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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변한 물 (출 7:14-25)

지금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예전에는 빚을 지고 있는 사람에게서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채무자의 집에 쳐들어가서 행패를 부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그렇게 하면 안 되죠. 빚쟁이들은 채무자의 집에 다짜고짜 들어가서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는데요. 집에 있는 집기들을 내 던지며 험악한 꼴을 보여주고, 욕을 해대면서 돈을 갚으라고 윽박지르는데, 그럴 때 제일 먼저 집에 쳐들어가서 내 던지는 게 있다고 합니다. 그게 뭘까요? 안 해봐서 모르시는군요. 그 집에 쳐들어가서 벽에 걸려 있는 결혼식 사진 액자를 떼어서, 방바닥에 내던져버린다고 합니다. 산산조각 나버린 그 액자를 보면서, 채무자들은 불안에 떠는 겁니다. 그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그 빚쟁이들 앞에서 혼비백산이 되는데요. 만일 돈을 갚지 않으면, 우리 가정이 저 깨어진 결혼식 액자처럼 완전히 박살 날 것만 같아서, 정말 어떻게든 돈을 갚겠다고 애원하게 된다고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요즘에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큰일 나죠. 법에 걸리는 겁니다. 채무자의 집에 함부로 찾아갈 수도 없는 것이 오늘날의 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어쩌면 하나님께서 애굽의 왕에게 바로 왕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빚을 받아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빚쟁이들이 그런 것처럼, 포악한 빚쟁이들이 들어가서 행패를 부리는 것처럼 하시지 않고, 말로서 요구하셨습니다. 모세를 보내어서 바로 왕에게 이야기를 한 거죠. 내 백성 이스라엘 민족을 내어 보내라고 말로 이야기를 했는데요. 안타깝게도 바로 왕은 그렇게 말을 했을 때,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들이 지금 편안하니까, 그래도 여유가 있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더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예전보다도 더 심하게 학대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렇게 불평하는 것은 살만하기 때문에 불평하기 하는 것이고, 더 심하게 괴롭혀야 아무 말도 못 하게 할 거라고 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더 심하게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이제 바로 왕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때 보여주신 것이 무엇이냐면, 고작 지팡이를 던져서 뱀을 만드는 기적을 보여주신 겁니다. 신기하기는 했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기적인 것이죠. “신기하네. 이런 일도 있구나.”라고 생각은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무섭다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런 기적은 아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바로 왕은 이 기적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요술사들도 애굽의 술사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약하게 나가실까? 차라리 빚쟁이들처럼 결혼사진을 방바닥에 내던지는 것과 같은 그런 강력한 한 방을 보여주신다고 했다고 하면, 그러면 바로 왕이 벌벌 떨면서 항복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 그렇게 궁금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포악한 하나님이어서, 그래서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억지로 굴복하게 하려고 한다면 할 수도 있었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포악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고,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강제로 여시는 것이 아니라, 문 밖에 서서 기다리시며, 우리가 마음의 문을 스스로 열고 나와서 주님을 받아주시기를 원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시지, 포악한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아주 좋은 방법으로 대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실 때 우리가 깨닫고 순종할 수 있다고 한다면, 복된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왕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순종한 것이 아니라 무시했고, 그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재앙을 애굽 땅에 내리기 시작했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애굽 땅에 총 10가지 재앙을 내려서, 바로 왕을 심판하고 애굽 왕을 심판한 이야기가 출애굽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첫 번째 재앙의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재앙은 어떤 재앙이었는가? 나일강의 물을 피로 바꾸어 버린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재앙으로 이렇게 나일강의 물을 피로 바꾼 이야기가 기록돼 있는데요. 왜 하나님께서는 나일강을 건드리셨을까요? 왜 나일강의 물을 피로 바꾸어 버리셨을까요? 왜냐하면 이 애굽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일강은 마치 생명의 젖줄기와 같은 그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일 강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인가요? 몇 번째로 긴 강인가요? 아무튼 나일강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나게 긴 길이인데요. 