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의 고백 (요 20:19-31)

2017.4.23 주일오전예배 설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사실이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마음을 열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산상수훈의 메시지에 열광한다. 심지어 불교의 어떤 스님은 늘 설법을 할 때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황당무계한 말까지 믿으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머뭇거리게 되고 주저하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 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마처럼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다. 죽었다가 다시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믿게 되었고, 도마는 믿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다른 제자들은 보았고, 도마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다. 왜 그 자리에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그 자리에 없음으로 인하여 도마는 영적인 유익을 얻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기쁨으로 가득하게 되었지만, 적어도 도마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의 사건이 개인적으로 실제화되지 못한 것이다.

성도들 중에서 시험에 빠지는 경우는 어떤 큰 일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조그마한 것에서부터 발생한다. 우리는 항상 있는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자리에 나아가고, 항상 주님 앞에 기도하는 자리에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일을 등한시하게 될 때, 어느 순간에 시험에 빠지게 된다. 도마는 우연히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날 때 그 자리에 없었다. 별 일 아니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아쉬웠다.

놀라운 것은 바로 그 도마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에게 확신을 심겨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사람들은 증거가 있어야만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말은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내놓아라.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알고보면 여러 가지 증거가 있어도 믿지 않는다. 다른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들이 왜 그렇게 말을 하게 되었는지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무조건 못 믿겠다고 우기는 게 사람이다. 더 큰 증거를 요구하면서 말이다. 사실 그러한 사람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이익과 안일을 위해서는 그리고 죄악의 길을 달려갈 때에는 전혀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어버리니까 말이다. 돈이 한 번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 적도 없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증거도 없는데도,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 착각하고 돈을 위해서 목숨을 건다. 그런데 유독 진리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한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게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는 주님을 믿어야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의 진짜 부모일까 의심하면서 고민하기보다는, 완벽한 증거를 내놓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우기기보다는, 나의 부모임을 믿고 부모와의 행복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일인 것처럼, 우리는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총을 누리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너희가 내 자녀가 맞느냐 질문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내 놓아야만 자녀로 사랑하시겠다고 하시지 않았다. 우리를 위해서 주님은 그냥 모든 것을 내어주셨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말이다.

예수 복음 중심의 교회 (요 5:39-40)

예수 복음 중심의 교회 2017.2.26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가르치는 종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라고 가르치는 종교이다. 이 중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종교는 우리의 본성에 딱 들어맞는다. 우리들의 마음에는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지가 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을 좋아할 수 있지만, 더더욱 기쁜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을 때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어한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 또는 지고선(至高善)에게 나아가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 중에서 대표적인 종교가 불교일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또는 수양으로 자신을 비우는 것을 통해서 해탈 또는 성불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기 위해서 참선을 하기도 하고 묵언수행을 하기도 한다. 방향은 정반대이지만 불교와 비슷한 종교 시스템을 가진 것이 샤머니즘일 것이다. 샤머니즘에서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의 복을 추구하는 것인데, 그러한 복을 얻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정성을 통해서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서로 다른 목표를 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러한 목표를 이루는 방법은 원론적으로 비슷하다. 내가 최선의 노력을 통해서 우리가 흐망하는 목표를 얻을 수 있다고 이런 종교 시스템에서는 가르친다. 

