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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학 강좌 제6강 – 문화적 표현, 과장법, 과장법적 대조, 제유법

들어가는 말

오늘은 문화적 표현과 하나님의 영원한 규례를 구분해야 된다는 것, 사실적인 묘사와 과장법적인 표현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 진짜 부정과 과장법적 대조 구문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 일부로 전체를 나타내는 제유법적 표현을 구분해야 된다고 하는 이 네 가지 주제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3. 그 시대의 독특한 상황 속에서 주어진 문화적인 표현을 구분해야

먼저 문화적인 표현과 하나님의 영원한 규례를 구분해야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성경은 언제 쓰인 것이죠?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에, 가장 최근에 쓰인 것이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쓰인 책이다 이 말이에요. 2천 년은 약간 안 되겠지만, 그렇게 먼 아주 아주 옛날에 쓰인 그 성경책인데, 그때 이 성경책이 어떻게 주어졌냐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고, 어떻게 쓰였습니까? 성경 저자들이 있었어요. 누가 있습니까? 마테 마가 누가 요한이라고 하는 성경 저자가 있고, 바울이라고 하는 성경 저자가 있고, 베드로라고 하는 성경 저자가 있고, 또 구약 성경에 여러 성경 저자들이 있는데, 그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쓴 겁니다.

성경을 썼는데, 그 성경을 쓸 때 그 사람들이 성경 저자들이 누구에게 썼을까요? 공중에 대고 썼나요? 그 진공 상태에 대해서 썼나요? 그게 아니라, 그 당시에 살고 있던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 시대 사람들이 이해하기 좋은 방식으로 글을 썼다 이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시대에 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방식으로 성경을 썼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요. 요즘 젊은 우리 세대가 말하는 걸 보면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들어요. 대한민국에서 같이 살고 있는데, 왜 우리는 젊은 사람들의 말을 못 알아들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권 밖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문화, 그들의 여러 가지 생활습관 속에서, 그들 사이에 공유하고 있는 그런 약속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의 표현 방식으로 대화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사용하는, 젊은 아이들이 사용하는 그 용어를 우리는 도무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우리는 그 문화권 밖에 있으니까요. 요즘 텔레비전 뉴스를 들으면 뉴스가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안 돼요. 온갖 이상한 용어들이 자꾸 튀어나옵니다. ESG, RE100, 등등 희한한 용어들이 막 나오는데, 그걸 알아듣냐면, 못 알아듣는 겁니다. 왜 못 알아듣죠? 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고, 거기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못 알아듣는 겁니다.

