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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모세 (민 20:10-13)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서부터 해방되어 가나안 땅을 향해서 행진할 때,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했다. 광야의 길을 걸어갔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40년 내내 걸은 것은 아닐 테고요. 아마 어느 지역에서는 몇 주를, 아마 어떤 곳에서는 몇 달을 거주하기도 하고, 어쩌면 몇 년 동안 한 곳에 머물기도 하면서, 그 과정 가운데 그 가난을 향해서 갔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 광야에서 생활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이 있었다고 한다면, 먹을 것을 구하고, 마실 것을 구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을 것입니다. 물론 사막과 같은 곳만이 아니라, 그냥 황량한 들판과 같은 곳을 지나갔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 황량한 들판 가운데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 또 마실 물을 구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인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날마다 하늘에서부터 만나가 내리게 하셔서 먹을 수 있었고, 또한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와, 그래서 물을 마실 수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광야 생활을 하면서,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구나.”라고 하는 것을 전적으로 깨닫는 기간이 그 광야 40년의 기간이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살아가야 했던 그런 기간이었기 때문에, 이 광야 40년의 기간은 그야말로 하나님께 순종을 배우는 기간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빵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빵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산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살 길이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복종하는 것이 크게 복된 길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기간이었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을 배우는 기간이 광야 40년의 기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향해서 걸어가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그 목적이 천성을 향해서 가는 것인데, 그 천성을 향해서 가는 우리들의 이 지금 이 시기 삶이라고 하는 게,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을 하던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살았던 그 이야기를 기록한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 지혜, 이 세상에서 배워야 할 영적인 교훈들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민수기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이 민수기의 말씀 가운데는 모세가 실패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민수기 20장 전체를 다 읽어보았으면 좋겠지만, 짧은 부분만 우리가 함께 읽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고, 모세를 향해서 불평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반석에서부터 물을 내어서 그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시게 하라고 하는 그런 명령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석에서부터 물을 내는 기적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이 물을 마시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인데요. 그런데 놀랍게 이 일이 끝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는 나를 믿지 아니한 고로, 그러므로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 너는 여기까지 데리고 나왔지만, 그러나 너는 정작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들은 이야기가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모세는 이런 말을 들어야만 했었을까요? 도대체 모세가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이 모세 지금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 모세를 향해서 자격 미달이라고 하는 그런 평가를 내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이 민수기 20장의 말씀을 읽다 보면,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함께 곰곰이 묵상하면서, 도대체 어디서 문제가 되었고, 어디서 잘못이 되었는가? 도대체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영적인 교훈이 무엇인가? 이 아침에 함께 같이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민수기 20장 8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해주신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

없다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모으고, 그 백성들 앞에서 반석을 향해서 명령해서, 그 반석으로부터 물이 나오게 만들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석에서 물을 냈는데요. 어떻게 물을 냈는가? 민수기 20장 10절에서부터 1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모세는 회중들을 반석 앞으로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소리친 다음에, 반석을 두 번 내리치자 그때 반석에서부터 엄청난 물이 솟아올라 나오게 되어서,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온 민족이 그 물을 마시게 되었고, 짐승들도 다 마시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 일을 했는데, 갑작스럽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민수기 20장 12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인데요. 첫 번째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했다.”라고 모세와 아론의 잘못을 지적하신 다음에,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당혹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낸 그 모세와 아론이 정작 자신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그런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어쩌면 충격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이스라엘을 성지 순례하는 가운데, 요르단 지역에 넘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요. 요르단 지역에서 여행을 하는 가운데 모세가 죽었다고 하는 느보산 위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그 느보산 위에 올라갔더니, 그 느보산 위에서 저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고 하는데,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느보산에서 바라보면 멀리, 날씨가 좋으면 제가 갔을 때는 날씨가

아예 나쁘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맑은 날도 아닌데, 1년에 몇 번 볼 수 있대요. 아무튼 날씨가 아주 맑으면, 느보산 꼭대기 위해서 저 먼 곳을 바라보면, 사해 바다가 보이고 그 바다 건너편으로 가나안 땅이 보이는 그 장소에서 모세가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산 위에 올라가서 제가 생각해 봤어요. 이 느보산 위에 서 있을 때 모세의 마음이 어땠을까? 모세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회한이 가득 찼을까? 아니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이 그의 마음 가운데 있었을까? 참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순례 여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모세와 아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바로 그 앞에 가나안 땅이 있는데, 조금만 더 가면 그 가나안 땅을 밟을 수 있는데,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 못한 채, 느보산 위에서 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죽었을 거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고 하면, 어쩌면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쉬웠을 것이고, 그런데 그렇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건이 무엇이었는가? 이 므리바에서 반석에서 물을 내는 과정 가운데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이유로 그렇게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입니다.