이러한 종교 시스템의 장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종교의 장점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이다. 도를 닦고 또 닦으면 그만큼 인격이 고매해질 수 있다. 묵언수양을 하고, 참선을 하고, 여러가지 수행을 통해서 높은 경지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고매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충분히 거룩해져서 하나님에게까지 도달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도토리 키재기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뛰어날 수 있겠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의 기준에는 도무지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은 아무리 높이뛰기를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제2 롯데월드 꼭데기까지 뜀뛰기로 올라갈 수 없다. 몇년을 연습해도 불가능할 것이고, 몇대에 걸쳐서 계속 뜀뛰기를 연습해도 이룰 수 없다. 물론 높이 뛰기 연습을 전문적으로 하는 선수들은 일반인들에 비하여 훨씬 더 높이 뛸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2롯데월드 꼭데기까지 뛸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문제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서는 결코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관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노력하고 도를 닦아서 해탈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 약간의 변화가 가능하고 더 나아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이 방법이 정말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좀 더 열심히 수련하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나아갈 만큼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다른 방법을 제시하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만일 완벽하게 착한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격이 없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의 손을 내미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남편을 배반하고 음탕한 여인을 끝까지 건져주고 아내로 받아들이는 호세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자격이 없는 우리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또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아버지를 배반하고 집을 떠난 자식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참된 복음은 아무런 가망성이 없는 우리들을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엡 2:8).

이러한 “오직 은혜로만 구원얻는다”는 가르침은 종종 율법폐기론으로 연결되곤 했다. 즉 이제는 우리가 무슨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생각이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이러한 구원파적 사고방식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제대로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더욱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옳다. 그래서 바울 서신은 대부분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우리가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한 후에, 후반부에서는 그러므로 이제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세상의 다른 종교와 비슷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고, 예수님을 선포하지 않고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종종 교회에서 듣는 메시지는 이런 메시지들이다. “여러분,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분,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치 이 세상의 종교가 스스로 노력하면 복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열심히 도를 닦으면 결국 신의 경지에 올라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교회도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하게 되면 결국 복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메시지 속에는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놀랍게도 설교 가운데 예수님의 이야기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기도 한다. 그냥 여러분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만 들릴 뿐이다. 놀랍게도 유대인처럼 살면 우리도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들리고 있고, 그런 식의 쉐마 교육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교회에서 크게 울려 퍼지고 있다. 유대인처럼 사는 것이 우리의 문제의 해결이라면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했겠는가?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사용했지만, 그 속에서 예수님의 필요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얻으려고만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철저한 무능을 발견해야 하고, 그래서 철저하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셨다(요 5:39-40). 이게 오늘날 우리가 자주 목격하는 모습이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님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공로사상만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이다. 성경 속에서 인생의 성공비법만을 찾는다면, 그것은 성경을 오용한 것이다. 아무리 성경에 보화가 가득하면 무슨 소용인가? 서울에 올라간 시골쥐가 서울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그저 쓰레기통만 뒤지면서, 서울도 별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세상의 다른 종교와 비슷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고, 예수님을 선포하지 않고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종종 교회에서 듣는 메시지는 이런 메시지들이다. “여러분,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분,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치 이 세상의 종교가 스스로 노력하면 복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열심히 도를 닦으면 결국 신의 경지에 올라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교회도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하게 되면 결국 복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메시지 속에는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놀랍게도 설교 가운데 예수님의 이야기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기도 한다. 그냥 여러분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만 들릴 뿐이다. 놀랍게도 유대인처럼 살면 우리도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들리고 있고, 그런 식의 쉐마 교육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교회에서 크게 울려 퍼지고 있다. 유대인처럼 사는 것이 우리의 문제의 해결이라면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했겠는가?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사용했지만, 그 속에서 예수님의 필요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얻으려고만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철저한 무능을 발견해야 하고, 그래서 철저하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셨다(요 5:39-40). 이게 오늘날 우리가 자주 목격하는 모습이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님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공로사상만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이다. 성경 속에서 인생의 성공비법만을 찾는다면, 그것은 성경을 오용한 것이다. 아무리 성경에 보화가 가득하면 무슨 소용인가? 서울에 올라간 시골쥐가 서울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그저 쓰레기통만 뒤지면서, 서울도 별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칠 때에도 율법적인 신앙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복음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흔히 자녀들에게 신앙생활의 법칙만을 가르치곤 한다.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하지 말라. 여러 가지 윤리와 도덕들을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은 분명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져야 할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복음이 빠진 채 율법만 가르치게 되면, 결국 사람들은 율법주의자가 되고 바리새인이 되고 말 것이다. 참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만 치장하는 위선적인 신앙인이 되고 말 가능성이 많이 있다. 그리고 율법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다.

