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꿀 수 없는 상황을 보면서

사족: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일입니다. 도무지 바꿀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절망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카드묵상 사용법: 욥의 친구들이 고난당하는 욥에게에게 한 말은 내용만 놓고 보면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당하는 이에겐 오히려 그 고통을 가중시키는 사랑이 없는 말이었습니다. 카드묵상의 내용이 좋다하더라도 무분별하게 아무에게나 사용되면 위험할 수도 있고, 사랑이 없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상태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공감해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묵상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화두가 되어야 합니다.

고치지 말고 바꿔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붙이는 나의 작은 생각

미국에 유학을 가서 처음 내가 산 차는 그야말로 골칫거리였다. 중고 자동차 시장에 가서 차를 고르려고 했을 때, 두 대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토요타 코롤라였고 또 하나는 다지 캐라반이었다. 모두 다 3년 된 차였고 가격도 같았다. 그렇다면 어떤 차를 사야 하겠는가? 자동차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알지 못하는 내가 선택한 것은 다지 캐라반이었다. 똑같은 가격인데 코롤라는 작은 소형차였고, 캐라반은 훨씬 큰 미니밴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동차가 하나씩 둘씩 고장 나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처음에는 그냥 고쳤다. 그런데 고치는 일이 잦아지면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과연 이 차를 계속 고치면서 타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지만 자동차가 고장이 날 때마다 나는 고치는 것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이번에 500불만 더 투자하면 다시 자동차를 잘 탈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오판이었다. 계속해서 고쳐야 하는 일들이 생기면서 처음 구입했던 차 가격보다 고치는 값이 더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나의 첫 자동차는 다음 해 눈이 오는 날 겨울에 길가에 있는 나무를 들이박고 장렬하게 사망하면서, 더 이상 고칠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고치지 말고 아예 차를 바꾸었더라면 더 나았을 텐데, 계속 고치느라 아까운 돈만 허비하고 만 것이다. 때로는 고치는 것보다 새것을 사는 것이 더 좋을 때가 있는 것이다. 고치는 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금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그래서 다양한 행사가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것도 바꾸고 저것도 바꾸자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참된 복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들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열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좀처럼 새롭게 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개혁이 개혁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완전히 바꾸어야 하는데, 바꾸지 않고 때우고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때움질과 반창고질은 개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바꾸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만 할 뿐일지도 모른다. 자꾸만 고장이 나는 자동차를 처분해버리고 새 차를 사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데, 새 차를 사지 못하게 조금씩 또 고치고 또 고치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전 모 노회에서 故 주기철 목사를 명예 노회장으로 세웠다는 뉴스를 보았다. 예전에 저질렀던 잘못들을 바로 잡고 참회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니, 거룩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들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노회가 어떤 노회인가 했더니, 성추행 목사를 면직하지 않고 오히려 두둔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노회가 아닌가? 나는 이러한 故 주기철 목사를 복권시키고 명예 노회장으로 세우는 일들이 오히려 참된 개혁을 거부하는 것을 돕는 이름뿐인 개혁으로 악용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들의 비석을 세운 것과 같은 행동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비판하신 바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마 23:29-31)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선지자들의 비석을 세우면서 자신들의 의를 나타내려고 했다. 우리는 과거의 악한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행동은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개혁의 진정성을 보이려면 선지자들의 비석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죄악들을 제거해야 한다(고전 5:11-13). 개혁의 진정성을 보이려면 세습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우롱하는 일들을 중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행하는 개혁의 제스처들은 자신들의 반개혁성을 숨기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받을 것이다.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답답하다. 도무지 이 시대에 개혁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 500년전 루터와 칼빈의 개혁도 엄격한 의미에서 개혁을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주교회는 그대로였다. 전혀 개혁되지 않았다. 루터와 칼빈이 한 것은 성경적인 교회를 세운 것뿐이었다.

