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지

한때 너는 나의 전부였다.
모든 종이는 
딱지가 되어야 했고
너는 나의 자존심이었고
너는 바로 나였다.

어느 순간 
너는 내 삶에서 사라졌다. 
배설물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소중했던 네가

너는 진화했다. 
딱지에서 게임기로 
게임기에서 돈으로 
돈에서 명예와 권력으로 
그래도 너는 여전히 딱지다.

지금은 
또 다른 딱지를 모은다.
언젠가 다 사라져 없어질 것이 뻔한 딱지를 
그래도 지금은 그 딱지가 전부이니까
그게 나를 지탱해주니까 
그게 나니까

나는 갈망한다 
사라지지 않을 것을 
그 어느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것을

2017.12.9 이국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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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열망, 제대로 된 욕심

우리는 무엇을 욕심내야 할까?

성경에 보면 욕심을 부리다가 망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게하시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게하시는 엘리사가 나아만이 주는 예물을 받지 않았을 때, 몰래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서 엘리사의 부탁이라고 속여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챙겼다. 하지만 엘리사는 멀리서도 게하시가 한 일을 알고 있었다. 결국 게하시는 욕심을 부리다가 나아만이 가지고 있었던 나병까지 얻게 된 이야기가 성경에 쓰여 있다(왕하 5:15-27).

게하시의 모습은 참으로 아쉽다. 재물의 욕심에 눈이 멀어서 양심의 소리에 자신의 귀를 닫아버리고, 거짓말을 해가면서 재물을 손에 넣었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고 비참한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왜 게하시는 그런 욕심을 부리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게하시는 재물을 얻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엘리사의 종이 되었을까? 적어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엘리사의 생도가 되어 엘리사 밑에서 일하려고 결심했을 때만 해도, 그의 마음은 순수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람 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자신도 신실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고 싶어서 선지생도가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지생도가 되는 순간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거룩의 싸움은 평생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벧전 5:8). 아쉬운 것은 처음에는 신실하게 그리고 거룩하게 시작했었을 게하시는 도중에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타락하게 된 것이다.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넘겼던 가룟 유다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한다(마 26:41).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성도들을 만났다. 수많은 목사와 전도사 그리고 선교사들을 만났고, 수많은 장로와 권사와 집사들을 만났다. 그런데 때때로 도대체 이 사람은 왜 목사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사람은 왜 장로가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사역을 하며 헌신하는 모습은 전혀 없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명예와 권력에만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안타깝다.

적어도 이들도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을 터인데 말이다. 처음에는 이들도 정말 주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는 각오로 성직자의 길로 들어왔을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순종하며 겸손하게 사역하겠다는 자세로 직분을 맡았을 텐데, 시간이 흐르면서 주님에 대한 첫 사랑을 잊어버리고(계 2:4)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마 13:22)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게하시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냈을 뿐, 엘리사가 보여준 영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욕심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나아만의 나병을 고치는 놀라운 기적을 행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한 게하시라면 자신도 그러한 영감과 영적인 능력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룩한 열망이 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성경은 게하시가 그런 욕심을 냈다는 기록이 없다. 오로지 재물에 대한 욕심만이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거나 추구할 것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요 6:27).

바로 이점이 게하시와 엘리사의 차이점이었다. 엘리사는 거룩한 욕심을 냈다. 엘리야 선지자가 때가 되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승천하기 전에, 엘리사는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만류하는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갔다.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요단까지 계속 따라갔다. 엘리사의 목적은 하나뿐이었다. 엘리야가 가졌던 영감보다 갑절의 영감을 얻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다(왕하 2:9). 그런데 게하시는 생생한 엘리사의 영적인 능력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으면서도 그런 열망이 없었다. 오직 그가 욕심을 낸 것은 엘리사에게 주어질 수 있었던 재물뿐이었다.

