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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주일설교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롬 2:1-11)

지금 우리는 로마서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있는데요. 지난 시간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기억이 나실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러한 지난주에 살펴본 말씀에 이어서, 오늘 읽은 말씀은 다시 한 번 우리 사람들은 그 누구도 죄가 없는 사람이 없고, “다 죄인들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저런 나쁜 사람, 저 아주 몹쓸 사람” 하면서 비난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도 똑같은 죄를 짓고 있는, 너무나도 모순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이고, 그러한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고 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우리가 질문을 던져봤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을 것이고, 죄를 지은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성경에서 표현하고 있는데요. 정말일까요? 정말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하는 것이 정말 맞는 이야기일까요?

성경 말씀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계시고, 그리고 그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선을 베푼 자에게는 상을 내리시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심판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정말 맞는 이야기인가?” 하는 그런 질문을 던져 던져보고 싶습니다.

최근에 넷플릭스라고 하는 곳에서 한국 드라마가 또다시 출시가 되었는데요. 연상호 감독이 만든 <지옥>이라고 하는 영화가 출시되어서, 지난번에 나왔던 <오징어 게임>에 이어서 또다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고 하는 뉴스를 아마 혹시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도 궁금해서 한번 도대체 어떤 드라마인가 하고 살펴봤습니다. 어떤 드라마이냐면, 천사가 나타나서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몇 년 몇 월 며칫날 몇 시에 죽는다”고 예고를 미리 합니다. 그러면 정말 그 시간이 되면, 지금 화면에 나오는 것처럼 죽음의 사자가 셋이 나와서, 그 사람을 죽여버린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로 진행되는 것이 <지옥>이라고 하는 드라마입니다. 이제 화면을 치워져도 괜찮겠습니다. 제가 봤는데, 재미는 좀 없어요. <오징어 게임>보다는 재미가 좀 없는데, 그런데 그 드라마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지옥이라고 하는 주제, 심판이라고 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참아가면서 끝까지 다 봤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를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무슨 얘기를 하냐면, “하나님의 심판 같은 거, 없다”가 드라마의 결론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 어떤 사람은 병을 얻게 되고,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정말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렇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통제되어서 악한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다 보면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고, 공의로운 심판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강하게 말하고 있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좀 반기독교적인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드라마가 바로 지옥이라고 하는 드라마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을 봤습니다. 연상호 감독은 이 드라마를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여러분, 쫄지 마세요. 하나님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심판하는 거 아닙니다. 그냥 재수 없어서 그런 일 당하는 겁니다. 괜히 쫄지 마시고, 그냥 자유롭게 살라”고 하는 것이 이 드라마에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계시는가? 심판하시는 하나님, 공의로운 하나님이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해서, 우리 크리스찬들이야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믿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건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이 세상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선하신 하나님,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그러면 악한 사람에게는 심판을 내리시고, 그리고 선한 사람들에게는 보상을 해주는, 그래서 정말 이 세상이 참 공의롭게 돌아가고,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통치자가 있어서, 그 통치자의 뜻대로 정말 잘 돌아가면, “하나님이 계시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 텐데,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엉망 진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추측을 하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안전한 나라입니다. 길거리를 걸어 다녀도 안전하고, 우리가 생활하는 데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는 공권력이 살아 있어서, 경찰력이 뻗치고 있어서, 악한 사람들이 마음껏 활개를 치지 못하는 것이죠. 하지만 저 개발도상국에 가면, 정말 낙후된 나라에 가면, 마치 정부가 없는 것 같아요. 깡패가 온갖 나쁜 짓을 하고 있어도, 마약 단체가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 있어도, 전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그래서 마치 무정부 상태와 같은 그런 나라들이 있는데, 그런 나라에 가면, “이런 나라에는 정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구나”라고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것처럼, 어쩌면 이 세상이 온 세상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공권력을 발휘해서, 정의를 바로잡고, 악한 자는 심판하고,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을 내리시는, 그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 계시겠구나”라고 생각하겠는데, 근데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는 겁니다. 악을 행한 사람 정말 파렴치한 사람은 아무런 고통을 당하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어요.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선을 행하는 사람, 의를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 정말 착하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은 아무런 것도 누리지 못하고, 고난 속에서 힘들게 살다가, 그리고 정말 억울하게 죽어가는 그런 모습들을 우리가 목도하게 되면서,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맞습니까?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게 맞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 이 <지옥>이라고 하는 드라마는 우리를 향해서 외치는 겁니다. “속지 마! 하나님은 없어! 하나님의 심판 같은 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문제에 대해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성경의 이야기는 아주 일관적인 대답을 우리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한 자에게는 심판하시고,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을 내리신다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일관적인 메시지입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2장 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혹 내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라고 쓰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지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당장 심판하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정말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마치 계시지 않는 것처럼, 아무런 심판을 하고 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아무런 감정이 없는 재판관, 심판관이 아니라,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할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기다리신다는 거예요. 그냥 잘못했으니까, “넌 불합격” 처리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넌 잘못했으니까, 지옥”하고 끝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너, 그러다가 망한다. 셋 할 동안에, 잘 들어. 하나! 둘! 하고 셋 하지 않고, ‘둘 반’ 그러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당장 심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참고 기다리시면서, 회개할 것을 기다리면서, 우리들에게 기회를 더 주시고, 또 주시고, 또 주시는 것인데, 그러한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없는 줄 알고 착각하면서 뻔뻔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씀이, 오늘 4절에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을 보면서 오해하는 것이죠. 착각하는 것이죠. “내가 죄를 지어도, 아무 문제 없구나! 내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내가 이렇게 악한 일을 행해도, 하나님께서는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래서 계속해서 죄를 짓는 일을 계속하는 겁니다. 왜냐? 심판이 없는 것 같으니까요.

