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영적인 몸(spiritual flesh)에 있는 종양들을 찾아내어 수술해 주는 책

팀 켈러의 책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읽는 사람을 수술해버린다. 우리들의 영적인 몸(spiritual flesh)속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암(癌, cancer) 종양들을 찾아낸다. 놀랍게도 괜찮은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우리를 영적 파멸로 이끄는 암적 종양들임을 이 책을 읽으면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팀 켈러는 우상(偶像, idol)이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인데, 하나님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22).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선한 것이 다 우상이 될 수 있다. 평생의 소원, 사랑, 돈, 성취, 그리고 권력 같은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섬길 것을 요구하시고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고 하셨다. 왜 그랬을까? 우상은 우리에게 약속한 행복을 결코 가져다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선악과처럼 말이다. 선악과는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것만 같았다. 그것을 먹으면 마치 하나님처럼 되어서 아무것도 부족함에 없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선악과라는 우상은 아담과 하와를 피폐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 게 바로 우상이다.

팀 켈러는 사랑도 돈도 성취와 권력도 모두가 우상과 같은 것들이라고 한다. 사실 그런 것들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우상이 되는 순간, 우리는 그 우상의 종이 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영웅들은 우상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는 결단을 보여주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았다. 하나님이냐? 자식이라는 우상이냐? 이 질문 앞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했다.

이 책은 심지어 “기독교 사역에서 성공하는 것도 다 우상이 될 수 있다”고 진단한다(23). 목회자가 되어서 아주 큰 대형 교회를 만들어 성공하는 것도 사실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상의 요소는 우리들의 생활 깊은 곳에 깊숙이 파고들어와 있다. 그저 복음을 전하고 선교를 하고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등, 신앙적으로 보이는 일들조차도 우상을 섬기는 일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진단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해 주신 일곱귀신의 비유가 생각이 났다.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갔으나, 다시 돌아와보니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어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나중 형편이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는 비유말이다(마 12:43-45; 눅 11:24-26). 팀 켈러는 말한다. 우상을 그냥 뿌리 뽑으면 우상이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말이다. 우상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참되신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밖에는 없다(231).

이 책을 읽으면서 요즘 뜨는 어떤 한 분이 생각이 났다. 그는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분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분이 참되신 하나님을 만났을지 의심스러웠다. 우상은 그대로인데 수단만 바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러한 현상은 그분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우리들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을 진짜로 만나야 한다. 요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우상에 갇혀있던 것과 같은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다(212-223).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들은 우상을 섬긴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들의 모습은 위기 속에서 우리들이 섬겼던 진짜 우상들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217).

이 책은 2017년에 한국어로 출간된 최고의 신앙서적이다. 나는 이 책을 내년도 독서모임을 통해서 우리 교회 성도들하고 같이 나누고 싶다. 그저 진통제 처방이나 하고 있는 차원을 뛰어넘어, 우리 속에 깊숙하게 뿌리박고 있는 영적인 종양들 제거하는 데에는 이것보다 더 좋은 책은 없을 것 같다. 

2017.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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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기도의 영성을 일깨워주는 책이 될 수 있을까?

기도에 대한 바른 안내서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내게 간절했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 교회 내에서 기도란 성경적이라기보다는 무속적이라 생각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김요한 목사의 기도에 관한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은 무척 반가웠다. 적어도 내가 알기에 김요한 목사는 그런대로 건전한 신앙적 관점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가 쓴 [지렁이의 기도]는 기도에 관한 우리의 잘못된 관점들을 교정시켜줄 치료제가 될 것인가?

