파시키기 위해서는 바위 근처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 보았자 바위에 그을음만 입힐 뿐이라는 것이다. 대신 바위 안으로 깊은 구멍을 내어서 그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넣고서 터트려야 한다고 한다. 그럴 때에야 바위를 폭파시킬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진리를 주장하고 목소리를 높이기만 하면 우리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때가 많다.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소리치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기만 하면 우리들의 임무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우리는 진리를 외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런 방법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도 있고, 악을 행하던 사람들이 악행을 중단할 수도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역사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러한 방법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역효과를 내게 되어 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또는 길거리에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외치는 그 소리를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 아니라, 무례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만 증폭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행위들은 마치 커다란 바위 옆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리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강하게 부는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 사람의 옷을 벗기듯, 우리는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어떤 건물이나 어떤 조직이 아니라, 사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이 교회이다. 교회인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이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 교회는 그냥 우리끼리 잘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 2017.3.15

사람은 예배하는 존재이다.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부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 예배의 대상이 각각 다를 뿐,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예배하게 되어 있다. 문제는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한다면 우리는 기쁨을 얻게 될 것이고,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상을 예배한다면 우리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상은 항상 우리들에게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약속하지만 단 한 번도 우리에게 그 화려한 것을 선물해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화려한 약속으로 우리를 유혹한 뒤 우리를 착취하고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만일 내 마음 속에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고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도 우상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자녀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거룩한 목적들도 우상이 될 수도 있다. 선교나 부흥이라는 거룩한 목적도 어느 순간에 우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옛날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상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신앙생활을 개인적으로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예배하는 공동체로 모인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된다. 함께 모일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가운데 회복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맛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예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심지어 부부싸움을 했더라도 예배의 자리로 나와야 한다. 마음에 불편한 일이 생기면 생길수록 예배의 자리로 더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의 자리에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호주에 집회를 갔을 때였다., 어떤 부부가 있었는데, 그 부부는 그 주에 서로 싸움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의 많은 분들이 걱정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분들이 예배의 자리로 나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부부싸움을 하면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지 않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싸웠으면서도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다. 그래서 그들은 회복이 되었다. 이번 한 번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겠지만, 이들은 예배를 통해서 많은 유익이 있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항상 우리에게 유익하다.

교회가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교회의 존재목적이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교회가 사교클럽의 수준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놀랍게도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또는 사람들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모인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과연 나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오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내가 예배받기 위해서 교회에 오고 있는가? 내가 교회에 오는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배받기 위해서 오는 순간, 우리의 신앙생활은 고통스럽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누가 더 큰가를 놓고 다투었다. 주님을 따르기로 처음 결심할 때에는 겸손하게 주님만을 바라보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데 급급했던 것이다. 마르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 자체가 기뻤다. 하지만 마리아를 바라보는 순간 자신과 마리아를 비교하기 시작했고,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비교가 있고,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생겨난다. 이러한 욕구는 자신이 예배받기를 원하는 욕구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오해하지 말자. 그러니까 교회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칭찬하고 박수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 내에서 서로 선행을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축복하는 것은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을 소망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예배하는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그런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표현은 좀 애매한 것 같다. 이럴 때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짜라고 생각한 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에 반하여, 예수님은 이 산이냐 예루살렘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비본질적인 것을 절대화해서 목숨을 거는 일이 많다. 예배의 각 요소들이나 순서들이나 형식들이 전통으로 굳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사실은 그런 형식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러한 형식을 고수하려고 했고, 이것 때문에 많은 싸움이 있어왔다. 기타나 드럼을 사용할 것인가? 오르간을 예배 중에 사용할 것인가? 찬송가만 불러야 하는가? CCM을 부를 수 있는가? 예배 중에 박수를 칠 것인가 말 것인가? 놀랍게도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런 문제 때문에 서로 싸우고 분열이 되어 왔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적인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와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물이라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문화와 전통 속에서 살아가면서 마치 그것이 본질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