6,650km나 된다고 합니다. 정말 긴 강이죠.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몇 km죠? 325 킬로미터라고 하니까, 서울과 부산 사이의 거리에 스무 배가 넘는 길이의 강이 한 이 나일강인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한강이 긴 강입니까? 한강이 508km의 길이라고 하니까, 한강보다 13배 이상의 길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나일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 나일강이라고 하는 것은 물이 마를 일이 없는 강이 바로 나일강입니다. 특히 이 애굽 땅에 있는 나일강의 삼각주라고 불리는 곳은 너무나도 비옥한 토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저 아프리카 내륙에서부터 계속 비로 쓸려 내려와 가지고, 그 모든 영양분들이 이 나일강의 삼각주에 쌓이게 되고, 거기에 물이 공급이 되기 때문에, 이 세상 그 어떤 곳에 흉년이 들어도 나일강의 삼각주 애굽 지대만큼은 절대로 흉년이 있을래야 있을 수 없는, 그런 아주 비옥한 토지가 바로 애굽 땅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리 비가 오지 않고 가물어도 한강이 말라서 한강 바닥이 드러난 적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만경강도, 심지어 만경강도 밑바닥이 드러난 적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런데 이 애굽 땅에 있는 이 나일강이라고 하는 것도 항상 물이 흐른 곳이었기 때문에, 온 세상에 가뭄이 들고 온 세상이 흉년이 든다고 할지라도, 애굽은 항상 먹을 것이 넘쳐났던 곳이고, 그래서 이 애굽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일강은 마치 생명의 젖줄기와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이 나일강을 보면서 나일강을 신적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나일강에 있는 하피 신이라든가, 크눔 신, 오시리아스 신, 이런 신들을 섬기면서, 나일강의 신이 우리를 축복해주고, 나일강의 신이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걱정할 것이 없다고, 우리는 나일강의 신에 의지해서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그 나일강의 신들을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고, 그 신들 때문에 우리들은 강대국이라고 하는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나일강을 치셔서 나일강의 물이 피로 변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나일강을 의지하던, 애굽 사람들이 의지하던 그 나일강의 신들이 전부 가짜일 뿐만 아니라, 나일강의 신을 의지하는 것은 허망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 바로 나일강의 물을 피로 만든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여기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는 10가지 재앙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면, 그 재앙들이 그냥 일어난 재앙들이 아니라, 당시 애굽 사람들이 믿고 있던 다양한 신들이 있었는데요. 그 다양한 신들이 전부 허망한 것이고, 다 가짜라고 하는 것을 일일이 일일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거예요. 애굽 왕과 그 애굽 사람들은 그 신들을 믿고 있는 겁니다. 나일강의 신을 믿고 있었고, 가축의 신을 믿고 있었고, 그 여러 가지 신들을 다 믿고 있었는데, 그 여러 가지 신들 하나하나가 이것도 가짜고, 이것도 가짜고, 이것도 엉터리고, 순 엉터리다고 하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다 보여주신 것이 바로 10가지 재앙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세상에 참된 하나님은 참된 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나일강의 물을 피로 바꾸어 버렸는데요.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일 강에 있던 물고기들이 다 죽어버린 것이죠. 그들이 물고기를 잡아서 먹었는데, 그 물고기가 다 죽어버려서 먹을 수 없게 된 겁니다. 뿐만 아니라 악취가 났을 뿐만 아니라, 나일 강의 물을 마실 수도 없게 되어 버려서, 이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는 그런 상황 가운데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애굽의 요술사들도 이와 비슷한 기적을 행했습니다. 애굽 왕의 술사들도 와서 물로 피를 바꾸어 버리는 것이죠. 아마 컵을 하나 가지고 와서, 물그릇을 가지고 와서, 그 물그릇을 피로 바꾸어 버리는 요술을 보여주었다고 오늘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애굽의 술사들이 물을 피로 만들어 버렸을까요? 그것은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마 속임수, 마술을 사용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요. 아니면 어떤 사탄적인 권세를 이용해서, 사탄적인 힘을 사용해서 그렇게 했었을 가능성도 있었을까요. 몰라요.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물을 피로 바꾸는 것 같은 그런 요술을 모세만 보여준 것이 아니라, 애굽의 술사들도 보여주게 될 때 이 바로는 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오늘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좀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언제 나일강의 물이 언제 정상으로 돌아왔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다른 재앙을 보면 바로 왕이 모세에게 간청을 합니다. “모세야, 내가 이스라엘 민족을 보낼 테니까, 이 재앙 좀 끝나게 해 달라.”라고 그렇게 부탁을 해서, 그래서 모세가 그 재앙을 그치게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첫 번째 재앙에는 그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그냥 물을 피로 바꾸어 버렸고, 애굽의 술사들도 그런 똑같은 기적을 행했는데, 그냥 안 들어주었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이 나일강이 정상으로 돌아오게 됐을까요?