기대감으로 받아들고 단숨에 읽은 이 책은 아쉽게도 그런 치료제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는 치명적이고 위험한 독소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기도에 관한 이론을 성경의 가르침에 세우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에 크게 의존하여 세웠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발견한 가르침보다는 실제적인 경험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더 열광하고 환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기도에 관한 가장 정확한 가르침은 오직 성경뿐(sola scriptura)이다. 성경 외에 다른 어떤 추가적인 계시나 권위적인 주장을 덧붙이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물론 [지렁이의 기도]에는 성경적인 교훈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기도응답의 비결은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성실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우시고 신실하신 성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86)는 표현 같은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기도가 단순히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정신에 따라서 기도해야 한다든가,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고, 지성을 다하여 기도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든가, 사회정의와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든가, 총 25개의 주제들은 대부분 건전한 성경적 주해에 바탕을 둔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은 동의하기 어렵다. 첫째, 김요한 목사가 자신이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주장이다. 김요한 목사는 이 책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받아서 J 집사의 태어날 아기가 딸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또 그 다음에 낳게 될 아기는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주장을 한다(97-99). 또한 자신을 찾아온 이 집사에게 남편이 아플 것이며 관악산 주변으로 집을 옮기라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했다고도 한다(114-115). 이 외에도 김요한 목사는 자신이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사람들의 앞날을 예언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예언이 진실되다는 이유로 몇 가지 근거를 댄다. (1) 참된 예언은 어떤 사건에 대해서 예언은 하지만 구체적인 시기나 장소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반면, 거짓 예언은 구체적인 시간이나 장소까지 예언한다. (2) 참된 예언은 복수의 은사자들에게 알려주시지만, 거짓 예언은 그렇지 않다. 특히 방언 통변자들을 통해서 복수로 검증되어야만 참된 예언이라 할 수 있다(160-161).

하지만 그의 주장과는 달리 이러한 근거는 성경적으로 지지되지도 않고, 더 나아가 김요한 목사 본인이 했던 예언도 이 기준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김요한 목사는 이번에 태어날 아기가 딸이고 다음번의 아기는 아들이라고 구체적인 예언을 했지 않은가? 서쪽으로 가면 횡재할 것이고, 물을 피해야 한다는 등 대개 토정비결 수준의 예언들이야 말로 구체적인 예언이 아닌 두루뭉술한 예언들이다. 대체로 빗나가는 예언들은 구체적으로 예언했기 때문에 빗나가는 것이지만, 두루뭉술하게 예언하면 대부분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좋게 해석하면 다 맞아 떨어지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의 예언은 참 선지자 미가야 한 사람의 예언과 거짓 선지자 다수의 예언 사이의 대결이기도 했다. 다수의 선지자가 모두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예언했지만, 그 예언은 거짓이었다(왕상 22:1-35). 예언의 진위는 다수결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안타깝게도 김요한 목사는 기도하는 삶을 통해서 성령께서 자신에게 예언해주시는 것을 듣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것들을 맞추었고, 때로는 치유의 결과가 나타나기도 했고, 그대로 적중한 예들을 언급하면서 마치 기도의 삶에 이러한 예언의 은사가 자동적으로 따를 수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아쉽다. 사실 이런 식으로 무엇인가를 적중하여 맞추는 일은 불교에서도 나타나고 있고, 수많은 무당들도 하고 있는 일이며, 심지어 월드컵 문어 파울(Paul)도 하고 있는 일이다. 물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빗나간 예언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의 은사는 미래의 일에 대해서 미리 알아맞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은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 사모해야 할 예언의 은사(고전 14:1, 5)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은사이다.

둘째, 김요한 목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물론 제6장에서 나열한 설명은 대체로 건전한 것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스탠리 존스의 이야기를 예화로 든 것은 그의 설명을 무색케 만들고 도대체 예수님의 이름을 주술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장려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명령하기만 하면,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셋째, 김요한 목사는 성령께서 탄식하며 기도하신다는 것을 방언 기도와 연결시킨다. 이렇게 연결시키는 것도 아무런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인데, 방언 문제에 있어서 김요한 목사는 철저하게 경험 중심적이다. “방언은사의 진가를 알려면 방언통변을 받아봐야 한다”는 주장(124) 등 성경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내용들을 자신 있게 말한다는 점이 아쉽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주장들은 우리 한국 교회에서 아무런 검증 없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넷째, 기도에 있어서 믿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그 믿음은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김요한 목사는 진지한 묵상과 고민이 묻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이 “자신의 노력이나 성실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우시고 신실하신 성품에 뿌리를 두고 있다”(86)고 선언했지만, 제9장 믿음으로 기도하기 편에서는 결국 기도자의 믿음이 “기도응답의 금고를 여는 마스터키와 같은 것”(150)이라는 이율배반적 주장을 하는 것이다. 결국 김요한 목사는 자신이 “기독교적 사고가 아니라 이교적 사유의 한 모습일 뿐”(87)이라고 비판했던 주장과 정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모순에 빠지고 만 것이다.