도대체 모세의 잘못이 무엇이었을까요? 도대체,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내라고 했으니까 물을 낸 것인데, 도대체 모세의 잘못이 무엇이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 모세의 잘못을 분석하려고 여러 가지 대답을 해 놓았는데요.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과 그리고 모세가 실제로 했던 것 사이의 차이점들을 찾아보면서, 그래서 모세의 잘못이 이것이었을 거라고 대답을 내놓습니다. 한 가지 대답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는 바위에게 명령하라고 했는데, 모세는 바위를 내리쳤기 때문이라고 하는, 그래서 그 말을 잘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하는 분석을 내놓는 사람도 있고요. 한 번만 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씩 했다고 해서, 그래서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이 모세가 분노했던가 화를 내면서 이 일을 했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분석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 어떤 식으로 분석을 해도 사실상 우리들의 마음에 쏙 와닿는 “아 그렇구나.”라고, 대답하기에는 어려운 분석인 것 같지 않습니다.

민수기 20장 12절에서는 간단하게 두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인 것이죠.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성경은 이 사건을 여러 군데에서 조금씩 조금씩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좀 더 살펴본다고 한다면, 민수기 20장 24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론은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 모세가 순종한 것 같은데, 하나님께 너희가 내 말을 거역했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이죠. 도대체 무엇이 거역한 것이 될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은 것이었을까요?

민수기 27장 14절 말씀 가운데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때에 너희가 내 명령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내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물을 내라고 말씀하시면서, 물을 내라고 말씀하시기는 하셨는데, 그 물을 내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기 위한 그런 기적인 것이죠. 물을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을 내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바라보게 만들고, 하나님이 인자하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드러내게 만들기 위해서,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물을 내기는 냈지만, 하나님이 그러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아서 분명하게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이 말씀을 종합하고 분석해 본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스라엘 민족이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할 때, 정말 빵점짜리 백성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으면서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당장 아쉬운 것이 있으면 당장 어려운 것이 있으면 감사가 나오기보다는 이내 불평해 버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 어쩌면 그게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 인생은 어떤 인생인가? 99를 잘해주어도 하나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내 불평이 나와버리는 것이죠. 이내 원망이 나와버리는 것이죠. 지금까지 아무리 잘해주었어도 마지막에 하나 잘못하면, 지금까지 해놓은 것이 전부 다 다 소용이 없어버리고, 갑자기 원수가 되어 버리는 게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죠. 그런 경험들을 우리가 너무나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저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건져주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살려주셨고,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여주셨고, 전쟁 가운데서 승리하게 해 주셨고, 물을 변화시켜서 마시게 해 주시고, 여러 가지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구름 기둥으로 불기둥으로, 날마다 날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가운데, 그런데 어느 날 물이 떨어지게 되는 순간에,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 이스라엘 민족 빵점짜리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그의 잘못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심판해 버리고 끝내시는 것이 아니라, 길이 참으시고 사랑을 더 베풀어 주시고, 은혜를 더 베풀어주시기는 그 하나님께서 이번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민족을 향해서도,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고,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이고,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아가서 그들을 반석 앞에 모으게 하고, 그리고 그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어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성경은 분명한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모세는 화가 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화가 났을 것 같아요.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들을 바라볼 때, 모세의 마음 가운데 실망감 그리고 짜증이 나기도 하고, 그리고 분노가 치밀어 솟아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한마디 내뱉는 것이죠. 뭐라고 내뱉었습니까?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이 말을 모세가 부드럽게 얘기했을까요? 신경질 내면서 화내면서, 이야기했을까요? “반역한 너희들이여, 들으라” 부드럽게 이야기했을까요? “너희를 위하여 우리가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웃으면서 얘기했을까요? 성경은 그 모습을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 신경질을 내면서 이 말을 했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그 역사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언해 주었던, 그리고 대행해 주었던 이 모세가 그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화를 내면서, 분노를 쏟아내면서, “이 나쁜 놈들아” “ 싸가지 없는 것들아”하면서 이런 말을 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가 화를 내는 그 모습을 누가 보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 민족들이 보는 것인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죠. 모세는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 주었던 선지자였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그 명령을 시행한 그 시행자였고,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의 모습이 모세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그런 전달자의 역할을 한 것인데, 모세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그대로 전달한 것이 아니라, 분노하고 짜증을 내면서 그 이스라엘 민족에게 화풀이하게 될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모세를 보면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 모세가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인데, 이 모세는 분노하고 짜증을 냄으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이 인자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문제일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하면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금년 초였을 겁니다. 뉴스에서 아주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는 것을, 참 씁쓸한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도 여러분들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아주 추운 날씨에 부산역에서 기차를 놓친 70대 여성이 영하의 추위 가운데 떠돌다가 잠시 몸을 녹이고 그리고 새벽 첫차로 다시 기차를 타기 위해서 부산에 있는 어느 한 경찰서 지구대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분 정도 지난 다음에 어떤 경찰이 나오더니만, 그 할머니를 막무가내로 지구대 밖으로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그는 그런 영상이 공개되어서, 전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게 만들었던 것이죠. 자신을 경찰로 뽑아주고 임용한 그 뜻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했던 것이죠. 어쩌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선발한 이유가 그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라고 그렇게 모세를 사용하고 계신데, 이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지 않은 채, 그 막무가내로 자기 기분에 화나는 대로 행동해 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식당에서 주인이 그 손님에게 물을 갖다 주라고 했는데, 그 직원이 가서 물을 준다고 하는 것이 콱 내리치면서, 여기 물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종업원이 그 손님에게 대접한 것과 비슷한 일을 모세가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는 정말 하나님께서 너무한 것이 아닌가? 그래도 모세가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해왔고, 이렇게 놀라운 사역을 지금까지 잘해왔는데, 겨우 이것 하나로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시는가?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을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것이 그냥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정말 심각한, 하나님께서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더구나 모세의 말을 가만히 살펴보면 모세의 말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그 말 가운데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이 모세가 한 말에 아주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실 수 있겠습니까? 거기는 그것은 바로 모세가 사용한 말에 주어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라고 하는 말로 바뀌어져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초창기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이야기했습니다. 홍해 바다를 가를 때, 출애굽기 14장 1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모세는 홍해를 가르면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한 것이죠. 출애굽기 16장 6절에서 만나와 매출하기를 내릴 때는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오.”라고 이야기한 것이죠.