따라서 이 언어라고 하는 것은 서로 약속된 그런 규약 속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고 의사가 전달이 되는 거거든요. 제가 중학교 다니고 그럴 때 보면, 여학생들이 대화를 하는데, 한국말로 대화를 안 해요. 뭐 하면서 막 얘기를 하는데, 여학생들끼리 자기들은 막 통해, 남자들은 못 알아듣는 말들을 막 했었어요. 그런 거 기억나십니까? 그런 거 하신 적 있어요? 무슨 말을 이상하게 하더라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어떤 규칙으로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공유하는 것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속에는 무엇이 섞여 있는가?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마치 영원한 하나님의 계명 영원한 법칙이라고 오해하게 되면, 우리는 성경을 오해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에 만일 바울 사도가 21세기 대한민국에 지금 살고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우리들에게 성경을 쓴다고 한다면, 바울 사도는 뭐라고 우리들을 향해서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여러분, 예배드릴 때 마스크 쓰고 예배드리세요.” 그럴 겁니다. 왜 마스크 쓰고, 예배를 드리라고 말할까요? 코로나 상황이니까, 마스크 쓰고 예배를 드리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마스크 코로나 상황이 아닌 사람들은 그 말을 읽으면, 그 글을 읽으면 좀 오해가 되는 것이죠. “왜 마스크를 쓰고 예배를 드려야 되지? 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얘기인가? 아 맞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말할 사람이 아니고, 우리는 입을 닫아야 되는 사람들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우리는 침묵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될까요?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성경 속에 있는 문화적인 표현인가? 아니면 영원한 하나님의 계명인가를 우리가 반드시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14절의 말씀을 보면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우리 앞으로 입 맞추면서 인사 좀 할까요? 제가 뒤에서 나가시는 분들하고, 지금 이렇게 이렇게 인사하고 있는데, 여성분들한테는 이것도 안 하고 그냥 눈으로만 하고 있는데, 앞으로 우리 뽀뽀 좀 하면서 인사할까요? 아니요. 이것은 그 당시 중동 문화권에서는 서로 입맞춤을 하면서 인사하는 인사법이 있었던 것이죠. 아버지와 아들이 입 맞추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인사하는, 그런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주신 명령이다 이 말입니다. 그니까 입을 맞추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중요해요? 인사하는 게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이런 문화적인 그런 내용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고린도전서 11장 4절에서부터 6절 말씀에 보면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릎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그러니까 예배드릴 때 여성들은 베일을 쓰고, 망토를, 아무튼 이렇게 가리는 것, 이렇게 천을 가린 채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고린도 전서 1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미사 드릴 때, 여성들이 뭐 하죠? 하얀 천을 쓰죠. 그러니까 천주교가 성경적으로 더 옳은 건가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이단 집단에 가면, 거기서도 성경 말씀에 따라서, 여성들은 두 건을 쓰고서 예배를 드리잖아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교회가 훨씬 더 성경적으로 바른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어리석은 겁니다. 성경에 입맞춤을 하면서 문안하라고 했다고 해서, 입 맞추려고 하는 시도나 똑같은 거죠. 잘못된 거예요. 그걸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마스크 쓰고 예배를 드리라고 했다고 하면, 우리가 어느 상황에서든지, 다 마스크를 써야 되는 게 옳은 게 아닌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속에 과연 문화적인 개념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원한 규례이고 명령인지에 대해서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종종 우리의 입장에서 유리한 것은 채택하고, 우리의 입장에서 불리한 것은 채택하지 않는, 그런 나쁜 습성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어떤 존재냐? 우리는 객관적으로 진공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평무사하게 해석할 수 있는 그런,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마치 우리는 우주의 어느 한 지점에서 지렛대만 주면 내가 지구를 들어 옮길 수 있는, 그 지구 밖에서 어떤 지점에 서 있는, 공평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에요? 늘 편향적인 사람이라 이 말입니다. 우리는 늘 편파적이고, 내 입장에 서서 바라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본과 스페인전에서 골이 하나 났는데, 그게 골라인 밖에 있는 아웃(out)입니까? 인(in)입니까 어느 게 맞아요? 안 봤군요? 일본 사람들은 다 인(in)이라고 그래요. 왜? 자기편이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 한국 사람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유교적인 문화에 우리가 길들여져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온 그런 남존여비 사상에 길들여져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온 그러한 여러 가지 관습에 길들여져 있어서, 그래서 그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면서, 그래서 심지어 이런 문화적인 것도 이것도 하나님의 영원한 규례인 것인 양, 그렇게 주장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데, 그렇게 주장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무엇이 문화적인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인지를 세심하게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읽으면서 이것이 문화적인 표현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원한 규례인지 고민해보고 또 고민해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14. 과장법적 묘사를 구분해야