김요한 목사는 “믿음이 있는 경우 반드시 기적이 일어난다”고 소개한다(149).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절반의 진리이다. 우선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경우는 반드시 믿음이 있는 경우만이 아니었다. 어떤 기적들은 그냥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다. 치유를 입는 자의 믿음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말이다. 예를 들면, 회당에 있던 손 마른 사람의 경우(막 3:1-5)나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경우(요 9:1-7) 등등 많은 경우에 병자의 믿음과는 관계없이 그냥 불쌍해서 고쳐주신 경우가 적지 않다.

더 나아가 과연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무엇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150)이며 결국 이런 믿음만 있으면 가나안 여인이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응답을 받은 것(151-152)처럼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수 있을까? 아니다.

김요한 목사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실패한 것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믿음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점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설사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지 않아도 우리는 그러한 거절 때문에 실망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거절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무시해서도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믿음은 “기도응답의 금고를 여는 마스터키와 같은 것”(150)이라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 기도의 응답이 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며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원천이며 또 다시 다른 문제로 기도할 수 있도록 용기는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다섯째, 김요한 목사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하루에 6-7시간씩 기도하기도 했고, 또 믿음의 위인들이 2-3시간씩 기도했다는 예들을 소개한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많은 시간 동안 기도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게 성경적인 가르침일까? 김요한 목사는 기도를 많이 해야만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오해한 이방인들의 예를 들면서 너희는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마 6:7-8)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물론 바알 선지자들의 요란한 기도에 비해 엘리야의 기도가 간단한 것이었음을 주목했지만 말이다.

기도는 무조건 많이 하면 좋을 것이라는 선입견은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무속적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잘 잊는다. 사실 이러한 주장들은 사람들을 기도의 세계로 초대하기보다는 포기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고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는 사람들은 결국 좌절을 맛볼 가능성이 많다. 몸짱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헬스클럽에 등록하기는 하지만 결국 실패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은 소개된 위인들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루터의 사명을 받은 것도 아니고, 목사는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그런 기도생활은 특별한 소명을 받은 분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기도를 포기하기 쉽다. 결국 이 책은 기도를 하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포기하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런 부류는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기도는 긴 시간 동안 해야 할 것이라기보다는 자주 해야 하는 것이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은 24시간 내내 절대 중단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라기보다는 모든 경우에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즉 힘들 때에도 기도해야 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기도해야 하고, 내가 내 힘으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말이다. 어린 아이는 매 순간마다 부모를 찾는다. “엄마, 배고파요.” “아빠, 이것 보세요.” “엄마, 쉬 마려워요.” “아빠, 이것 들어줘요.” 우리 아랫집에 사는 꼬마 아이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 아빠 다리 뒤로 숨는다. 낮선 아저씨인 내가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것이 두려운 모양이다. 그 아이는 아빠의 손을 꼭 잡고 뒤로 숨는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자기 전에 “하나님 편안한 밤이 되게 하시고 잘 자게 해 주세요” 기도해야 한다. 일어나서, “하나님 저 일어났어요” 기도해야 한다. 무서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길지 않아도 좋다. 30초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 아뢰지 않고 혼자 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기도한 것이 거절 되어도 낙망하지 말고, 다음에는 다른 기도의 제목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게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지, 끝까지 떼쓰면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기도는 한국 성도들에게 하나의 공로가 되어 버렸다. 마치 스님들이 면벽수도를 하듯 한국성도들은 기도의 시간으로 또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기도의 수련을 닦고 있다. 그래서 수련의 깊이가 깊어지고 응답의 횟수가 늘어나면 그 사람은 기도의 대가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우리의 종교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음을 전제한다. 지치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눅 18:16). 그렇지 않고 기도를 얼마나 유창하게 오랫동안 하는가 따위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려고 한다면 복음을 크게 오해한 것이 될 것이다. 거기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렁이의 기도]라는 책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많은 유익한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아쉽다. 그건 내가 김요한 목사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한 탓도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2017.11.29

