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와 축복 (삼상 3:15-21)

2017년 5월 10일 수요예배 설교

1. 엘리 제사장은 영적인 갈망이 없었다.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서 영적인 욕심이 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내게도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그렇게 갈망해야 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우리들은 엘리 제사장을 닮았다.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심은 있는데, 영적인 축복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신호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2.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을 사무엘을 통해서 듣게 되었는데도 너무나도 태연하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라고 말했다. 이건 신앙이 아니다. 정상적인 사람이 보일 반응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가 회개하고 나아가면 뜻을 돌이키사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아닌가? 하나님의 경고는 우리로 하여금 돌아오라는 애타는 신호이다. 우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늦었다고 할 그 때가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있는 때이니까 말이다.

3. 주님이 엘리 제사장 같지 않은 것이 감사하다. 하나님은 자식이 죽든 말든 너무나도 태연했던 엘리 제사장과 같지 않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라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이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소망이 있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삼상 3:1-14)

2017.5.3 수요예배 설교

1. 어린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 앞에서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삼상 3:1).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성경 전체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순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도 침묵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은 많은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다(마 13:58). 당시 엘리 제사장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던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우리는 은혜받는 것을 사모해야 한다. 

2.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에, 누가 불렀는지 몰라서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갔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돈이 우리의 문제의 해결책인 줄 알고 돈을 향해서 달려간다. 화내는 것이 옳은 것인 줄 알고 화를 낸다. 쾌락이 정답인 줄 알고 쾌락을 추구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에게로 가야 한다. 

3.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의 가정을 향하여 심판의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그의 가정에 마지막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아무런 통회 자복하는 모습이 없었다. 마지막 기회를 발로 차버린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에 회개해야 한다. 

신실한 제사장을 찾습니다 (삼상 2:27-36)

2017.4.26 수요예배 설교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 가정에 대하여 심판을 에언하셨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는 말씀처럼, 엘리 제사장의 가정이 하나님을 멸시했기 때문에 따라오는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먼저 하나님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의 가정에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가를 상기시켰다(삼상 27-28). 그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 자격도 없는 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 가정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악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를 지적하시며 심판을 예언하신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을 들은 엘리 제사장의 반응이다. 그런 심판의 예언을 들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해야 할 것이 아닌가? 엘리 제사장의 가정이 망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그냥 무덤덤했다. 이것이 안타깝다.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은 사실상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엎드린다면 예정하셨던 그 심판을 하나님께서 돌이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치 니느웨 백성들이 심판을 면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완벽하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 늘 실수하고 죄악을 저지르며 산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그게 우리의 한계이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죄인으로 서야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우리의 죄를 자복해야 한다. 그러면 살 것이다. 엘리 제사장 가정이 그랬던 것처럼,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메시지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위해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삼상 2:31)라고 하셨다. 이러한 예언은 사무엘에게서 성취된다. 제사장 가정이 타락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절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이라는 새로운 제사장을 세우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사무엘도 온전한 제사장일 수는 없었다. 그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완전한 제사장이 필요하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신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을 가진다.

회개와 갱신을 통해 삶의 전 영역을 새롭게 하는 교회

회개와 갱신을 통해 삶의 전 영역을 새롭게 하는 교회 2017.7.31

구원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구원이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는가 받지 못했는가를 질문하고,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구원에 대한 개념이다.

구원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로만 판단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우리가 어떤 입장권을 손에 넣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어느 날 몇 시에 열리는 축구 경기의 입장권을 손에 넣었다면, 더 이상 축구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서 더 해야 할 일이 없다. 축구 경기가 열리기 전에 어떤 삶을 살든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중에 입장권만 확인하고 우리를 그 경기장 안으로 넣어줄 것이니까 말이다. 천국에 가는 것도 즉 구원을 받는 것도 천국 입장권을 확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마지막 날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반쪽짜리 구원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원 개념을 가지게 될 경우, 이 세상에서의 삶이란 아무런 중요성을 가지지 못하게 되며,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율법폐기론 또는 율법무용론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초대교회 시절에 복음을 이런 식으로 오해한 경우가 있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전했을 때, 사람들은 그러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고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바울 사도의 대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였다.

구원은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는 입장권을 확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점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탕자의 비유이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그 결과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다. 나중에 탕자는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 탕자를 다시 맞이하여 예전의 아들의 신분으로 온전히 회복시켜 주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으니 다시 아버지의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게 삶을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 됨의 신분을 누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참된 믿음과 참된 구원을 단순히 예수님을 믿어 나중에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어 그 관계가 주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자애로움 때문이다. 아무리 탕자가 철저하게 타락했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사랑은 그 아들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인가 내놓을만한 장점이 있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의 축복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야 한다. 다시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청혼하여 결혼에 성공한 이후에는 이제 배우자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가? 마치 물고기를 잡은 후에는 더 이상 미끼를 던지지 않는 것처럼? 만일 그렇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결혼의 목적은 결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의 목적은 함께 같이 살아가면서 행복을 누리는데 있다.

교회 안에는 물론 참된 성도와 거짓 성도가 있다. 장인어른의 돈을 노리고 사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속여 결혼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성도들 중에는 거짓 성도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거짓 성도들의 삶에서는 참된 회개의 열매가 나타날 수 없다. 하지만 참된 성도의 삶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당연히 나타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전 영역에서 회개와 갱신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삶을 개혁해 나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다 된 줄 알거나, 선 줄로 안다면 넘어질 것이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서 잘못한 것이 있으면 회개해야 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017.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