두 번째로, 두 번째 주제가 무엇이냐면 사실적인 묘사와 과장법적인 표현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부터 오늘 다룰 이 내용들은 사실은 성경 해석학에서 나오지만, 성경 해석에서만 나오는 내용이 아니라, 사실은 일반 해석학, 일반 논리, 국어 이런 데서 나오는 거예요. 사실은 우리가 성경 해석학을 배우기 이전에, 무엇을 먼저 배워야 되냐면은, 일반 우리들의 언어 법칙을 배워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법칙은 사실 성경 해석학에만 해당되는 법칙이 아니라, 일반 해석학 법칙이에요. 일반 해석학 법칙이고, 일반 논리고, 일반 우리들이 중고등학교만 제대로 잘 나오면 다 알 수 있는 내용들을 지금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를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 해석학은 어떤 특별한 해석학이 아니라, 우리가 정상적인 방식으로 글을 읽어나갈 능력만 된다고 하면, 성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일반 해석학의 원리가 사실은 성경 해석학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하는 것을 먼저 기억하시면 좋겠는데요. 오늘 두 번째 다룰 내용 사실적인 묘사와 과장법적인 표현을 구분해야 된다고 하는 이 원칙은 우리 성경 해석하기에도 필요하지만, 어디에도 필요해요? 우리들의 일반 생활에도 필요해요. 우리가 대화할 때 주로 대화를 어떤 식으로 합니까? 과장법을 많이 써요. 우리 여러분 과장법 쓰면서 얘기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많이 합니다. 특별히 누가 그런 과장법 많이 쓰죠? 남자들 보면, 과장법을 얼마나 많이 쓰는지 몰라요. 그거 과장해 가면서, 과장법을 많이 쓰는데, 그런 과장법적인 표현을 하면, “아, 정말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아, 저것은 그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서, 과장법적으로 표현하고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감안하고 들어야 되는 것이죠.

과장법적인 표현들이 성경에도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과장법적인 표현을 마치 사실적인 묘사로 오해하시면 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가장 흔히 나오는 과장법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모두”라고 하는 과장법입니다. “모두” “전부” 이런 과장법이죠. (한번 그 스크린을 한번 보여주세요.) “모든” “온” “다” (그런데 왜 “마”라고 적었을까?) “전부” 그런 것들, “다” 문자적으로 정말 하나도 빠짐이 없는 전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에요. 전부, 모두, 온, 다, 이게 문자적으로 하나도 빠짐이 없는 걸 가리키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 5절 말씀에 보면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단강 사방에서 그에게 나아와”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 사람들은 다 나온 건가요? 한 명도 빠짐없이? 할아버지든, 아기든, 갓난아기든, 아픈 사람이든, 걷지 못한 사람이든, 온 유대 사람들이 다 예수님에게 나왔습니까? 아니요. 안 나온 사람도 많아요.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왔다고 했으니까, 남아 있는 사람 한 명도 없이, 100퍼센트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로 왔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까? 아니요. 여기서 말하는 “온” 유다, “다”라고 하는 말은 많이 나왔다는 얘기예요. 예수님 앞으로 몰려든 사람이 “정말 많이 나왔다”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전부 나왔다”라고 표현하는 거죠. 문자적으로 “정말 전부 나왔다”라고 해석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다니셨대요. 갈릴리 지방을 “다” 다니셨대요. “모두” 다니셨대. 그러니까 갈릴리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방문 안 한 곳이 있어요? 없어요? 없다고 생각하시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곳을, 정말 많이 다니셨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안 간 곳도 있어요. 못 들린 곳도 계셔요 몸이 하난데 어떻게 다 들리겠어요? 다 못 들리는 겁니다. 하지만 가야 할 대부분의 지역은 다 갔고, 할 수만 있으면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온” 갈릴리에 “두루” 다녔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과장법적인 표현인 겁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 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시리아 전 지역 모든 지역에 다 퍼졌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시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안 들은 사람이 없이 다 100% 다 들은 거죠? 맞죠? 아닌 겁니다. 그냥 수리아라고 하는 그 지역의 많은 곳에 전파되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모든 병든 자가 왔다고 했는데, 병든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님 앞에 다 나왔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 믿으면 우리가 고난을 당할 것인데,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했으니까,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100퍼센트 다 미워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아니요. 그 가운데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환영해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위로해 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거라고 표현하는 거죠? 우리가 받을 그 미움이 아주 크고, 광범위하다고 하는 것, 모든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거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모든”이라고 하는 말을 쓴 겁니다.