기적을 행할 때마다 모세가 했던 말이 무엇이냐면,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봐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일하시는 것을 봐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해 내셨다”라고 늘 “하나님께서 하셨다”라고 이야기했던 그 모세의 입에서, 모세의 말년이 되어 갔을 때 그 말에서 어느덧 주어가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주어가 바뀌어 있는 것이죠.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심각한 위험이고, 누구나 다 빠질 수 있는 함정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어 사용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다.”라고 고백하며 겸손하게 말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내가 이런 일을 했고, 내가 이런 교회를 건축했고, 내가 이런 교회를 세웠고, 내가 이런 하나님의 일을 했고, 내가 이런 선교사역을 했다고 하는, 내가 했다고 하는 말로 바뀌기가 너무나도 쉬운 것이죠.

이러한 위험이 누구에게서 나타나는가? 어쩌면 영적인 지도자들 가운데서 너무나도 나오기 쉬운 것입니다. 누가 빠지기 쉬운 함정인가? 목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고, 교역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고, 그리고 주를 위해서 헌신하려고 더 힘쓰는 자들이 늘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는 사실은 저를 향해서 하는 설교예요. 제가 늘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여러분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내게 주는 그런 설교를 하려고 하고 있는데, 바로 저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인 것이죠.

우리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버리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가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죠. 마치 머리카락이 잘려나간 삼손처럼,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을 때는 엄청난 능력이 나타났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가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그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삼손처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다가 하나님께서 놔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우리들인데, 우리는 마치 내가 무엇이 된 것처럼 교만할 때가 너무나도 많은 것이죠.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편 106편 32절에서 33절의 말씀, “그들이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그들 때문에 재난이 모세에게 이르렀나니,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너무 모세에게는 가혹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수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들려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죠.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원하시는 것이고, 또한 똑같은 상황에 똑같은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우리들을 위하여서 경고해 주시는 말씀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늘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설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모세의 손에 들렸던 지팡이도 모세가 잡지 아니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그냥 막대기에 불과한 것이죠. 그 지팡이를 들어서 기적을 베풀었지만, 그것이 스스로 기적을 베푼 것이 아니라, 모세의 손에 들렸을 때만 가능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손에 들렸을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놓으시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겸손해져야 하는 것이죠. 법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법궤를 들고 요단강을 가르면서 건너갈 수 있었고, 법궤를 가지고 여리고성을 돌면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서부터 떠나버리자, 그 법궤를 가지고 전쟁터에 나가봤자 전쟁터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여, 겸손하게 서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의 말씀에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우리는 우리의 교만함을 내버려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의 말씀에 기록한 것처럼 “그런즉 너희는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 앞에 서는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교만한 마음이 들어서, 정말 아무 의미가 없는 헌신 아무 의미가 없는 봉사로 바뀔 것이 너무나도 쉽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 저희들의 마음을 지켜주셔서, 겸손하게 주를 섬길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 억지로 가신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키니까 할 수 없이 마지못해서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7절 18절 말씀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마지못해서 억지로 그냥 하는 시늉만 하고 끝내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내어주었고, 그 옛날 그 반석에서 물을 내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먹이셨듯이 주님의 물과 피를 우리들에게 내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마시게 하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또 겸손하게 주님 앞에 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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