최근 어느 대형교회에 세습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느 유명하고 능력이 많은 목사의 아들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처럼 행하지 않고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했던 예가 있으니까 말이다(삼상 8:3). 그래서 이 세상에 수많은 목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그 교회의 전임 담임목사의 아들 목사를 굳이 세습하면서 세우겠다는 생각은 별로 바람직한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습 자체를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만일 정당한 기회가 보장이 되고 정당한 절차를 거칠 수 있다면 말이다. 해당 교회는 총회 결의로 세습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습을 하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아들 목사의 태도를 보면서 실망스럽다. 아버지가 가졌던 영적인 능력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은 보이지 않은 채, 아버지가 일구었던 어마어마한 제국에 대한 욕심만이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게하시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교회의 태도도 실망스럽다. 그런 자격 미달의 사람을 굳이 세우려고 하는 그들의 정신상태를 이해하기 어렵다. 분명하게 자신이 그럴 의사가 없다고 밝히지 않는 이유를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성도들이 직분을 사모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는 게 뭐라고, 거기에 목숨을 거는 것 같은 성도들을 많이 목격해왔다. 심지어 장로나 권사가 되지 못했다고 화를 내면서 교회를 비방하고 떠나는 사람들도 보았다. 왜 직분자가 되는 것을 그렇게 열망할까? 내게는 그 모습이 꼭 게하시의 모습처럼 보인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열망하고, 장로나 권사라고 하는 명예가 주는 만족감을 욕심내는 것 같은데, 정작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에 대한 욕심을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부목사들이 담임목사가 되는 것을 강하게 열망하는 것을 보았다. 특히나 요즘처럼 목회자 수급에 불균형 현상이 생기고, 결국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담임목사가 되지 못하면 이제는 더 이상 목회자로서 사역하기는 어렵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목사들에게서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소원이 강한 경우를 별로 찾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에 충성하면서, 주를 위해 사역하는 것을 기뻐하고, 정말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영적인 능력을 사모하는 부목사를 찾는 것이 어려웠다. 그저 담임목사가 되면 얻을 수 있는 영광과 특혜만을 탐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정말 신실한 목사들도 있었다. 내가 필라델피아에서 목회를 할 때였다. 그곳에 있는 신학교에 유학을 온 젊은 목사님이 있었는데, 그 목사님은 우리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는 T.O.가 없었기 때문에 그분을 유급 사역자로 세울 수는 없었다. 그냥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목사님이었다. 그런데 어느 토요일날 사무실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있을 때 그 목사님 부부가 교회에 와서 청소하는 것을 보았다. 물어보니 자기 아이들이 유치부에 해당하는데, 유치부실이 조금 더러운 것 같아서 청소하려고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한번이 아니었다. 다음 주에도, 또 그 다음 주에도, 그 목사님 부부는 조용히 교회에 와서 이곳저곳을 청소하기도 하고 정리하기도 했다.

얼마 뒤 나는 한국에 있는 교회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10년 동안 사역하던 교회를 뒤로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남겨지는 교회에 새로운 담임목사를 모시는 것은 남아있는 교인들에게도 중요했고, 내게도 아주 중요했었다. 그때 나는 아직 30대 초반이며, 목사 안수를 받은 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고, 미국 생활의 경험도 일천하고 아직 유학생 신분이며 영어 실력도 아직 많이 부족한 바로 그 목사님을 교우들에게 추천했다. 놀랍게도 우리 교인들은 그분을 환영하고 받아주었다. 옆에서 볼 때 그분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 같았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욕심낸 분 같았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말이다. 사실 목사에게는 그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자격조건일 수 없다. 지금도 그 교회는 그분과 함께 부흥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다.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어야 할까? 그것은 썩어져가는 재물이어서는 안 된다. 아무 의미가 없는 명예와 영광이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더욱 주님을 알아가는 것을 사모해야 하고, 더욱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소원해야 하고, 더욱 겸손해지기를 소원해야 하고, 더욱 주님께 헌신하는 것을 소원해야 하고, 더욱 주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것을 소원해야 한다. 그저 평안함과 명예나 추구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추구하셨던 예수님처럼 말이다.

2017.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