우리는 종종 좀처럼 개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답답해하곤 한다. 교회를 망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곤 한다. 그래서 때로는 비성경적인 방법까지 동원해가면서 내가 생각하는 교회개혁을 이루려고 시도하기까지 한다. 나는 그러한 시도들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이룰 수 없는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악한 자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빈은 천주교와 싸워서 교황을 폐위시키고 천주교 조직을 없애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을 뿐이다. 여전히 저기에는 천주교가 버티고 있었지만, 참된 복음으로 된 교회를 만들었다. 그것이 종교개혁이었다. 나는 오늘날의 종교개혁도 똑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악마처럼 보이는 세력들과 비성경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싸우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나가면 될 것이다. 그게 종교개혁이다. 50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다.

우리는 썩어져 가는 교회에 미련을 둘 필요는 없다. 어차피 교회는 참된 성도들의 공동체이지, 건물도 아니고 어떤 단체도 아니다. 한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예루살렘 교회는 사라졌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도 사라졌다. 유럽의 교회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미국의 교회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던 평양의 교회도 사라졌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절대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고 또 새로운 그루터기들을 사용하여서 참된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시기 때문이다. 한 때 유명했던 교회가 사라지는 것을 애통해 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참된 복음이 없다면 그곳은 이미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새로운 사람들을 통해서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고 계신다.

2017.10.16

회개와 갱신을 통해 삶의 전 영역을 새롭게 하는 교회

회개와 갱신을 통해 삶의 전 영역을 새롭게 하는 교회 2017.7.31

구원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구원이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는가 받지 못했는가를 질문하고,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구원에 대한 개념이다.

구원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로만 판단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우리가 어떤 입장권을 손에 넣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어느 날 몇 시에 열리는 축구 경기의 입장권을 손에 넣었다면, 더 이상 축구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서 더 해야 할 일이 없다. 축구 경기가 열리기 전에 어떤 삶을 살든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중에 입장권만 확인하고 우리를 그 경기장 안으로 넣어줄 것이니까 말이다. 천국에 가는 것도 즉 구원을 받는 것도 천국 입장권을 확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마지막 날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반쪽짜리 구원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원 개념을 가지게 될 경우, 이 세상에서의 삶이란 아무런 중요성을 가지지 못하게 되며,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율법폐기론 또는 율법무용론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초대교회 시절에 복음을 이런 식으로 오해한 경우가 있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전했을 때, 사람들은 그러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고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바울 사도의 대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였다.

구원은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는 입장권을 확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점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탕자의 비유이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그 결과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다. 나중에 탕자는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 탕자를 다시 맞이하여 예전의 아들의 신분으로 온전히 회복시켜 주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으니 다시 아버지의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게 삶을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 됨의 신분을 누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참된 믿음과 참된 구원을 단순히 예수님을 믿어 나중에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어 그 관계가 주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자애로움 때문이다. 아무리 탕자가 철저하게 타락했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사랑은 그 아들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인가 내놓을만한 장점이 있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의 축복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야 한다. 다시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청혼하여 결혼에 성공한 이후에는 이제 배우자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가? 마치 물고기를 잡은 후에는 더 이상 미끼를 던지지 않는 것처럼? 만일 그렇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결혼의 목적은 결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의 목적은 함께 같이 살아가면서 행복을 누리는데 있다.

교회 안에는 물론 참된 성도와 거짓 성도가 있다. 장인어른의 돈을 노리고 사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속여 결혼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성도들 중에는 거짓 성도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거짓 성도들의 삶에서는 참된 회개의 열매가 나타날 수 없다. 하지만 참된 성도의 삶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당연히 나타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전 영역에서 회개와 갱신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삶을 개혁해 나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다 된 줄 알거나, 선 줄로 안다면 넘어질 것이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서 잘못한 것이 있으면 회개해야 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017.7.31