대표적인 예가 어디에 나오냐면,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라멕이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라멕은 자기 두 부인을 향해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창세기 4장 23절에서부터 24절 말씀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이 가인을 본 겁니다. 그런데 그 가인이 자기 동생을 쳐죽인 살인자인데, 하나님께서 그 살인자 가인을 심판하지 않고 보호하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괜찮구나!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없구나! 내가 사람을 죽이고, 다른 사람이 나를 때렸다고, 내가 저 사람을 죽여도 아무 문제없다! 하나님은 나를 심판하지 않는다!”면서 뻔뻔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 대표적인 예가 라멕이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뻔뻔한 사람이 정말 사악한 라멕과 같은 사람이 성경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라멕과 같은 사람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요.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인데, 미워하면서도 죄책감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심판하지 않으니까, 괜찮은가 보다. 미워해도 괜찮은가 보다 하면서, 계속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죠. 신실하게 삶을 살고 있지 않으면서, 마음에 두려움이 전혀 없는 거예요. 왜?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니까, 주님께서는 형제를 용서하라고 하셨고,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셨지만, 우리가 용서하지 않고, 마음속에 옹졸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지금 당장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냥 뻔뻔하게 계속 미워하면서, 계속 미워하고, 살인을 마음속에 살인을 하면서, 용서하지 않으면서도 괜찮은 줄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슬쩍슬쩍 거짓말하고, 슬쩍슬쩍 속이고, 슬쩍슬쩍 내 것이 아닌 것을 내가 마음껏 편취하면서도, 거리낌 없이 살아가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한 척, 가장 신실한 척,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을 향해서 드라마 <지옥>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괜찮아. 하나님, 없어! 괜찮아. 하나님이 심판 안 해.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것은 그냥 어쩌다 보니까 만나는 거야. 교통사고 당했다고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그때마다 마음속에 좀 쫄리지? 내가 혹시 죄를 지어서 이런 것은 아닐까? 내가 오늘 신앙생활 잘 못해서 이런 건 아닐까? 그런 두려운 마음이 들 때, 그것은 순 가짜야! 저 사이비 종교가 너희들을 착취하기 위해서 만든 거짓 프레임이니까, 그 말에 속지 말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 그냥 믿고 나가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이 드라마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물론 사이비 종교 단체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우리를 편취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이 드라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당장 우리들에게 심판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세상에 심판이 없다.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 정말 살인마가 같은 사람이 정말 파렴치한 같은 사람이 떵떵거리면서 잘 살다가 아무 문제 없이 천수를 누리고 죽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결론이 하나님은 전혀 심판하지 않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하는 겁니다. 첫 번째 가능성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아무 일 안 일어난다고 하는 가능성입니다. 거짓말이야!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거, 거짓말이고, 하나님이 심판한다고 하는 거, 거짓말이고, “그냥 이 세상은 저절로 돌아가는 거야”라고 하는 가능성이 하나입니다.