역대하 28장 4절에 보면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양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이 이야기는 아하스 시대에 있었던 일들을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인데,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얘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푸른 나무만 보면, “아이고 저기도 푸른 나무 있네. 저기서 밑에서도 제사드려야 되겠다. 아이고 저기도 푸른 나무 있네.” 해가지고, 모든 푸른 나무를 다 찾아내서, 그 나무 밑으로 다 가서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아니요. 과장법적인 표현인 겁니다. 정말 많은 곳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모든”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마가복음 4장 30절 말씀에 보면,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34절이군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전부 비유입니까? 비유가 아닌 것도 있습니까? 비유가 아닌 것도 있어요. 어떤 것은 비유로 말씀하신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직설적으로 말씀하신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성경을 봐라. 마가복음 4장 34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는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그랬어.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전부 다 비유야. 그러니까 모든 말은 다 비유로 해석해야 돼. 사실처럼 그냥 객관적인 사실처럼 해석하면, 절대로 안 돼. 모두 다 다 비유로 해석해서, 그래서 비유로 이해해야 돼.”라고 주장하시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겁니다.

창세기 22장 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에 별과 같고, 바닷가에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아브라함의 후손이 얼마나 많아질 것인가를 설명하는 묘사인데요.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고,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많아진다는 얘기는 이스라엘 민족 그 후손들의 숫자를 다 세보면, 바닷가 모래알 숫자만큼 똑같아질 거라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아니요. 과장법일 뿐입니다. 바닷가의 모래라고 하는 것은 정말 많아서, 셀 수가 없이 정말 많은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도 그만큼 엄청나게 숫자가 늘어날 거라고 하는 것을 과장해서 하시는 말씀이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을 연구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과장법적인 묘사와 사실적인 묘사를 혼동해서, 과장법적인 묘사를 사실적인 것이라고 오해해서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어떤 경우냐면 “보편구원론”(universalism)이라고 하는 그런 주장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천국에 가는 겁니까? 일부만 천국에 가고, 일부는 지옥에 갑니까? 어떤 게 성경의 가르침이죠? 좀 얘기 좀 해줘요. 어떤 게 성경적인 가르침이죠? 모든 사람들이 다 천국에 가게 돼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가게 돼 있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죠. 그게 성경적인 가르침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근거로 해서, “지옥에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모두가 다 천국에 가게 되어 있다”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왜? 성경에 보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는 말이 있거든요(고전 15:22; 딛 2:11; cf. 딤전 2:4).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라고 하는, 받을 거라고 하는 말이 있으니까, “거봐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다고 한다면 “모든”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이지, 한 사람이라도 예외가 있으면, “모든”이 되겠느냐?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참 바보스러운 사람들이에요. 해석학의 기본 원칙도 모르고, 언어의 습관도 모르고, 법칙도 모르고, 정말 과장법을 사실적인 묘사로 오해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죠.

우리 남편이나 아내가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과장해서 얘기하는구나. 너무나도 잘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너무나도 기분이 좋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과장해서 말하는구나” 하고 좋게 봐주세요. “이런, 또 거짓말하고 있어!” 그렇게 반응할 게 아니고, 그만큼 정말 좋았단 얘기구나. 그만큼 정말 신났단 얘기구나. “정말 좋았다고 하는 그 감정을 과장법적으로 얘기하고 있구나”라고 제발 좀 받아들여 주세요. 그게 언어 법칙입니다. 언어 법칙도 잘 배워야 되는 것이고, 성경도 잘 이해해야 되는 것이죠.

15. 과장법적 대조 구문을 구분해야

다음은 진짜 부정과 과장법적 대조 구문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장법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과장법적 대조(hyperbolic contrast)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한번 보여주세요.) 과장법적 대조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참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수사학적으로는 부정하지만, 실제로 부정하는 것이 아닌 강조 기법을 가리켜서, 과장법적 대조 기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거 아니야” “그거 아니야”라고 부정하는데, 부정하지만, 사실은 부정하는, 실제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고 싶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수사학적으로 부정하는 수사학적인 방법인 거예요.