재앙으로 변한 찬양대 자리 변경

얼마 전부터 우리 교회 찬양대가 서는 방법을 바꾸었다. 찬양대석에서 일어서서 찬양을 하는 전통적 방식에서 찬양대가 회중석에 앉았다가 강대 쪽으로 나와서 찬양을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바꾸기로 할 때에, 이런 변화는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찬양대가 청중을 바라보고 찬양을 한다면 훨씬 더 좋을 것이고, 찬양대원들도 설교하는 목사를 옆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바라보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훨씬 더 좋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이건 복잡한 부차적인 문제들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찬양대가 강대단 앞으로 나오고 들어가는 시간이 소요되는 문제가 있었고, 찬양대석 위에 설치되어 있던 마이크 장치를 옮겨야 하는 문제가 있었고, 찬양대원 중에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좀 더 긴 시간 동안 서 있는 것을 불편해하는 분들도 계셨다. 결국 강대단을 그 누구든지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개선하였다. 이건 정말 잘된 결정이었다. 찬양대원들이 앞에서 찬양을 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개선했었어야 했던 것이었다. 미국에는 그런 편의시설들이 아주 잘 되어 있는데, 한국에 오니 그런 편의시설들이 부족한 것이 아쉬웠었다. 그런데 이번 기회를 계기로 앞으로 교회의 모든 시설들을 누구든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개선하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터졌다. 찬양대원들이 강대단으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스피커에서 잡음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끽… 지익” 하는 잡음이 찬양대원이 강대단으로 올라올 때, 그리고 다시 내려갈 때 발생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말이다. 나는 내 상식을 동원해서 광고했다. 마이크 선을 밟게 되면 이런 잡음이 날 수 있으니 찬양대원들은 오르내릴 때 선을 밟지 않도록 부탁을 드린 것이다. 하지만 매 주일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었다.

몇 주 전에는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우리들의 귀를 막아야 했다. 청중 속에서 불만 소리도 들려왔다. “애 떨어지겠네.” 거룩하고 진지하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인데, 스피커에서 귀막을 울리도록 나는 소음 때문에 예배 분위기는 망쳐지고 말았다. 더욱 아름다운 찬양을 드림으로 멋진 예배를 만들고자 시도했던 찬양대 자리 변화인데, 결과는 우리들의 의도와는 정반대가 되고 만 것이다. 도대체 내가 무슨 결정을 내린 것일까?

이런 상황이 되고나니 교인 중에 한 분이 앰프 시스템을 교체하는 것을 자원하였다. 나는 그런 성도가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사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좋은 앰프 시스템은 아무리 욕심을 내어도 과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른 교회에 있을 때 정말 좋지 않은 앰프 시스템 때문에 정말 고생해본 나로서는 앰프 시스템을 자원하여 교체하겠다는 분이 있을 때, 그렇게 하시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 보았다. 그분의 헌신은 고맙기는 했지만, 앰프 시스템 자체를 교체하는 것은 과도한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타이어 펑크가 났는데 자동차를 아예 바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분을 설득했다. 감사하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말이다. 언젠가 우리 교회도 더 좋은 앰프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할 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약간의 문제만 해결하면 될 것 같았다. 결국 그분이 자신의 생각을 접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얼마나 감사한지 감사의 찬양이 저절로 나왔다. 목회자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성도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면 정말 힘들다. 성도들을 일일이 설득하다보면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오히려 내가 괜찮다고 사양할 입장이니 말이다. 그런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내게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나면서 마이크 선을 밟지 않는다고 찬양대원들이 조심하고 또 조심했지만 사태가 악화되기만 했다. 그러면서 문제의 원인이 마이크 선을 밟는데 있지 않고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몇 주 전 모니터 스피커를 장만하면서 선공사를 했는데, 그때 했던 강대단에 설치된 잭이 느슨하게 공사하여 발생하는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잭 부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강대단 위를 찬양대원들이 걸어가듯이 걸어가 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도대체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강대단 아래에 있는 선 전체를 다시 깔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강대단 위에서 펄쩍펄쩍 뛰어보았다. 그랬더니 바로 그 잡음이 나는 게 아닌가? 펄쩍펄쩍 뛰면서 강대단을 다녀보니, 어느 부분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시공했던 업자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업자가 그 부분의 선을 살펴보니 피복이 벗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부분을 갈아주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사를 하고 난 다음 주일에 찬양대가 회중석에서 나와서 강대단으로 올라왔지만, 전혀 잡음이 나지 않았다. 나는 교인들에게 이런 사실을 설명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전교인들 앞에서 사과했다. 확실하지 않은 어설픈 지식으로 선을 밟지 않아야 한다고 말해서, 결국 소리가 날 때마다 누군가 부주의하게 선을 밟는 범인이 있을 것이라 오해하게 만들었고, 결국 이웃을 향해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형제를 향한 분노의 마음을 갖게 한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교인들은 웃음으로 나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아마 형제를 향해 이해하기보다는 잠시나마 분노의 마음을 가졌던 것을 회개하기도 했을 것이다.