근데 그 가능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계시지만,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또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참고, 또 참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하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우리가 이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어떤 것이 옳다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믿는데요. 그 이유는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증거가 온 세상에 널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우리 집에 다녀가면, 자취하고 있는 그 청년의, 자취하고 있는 어떤 학생의 집에 어머니가 다녀가게 되면, 다녀갔다고 하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증거가 방 안 구석구석에 다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고 하는 증거가 온 세상에 곳곳에 넘쳐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양심에 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보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일관적이죠. 로마서 2장 6절에서부터 8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여러분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심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는데요. 안 믿으면 마음은 편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지 아니하면, 겁낼 것이 없습니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마음 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믿으면, 하나님이 사라져버리죠? 어떻게 되나요? 우리가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믿으면, 하나님이 없어져 버리나요? 그게 아닌 거죠. 우리가 눈을 감고 보지 않으면, 없어지나요? 이 세상에 고통과 슬픔이 있어서, 그걸 놔두고 멀리 떠나면, 그 문제가 없어지나요? 아니요. 우리가 동굴 속으로 숨어 들어가면, 문제가 없어지는게 아니에요. 있어요. 그대로 있어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인데,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꿩이라고 하는 새를 잡으려고 하면, 그렇게 별로 어렵지 않다고 해요. 꿩을 잡으러 막 쫓아가면, 그 꿩이 막 도망가다가 조그마한 구멍을 발견하면, 머리를 팍 쳐박고, 가만히 있는답니다. 자기의 머리를 구멍 속에다 집어넣으면, 더 이상 사람이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안전하다 하고, 안심한다는 거에요. 그러면 쫓아가서 그냥 잡기만 하면 된대요.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어떤 생각을 하냐면,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해, 하나님이 없어진 줄 알아요. 심판하신 하나님이 안 계신 줄 알아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지 않는 거죠. 저는 건강검진을 잘 안 받아왔었는데요. 미국에 살면서 거의 병원에 가본 적이 없고, 그래서 사람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건강상에 문제가 있나요? 없나요?” 그러면 제가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저, 아무것도 없는데요. 당뇨도 없고, 콜레스테롤도 없고, 혈압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왜? 검사를 안 했으니까, 몰라요. 그런데 검사를 안 해서 모르면, 없는 게 아니고, 검사를 안 해서 없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가보면 암이에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가보면 당뇨에요. 검사 안 하면, 마음은 편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질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마음이 편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결국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고, 오늘 말씀 가운데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거룩한 척 하는 사람일지라도, 사실은 그 사람이 비난하고 욕하는 그런 행위를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거룩해 보이는 저 사람은 죄가 없을까요? 착해 보이는 저 사람은 죄가 없을까요? 이 강단 위에서 설교하는 목사는 죄가 없을까요? 그게 우리들의 문제이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들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인데,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해결책이 없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아니하면, 성탄절이 다가오는데요. 예수님께서 저 높고 높은 곳에서부터 낮고 천한 말 구유에 내려 오셔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단 한 사람도 거룩한 사람이 없고,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드라마 <지옥>을 보면, 연상호 감독의 지옥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반기독교적인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오히려 복음을 더 잘 드러내주는 장면이 하나 등장합니다. 그것은 천사가 나타나서 이 사람에게 죽음을 예고하고, 저 사람에게 죽음을 예고하고 그래서 죽음의 사자들이 와서 그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그런데 한 아기에게 천사가 나타나 삼일 뒤에 죽을 거라고 하는 예고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 모습을 산모가 자기 아기를 카메라로 찍으러 갔다가 보게 된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충격을 받습니다. 아니, 도대체 우리 애기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죽는단 말인가? 거기서 혼란을 느끼고 당황스러운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항변해 보았자,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처럼 그렇게 죽음의 예고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죽게 돼 있는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그 예고한 갓난 아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날, 예고한 날이 됐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사자가, 셋이 아주 시커먼 괴물들이 나타나 가지고, 죽음의 사자가 그 아기를 죽이려고 하는 그 장면 가운데서, 엄마와 아빠가 그 아이를 꼭 막 껴안고 지키는 거에요. 우리 아기 데려가지 말라고, 우리 아기 죽이지 말라고, 꽉 껴안았는데, 그런데 어떻게 되느냐면, 그 죽음의 사자가 결국 누구를 죽이냐면, 엄마 아빠를 죽이고 불에 태워 죽여버리고, 그 엄마 아빠의 품속에 있는 아기는 살아납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면서, 무슨 죽음의 사자가 이렇게 실수를 해? “엉터리 드라마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근데 그게 바로 우리가 갈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아기를 죽일 수 없어서, 그 부모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살리는 그 장면을 보면서, 저게 부모의 사랑이구나! 그런데 우리는 부모가 사랑을 해도, 살리기보다는 죽일 때가 더 많아요. 나는 사랑으로 한 일인데, 아이들은 그것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하는 일들이 더 많아요. 결국 우리들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게 무엇이냐면, “어디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살려줄 구세주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인데요.

우리는 정답을 압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저와 여러분들을 안으시고, 우리의 죄로 인하여 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그냥 지옥불에 떨어지도록 방치해 두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가 당해야 될 그 십자가를 우리 주님께서 대신 지시고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얻게 된 줄로 믿습니다.

지난 11월 13일 미국 미시간주에서는 경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5명이 탑승을 했는데,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다 죽고 한 사람이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11살 여자 아이가 살아났는데요. 어떻게 살아났는가? 뉴스는 말하기를 그 비행기가 추락하는 순간에, 아버지가 그 아이를 꼭 껴안고 놓지 않고, 죽는 그 상황까지 껴안고 있다가, 아빠는 죽고 아이는 살렸다는 거에요.

오늘 우리들의 삶은 마치 죽음의 예고를 받은 아기처럼,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영원히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찬 예식은 바로 그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흘리신 피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주님께서 나를 위해 내어주신 목숨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다시 깨닫는 은혜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이 성찬 예식에 참여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기억하고, 또 그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소망한다고 하는 다짐을 하면서, 이 귀한 예식에 참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 (눅 15:11-24)

아버지의 집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집은 감옥일까요? 풍성한 사랑이 있는 곳일까요? 그렇죠. 풍성한 사랑이 있는 곳이 아버지의 집입니다. 하지만 종종 아버지의 집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풍성한 사랑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억압으로, 족쇄로, 그리고 감옥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어쩌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이 탕자의 생각이 그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사는 것보다는, 먼 나라에 가서 내가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하는 그런 욕망이 이 둘째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을 떠나 멀리 살아가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그리고 아주 빨리 나타나게 되었는데요.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 자유인 줄 알았으나, 오히려 고통이었고, 자유가 아니라, 더 큰 억압과 속박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마치 물고기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요. 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고기로 하여금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하게 만드는 감옥일까요? 아니면 물고기로 하여금 물고기가 되게 만들고, 물고기로 하여금 그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게 만드는 그런 풍성한 자리가 될까요? 물고기가 그 물 밖으로 튀어 나간다면, “나는 이 물에서부터 자유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튀어나가면, 자유로울 것 같지만, 그러나 이내 그 물고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다다르게 될 겁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탕자는 자신이 처한 그곳이, 자기가 결론으로 맞이하게 된 마지막으로 맞이하게 된 그것이 아버지의 집과 비해서는 너무나도 형편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어떤 집인가? 아버지의 집은 먹을 것이 풍성한 집안입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탕자가 생각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아버지의 집은 풍성한 곳이라는 겁니다. 아버지의 집은 부족한 것이 없는 곳이라는 겁니다. 그 아버지의 집은, 심지어 노예들도 풍성하게 먹을 수 있는 만족함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아버지의 집인 것이죠. 하지만 이 아들이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아버지에게서부터 멀리 떠나게 되었을 때 만난 곳은 어딘가? 바로 주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겁니다.

