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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선택한 모세(출 2:11-22)

남의 일에 참견을 하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잠언 26:17은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고 했다. 그런데 출애굽기 2장에는 남의 일에 참견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모세였다. 모세는 오지랖이 넓게도 다른 사람들의 일에 끼어들었다. 세 가지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이집트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학대할 때였고, 두 번째는 히브리 사람들끼리 서로 싸울 때였고, 마지막을 세 번째는 미디안의 여자 목동들이 남자 목동들에 의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였다. 결과적으로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 도망쳐야 했고 광야에서 40년간 무명의 삶을 살아야 했다.

보통 사람들은 모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모세를 평가절하 해버리곤 한다.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교만하며 혈기를 부리는 모세가 민족을 구원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무시당했으니까 말이다. 40년이 지난 후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겸손해질 대로 겸손해진 모세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일에 비하면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히브리서 11:24-26에서는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의 행위가 믿음의 행위였으며,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부귀와 영화를 추구하며 그것으로 만족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늘의 상급을 기다리는 것이었다는 설명이다.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편안하게 살려면 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그에게는 부귀와 권력이 자동으로 따라왔을 것이다. 하지만 모세는 다른 사람이 불의를 당하고 있을 때 못 본 척하고 지나친 것이 아니라 그 일에 개입했다. 결국 그로 인하여 왕궁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이 놀라운 것이다. 우리가 불의의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괜히 나섰다가 내가 피해를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 아닌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강도만난 자가 있는데도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냥 못 본 척 하고 지나간 것이 아닐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하셨다. 우리는 죄의 종이 되어, 피해를 당하고 살아간다. 마치 이집트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박해하듯, 죄는 우리를 종으로 삼고 우리를 피폐하게 만든다. 죄에게 복종하면서 살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우리의 삶은 더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예수님은 저 하늘나라의 보좌에 앉아서 그냥 가만히 계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 과정에서 멸시와 조롱과 천대를 받았지만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통 가운데서 홀로 방황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 앞에 나아가서 안식을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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