재앙처럼 보였던 찬양대 자리 재배치는 결국 조금씩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지난 주 현악 소리에 맞추어 찬양을 하는 찬양대의 찬양이 아주 감동적이었다. 아무런 부작용이 없는 변화는 없다. 모든 변화는 더 나빠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재앙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를 거부하고 안주하는 것을 선호한다. 예전 방식만을 고집하면서 그게 제일 편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결국 그런 편한 방식이 쌓이고 쌓여서 신앙적 적폐(積弊)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은 과감하게 그러한 적폐들을 개선하려는 변화의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결국 교회가 살아났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500년이 지나는 동안, 그리고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지 꽤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편한 방식이 쌓이고 쌓여서 신앙적 적폐(積弊)가 되었다. 우리는 다시 성경에 비추어서 우리에게 익숙했던 편한 방식들을 개선해야 한다. 때로는 그러한 변화가 아플지라도 말이다.

2017.7.20

수용과 변혁을 추구하는 교회 (마 15:1-11)

수용과 번혁을 추구하는 교회 2017.3.5

변하는 것이 좋을까? 변하지 않는 것이 좋을까? 한편으로 생각하면 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사랑은 변하지 않고 영원해야 한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기로 서약하고 결혼을 하는 것인데, 만일 그 사랑이 변해버린다면 정말 슬플 것이다. 사랑은 변하지 않아야 좋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것이 나쁠 수도 있다. 귀엽고 예쁜 어린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전혀 성정하지 않고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축복일 수 없다. 아무리 예쁘고 귀여운 아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해야 좋은 것이고, 세월이 차면 부모의 곁을 떠나 독립해야 좋은 것이다.

변하는 것이 모두 다 좋을 수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이 모두 다 좋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변하지 않아야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변해야 좋은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변해버리고,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는다면 문제다. 그런데 사람들은 변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종종 혼동한다.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알고 보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를 수호하는데 목숨을 거는 경우가 많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어야 한다는 하나의 규칙을 금과옥조처럼 여겼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제자들을 비난했다. 사실 손을 씻어야 한다는 장로들의 규칙은 아주 유익한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전통이 하나의 법칙이 되어버리고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자신들의 전통으로 사람들을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이고 문화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비본질적이고 문화적인 것마저도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몇 달 전에 호주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설교를 하면서 신약성경 한 구절만을 읽고 설교를 했다. 그랬더니 호주 교회의 성도 한 분이 이것을 아주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서양의 전통에서는 교회력에 따라서 예배 시간에 구약 한 구절과 신약 한 구절을 읽고 설교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전통에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런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없는데,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문화적이고 전통적인 것을 따르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비본질적이고 문화적인 것이 마치 절대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인 양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고기는 자신이 살고 있는 그 물에서 떠나보지 않고는 물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물은 언제나 항상 존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 진공상태에서 신앙생활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교문화와 여러 가지 토속신앙의 배경에서 그리고 한국적 삶의 방식을 가진 채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전통들이 다 신앙적인 것이고 성경적인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단면들이 성경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인 것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현재 환경을 떠나 보면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수 있다.

내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였다. 한국에서만 살았던 내가 처음 미국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이 한국과는 달라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모든 것들이 한국과는 정 반대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트럭은 1차선으로 다닐 수 없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트럭이 1차선을 마음대로 다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오토바이들도 고속도로를 마음대로 활개치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화폐의 디자인은 하나로 통일 되어 있어야 한다는 관념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같은 액수의 화폐인데도 여러 가지 종류의 화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미국의 뉴햄프셔 주에서는 안전띠를 매는 것이나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는 것이 법으로 강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한국에서처럼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한국에서 하는 방식과는 정반대로 해도 되는구나! 내가 한국을 떠나 미국에 갔을 때 느끼게 된 것이었다.