예를 들자면 출애굽기 16장 8절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이게 어떤 배경에서 나온 이야기냐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물이 없다고, 고기가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을 하는데, 누구를 향해서 원망을 해요? 모세와 아론, 지도자를 향해서 원망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원망을 듣고 있던 모세가 답답해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한 말이 바로 출애굽기 16장 8절의 말씀이에요. 너희들이 지금 원망하고 있는데, 그 원망이 무슨 원망이냐? “우리에게 하는 원망이 아니다.” 그래요. 우리에게 하는 원망이 아니라, 누구를 향해서 하는 원망이다? 하나님을 향해서 하는 원망이다. 함부로 입 놀리지 마라. “함부로 원망하지 말라” 하면서, 책망하는 거죠. 그런데 정말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하지 않았나요? 했어요! 모세와 아론을 향한 원망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인 겁니다.

그런데 모세가 무슨 얘기를 하냐면, 그 원망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무슨 얘기를 하냐면, 그 원망은 우리에 대한 원망이 아니야라고 얘기하는, 너희들이 원망하고 있는 거, 우리한테 원망한다고 원망하는 거지? 하지만 우리에 대한 원망이 절대로 아니야. 누구에 대한 원망이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야.”라고 말하면서, “조용해”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정말 우리에 대한 원망이 아닌가요? 그것을 부정하고 있는가요? 아니요! 우리에 대한 원망이긴 한데, 그 원망이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 원망의 심각성, 그 원망이 아주 잘못된 거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우리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고, 수사학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70인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발휘한 다음에, 예수님께 돌아와서 귀신이 주님의 이름으로 물러나갔다고 하는 사실을 보고하면서, 흥분하고 좋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해 주셨어요.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너희에게서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쫓겨나는 그런 엄청난 기적을 맛봐도, 어떻게 해야 돼요? 별거 아닌 것처럼, 그냥 우리 전주 사람들처럼, 좋아도 안 좋은 것처럼, 그렇게 하고 있어야 되나요? 아니요. 귀신이 쫓겨나가는 걸로 기뻐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를 강조하기 위하여, 수사학적으로 대비해서 기뻐하지 말라고 말한 것뿐입니다. 기뻐하면 잘못됐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진정으로 기뻐해야 될 것이 무엇이고, 우리의 영원한 기쁨이 어디에 있는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수사학적으로 부정하는 그런 표현일 뿐인 것이죠.

마태복음 10장 5절 6절도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5절 6절인가요? 예. “예수께서 이 열둘을 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경을 연구한다는 신약학자들에게 엄청난 고민을 던져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선교를 부정했네! 예수님은 생전에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반대했었네! 예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회복에 관심이 있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메시아로 오신 것이지, 이방인을 위한 메시아로 예수님이 오셨다고 생각하지 않았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대인들만을 위한 메시아로서 사역을 했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예수님의 정신에 따라서 교회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신을 확대하고 확대하다 보니까, 이러지 말고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이방인들에게도 전하자! 그래서 바울 사도에 의해서 선교가 만들어지고, 그리고 초대교회, 그런 사도들에 의해서 그렇게 선교가 만들어진 것이지, “원래 예수님은, 이방인 선교에 대해서 전혀 관심도 없었던 분이 예수님이야”라고 생각하는 신약학자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었어요. 제가 박사 논문 쓴 게 이 구절로 박사 논문을 썼어요. 그건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과장법적 대조의 표현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방인들을 배제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시급한 일이 유대인들, 잃어버린 그 본래의 백성들을 시급하게 구원해야 될 일이 아주 급하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로 갈 게 아니다. 그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본 것이죠.