[서평] 거절을 당하며 사는 우리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거절의 과학

거절당하는 것은 아주 끔찍한 경험이다. 거절당하게 되는 경우 분노하게 되기도 하고, 자신감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고통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거절의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 거절의 경험은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돌이켜 보니 나에게도 쓰라린 거절의 경험이 많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시간이었다. 이름은 지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재학 중이었던 분이셨다. 이분은 단순히 교과서를 가르쳐주는 정도로 하지 않았다. 우리들에게 판소리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었고, 또한 국립 도서관에 직접 가서 문헌 조사를 하도록 숙제도 내주는 등, 정말 실력파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한번은 그분이 시를 분석하는 숙제를 내주었고 발표를 하게 했었는데, 나는 나름대로 분석하고 발표했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나의 발표를 들은 후에 혹평을 해주었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까지 내가 교과서 중심으로 충실하게 공부하는 습관이 있어서였을 수 있었다. 그분은 좀 더 창의적인 접근을 기대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혹평은 당시에 내게 아주 큰 충격이었었다. 그때까지 항상 공부시간에 꾸지람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 충격이 적지 않았다. 그 결과 나는 국어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게 아주 큰 손실이 된 경험이었다.

만일 그 때 내가 지아 장이 쓴 <거절당하기 연습>이라는 책을 읽었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그 때 국어선생님으로부터 받았던 거절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지 않았을까? 지금의 나의 모습은 훨씬 더 많이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지아 장은 자신의 사업에 투자를 받으려고 하다가 투자자로부터 거절을 받고 낙망에 빠졌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식으로 절망할 경우 자신의 미래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거절에 대한 내성을 키우기 위해 100번의 거절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써내려간 거절에 대한 연구서가 <거절당하기 연습>이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지아 장의 터무니없는 부탁을 무조건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지아 장은 어떻게 하면 거절당하지 않고 승낙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원리들을 추출해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그가 발견한 거절의 과학은 가히 놀랍다.

지아 장은 거절은 단순히 거절하는 사람의 의견일 뿐, 그것이 나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고 한다. 거절하는 이유는 단순히 거절하는 사람의 상황이나 필요가 나의 요구와 맞지 않아서 일어나는 것일 수 있으며, 적합한 상대를 만나거나 또는 수락을 받아내기 위한 적절한 방법들을 사용한다면 수락을 받아낼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부탁하는 이유를 잘 설명한다든지, 1인칭 주어로 말을 한다든지, 상대방의 의심을 인정해준다든지 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아 장은 거절당하기를 통해서 얻은 친절하게 거절하는 방법도 제안한다. 예를 들어 단도직입적으로 거절을 밝힌 후 후에 그 이유를 설명한다든지, 대안을 제시하여 상대방을 내편으로 만드는 방법을 사용할 것을 권한다. 이 외에도 이 책은 사람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바라볼 것인지에 관한 아주 좋은 제안들을 많이 해주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은 후 곧바로 미국에 있는 두 딸아이들에게 원서를 주문해서 선물해주었다. 하루라도 더 빨리 이 책을 읽게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거절을 당하면서 의기소침해졌을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는 오히려 더 당당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배울 수 있게 하고 싶었다.

2017.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