율법을 가르치는 것의 문제는 우리가 결코 완벽해질 수 없다는 데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 자녀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부모에게서 이중성을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부모에게서 위선적인 모습을 보면서 신앙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완벽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잘못을 저지르면 왜 잘못을 저질렀느냐고 윽박지르며 훈계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도 똑같이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음을 고백하면서 바로 이러한 모습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것을 기대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우리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그들에게 매력적인 것들이 더 이상 교회에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교회보다 교회 밖에 더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는 단순히 부모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오지만, 성장하면서 세상을 향해서 달려 나가는 것이다. 기독교의 참된 핵심인 복음 자체의 맛을 느끼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단순히 과자나 놀이와 같은 즐거움에 이끌려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를 맛보게 해야 한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 2017.3.15

사람은 예배하는 존재이다.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부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 예배의 대상이 각각 다를 뿐,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예배하게 되어 있다. 문제는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한다면 우리는 기쁨을 얻게 될 것이고,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상을 예배한다면 우리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상은 항상 우리들에게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약속하지만 단 한 번도 우리에게 그 화려한 것을 선물해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화려한 약속으로 우리를 유혹한 뒤 우리를 착취하고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만일 내 마음 속에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고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도 우상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자녀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거룩한 목적들도 우상이 될 수도 있다. 선교나 부흥이라는 거룩한 목적도 어느 순간에 우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옛날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상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신앙생활을 개인적으로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예배하는 공동체로 모인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된다. 함께 모일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가운데 회복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맛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예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심지어 부부싸움을 했더라도 예배의 자리로 나와야 한다. 마음에 불편한 일이 생기면 생길수록 예배의 자리로 더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의 자리에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호주에 집회를 갔을 때였다., 어떤 부부가 있었는데, 그 부부는 그 주에 서로 싸움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의 많은 분들이 걱정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분들이 예배의 자리로 나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부부싸움을 하면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지 않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싸웠으면서도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다. 그래서 그들은 회복이 되었다. 이번 한 번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겠지만, 이들은 예배를 통해서 많은 유익이 있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항상 우리에게 유익하다.

교회가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교회의 존재목적이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교회가 사교클럽의 수준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놀랍게도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또는 사람들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모인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과연 나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오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내가 예배받기 위해서 교회에 오고 있는가? 내가 교회에 오는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배받기 위해서 오는 순간, 우리의 신앙생활은 고통스럽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누가 더 큰가를 놓고 다투었다. 주님을 따르기로 처음 결심할 때에는 겸손하게 주님만을 바라보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데 급급했던 것이다. 마르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 자체가 기뻤다. 하지만 마리아를 바라보는 순간 자신과 마리아를 비교하기 시작했고,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비교가 있고,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생겨난다. 이러한 욕구는 자신이 예배받기를 원하는 욕구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오해하지 말자. 그러니까 교회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칭찬하고 박수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 내에서 서로 선행을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축복하는 것은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을 소망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예배하는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그런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표현은 좀 애매한 것 같다. 이럴 때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짜라고 생각한 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에 반하여, 예수님은 이 산이냐 예루살렘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비본질적인 것을 절대화해서 목숨을 거는 일이 많다. 예배의 각 요소들이나 순서들이나 형식들이 전통으로 굳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사실은 그런 형식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러한 형식을 고수하려고 했고, 이것 때문에 많은 싸움이 있어왔다. 기타나 드럼을 사용할 것인가? 오르간을 예배 중에 사용할 것인가? 찬송가만 불러야 하는가? CCM을 부를 수 있는가? 예배 중에 박수를 칠 것인가 말 것인가? 놀랍게도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런 문제 때문에 서로 싸우고 분열이 되어 왔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적인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와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물이라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문화와 전통 속에서 살아가면서 마치 그것이 본질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