제 추측은, 이건 제 추측이고 성경에 기록된 것이 아니니까, 그냥 추측으로만 이해하시면 되겠는데요. 아마도 이 모세가 물을 피로 바꾼 것은 부분, 아마 보이는 그 부분의 피를 피로 바꾼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상류에서 내려온 물이 그 피를 내려가게 만들었고, 아마도 자연스럽게 시간이 지나면서 물이 들어와서, 상류의 물이 하류로 들어오면서 피는 사라져 버리고, 원래의 물로 바뀌게 되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25절 말씀에서, 칠일이 지났다고 하니까, 이레가 지났다고 하니까, 일주일 정도 지나는 과정 가운데, 그 피는 다 사라져 버리고 물로 바뀌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바뀌는 동안에 물을 구하지 못해서 그 애굽 사람들이 너무나도 허둥지둥거리고 도대체 물을 어디서 구해야 하면서 정말 고통스럽게 일주일간을 지냈을 것이라고 그렇게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드럽게 말씀하실 때, 그때 응답하고 돌아오는 것이 복되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포악한 빚쟁이들처럼, 결혼식 사진을 땅바닥에 내팽개쳐 버리면서 위협하는 그런 위협을 보여줄 때, 그때 돌아올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향해서 부드럽게 말씀해 주실 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응답하는 것이 그게 복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바로와 애굽 민족은 계속 거부하고 또 거부하고 또 거부하다가 받지 않아도 될 10가지 재앙을 다 경험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장자가 죽는 그런 고통까지 당하게 되었던 것인데요. 하나님의 심판이 없고, 부드럽게 말씀하실 때, 그때 무시할 게 아니라,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양심을 향해서 들려주시는 그 말씀을 애써 외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하실 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는 그런 결단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의 경고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늘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경고가 무엇이냐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판하실 때가 있을 것이고, 그 심판하실 때가 있으면 결국 우리들의 운명이 갈리게 된다는 것이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시는 교훈이 무엇이냐면, 아무리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어도, 아무리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았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마지막이 지옥이라고 한다면, 그 마지막이, 그 종착역이 지옥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사람이 복된 인생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 사람은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아무리 이 세상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지막 종착역이 천국이라고 한다면, 그 인생은 불쌍한 인생이 아니라, 참으로 복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 듯이, 물을 피로 만들 듯이, 지금 이 세상에는 정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대단한 능력들을 보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 같은 그런 능력들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인데요. 우리들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정말 대단한 일들입니다. 우주의 비행선을 쏘아 올리고, 사람의 얼굴을 완전히 바꾸어서 정말 최고의 미녀가 되도록 만들어주기도 하고, 성을 바꾸기도 하고,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나는 그런 일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런 일을 보면서, “아, 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없구나.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고, 사람이 마음먹으면 안 되는 일이 없구나.” 하면서 하나님이 없어도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이 세상을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강력한 한 방으로 최후의 심판으로 우리를 심판하시기 전에, 오늘 우리를 향해서 부드럽게 말씀해 주시고, 내게로 돌아오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실 때, 지금 우리가 죄악의 길로 나가도, 전혀 심판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이 세상에서도, 주님 앞에 온전히 믿음으로 반응하는 그런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믿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들을 믿었던 것이죠. 나일강을 믿었고, 나일강의 신을 믿었습니다. 그 나일강은 애굽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나일강은 이 애굽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었고, 그래서 그것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치시니까, 생명을 주던 강이 악취를 풍기게 되었고, 생명을 주던 강이 죽음의 강이 되었고, 더 이상 살 수 없는 그런 상태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이 사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 결국은 썩어질 것, 결국은 멸망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의 소망이 없는 것들에게 의지하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의지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얼마든지 우리를 배신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우리들을 배신하는 것이죠. 그래서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고, 비트코인 등, 여러 가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들을 의지하며 따라가다가,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는데요. 우리가 의지할 것은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니고, 이 세상의 권력이 아니고,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이 우리가 의지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시편 146편 3절에서부터 5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고, 이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이 세상에 물질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을 사귈 필요도 없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돈을 의지하지 말고 물질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는 돈을 벌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돈을 벌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가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도 아닙니다.

