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망을 가지고 부서진 집을 보다 (8/21/2024)
- 저혈당 대소동 (4/8/2024)
- 사진 잘 찍는 법 (3/4/2024)
- 증오와 열광 (3/1/2024)
- 2024 전교인 성경일독에 초대합니다. (1/1/2024)
- 믿음의 분량과 은사 (11/8/2023)
- 성급한 판단 (7/30/2023)
- 우리는 어떻게 전도할 수 있을까? (7/28/2023)
- 블루베리 소동 (7/14/2023)
- 세속국가 속의 크리스천 (6/14/2023)
- 사랑하는 김용기 집사님을 추모하면서 (5/8/2023)
- 십일조에 대한 단상 (5/4/2023)
- 가짜목사 전성시대 (4/25/2023)
- 선거를 앞두고 (2/20/2023)
- 사랑의 여섯(6) 가지 언어 (1/17/2023)
- 사랑을 강요하는 아이 (1/16/2023)
- 한해를 결산하면서 실망스러울 때 (12/16/2022)
- 억지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11/8/2022)
-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 (11/5/2022)
- 고난을 당할 때 보여야 할 참된 F반응 (10/27/2022)
- 우리의 몸이 다시 살 것을 믿는다면 (10/21/2022)
- 부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 (10/13/2022)
- 아무나 교회로 불러들여도 될까? (10/11/2022)
- 영적 MRI로 검사해 보았는가? (10/7/2022)
-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사는 법 (9/30/2022)
- 벤치만 지킨 이강인 선수 (9/28/2022)
- 거룩한 삶을 향한 갈망 (9/20/2022)
- 다윗과 같은 장수 어디 없소? (9/16/2022)
- 헌금을 위해 도둑질을? (9/14/2022)
- 기쁨은 찬양으로 완성된다 (9/7/2022)
- 율법이라는 거울 (9/3/2022)
- 4경기 째 골이 없는 손흥민 선수를 보면서 (8/29/2022)
- 화평과 거룩이라는 두 마리 토끼 (8/25/2022)
-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8/16/2022)
- 수고의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 (8/5/2022)
- 의와 불의의 싸움 (8/5/2022)
-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일까? (7/27/2022)
- 잘못을 보았다면 (7/22/2022)
- 욕구를 없애야 할까? (7/10/2022)
- 피로 변한 나일 강을 보면서 (7/8/2022)
- 신앙 에세이 – 세상의 능력 (7/6/2022)
-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7/1/2022)
- 하나님이 계신 증거가 안 보인다구요? (6/25/2022)
-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6/16/2022)
-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 (6/11/2022)
- 억울한 게 아니다 (6/3/2022)
- 가볍지 않은 죄 (5/28/2022)
- 비교에서 나오는 감사와 절망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5/20/2022)
- 건강한 사람에게서 건강한 반응이 나타난다 (5/12/2022)
- 믿음에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5/11/2022)
- 입다의 서원 (5/10/2022)
- 누가 우리의 적인가? (5/9/2022)
-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가? (5/9/2022)
- 어떤 고통은 징계일 수 있다 (5/9/2022)
-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고? (5/7/2022)
- 자녀들에게 어떻게 신앙을 가르칠까? (5/5/2022)
- 마라나타와 순교적 신앙 (5/4/2022)
- 모로 가도 한양만 가면 될까? (5/3/2022)
- 우리에게 주어진 교사의 사명 (5/2/2022)
- 은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노력 (5/1/2022)
- 믿음의 열매를 맺으려면 (5/1/2022)
- 어디에 인생을 걸 것인가? (5/1/2022)
- 침묵하지 말아야 할 이유 (5/1/2022)
- 왜 우리는 선을 행하는 것에 실패하는가? (5/1/2022)
- 바리새주의의 위험을 피해야 (5/1/2022)
- 주 안에서는 모두가 영적인 가족 (5/1/2022)
- 삶이 꼬여도 절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 (5/1/2022)
- 왜 우리는 늘 남을 비방할까? (5/1/2022)
-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실까? (5/1/2022)
- 초라했던 왕, 왕 같았던 신하 (4/29/2022)
- 왜 날 사랑하나? (4/25/2022)
- 누군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면 그냥 믿어주어야 하는가? (4/22/2022)
- 죽기 전에 회개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4/15/2022)
-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용서를? (4/7/2022)
- 믿음으로 살아가는 데, 왜 여전히 고통이 있는가? (3/28/2022)
- 신앙 에세이 – 오늘의 작은 변화 (3/23/2022)
-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3/22/2022)
- 믿음은 마음의 문 (3/18/2022)
- 탁월함보다 신실함 [국민일보] 2022.3.17 (3/17/2022)
- 시오니즘(Zionism)의 오류 (3/12/2022)
- 정치가 우상이 될 때 (3/8/2022)
- 103주년 삼일절 기념예배 및 기념식 (3/1/2022)
- 돈인가? 하나님인가? 선택의 길에서 (2/9/2022)
- 정치가 우상이 될 때 (1/27/2022)
- 백신을 맞았는데도 왜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1/26/2022)
- 2021년 송구영신 예배 참회의 기도 (12/31/2021)
- 현대판 사도바울을 세워내는교회가 됩시다 (12/20/2021)
- 지난 1년간 난 8kg을 뺐다 (12/17/2021)
- 도대체 언제 코로나가 끝날까? (12/3/2021)
- 또 다른 넷플릭스 K-드라마 <지옥>(스포 주의) (11/23/2021)