16절 말씀은 그 아들이 처한 아주 힘들고 어려운 처지를 표현해주고 있는데요. 누가복음 15장 16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으려고 했다고 하는 이 표현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쥐엄 열매가 도대체 무슨 열매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문맥상 보면, 이 쥐엄 열매라고 하는 거는 사람이 먹는 게 아니고, 돼지나 먹는 것이에요. 돼지나 먹는 걸 사람이 먹겠다고 해도, 먹을 수 없는 그런 아주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개 돼지라고 하는 것은 아주 경멸의 대상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잘 즐겨 해서 먹지만, 유대인들은 아예 먹지도 못하는 그런 음식이 바로 돼지였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이나 먹는 아주 불결한 음식이 돼지인 겁니다. 그런데 그 돼지들이 먹는 그 음식을 먹으려고 해도 그것조차 먹을 수 없는 아주 심각한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 둘째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의 집에서부터 떠나온 것을 후회하게 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결단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우리 기독교의 복음을 아주 생생하게 아주 정확하게 명확하게 드러내는 비유라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과연 어떠한 인생인가 하는 것을 잘 설명해 주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모든 불행의 근원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가운데 아픔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 가운데 불만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 가운데 슬픔이 있다고 한다면, 그 근원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들은 그 이유를 피상적인 이유를 찾습니다. 돈이 없어서 불행한 거야. 키가 크지 않아서 불행한 거야. 내가 못생겨서 불행한 거야. 내가 살이 쪄서 불행한 거야. 내가, 내가 어떤 권력을 가지지 못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해서 문제야. 남편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내가 나를 존중해주지 못해서 문제이고, 우리 부모님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서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문제의 근원적인 문제는 추적해보면 더 깊은데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가서, 하나님에게서부터 멀리 떠나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근원적인 문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리 예쁜 꽃도 줄기에서부터 꺾여버리면 살아 있는 것 같으나 곧 말라 비틀어져 버립니다.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어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 것인데, 물을 빨아들이는 그 뿌리, 그 줄기에서부터 잘려져 나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라.”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나 있는 것이고,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이고,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부터 멀리 떠나 있을 때, 우리 인생의 문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 그런 대로 괜찮은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집에서 재산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재산은 얼마 가지 않아서 다 떨어져버리고, 이제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쾌락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 들어가 돼지를 치기도 하고, 돼지가 먹는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하지만, 채울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좋았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이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돌아가고 싶지만, 자기가 돌아가는데 장애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에게 너무나도 큰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아빠, 저에게 줄 유산을 지금 주세요”라고 요청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대로 괜찮은, 그럴 수도 있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유대사회에서 이런 일은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이 말은 “아빠, 빨리 죽어버리세요.” “아빠, 빨리 죽어요”라고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이었고, 만일 유대 사회에서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서 했다고 한다면, 그 아들은 정말, 정말 악한 자식으로서, 그 마을에서 징계를 받고, 아주 엄청나게 혼을 내야만 하는 그런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을 때, 이 비유를 듣던 수많은 청중들은 아마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을 겁니다. “세상에, 우리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아빠에게 그런 주장을 하는, 아빠의 유산을 달라고 말하는, 그런 싸가지 없는 인생이 있다니”라고 하면서,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비교하자면,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를 죽이고 돈을 뺏어간 것과 똑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스라엘 사람이 유대인이 이방인들 사이에 가서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흥청망청 써버리고 알거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 수치를 저지른 사람은 그 마을에서 받아주질 않습니다. 돌아온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내쫓아버릴 겁니다. 그러니까 이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죠.