지금 우리 일상 대화 중에서 어떻게 대화를 합니까? 지금 밥 먹으려고 식탁을 준비했어요. 그래서 “밥 먹자” “밥 먹자” 그러는데, 엄마가 막 뛰어와요. “지금 밥 먹을 때가 아니야. 밥 먹지 마. 밥 먹지 마.” 그래요. 왜?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아빠가 다쳤어. 빨리 가야지. 그 말은 무슨 얘기예요? 지금 해야 될 가장 시급한 일이 뭐라는 얘기예요? 지금 문제가 닥친 데를 먼저 해결해 보자고 하는 것의 시급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지금 이것을 신경 쓸 게 아니다. 우리 꼬마 아이가 “엄마, 사탕을 사줘. 엄마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그럴 때, 엄마 아빠가 뭐라고 그래요? “사탕 말고, 아이스크림 말고,” 뭐라고 그래요? “밥부터 먹어야지” 안 준다는 얘기입니까? 아니요.

시급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장법적으로 “그게 문제가 아니야.” 남편과 아내가 싸웁니다. 아내가 막 뭐라고 얘기하는데, 남편이 “내가 돈 많이 벌어다 줄게” “내가 이렇게 돈 많이 벌어가지고 행복하게 해 줄게” 그러면 아내가, 얘기하면, “돈이 중요한 거야? 돈이 뭐가 중요해?” 싸운단 말이에요. 돈이 안 중요하단 얘긴가요? 아니요! 돈보다도 훨씬 더 시급하고, 훨씬 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하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죠. 그게 우리의 실생활 가운데서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성경 말씀 가운데도 이렇게 과장법적인 대조가 많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백성이요. 할례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자동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저 이방인들이고, 저 나쁜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야지,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우리는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방인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문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얘기는 이방인 선교가 불가하다고 하는 그런 입장이 아닌 것인데, 놀랍게도 좀, 공부 좀 많이 하고 정신이 제대로 바뀐 사람들조차도, 과장법적 대조라고 하는 이런 표현법을 몰라서, 사실적인 묘사인 줄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마태복음 8장 11절 12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까 보여줬던 것에 나와 있을 것 같은데요.) 마태복음 8장 11절 12절 말씀 “또 너희에게 이르는 이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마지막 때가 되면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쫓겨날 거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유대인들은 이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말 원래 선택받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오히려 쫓겨나게 될 거라고 대조해서 강조해서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이죠.

시편 146편 3절에서부터 5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거 성경 전체에 아주 반복해서 나오는 것인데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이게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메시지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말고, 돈을 의지하지 말고,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라. 하나님만이 너의 구원자시니까, “하나님만 바라봐라”라고 하는 게, 성경 전체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오해하냐면, “거봐라.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했지, 사람을 의지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지금 어려움 가운데 있어서, 그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옆에서 어떤 사람이 찾아와 가지고 “참 안됐네요.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뭘 도와줄까요? 내가 도와주고 싶어요.” 그렇게 얘기하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는 그 사람이 대답하는 겁니다. 전 도움 필요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그랬지, 사람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도움 필요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만 의지할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에요.

종종 어떤 사람들은 약을 버려야, 병원에 가지 않아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의 마음은 이 세상의 것들에 의존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 표현은 과장법적인 대조의 표현으로서,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해야 될, 궁극적으로 의지해야 될, 그리고 영원히 우리를 변치 않고 사랑하실 분은 하나님이 한 분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의지하는 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이지, 우리 성도는 기도만 하기만 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알아서 먹여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잘못된 결론으로 내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16. 일부로 전체를 나타내는 제유법적인 표현을 구분해야

마지막으로 일부러 전체를 나타내는 제유법적인 표현을 구분해야 합니다. 제유법(synecdoche)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일부를 가지고서 전체를 나타내거나, 전체를 가지고 일부를, 일부를 나타내는 방법 등등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 없다”라고 하는 그 말에 “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빵만이 아니죠. 먹을 것, 아무튼 의식주 이런 것을 다 포함해서 대표로 빵을 이야기한 것뿐입니다.