- 직분자로 임직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11/20/2021)
- 참된 교회와 가짜 교회 (10/30/2021)
- 성찬식에 대하여 (10/14/2021)
- 베데스다 게임 (10/6/2021)
- WEA 관련 106회 총회 결과 보고 (9/14/2021)
- WEA관련 긴급호소문 (9/10/2021)
- D.P. 주인공 안준호 (9/8/2021)
- 스타벅스를 끊어야 할까요? (8/18/2021)
- 자녀는 언제 어떻게 우리의 우상으로 변하는가? (5/9/2021)
-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5/6/2021)
- 직분자 선출과 관련한 질문과 대답 (4/15/2021)
- 우리는 왜 망하는가? (4/2/2021)
- 사명을 배신한 빌라도의 엉터리 재판 (3/31/2021)
- 십자가의 길, 십자군의 길 (3/23/2021)
- 롯을 구한 아브라함처럼 (3/14/2021)
- 눈을 들어 바라 보라 (3/7/2021)
- 부자에게 화가 있다고? (2/28/2021)
- 박수가 아닌 박해를 받을 때 (2/21/2021)
- 악한 방법으로 의를 이룰 수는 없다 (2/14/2021)
-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 (2/7/2021)
- 흙이 묻은 피카소의 그림 (2/2/2021)
- 헛된 갈망 (1/24/2021)
- 드디어 트럼프가 사라졌다. 새 시대가 올 것인가? (1/21/2021)
- 온유하면 다 빼앗기게 되지 않을까? (1/17/2021)
- 재미도 없고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기독교 영화 (1/14/2021)
- 울어야 할까? 기뻐해야 할까? (1/10/2021)
- 코로나19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1/7/2021)
-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는? (1/3/2021)
-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이유 (1/1/2021)
- 참회의 기도 (12/29/2020)
- 방역과 교회 폐쇄법 (12/22/2020)
- <그래, 이런 사랑이야> 공개 (12/8/2020)
- 감사의 이유 (11/12/2020)
- 믿음의 사람이 주는 착각 (10/21/2020)
-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10/18/2020)
- 당신의 암을 쓰레기 취급하지 마십시오 (10/7/2020)
- 홈피를 리뉴얼했습니다 (10/2/2020)
- 성경의 문자로 성경의 정신을 죽이지 말아야 (9/23/2020)
- 코로나 상황에서 설립 7주년을 맞이하면서 (9/3/2020)
- 음모론 앞에서 (8/19/2020)
- 올드 노멀과 뉴 노멀 (7/29/2020)
- 그 식당이 잘 되는 이유 (6/9/2020)
- 약탈로 변한 시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6/2/2020)
- 이열치열, 이성치성 (6/1/2020)
- 사람이 어떻게 인분을 먹게 되었을까? (5/10/2020)
- 마스크 한장이 마음을 적시는 가랑비가 되었을까? (3/23/2020)
- 크리틱(critic) 바이러스와 컴플레이닝(complaining) 바이러스 (3/16/2020)
-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정부의 노력과 교회의 노력 (3/15/2020)
- 작은 파도인가 쓰나미인가? (2/25/2020)
- 경우에 합당하지 않은 말씀 (1/9/2020)
-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는 2% 부족하다 (1/3/2020)
- 아버지를 다시 생각한다. 영화 백두산을 보고 (12/31/2019)
- “하나님, 꼼짝마. 까불면 나한테 죽어”의 원조 (12/25/2019)
- 율법주의적 신앙관점의 문제점 (12/9/2019)
- 새해 표어 만들기 (12/6/2019)
-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익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 (10/15/2019)
- 십자가의 승리와 십자군의 실패 (10/8/2019)
- 로마 카톨릭을 이교(異敎, other religion)로 지정해야 하는가? (9/2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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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000명이 상징적인 숫자인가요? 실제 숫자인가요? (11/1/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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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류에서 살아남기 (행 27:27-44) (6/23/2017)
- 목회자들의 정치 참여- 내가 어느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이유 (5/19/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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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랜드 피아노가 들어왔다 (5/4/2017)
- 회개와 갱신을 통해 삶의 전 영역을 새롭게 하는 교회 – 교회 모토 08 (4/16/2017)
- 예수님의 말 바꾸기 (4/11/2017)
- 교회와 가정과 직장과 쉼의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 – 교회 모토 07 (4/9/2017)
- 가장 슬펐던 부활절 (4/8/2017)
- 전주를 기점으로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교회 – 교회 모토 06 (4/2/2017)
- 부활절 계란이 문제라구요? (3/15/2017)
- 비단물결 같은 목소리로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교회 (빌 2:1-4) – 교회 모토 05 (3/12/2017)
- 수용과 변혁을 추구하는 교회 (마 15:1-11) – 교회 모토 04 (3/5/2017)
- 예수 복음 중심의 교회 (요 5:39-40) – 교회 모토 03 (2/26/2017)
- 주님의 사랑으로 선한 영향을 끼치는 교회 = 교회 모토 02 (2/12/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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