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이 주는 착각

예전에 다른 교회에서 목회할 때였다. 어떤 이웃 교회의 신실한 장로님이 내게 찾아오셨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앙을 간증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말씀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감동이 있었다. 신앙을 삶의 현장에서 지켜나가는 성도들의 이야기처럼 감동적인 것은 없다. 그러다가 그분이 마지막에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땅이 있는데, 우리 교회가 그것을 매입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마침 우리 교회는 건축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제안은 솔깃했다. 더 비싸게 사겠다는 사람이 있지만, 자신은 자신의 땅을 주님을 위해 내놓고 싶다고 했고, 저렴하게 제공할 생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금액은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금액이었고, 더 이상 이야기가 진전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들려온 소식은 그분은 자신의 땅을 우리에게 제시한 가격보다 더 싼값에 어떤 업자에게 처분했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땅을 처분해야 하는 긴박한 순간에 우리에게서 더 많은 값을 받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게 불발되자, 하는 수 없이 더 싸게 처분해버린 것이었다. 사실 나는 30년이 조금 넘게 목회하면서 이런 경우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교회니까 할인된 가격에 공급하는 것처럼 말했는데, 알고 보니 유효기간 하루 지나버린 빵을 처분해버리는 일이 있었고, 교회니까 선교하는 마음으로 방송장비를 저렴하게 공급한다고 하면서 더 많은 폭리를 취하는 경우도 보았다.

나는 이런 분들의 신앙이 완전히 가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그분의 신앙과 삶은 분명 존경할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분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분이 하는 모든 일이 다 신앙적일 것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매매의 순간이 되면 더 많은 이익을 남기고 싶은 게 자연스러운 인간의 마음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구매는 철저하게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결정한다. 신앙적인 말에 따라, 무턱대고 믿어버리는 사람처럼 속이기 쉬운 사람은 없다. 사실 낚싯배에는 수많은 갈매기가 따라다니는 것처럼, 교회에는 이런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분별이 필요하다. 잘 아는 성도로부터 보험을 구입하든 건강식품을 구입하든, 분별하지 않고 행동하면 손해를 입게 될 수 있다.

특히 정치인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정치인들은 종종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내세울 때가 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정말 고맙고 반갑다. 정치 세계에서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밝히고 신앙적으로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것처럼 반가운 일은 없다. 그런데 그런 말만 듣고, 또는 신앙적인 행위처럼 보이는 것만을 보고, 그런 사람을 믿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다. 땅을 팔거나, 보험을 팔거나, 빵을 처분해버릴 때에도 마치 참된 신앙적 동기만이 전부인 것처럼 말할 때가 있는 것과 같이, 정치인들도 그렇게 포장해 버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참된 신앙인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참된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모든 삶이 완벽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도 유혹 앞에서는 넘어졌고, 인구조사의 교만함에 넘어졌던 것처럼, 아무리 거룩한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다. 그게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식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주식투자를 할 때는 주식투자의 원칙에 따라 해야 하고, 부동산을 거래할 때도 적절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하며, 투표를 할 때는 그 사람이 추구하는 정치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과연 긍휼의 마음으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인지, 아니면 소수의 가진 자들의 편에서 그들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사람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이 글 링크: http://www.jjvision.org/?p=1416

아벨의 믿음 (히 11:4)

2017.5.21 주일오전예배 설교

1. 예배가 제사인가? 한편으로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once for all)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희생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에(히 10:11-14), 우리는 더 이상 구약에서 규정하고 있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필요가 없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방식은 다르지만 구약에서 규정했던 제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린다는 점에서는 제사라는 표현으로 비유할 수 있다. 성경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찬송의 제사를 드려야 하며(히 13:15), 신령한 젯가를 드려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벧전 2:5).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한다는 점에서, 예배는 제사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를 통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대한 교훈을 얻는 것은 가능하다.

2.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벨이 더 좋은 제물을 드렸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곡물로 드리는 제사도 받으시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가 피의 제사였기에 받았다고 해석할 수 없다. 또한 가인의 제사가 정성스럽지 않았던 것이라는 뉘앙스가 없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가 정성스러운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다. 그런데 히브리서 11:4에서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제사는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예배를 멋있게 드리는 것도 중요하다. 무시할 것이 아니다. 하지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3. 우리가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먼저 모든 것을 주셨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쏟아주셨다.

폭력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사용해야 할 방법은

사족: 무조건 피해를 당하는 것이 능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때로는 정당한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특권을 사용하기도 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방법을 넘어서서, 이 세상 사람들의 방식마저도 무분별하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가 옳다고 생각될 때, 그런 위험이 있습니다.

카드묵상 사용법: 욥의 친구들이 고난당하는 욥에게에게 한 말은 내용만 놓고 보면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당하는 이에겐 오히려 그 고통을 가중시키는 사랑이 없는 말이었습니다. 카드묵상의 내용이 좋다하더라도 무분별하게 아무에게나 사용되면 위험할 수도 있고, 사랑이 없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상태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공감해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묵상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화두가 되어야 합니다.

라합의 믿음 (히 11:31)

2020.10.11 주일오전예배 설교

라합은 다윗 왕의 고조할머니며, 예수님 조상의 명단 가운데 있는 여인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출신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깜짝 놀라게 된다. 먼저 라합은 가나안 사람이었다. 이방 사람이라는 게 지금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하나님의 회중에 들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아래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더 나아가 라합은 기생이었다. 물론 이 여인의 실제 직업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방법이 없다. 아마 몸을 파는 여인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냥 주막 여주인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출신 성분 자체는 그리 떳떳하지 못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라합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고조할머니였고, 예수님의 조상 가운데 있다는 것이 놀랍다. 더구나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라합의 믿음을 하나의 예시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도대체 어떻게 이 여인이 믿음의 모범으로 제시될 수 있었을까?

라합은 하나님에 대해 설명을 들은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유를 받은 적도 없다. 그가 들은 것은 소문뿐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고 애굽과 아모리를 물리친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직 참되신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초대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진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동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다. 또한 우리에게 양심이 주어져 있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지문이 찍혀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초대가 들려질 때, 사람들은 세 가지 방법으로 반응한다. 첫째는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하나님은 없다고 믿는다. 둘째는, 하나님을 모방한 가짜 신을 만들고 그 앞에 절한다. 오직 자신들에게 복을 주는 용도만 가지고 있는 우리 입맛에 맞는 가짜 신을 섬긴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반응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초대에 순종하며 마음을 여는 반응이다. 이것이 바로 라합이 보인 반응이었다. 그 결과 라합은 다른 여리고 성 사람들이 망할 때, 함께 망하지 않았다. 믿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믿음이 실제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라합의 경우,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것으로 그의 믿음이 나타났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그때 우리는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