군대에서 지휘관이 말합니다. “점심시간이다. 식판 들고 집합.” 그러면 식판 갖고 나가야 됩니까? 식판만 갖고 나가야 됩니까? 식판과 숟가락도 같이 갖고 나가야 됩니까? 예! 숟가락도 같이 갖고 나가야 돼요. 왜 제유법적인 표현인 거예요. 그게 그런데 군대에서는 제유법적인 표현을 할 때도 있고, 사실적인 표현을 할 때도 있고, 자꾸 왔다 갔다 하니까, 이때가 제유법적인 표현인지, 사실적인 표현인지 몰라서, 헷갈려하는 거예요.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 이게 지금 제유법적인 표현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 사실적인 표현으로 말하고 있는지를 구분해야 되는 겁니다.

아내가 남편을 향해서, “좀 그렇게 집안일에 관심 없게 하지 말고, 좀 나 좀 도와주고, 설거지 좀 해. 도와주고” 그랬더니, 설거지해주고, “설거지했어, 됐지?” 그러면 되나요? 안 되나요? 안된단 말이에요. 설거지를 해달라고 하는 것은 제유법적인 표현이에요. 관심을 가지고 집안일도 해주면서, 우리 서로 사랑하면서 살자고 하는, 그런 제유법적인 표현인데, 일부러 제유법적인 표현을 해도 사실적인 표현으로 알아듣는 척하는, 그런 무심만 남편들이 많죠. 저를 포함해서.

마태복음 6장 11절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양식을 위해서는 기도할 수 있겠지만, 학교를 위해서는 기도하는 건 안 되는 거죠? 직장을 위해서는 기도할 수 없는 거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으니까? 아니죠. 양식이라고 하는 것도 제유법적인 표현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것이고,

누가복음 10장 4절에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으니까, 전대하고 배낭 하고 신발만 안 가져가면 되고, 휴대폰이나 노트북은 가져가도 괜찮겠죠? 아닌 겁니다. 제유법적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제유법적인 표현들이 많아요. 그래서 그 표현을 볼 때, 법률가들은 그 제유법적인 표현을 보고서 빠져나갈 궁리들을 합니다. 법에 “a b c 등”이 있으면 다 포함된 거지만, “등”자가 없으면, abc만 포함한다. 그러면서 막 법률가라고, 막 서로 그거 가지고 싸워요. 법률가가 안 되길 다행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 말씀을 그런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겠고, 제유법적인 표현으로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또 무엇이냐면 “결의법”입니다. 결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데, 세부적인 경우를 예로 들어서 규정하는 법이 결의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출애굽기 23장 4절에서부터 5절 말씀에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려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자, 길을 가는데 이웃집 고양이나 개가 길을 잃고 있습니다. 고양이나 개는 안 돌려줘도 되죠? 아니, 여기 소나 나귀만 규정해 놨잖아요? 이게 이게 결의법이라고 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의 예를 들은 거예요. 소나 나귀나 길 잃은 것을 보면, 돌려줘라. 하나의 예를 들은 것이죠. 그 얘기는 뭡니까 그와 비슷한 상황에도 역시 적용이 되는 거예요. 개가 길 잃고 있든, 혹은 자전거가 나와 있든, 뭐가 있든, 성경에서 일일이 다 규정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래도 이것이 전체를 나타낼 수가 있겠구나. “결의법적인 표현으로 이렇게 돼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성경을 해석해야 되지, 안타깝게도 성경을 문자대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성경을 곡해하면서, 성경의 정신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정말 성경을 주신 이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발견해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발견하지 않고 자꾸만 법률가들처럼 자구를 따지는 겁니다. 성경에 보니까, “이건 언급이 돼 있더라. 이건 언급이 안 돼 있더라” 하면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만약에 그럴 마음이었으면, 다 얘기해 주시면, 내가 들었을 텐데, 얘기 안 해서, 내가 안 들어요” 하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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