아니죠. 정반대의 말씀이죠. 성경에 보면 우리가 수고하며 땀을 흘려야만 하는 것이고, 일할 수 있을 때 일해야 되는 것이고, 저축할 수 있을 때 저축해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고, 지혜로운 일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우리가 극단적으로 해주시는 말씀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 성경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오해해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돈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 세상에 물질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보면서,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과는 다 단절하고 살아야 되고, 사람의 도움을 거부해야 되는 것, 물질을 갖다 내버려야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사람을 우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고, 돈을 우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 위치에 있어야 되는데, 제 위치에 있지 아니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위치로 가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언제 돈이 우상이 되는 겁니까? 언제 물질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수고하고 땀을 땀을 흘려서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언제 잘못되는 것인가?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서 우리가 정당한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기를 친다든가 도둑질을 한다거나 강도짓을 한 다는 등,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방법으로 물질을 취득하려고 한다고 하면, 그것은 돈이 우상이 된 것이고, 돈을 부당하게 의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못된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돈이 너무나도 우상처럼 보이기에, 돈을 의지하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들인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벌어놓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벌은 것이고, 내가 내 힘과 능력으로 한 것이라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이 가지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것 역시 돈이 우상이 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않는다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파수군에 깨어 있음이 헛된 것인데, 마치 자신의 능력 인 냥,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질을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의지하게 되면 청지기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돈이 나를 살리는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나를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 더 이상 청지기적인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는 겁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셨을 때, 그 만나를 거둡니다. 만나를 거둘 때, 그 만나가 나를 먹여 살린다고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만나를 많이 거두어야 되는 겁니다. 왜? 만나가 나를 살리는 것이, 그 만나가, 떡이 나를 살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떡을 많이 거두어 두어야 그래야 안심할 수 있고, 그래야 먹고살 수 있고 그래야 행복해질 수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많이 거두지 말고, 하루치 분량만 거두라라고 말씀해 주시는데요. 그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만나를 서로 나누어 먹으라고 하는 겁니다. 같이 나누어 먹어라. 만일 만나가 나를 살리는 것이라고, 만나를 우상화하게 된다고 하면, 우리가 만나를 의지하게 된다고 한다면, 나눠 먹을 수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믿음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산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내게 물질을 주셨다고 한다면, 그 물질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살린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살기 때문에 그 청지기적인 역할을 감당하면서 나눌 수 있는 그런 담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인데요. 돈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는 것이죠.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그렇게 외세를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러니까 이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냥 나 혼자 살라는 이야기입니까?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말고 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아니에요.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어서, 서로 돕고 도움을 받으며,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며,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 사람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까? 재물을 의지하는 것과 역시 마찬가지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한 채, 하나님이 아닌 사람만을 의지하는 것이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은 채, 우리의 교만함이 보인다든가, 사람들에게만 너무 의존하는 모습이 된다고 한다면, 사람이 우상이 되어 버린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때로는 이 세상의 것들이 아무것도 없을 때가 있어요. 정말 괴로울 때가 있어요.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담대하게 믿음으로 일어설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의 나일강이 아니라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니라 이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먹여 살리시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이 피로 변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리는 기적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기적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에 표현이었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렇게 반응하시고, 이렇게 물을 피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이런 기적을 보여주시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은 더 좋은 기적을 보여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죽음의 기적이 아니라, 생명의 기적을 보여주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약에 보면 이와 비슷한 기적이 하나 더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또 하나의 기적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혼인잔치에서 있었던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이었습니다. 똑같이 빨갛게 변한 것인데요. 예수님께서는 그 원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빨갛게 변한 것은 똑같지만, 전혀 성격이 다른 기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런 소망이 없을 때 보여준 주님의 기적이었고, 주님 앞에 나와 간청할 때 주님 앞에 나올 때 주님께서 보여주신 소망의 기적이었습니다.

당시 혼인집 주인은 정말 난감했을 겁니다. 결혼식을 열어놓고 손님들을 청했는데, 손님들을 기쁘게 만들어줄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정말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망했구나. 이제는 우리들에게 소망이 없구나. 생각되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 앞에 나온 그들에게 물로 포도주를 바꾸어 주셔서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는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나일강의 물을 피로 바꾸어 버린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한다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의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버린 것은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요 소망의 메시지였는 줄로 믿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이신데 다르게 반응하신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구냐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다른 반응으로 나타나시는 것인데요.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반응으로,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엎드리며 나가는 자들에게는 은혜의 손길로 반응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왕이면 은혜의 손길을 기대하며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포악한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우리 위해서 내어주시는 하나님이세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아무것도 아끼지 아니하신 그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가고 기도하며 나가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며 나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는 귀하고 복된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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