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감동으로 (딤후 3:14-17)

2017.5.28 주일오후예배 설교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신앙강좌 제3강

1. 성경은 누가 기록했는가? 성경에는 여러 명의 인간 저자가 있다. 모세오경은 모세가 썼고, 바울서신은 바울이 썼고, 이런 식으로 인간 저자가 성경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이 인간 저자의 글인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을까? 성경적인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영감을 통해서 오류로부터 자유롭게 보호하셨다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 저자가 쓴 책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동시에 하나님의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의지할만한 책이 되는 것이다.

2. 실제적으로 성경에 오류가 있어 보이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첫째, 우리가 오해한 결과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른 이해를 위해 겸손한 태도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둘째, 성경은 다양한 문학적 장르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문학적 장르에 맞는 해석을 해야 한다. 셋째, 성경은 영적인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세상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세상의 언어는 영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그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불변하면서 이해해야 한다. 넷째, 성경은 원문이 영감된 것이지, 사본이나 번역본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본이 원문을 거의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번역이 원문의 의미를 거의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지만, 결국 최종적인 권위는 원문에만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더하거나 제하지 말라 (계 22:18-19)

2017.5.14 주일오후예배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신앙강좌 제2강

1.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대한 최고의 기준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던져지는 질문은 과연 성경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어떤 책들이 성경인가? 천주교의 성경은 개신교의 성경에 7권의 책이 더 많다. 유대교는 구약만을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이슬람교는 모세오경과 시편과 복음서만을 성경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정말 누구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사실 어떤 책이 성경이고 어떤 책이 성경이 아닌가를 결정할 권한이 사람에게 있지 않다. 만일 사람이 성경이 무엇인가를 결정할 위치에 있다면,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를 사람이 가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을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2. 성경 66권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성경이다. 그래서 성경이 탄생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 책을 성경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무엇이 성경이고 무엇이 성경이 아닌가를 구분할 수 있는 어떤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처음부터 성경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성경인 것이고, 어떤 책은 처음부터 성경으로 주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성경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성경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는데서 발생한다. 어떤 초대교회 이단종파는 오직 누가복음과 바울서신만이 성경이고 구약이나 다른 신약성경은 성경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성경을 결정할 권한은 없지만, 무엇이 진짜 성경이고 무엇이 아닌가 구별할 기준을 요구하게 된다. 1546년에 천주교에서 성경에 추가시킨 7권의 책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성경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원래 기록된 책이 아니다. (2) 책 자체에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3)  유대교에서 성경으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 (4) 4세기 이후에야 교회 안에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5) 신약에서 권위가 있는 구약성경 말씀으로 인용된 적이 없다. 

3. 우리는 성경 외에 다른 책들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추가해서는 안 된다. 성경 66권 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우리 신앙과 생활에 대한 최고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오직 성경으로 (시 119:105)

2017.4.30 주일오후예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신앙강좌 1강

1. 중세의 가톨릭 교회가 타락했던 것은 성경을 몰랐기 때문이다. 성경을 떠나 그저 교회의 전통과 관습 속에서만 신앙생활을 할 때 교회는 타락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은 성경을 다시 발견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500년전에 출발한 것이지만, 사실은 그 이전 원래 진짜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도 잘못된 길로 걸어가고 있는 것은 성경을 떠났기 때문이다. 

2. 우리의 신앙생활이 과연 성경적인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분별해야 한다. 그 어느 것도 성경보다 높은 권위를 가지는 것이 없다. 