여러분이 잘못했을 때 부모님 앞에 나가기가 쉽던가요? 쉽지 않아요.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한테 뭔가 잘못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아주 큰 잘못을 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너, 내일 부모님 모시고 와.” 그랬어요. 그 말을 듣고 집에를 가야 되는데 집에를 못 가겠는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에게 가서 선생님의 말을 전하기가 너무나도 무서운 거예요.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드러날까 봐, 너무나도 걱정이 돼서 그날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빙빙 밖으로 돌다가, 멀리 돌다가 저녁 늦게 서나 집에 돌아갔던 기억이 있는데요. 탕자가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싶어도, 자기가 한 잘못 때문에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생각해낸 것이 무엇이냐면, “아버지, 나를 아들로 받아주세요”가 아니라, 저를 아들로 받아주는 게 아니고, “그냥 노예의 한 사람으로 써주세요.” “저를 아르바이트생으로 받아주세요. 그래서 먹고살게만 해주세요.” 그렇게 품꾼으로 써달라고 부탁하겠노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 아버지는 아들이 오는 그 모습을 보고 뛰어 달려가, 그 아들을 환영해 주는 것이, 아버지의 집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집은 바로 사랑이 풍성한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에요. 그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인가?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에요. 아들이 집을 나갔을 때 마음에서부터, 그 아들은 지워버리고 “그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마음에서 깨끗이 지워버린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계속해서 기다리며, 오늘 돌아올까 혹은 내일 돌아올까 밤새도록 기다리며, 그 아들을 기다리는,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 바로 아버지의 집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의 집은 사랑이 많은 아버지가 있는 곳인데, 그 아버지는 자신이 했던 모든 과거의 잘못들을 다 용서해 버리시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들이 단 한 번도 잘못을 한 것이 없는 것처럼 대우해 주시는 아버지가 계신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들을 받아준 다음에, 조금만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너는 저리 가서 앉아.” “너, 집에서 나갔었지? 저 끝에 앉아.”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마치 예전에 아들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것처럼, 다 잊어버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지은 죄를 기억도 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전지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들의 죄를 다 잊어버리십니까? 다 잊어버리시고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행한 것을 치매 환자처럼 잊어버리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물론 다 알고 계셔요. 하지만 우리가 지은 잘못이 현재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사랑해 주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선 우리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인가? 그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그 집에 있는 그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인가? 그 탕자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는 아버지입니다. 아이를 데려다가 깨끗이 씻기고,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신기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주셨는데, 이것은 그냥 더러운 몸을 가지고 왔으니까, 깨끗하게 씻기고 새 옷을 입혔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옷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유산을 상속받을 당당한 상속자로 받아준다는 이야기고, 가락지를 끼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서 할 수 있는 그런 아버지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아들이라고 하는 의미이고, 신발을 신겼다고 하는 것은 네가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서 이 집의 주인으로서 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제스처의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버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성경에서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바라보고 계십니까?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세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뭐라고 가르쳐 주셨냐면,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부르면서 기도해라.” 아버지께 기도하듯 너희가 하나님을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종교와 성경적인 기독교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세상의 종교에서 바라보고 있는 신, 그 신은 어떤 신입니까? 그 신은, 이 세상 종교의 신은 무심한 신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아닌 신입니다. 그냥 옥황상제일 뿐이고, 천지신명일 뿐입니다. 천지신명일 뿐이고, 옥황상제일 뿐인 그 신에게서 우리가 무엇인가 기도하고 간구할 때,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얼마나 정성을 다했느냐”입니다. 옥황상제에게 천지신명에게 무엇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정말 정성을 다해야 되는 거죠. 정한수를 떼어놓고, 1,000일씩, 100일씩 기도를 해야 된다든지, 인당수에 몸을 던져야 된다든지, 공양미 3천석을 바쳐야 되든지, 내 힘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것까지, 다 감당해서 바쳐야, 겨우 들어주는 것이 이 세상 거짓 종교의 신들입니다.

이 세상 모든 다른 종교를 보면 모두가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불교 같은 경우는 누가 해탈할 수 있습니까? 아무나 해탈 못해요. 가족을 버리고 출가해야만 하고, 거기서 도를 닫고,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다 해서, 정말 최고의 높은 단계에 올라가야, 그래야 해탈할까? 말까? 열반할까? 말까? 그렇게 되는 거에요, 미신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습니까? 부적을 붙이면, 조그마한 부적 가지고는 안 돼요. 큰 부적, 돈을 많이 주고 산 부적이라야 효과가 있는 것이지, 돈을 조금만 주면, 효과가 없는 부족이 되는 것이고, 굿을 해도 조그마한 돈을 들이면 효과가 없고, 큰 돈을 들이면 효과가 있는 그러한 거짓된 종교가 미신의 종교인 것이죠.

성공이라고 하는 종교는 어떻습니까? 성공이라고 하는 종교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야만 성공하는 거예요. 먹을 것을 먹지 않고 다이어트해 가면서, 그래야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고, 직장에서 어떻게 성공합니까? 이 사업에서 어떻게 성공해야 됩니까? 가정도 다 내 팽개치고, 정말 내가 all-in 하면서 모든 것을 다 해야만, 겨우 성공할까? 마는가? 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하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이죠. 극단 이슬람교에서는 자살 폭탄 테러를 해야만, 그래야 극락에 갈 수 있는 그런 요구들이 있는 것이죠.

이 세상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 문제는 그 신이 살아있는 신이 아니라 가짜 신이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다리가 있어도 걷지 못하는, 가짜 신이라고 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인데, 또 하나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그런 신들에게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말 최선을 다해야 되는데, 아무리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그들이 높은 세워놓은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예요.

