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과 변혁을 추구하는 교회 (마 15:1-11)

수용과 번혁을 추구하는 교회 2017.3.5

변하는 것이 좋을까? 변하지 않는 것이 좋을까? 한편으로 생각하면 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사랑은 변하지 않고 영원해야 한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기로 서약하고 결혼을 하는 것인데, 만일 그 사랑이 변해버린다면 정말 슬플 것이다. 사랑은 변하지 않아야 좋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것이 나쁠 수도 있다. 귀엽고 예쁜 어린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전혀 성정하지 않고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축복일 수 없다. 아무리 예쁘고 귀여운 아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해야 좋은 것이고, 세월이 차면 부모의 곁을 떠나 독립해야 좋은 것이다.

변하는 것이 모두 다 좋을 수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이 모두 다 좋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변하지 않아야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변해야 좋은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변해버리고,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는다면 문제다. 그런데 사람들은 변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종종 혼동한다.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알고 보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를 수호하는데 목숨을 거는 경우가 많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어야 한다는 하나의 규칙을 금과옥조처럼 여겼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제자들을 비난했다. 사실 손을 씻어야 한다는 장로들의 규칙은 아주 유익한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전통이 하나의 법칙이 되어버리고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자신들의 전통으로 사람들을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이고 문화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비본질적이고 문화적인 것마저도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몇 달 전에 호주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설교를 하면서 신약성경 한 구절만을 읽고 설교를 했다. 그랬더니 호주 교회의 성도 한 분이 이것을 아주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서양의 전통에서는 교회력에 따라서 예배 시간에 구약 한 구절과 신약 한 구절을 읽고 설교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전통에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런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없는데,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문화적이고 전통적인 것을 따르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비본질적이고 문화적인 것이 마치 절대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인 양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고기는 자신이 살고 있는 그 물에서 떠나보지 않고는 물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물은 언제나 항상 존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 진공상태에서 신앙생활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교문화와 여러 가지 토속신앙의 배경에서 그리고 한국적 삶의 방식을 가진 채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전통들이 다 신앙적인 것이고 성경적인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단면들이 성경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인 것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현재 환경을 떠나 보면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수 있다.

내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였다. 한국에서만 살았던 내가 처음 미국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이 한국과는 달라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모든 것들이 한국과는 정 반대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트럭은 1차선으로 다닐 수 없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트럭이 1차선을 마음대로 다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오토바이들도 고속도로를 마음대로 활개치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화폐의 디자인은 하나로 통일 되어 있어야 한다는 관념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같은 액수의 화폐인데도 여러 가지 종류의 화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미국의 뉴햄프셔 주에서는 안전띠를 매는 것이나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는 것이 법으로 강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한국에서처럼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한국에서 하는 방식과는 정반대로 해도 되는구나! 내가 한국을 떠나 미국에 갔을 때 느끼게 된 것이었다.

우리가 지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일 수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미국 교회에 갔더니 목사님이 양복을 입고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편한 복장으로 나와서 설교를 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심지어 청바지를 입고 나와서 설교하기도 했다. 성경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양복을 입고 설교하라는 구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양복을 입지 않으면 큰 문제처럼 여겨질 것이다. 우리는 비본질적이고 문화적인 것에 목숨을 거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와 다른 방식으로 신앙생활한다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과연 내가 하는 이 방식이 성경적인 것인가?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나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심지어 자신이 만들어놓은 틀과 법칙의 노예가 되는 경향도 있다. 전통이나 문화적 관습들을 절대적인 법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우리가 알고 행하고 있는 것들이 정말 성경적인 것인가? 혹시 문화적 관습에서 온 것은 아닌가?

진리는 수호해야 하겠지만, 문화적인 것이나 관습적인 것들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들이다. 유럽의 교회들은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려고 했다. 사실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들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 결과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교회란 진부하고 자신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교회는 진리를 붙든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진리가 아닌 자신들이 만든 전통을 붙들다가 쓰러져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 즉 진리는 확고하게 붙들어야 하겠지만, 문화적인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맞추어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새 술을 거부하면서 말했다. 오래된 술이 더 맛있다고 말이다. 인생을 오래 살다보면, 경험도 생기고 여러 가지 경험에서 오는 지혜들이 생긴다. 그래서 아직 경험이 부족한 세대를 바라보면 늘 불안한 마음을 가진다. 그들이 실수할까 염려한다. 하지만 새로운 길과 방법을 시도하지 않고는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패를 무서워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어른들이 젊은이들의 생각을 가로막고 어른들의 방식대로만 고집하면 그 집단은 망하게 되어 있다. 한국교회가 망해가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 입었던 갑옷과 칼이 다윗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들의 생각이 새로운 세대에는 전혀 맞지 않고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다윗에게는 물맷돌이 더 어울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골리앗을 결코 물리칠 수 없을 것이다.

스펜서 존슨이라는 작가가 쓴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을 보면 매일 맛있는 치즈를 창고C에서 얻을 수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창고가 텅 비어 있는 것을 알게 된 후 각각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스니프와 스커리라는 두 마리의 생쥐는 치즈를 찾기 위해서 다른 창고를 찾아나셨다. 꼬마 인간 허도 결국 다른 창고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꼬마 인간 헴은 자신에게 맛있는 치즈를 제공해주었던 창고C를 떠날 수 없었다. 다른 곳을 찾아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예전에 풍성하게 치즈를 제공했던 창고C를 철저하게 고수하는 것만이 치즈를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 이런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예전에 썼던 방법, 예전에 부흥을 일구었던 바로 그 방법을 고수하면 다시 교회가 부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시대가 변했고 사람들이 변했건만, 그러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예전에 썼던 방법들을 다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사실 유럽 교회가 텅텅 비어간 것은 바로 이러한 옹고집 때문이었다. 젊은이들의 생각이 바뀌었고 생활방식이 바뀌었는데, 유럽의 교회들은 그 젊은이들의 관심사와는 무관한 예전의 방식만을 그대로 고집하다가 젊은이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우리나라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진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진리가 아닌 문화적인 것, 충분히 변해도 괜찮은 것들마저도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유럽의 교회들처럼 텅텅 비어갈 것이다.

미국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교회를 변화시킨 교회들은 성장하였다. 예를 들면 뉴욕에서 엄청난 부흥을 일구고 있는 리디머 교회 같은 경우에는 복음의 핵심은 철저하게 고수하면서도, 문화적인 면에서 젊은이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교회는 세상 끝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어떤 지역교회가 망하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나 에베소 교회나 안디옥 교회들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 잘 적응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던 새로운 교회들이 생겨났고, 그렇게 교회는 생명을 이어나갔다.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 가운데 우리 교회가 지속적으로 사용되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용과 번혁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