고치지 말고 바꿔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붙이는 나의 작은 생각

미국에 유학을 가서 처음 내가 산 차는 그야말로 골칫거리였다. 중고 자동차 시장에 가서 차를 고르려고 했을 때, 두 대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토요타 코롤라였고 또 하나는 다지 캐라반이었다. 모두 다 3년 된 차였고 가격도 같았다. 그렇다면 어떤 차를 사야 하겠는가? 자동차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알지 못하는 내가 선택한 것은 다지 캐라반이었다. 똑같은 가격인데 코롤라는 작은 소형차였고, 캐라반은 훨씬 큰 미니밴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동차가 하나씩 둘씩 고장 나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처음에는 그냥 고쳤다. 그런데 고치는 일이 잦아지면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과연 이 차를 계속 고치면서 타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지만 자동차가 고장이 날 때마다 나는 고치는 것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이번에 500불만 더 투자하면 다시 자동차를 잘 탈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오판이었다. 계속해서 고쳐야 하는 일들이 생기면서 처음 구입했던 차 가격보다 고치는 값이 더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나의 첫 자동차는 다음 해 눈이 오는 날 겨울에 길가에 있는 나무를 들이박고 장렬하게 사망하면서, 더 이상 고칠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고치지 말고 아예 차를 바꾸었더라면 더 나았을 텐데, 계속 고치느라 아까운 돈만 허비하고 만 것이다. 때로는 고치는 것보다 새것을 사는 것이 더 좋을 때가 있는 것이다. 고치는 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금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그래서 다양한 행사가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것도 바꾸고 저것도 바꾸자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참된 복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들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열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좀처럼 새롭게 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개혁이 개혁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완전히 바꾸어야 하는데, 바꾸지 않고 때우고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때움질과 반창고질은 개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바꾸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만 할 뿐일지도 모른다. 자꾸만 고장이 나는 자동차를 처분해버리고 새 차를 사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데, 새 차를 사지 못하게 조금씩 또 고치고 또 고치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전 모 노회에서 故 주기철 목사를 명예 노회장으로 세웠다는 뉴스를 보았다. 예전에 저질렀던 잘못들을 바로 잡고 참회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니, 거룩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들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노회가 어떤 노회인가 했더니, 성추행 목사를 면직하지 않고 오히려 두둔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노회가 아닌가? 나는 이러한 故 주기철 목사를 복권시키고 명예 노회장으로 세우는 일들이 오히려 참된 개혁을 거부하는 것을 돕는 이름뿐인 개혁으로 악용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들의 비석을 세운 것과 같은 행동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비판하신 바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마 23:29-31)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선지자들의 비석을 세우면서 자신들의 의를 나타내려고 했다. 우리는 과거의 악한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행동은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개혁의 진정성을 보이려면 선지자들의 비석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죄악들을 제거해야 한다(고전 5:11-13). 개혁의 진정성을 보이려면 세습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우롱하는 일들을 중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행하는 개혁의 제스처들은 자신들의 반개혁성을 숨기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받을 것이다.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답답하다. 도무지 이 시대에 개혁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 500년전 루터와 칼빈의 개혁도 엄격한 의미에서 개혁을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주교회는 그대로였다. 전혀 개혁되지 않았다. 루터와 칼빈이 한 것은 성경적인 교회를 세운 것뿐이었다.

우리는 종종 좀처럼 개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답답해하곤 한다. 교회를 망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곤 한다. 그래서 때로는 비성경적인 방법까지 동원해가면서 내가 생각하는 교회개혁을 이루려고 시도하기까지 한다. 나는 그러한 시도들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이룰 수 없는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악한 자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빈은 천주교와 싸워서 교황을 폐위시키고 천주교 조직을 없애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을 뿐이다. 여전히 저기에는 천주교가 버티고 있었지만, 참된 복음으로 된 교회를 만들었다. 그것이 종교개혁이었다. 나는 오늘날의 종교개혁도 똑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악마처럼 보이는 세력들과 비성경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싸우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나가면 될 것이다. 그게 종교개혁이다. 50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다.

우리는 썩어져 가는 교회에 미련을 둘 필요는 없다. 어차피 교회는 참된 성도들의 공동체이지, 건물도 아니고 어떤 단체도 아니다. 한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예루살렘 교회는 사라졌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도 사라졌다. 유럽의 교회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미국의 교회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던 평양의 교회도 사라졌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절대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고 또 새로운 그루터기들을 사용하여서 참된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시기 때문이다. 한 때 유명했던 교회가 사라지는 것을 애통해 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참된 복음이 없다면 그곳은 이미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새로운 사람들을 통해서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고 계신다.

2017.10.16

한국교회의 오적(五賊)

얼마 전 하이패밀리의 송길원 목사는 한국교회의 오적(五賊)으로 드럼, 대형 스크린, 주여 삼창 기도, 단체급식같은 성찬식, 그리고 청바지와 같은 싸구려 복식이라고 자신의 SNS에 올렸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고 급히 사과문을 다시 올렸다. 원래의 제목이 몰매 맞을 각오로 올리는 글이라면 그만큼 소신을 가지고 올린 것이었을 텐데 며칠 만에 자신의 소신을 꺾고(?) 사과문을 올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안쓰러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사건을 계기로 과연 한국 교회의 오적(五賊)이 정말 무엇인가에 대한 주장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그러한 주장들을 대하면서 우리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송길원 목사가 이러한 효과를 노렸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을 실없는 유머로 웃게 만들고 그러는 가운데 진리를 보게 하는 송길원 목사 특유의 어법이었을는지도 모른다고 애써 자위해본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교회의 진짜 오적(五賊)은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진짜 적은 참된 복음을 대신해버린 “번영신학”이다. 철저한 부패와 타락 때문에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우리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참된 복음의 메시지는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이 세상에서의 형통을 추구하는 번영신학이 한국교회를 병들게 만들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언약궤를 블레셋과의 전쟁에 가지고 가서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먹으려고 했던 이스라엘 민족처럼, 신앙을 이 세상에서의 축복을 얻는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린 번영신학이야말로 한국교회의 가장 큰 적이다.