하지만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의 우상들은 우리들을 만족시켜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우리를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파멸로 이끌어 버립니다. 탕자가 집을 나갈 때는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서 나간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유를 얻기 위해서 어쩌면 쾌락을 위해서 나아갔을 겁니다. 집을 나가기만 하면, 아버지를 떠나서 이 세상의 우상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쾌락을 주겠다고, 즐거움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그래서 정말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는 자유가 있는 것 같고 즐거움이 있는 것 같고, 쾌락이 있는 것 같았지만, 이내 내 모든 재산을 다 가져간 이후에는 나를 종속시켜버리는 겁니다. 자유를 빼앗아버리고, 즐거움을 빼앗아 버리고, 고통 가운데 집어넣는 그런 것이 이 세상의 우상인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지만,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헛된 우상에게로 떠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만, 참되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더 멀리 떠나 헛된 우상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때로는 돈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정치가 우리들의 우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쾌락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 나의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을 우상으로 섬기고, 그 우상을 향해서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우상을 향해서 나아간 결과는 무엇인가? 오늘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통과 절망 가운데로 빠져들게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지금 우리가 힘들고 어렵고 고통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남편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서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에 헛된 것들을 갈망하고 헛된 우상들을 쫓아가며, 우리를 만족하게 해줄 수 없는 가짜 신을 향해서 나아가게 될 때, 우리들의 삶이 고통 가운데 빠져들게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계십니다. 아버지와 같은 그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시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늘 감사하며 찬송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추수 감사 주일인데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을 고마워하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고, 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되고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감사하게 되면 감사하게 되면, 우리가 더 많은 축복을 받고, 감사하게 되면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누리게 되고, 감사할 때 많은 유익을 얻게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종종 감사에 대한 설교를 듣다 보면, 감사가 마치 무슨 수단인 것처럼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감사하면서 사십시오. 감사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감사하게 되면 행복하게 됩니다.”라고 하는 설교를 듣게 될 때, 맞는 말인데, 그런데 종종 물론 설교가 그런 의도로 설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감사가 하나의 수단이 되어 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시 말하자면 감사하는 것은, 수단이고, 하나님도 우리의 수단이 되어서, 나의 진짜 하나님, 즉 돈을 얻기 위해서 명예를 얻고 권력을 얻고 성공을 얻기 위한 그것이 우리들의 우상인데,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잘못해도, 아무리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아들을 내어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가장 좋으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무엇을 주셨습니까? 내가 제일 맛있는 거 먹고, 찌꺼기 주셨나요? 내가 제일 좋은 옷 입고, 우리 자녀들은 그냥 남는 거 주셨나요? 아니요. 우리 부모들은 내가 못 먹어도, 자식 먼저 주고, 내가 못 입어도, 자식 먼저 주고,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데, 바로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무엇을 주시는가? 시원치 않은 걸 주는 게 아니에요. 별 볼 일 없는 걸 주는 거 아니에여요. 우리가 달라고 하면, 마지못해 주는 게 아니라, 가장 좋은 것으로 주셔요. 그런데 그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것이 때로는 우리의 생각과 달라서, 우리는 이것을 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실 때도 있고, 건강을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질병을 주실 때도 있고, 편안한 길을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걷게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시든지 간에,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한 치도 없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인생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늘 감사하며 찬송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수능을 앞에 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제 방에 불러서 격려하고, 또 기도해 주면서 다른 말이 아니라 이 말을 했어요. 앞으로 우리들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겠지만,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원치 않은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라고 권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 위에 내어 주셨는데,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다른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늘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둘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버려 두사 (롬 1:24-32)

예수님께서 기쁨의 소식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데요. 예수님이 왜 복음인가? 예수님이 왜 우리 모두에게 기쁜 소식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어서, 다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실 메시아가 필요한 것인데 바로 그 메시아가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서, 그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하는 것을 지난주에 살펴보았는데요.