우리가 지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일 수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미국 교회에 갔더니 목사님이 양복을 입고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편한 복장으로 나와서 설교를 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심지어 청바지를 입고 나와서 설교하기도 했다. 성경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양복을 입고 설교하라는 구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양복을 입지 않으면 큰 문제처럼 여겨질 것이다. 우리는 비본질적이고 문화적인 것에 목숨을 거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와 다른 방식으로 신앙생활한다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과연 내가 하는 이 방식이 성경적인 것인가?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나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심지어 자신이 만들어놓은 틀과 법칙의 노예가 되는 경향도 있다. 전통이나 문화적 관습들을 절대적인 법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우리가 알고 행하고 있는 것들이 정말 성경적인 것인가? 혹시 문화적 관습에서 온 것은 아닌가?

진리는 수호해야 하겠지만, 문화적인 것이나 관습적인 것들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들이다. 유럽의 교회들은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려고 했다. 사실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들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 결과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교회란 진부하고 자신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교회는 진리를 붙든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진리가 아닌 자신들이 만든 전통을 붙들다가 쓰러져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 즉 진리는 확고하게 붙들어야 하겠지만, 문화적인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맞추어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새 술을 거부하면서 말했다. 오래된 술이 더 맛있다고 말이다. 인생을 오래 살다보면, 경험도 생기고 여러 가지 경험에서 오는 지혜들이 생긴다. 그래서 아직 경험이 부족한 세대를 바라보면 늘 불안한 마음을 가진다. 그들이 실수할까 염려한다. 하지만 새로운 길과 방법을 시도하지 않고는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패를 무서워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어른들이 젊은이들의 생각을 가로막고 어른들의 방식대로만 고집하면 그 집단은 망하게 되어 있다. 한국교회가 망해가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 입었던 갑옷과 칼이 다윗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들의 생각이 새로운 세대에는 전혀 맞지 않고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다윗에게는 물맷돌이 더 어울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골리앗을 결코 물리칠 수 없을 것이다.

스펜서 존슨이라는 작가가 쓴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을 보면 매일 맛있는 치즈를 창고C에서 얻을 수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창고가 텅 비어 있는 것을 알게 된 후 각각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스니프와 스커리라는 두 마리의 생쥐는 치즈를 찾기 위해서 다른 창고를 찾아나셨다. 꼬마 인간 허도 결국 다른 창고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꼬마 인간 헴은 자신에게 맛있는 치즈를 제공해주었던 창고C를 떠날 수 없었다. 다른 곳을 찾아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예전에 풍성하게 치즈를 제공했던 창고C를 철저하게 고수하는 것만이 치즈를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 이런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예전에 썼던 방법, 예전에 부흥을 일구었던 바로 그 방법을 고수하면 다시 교회가 부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시대가 변했고 사람들이 변했건만, 그러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예전에 썼던 방법들을 다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사실 유럽 교회가 텅텅 비어간 것은 바로 이러한 옹고집 때문이었다. 젊은이들의 생각이 바뀌었고 생활방식이 바뀌었는데, 유럽의 교회들은 그 젊은이들의 관심사와는 무관한 예전의 방식만을 그대로 고집하다가 젊은이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우리나라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진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진리가 아닌 문화적인 것, 충분히 변해도 괜찮은 것들마저도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유럽의 교회들처럼 텅텅 비어갈 것이다.

미국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교회를 변화시킨 교회들은 성장하였다. 예를 들면 뉴욕에서 엄청난 부흥을 일구고 있는 리디머 교회 같은 경우에는 복음의 핵심은 철저하게 고수하면서도, 문화적인 면에서 젊은이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교회는 세상 끝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어떤 지역교회가 망하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나 에베소 교회나 안디옥 교회들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 잘 적응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던 새로운 교회들이 생겨났고, 그렇게 교회는 생명을 이어나갔다.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 가운데 우리 교회가 지속적으로 사용되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용과 번혁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