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지 말고 바꿔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붙이는 나의 작은 생각

미국에 유학을 가서 처음 내가 산 차는 그야말로 골칫거리였다. 중고 자동차 시장에 가서 차를 고르려고 했을 때, 두 대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토요타 코롤라였고 또 하나는 다지 캐라반이었다. 모두 다 3년 된 차였고 가격도 같았다. 그렇다면 어떤 차를 사야 하겠는가? 자동차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알지 못하는 내가 선택한 것은 다지 캐라반이었다. 똑같은 가격인데 코롤라는 작은 소형차였고, 캐라반은 훨씬 큰 미니밴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동차가 하나씩 둘씩 고장 나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처음에는 그냥 고쳤다. 그런데 고치는 일이 잦아지면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과연 이 차를 계속 고치면서 타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지만 자동차가 고장이 날 때마다 나는 고치는 것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이번에 500불만 더 투자하면 다시 자동차를 잘 탈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오판이었다. 계속해서 고쳐야 하는 일들이 생기면서 처음 구입했던 차 가격보다 고치는 값이 더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나의 첫 자동차는 다음 해 눈이 오는 날 겨울에 길가에 있는 나무를 들이박고 장렬하게 사망하면서, 더 이상 고칠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고치지 말고 아예 차를 바꾸었더라면 더 나았을 텐데, 계속 고치느라 아까운 돈만 허비하고 만 것이다. 때로는 고치는 것보다 새것을 사는 것이 더 좋을 때가 있는 것이다. 고치는 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금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그래서 다양한 행사가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것도 바꾸고 저것도 바꾸자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참된 복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들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열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좀처럼 새롭게 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개혁이 개혁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완전히 바꾸어야 하는데, 바꾸지 않고 때우고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때움질과 반창고질은 개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바꾸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만 할 뿐일지도 모른다. 자꾸만 고장이 나는 자동차를 처분해버리고 새 차를 사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데, 새 차를 사지 못하게 조금씩 또 고치고 또 고치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전 모 노회에서 故 주기철 목사를 명예 노회장으로 세웠다는 뉴스를 보았다. 예전에 저질렀던 잘못들을 바로 잡고 참회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니, 거룩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들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노회가 어떤 노회인가 했더니, 성추행 목사를 면직하지 않고 오히려 두둔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노회가 아닌가? 나는 이러한 故 주기철 목사를 복권시키고 명예 노회장으로 세우는 일들이 오히려 참된 개혁을 거부하는 것을 돕는 이름뿐인 개혁으로 악용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들의 비석을 세운 것과 같은 행동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비판하신 바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마 23:29-31)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선지자들의 비석을 세우면서 자신들의 의를 나타내려고 했다. 우리는 과거의 악한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행동은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개혁의 진정성을 보이려면 선지자들의 비석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죄악들을 제거해야 한다(고전 5:11-13). 개혁의 진정성을 보이려면 세습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우롱하는 일들을 중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행하는 개혁의 제스처들은 자신들의 반개혁성을 숨기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받을 것이다.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답답하다. 도무지 이 시대에 개혁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 500년전 루터와 칼빈의 개혁도 엄격한 의미에서 개혁을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주교회는 그대로였다. 전혀 개혁되지 않았다. 루터와 칼빈이 한 것은 성경적인 교회를 세운 것뿐이었다.

우리는 종종 좀처럼 개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답답해하곤 한다. 교회를 망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곤 한다. 그래서 때로는 비성경적인 방법까지 동원해가면서 내가 생각하는 교회개혁을 이루려고 시도하기까지 한다. 나는 그러한 시도들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이룰 수 없는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악한 자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빈은 천주교와 싸워서 교황을 폐위시키고 천주교 조직을 없애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을 뿐이다. 여전히 저기에는 천주교가 버티고 있었지만, 참된 복음으로 된 교회를 만들었다. 그것이 종교개혁이었다. 나는 오늘날의 종교개혁도 똑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악마처럼 보이는 세력들과 비성경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싸우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나가면 될 것이다. 그게 종교개혁이다. 50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다.

우리는 썩어져 가는 교회에 미련을 둘 필요는 없다. 어차피 교회는 참된 성도들의 공동체이지, 건물도 아니고 어떤 단체도 아니다. 한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예루살렘 교회는 사라졌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도 사라졌다. 유럽의 교회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미국의 교회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던 평양의 교회도 사라졌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절대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고 또 새로운 그루터기들을 사용하여서 참된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시기 때문이다. 한 때 유명했던 교회가 사라지는 것을 애통해 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참된 복음이 없다면 그곳은 이미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새로운 사람들을 통해서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고 계신다.

2017.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