오늘 본문은 “어떻게 우리 인간들이 전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빠지게 되었는가?” “어떻게 우리는 이렇게 불행한 인간이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말씀입니다. 오늘 특별히 로마서 1장 24절에서부터 32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았는데요. 이 본문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어서 나오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 읽으시면서, 오늘 본문을 천천히 읽어보면서 반복되는 구절을 살펴보신 분들이, 발견하신 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 반복되는 표현이 무엇이죠? “내버려 두었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로마서 1장 2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장 26절에서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장 28절에서도 똑같은 표현이 등장하는데요.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악한 일을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들을 보시면서 심판해 버리고,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려고 한다면 그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냥 손 놓고 계셨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이 죄를 지으면, 죄를 짓는 그 일을 방해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못하도록 그렇게 방해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냥 손 놓고 계셨다는 겁니다. 죄를 지으면 죄를 짓도록 방치해 두셨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죄를 짓도록 그냥 내버려 두셨다! 방치해 두셨다라고 하는 이 표현을 여러분들이 좀처럼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이 납득이 되십니까? 아마 납득이 잘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같으면 우리 같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의 자녀들이 나쁜 짓을 한다면, 나쁜 아이들과 어울려서 악한 일을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우리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간다고 하면, 이 아이의 미래가 암울해질 테니까, 이 아이가 그런 길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부모라고 한다면 그 아이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을 겁니다. 나쁜 아이들이랑 어울린다고 한다면, 학교 전학을 가서라도 좋은 환경에 우리 아이들을 집어넣기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한다면, 급기야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우리 아이들이 나쁜 길로 가지 않도록 막으려고 하는 것이 그게 부모님의 마음일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할 때 그냥 내버려 두셨다, 방치해 두셨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과연 그렇게 방치해 두는 것, 내버려 두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도 괜찮은 것일까? 납득이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지난주에 아주 참 안타까운 뉴스를 하나 보았습니다. 간병 살인사건이라고 불리는 뉴스였습니다. 대구 수성구에 사는 22세의 젊은 청년이 있는데요. 대학을 다니다가 공익근무를 위해서 잠시 휴학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에게는, 그 청년에게는 56세 된 아버지가 계셨는데, 그 56세 된 아버지께서 지난 9월달에 뇌졸중이 걸리게 된 겁니다. 뇌졸중에 걸려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 혼자 밥을 떠먹지도 못하고, 대소변을 혼자 잘 가릴 수도 없는 그런 아주 심각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겁니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치료비가 만만치 않은 겁니다. 수입이 별로 없는 그 청년이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치료비가 나올 수밖에 없어서, 결국 금년 4월에 퇴원하고 말았는데요. 퇴원한 이후에 5월 1일부터 5월 8일까지 그간 일주일이 넘는 그 기간에,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에게 물도 주지 않고 음식도 주지 않고 그냥 방치시켜 놓았다가 아버지가 사망해 버렸습니다. 결국 그 청년은 존속 살해 혐의로 체포되고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여러 가지 상황들이 정상 참작이 되어서 되었지만, 결국 징역 4년이라고 하는 그런 선고를 받게 되었는데, 항소심을 했지만 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4년을 그대로 선고했다고 하는 뉴스를 듣게 됐습니다. 죽어가는 아버지를, 정말 힘든 상황이 있다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안 해서 죽게 만들었다고 하는 그것이 아무리 정상 창작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건 죄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모습이 마치 그런 것 같은 겁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그래서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셔야 될 거라고 우리는 예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아야죠. 죄를 짓지 못하도록,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할 것 같은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의 말씀은 뭐라고 표현하고 있냐면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셨다. 그냥 방치해 두셨다. 죄를 마음껏 짓도록, 그냥 내버려 두셨다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약간의 불편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본문을 읽으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무책임하고, 아무런 애정도 없고 감정도 없는, 그런 무뚝뚝한 정말 냉혈한과 같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할 수 있을 법한 표현을 하고 있지만, 성경의 다른 곳에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정반대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히브리서 12장 5절에서부터 1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니까 히브리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면 그냥 “될대로 돼라” 하고, 방치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징계하시면서까지라도, 우리를 바른 길로 돌아오게 만드시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때려서라도 징계해서라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는 예가 성경에 수두룩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몇 가지만 들자고 한다면, 사사기의 말씀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우상숭배하는 길로 가게 되는데요. 그렇게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여지 없이 이방 민족을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치십니다. 압제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면,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주시는 이야기가 사사기에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또 반복되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이 범죄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의 범죄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이라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징계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회개하게 만들고 돌아오게 만드시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성경에 어느 한 구절만 읽고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거나 속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성경의 어느 한 부분만 읽고 그 부분을 통해서 너무나도 쉽게 너무나도 빠른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고 늘 말씀드리고 있는데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이 망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하나님이 결코 아닌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징계해서라도 바른 길로 가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읽은 로마서 1장의 말씀은 왜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가? 한번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 것이죠. 1장 24절에서 26절에서 2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악을 저지르고 악을 행할 때 그냥 내버려 두셨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렇게 표현한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손 놓고 계셨다. 방치해 두셨다라고 하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돌아오기를 원하셔서 최대한의 모든 일들을 하시는 겁니다. 탕자의 비유에 보면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아들을 기다립니까?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탕자가 돌아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뛰어나가서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 겁니다. 잃은 양의 비율을 보면, 한 마리에 잃은 양이 발생했을 때 그까지 한 마리 잃은 양 상관없다라고 외면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99마리를 들판에 두고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는 목자와 같다고 하나님께 이 성경에서는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 9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왜 이렇게 악이 횡행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당장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가? 그들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면서 아직 심판하지 않는다라고 베드로 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냐면, 죄악을 저지른다면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마음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징계하시기도 합니다. 징계해서 돌아오도록 그렇게 채찍질 하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로마서 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그렇게 채찍질하지 않으실 때가 있는데, 채찍질하지 아니하시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는데, 그렇게 내버려 두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돌아오도록 많은 일을 하나님께서 하고 계세요.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우리들의 마음에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거죠. 양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거ᅟᅦᆼ요. “너, 그렇게 살면 안되잖아!” “그렇게 신앙생활 안 하며 살면 안되잖아” 우리들의 마음에 양심을 두드리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놓고 하고 계시는 것이죠.

계시록 3장 2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돼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표현을 한번 가만히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요?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잘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디서 두드려요?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신다. 주님께서 하시는 것은 어떻게 하시는가? 우리의 마음의 문을 강제로 뜯어버리고, 그래서 마치 쿠데타 군인들처럼 쳐들어가고, 진압군처럼 쳐들어가서, 우리들의 마음을 정복해버리고 강압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 버려서 우리를 정복하시는 방법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방법은 우리들의 마음 문 밖에 서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겁니다. 우리들의 마음 문 밖에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언제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는가? 문을 여는 것이 누구에게 달려 있게 만드셨어요? 우리에게 달려있게 만드셨어요. 문을 박살 내버리고, 우리의 마음속으로 쳐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문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계시면서, 우리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기를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향해서 호소하시는 겁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강압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문을 두드리면서 문 열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에, “내버려 둔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왜, 주님께서는 강압적으로 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고 계시는 걸까요? 그것은 참된 사랑은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라야만이 그것이 진짜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할 수 없이 사랑하고, 할 수 없이 순종한다고 하면, 그것은 진짜 사랑이겠습니까? 진짜 사랑이 아닌 거죠. 예를 들면 로보트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과학자가 로보트를 만들어서, 그래서 그 로버트에게 인간의 말을 다 듣도록 프로그램화시킨 로버트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로보트 청소기가 하나 있는데요. 그 로버트 청소기에게 명령을 내리면, 그 로보트 청소기는 군말 하지 않고, 예배당 바닥을 쫙쫙 다니면서 청소를 합니다. 나 청소하기 싫어! 나 청소 안 할래! 하는 말 없이, 군말하지 않고, 모든 곳을 다니면서 청소를 하는데, 참 신기해요. 근데 그게 참된 순종이고 참된 사랑이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당에서 청소하는 거냐? 아니에요. 로보트는 주인의 말을 무조건 듣습니다. 왜냐하면 거부할 자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로보트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물론 좋아하고 아낄 수는 있겠지만, 사랑의 대상은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대상은 누가 사랑의 대상이에요? 내가 거부할 수 있는데,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데, 선택한 것이 사랑이고, 거부할 수 있는데 복종하는 것이 사랑인 거에요. 내가 자유함을 가지고 사랑할 때, 그게 진짜 사랑인 것이지, 나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치 꼭두각시처럼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그 꼭두각시를 움직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면, 그 꼭두각시가 하나님을 진짜로 사랑하는 거냐면, 그게 사랑하는 게 아닌 거예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것을 다 하실 수가 있어요. 우리를 강압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하게 만들 수 있고, 프로그램화시켜서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유 의지를 주셨고, 우리들에게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과, 자연 만물과의 차이점입니다. 자연 만물은 그런 자유 의지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무조건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이 자연 만물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유일하게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람인 거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자유가 있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가 우리 인간들인데,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압적으로 무조건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거죠.