이러한 번영신학이 활개를 치게 만든 것은 우리 속에 파고든 “미신적인 관점”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을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시켜야 한다는 종교개혁적 원리(sola scriptura)는 한국교회에서 실종된 지 오래고, 놀랍게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미신적인 관점이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에 깊이 파고들어 왔다. 놀랍게도 이런 미신적인 관점을 강화시킨 책임에서 한국 신학자들이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교회의 현재 모습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 신앙행태”를 많이 닮아 있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행태는 참된 복음을 잃어버리고 번영신학을 추구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놀랍게도 대다수의 한국교회의 강단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가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대신 그 자리에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가와 같은 강연들이 넘쳐나고 있는데, 그러한 해답으로 주어진 것이 율법주의적 신앙이다. 헌금을 많이 하거나, 종교적 열정에 힘쓰면, 최선을 다하면, 더 나아가 마음을 비우면 성공할 것이라는 가르침이 난무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성공할 수 있다면, 도대체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겠는가? 율법주의적 신앙은 우리의 철저한 무능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고 십자가에 못박혀야 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한국교회를 타락하게 만든 또 하나의 적은 “신앙도 성공의 척도로 바라보는 세속적 관점”이다.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로 서는 것(마 6:1)인데, 사탄은 신앙마저도 성공의 관점으로 재단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전도왕, 맨손으로 개척하여 대형교회를 일군 목사, 주일학교 학생들이 많은 교회, 이웃들에게 사랑을 많이 베푸는 교회 등등 신앙은 어느새 사람들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고, 그러한 평가에서 박수 받는 사람과 교회가 등장하게 되었다. 대형교회를 일구지 못하면, 또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신실한 경건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란 실패자들의 변명거리로만 치부되는 형편이다.

마지막으로 본질에 주목하지 못하고 형식에만 매어달리는 “형식주의”가 한국교회의 오적 가운데 하나이다. 찬양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마음속에서부터 올리는 찬양이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드럼이 문제라느니 복식이 문제라느니 하고 시비를 건다. 우리가 자라 온 문화는 신앙보다 더 강한 것이어서 나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인정할 수 없고, 그들의 신앙은 거짓으로 몰아가는 문화적 편견 속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신앙을 돕기 위해 마련된 여러 가지 문화들이 하나의 전통이 되어버리고, 알맹이는 빠진 채 그 전통이 마치 진리인양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신학적으로 훈련되지 못한 일반 신도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에게서 더욱 많이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옛날 바리새인들처럼 말이다.

오적(五賊)들로 가득 찬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을까? 누군가는 그래도 깨어 있는 양심을 가진 분들이 소망이라고 말한다. 강호에 고수들이 있듯이,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신실하게 사역하는 목회자들과 정말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무명의 성도들이 우리 한국교회의 소망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안타깝게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적(五賊)을 말하는 것은 사실 위험한 일이다. 오적(五賊)을 규명하는 순간 규명하는 사람은 그 한국교회를 망친 주범에서 살며시 빠지게 되는 것이고, 또한 그 글에 동조하는 사람도 그런 주범에서 혐의를 벗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그 주범의 혐의에서 벗어나게 되고, 실체 없는 오적(五賊)만을 세워놓고 돌을 던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로 한국교회를 망친 주범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이다. 그리고 내 글을 함께 읽고 동조하는 바로 우리가 주범이다. 한국교회를 망친 주범의 얼굴이 누군가 하고 우물을 들여다보면 바로 그 속에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우리는 오적(五賊)들이 활개 치도록 방치하고 있는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심지어 우리 자신이 오적(五賊)처럼 행동하고 있는 점에서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깨어 있는 양심을 가진 무명의 신실한 성도들도 실체가 없다.

한국교회의 소망이 있다면, 오직 예수님뿐이다. 더럽고 추한 모습을 가진 우리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 신앙마저도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바꾸어버리는 죄성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소망도 없다. 오늘도 주님의 은총을 기대할 뿐이다.

2017.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