마치 이것을 비유한다고 한다면 임금님이 시녀에게 사랑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극 드라마에 보면 어느 임금님이 어느 왕자가 시녀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그런데 그 임금은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왕자는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명령하면 돼요. 자기의 신하를 시켜서 저기 보이는 저 아녀자가 누구냐? 오늘 밤 내 방에 들어와서 수청 들라 하라. 그러면 끝이에요. 그러면 찍소리 못하고 와서, 수청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권력이었습니다. 임금이었습니다. 왕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건 그렇게 명령을 받아서 할 수 없이 선택권이 없이 와서 수청 드는 것은 사랑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그 임금이, 그런데 그 왕자가, 어느 날 시녀 앞에 가서 무릎을 꿇는 겁니다. “나를 사랑해줄 수 있느냐”고 내가 명령해서 나를 억지로 수청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시녀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이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느냐고 나에게 사랑해 줄 수 있느냐고 사랑을 애걸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들의 마음의 문 앞에서 사랑을 구하며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피 흘려 주었는데, 너희도 날 사랑해줄 수 있겠느냐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줄 수 있느냐라고, 이야기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 강압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정복해서 우리를 굴복시키시는 하나님이, 오늘 로마서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강압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손 놓고 계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선지자를 보내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시고, 때로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여러 가지 징계를 통해서, 여러 가지 방법도 쓰시면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계셨는데, 그런데 우리 인류의 불행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그 참사랑을 외면해 버리게 된 것이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외면해 버렸기 때문에, 그냥 그 악을 계속해서 범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본문에서는 우리 인류가 어떻게 더러운 모습에 빠졌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겼다고 하는 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는데,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끌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이 아닌 것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망하게 되는 겁니다. 마치 부모님의 참된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주는데, 유괴범이 와서 과자를 주고, 유괴범이 와서 강아지 보러 가자고 하니까 유괴범을 따라가는 꼴과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로는 동성애의 죄에 빠졌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의 방법대로가 아니라, 동성애에 빠져 음행의 죄를 저질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온갖 불의와 죄의 모습에 빠져들었다고 29절에서부터 31절 말씀에 열거하고 있는데요. 그 내용들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죄 없다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러한 죄를 죄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1장 32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양심이 무너지게 되었고, 결국 우리가 불행한 상태가 되었고,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였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죄와 허물로 인해서 죽은 자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두드리시면서 기다렸지만, 결국 죄악의 길로 달려간 우리들을 향해서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 그 독생자를 우리 위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 그것이 복음인 줄로 믿습니다.

지난주에 아주 참 감동적인 뉴스를 하나 듣게 됐습니다. 고양시 일산 동구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요.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게 되었습니다. 접촉사고가 나게 된 것이죠. 홍영숙 씨라고 하는 사람이 피해 차주였는데요. 차에서 내려서 사고를 낸 사람에게로 내려가는데, 젊은 엄마가 사고 난 것 때문에 두려워서 벌벌 떨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피해 차주는 그 사고를 낸 젊은 엄마에게 다가가서 사고 처리는 나중에 해도 좋으니, 일단 아기를 데리고 응급실로 가라고 말해주면서, 그 여성을 꼭 껴안아 주었다고 하는 뉴스. 그 아기 엄마는 아기가 고열이 나 응급실로 정신없이 가는 도중에 교통사고를 내버렸는데, 그 상황에서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너무나도 어찌할 줄 몰라 울고 있는 그 젊은 여성을 보고, 피해 차주가, 이 문제 해결하고 가라고 했던 어떤 택시 운전사와는 달리, 그 사고 처리는 나중에 해도 좋으니까, 진정하고 아이를 먼저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꼭 안아주었다고 하는 것이 나중에 그 피해 사고 낸 사람의 남편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어서, 뉴스가 나게 되었는데요. 아마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바로 이 일이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같은가? 우리는 좌충우돌하면서 피해를 낸 사람과 같아요.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나쁜 길로 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을 법한 일들을 하는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 우리 위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안아주시고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그 놀라운 구원을 생각하면서 늘 감사하고 기뻐하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롬 1:18-23)

바울 사도는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쁜 소식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쁜 소식이요, 복된 소식, 다시 말하자면 복음이라고 소개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18절 말씀에서는 갑자기 그 톤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18절에서부터 23절 말씀까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18절 말씀을 보니까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로마서를 쭉 읽어나가고 있는데,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고 있는데, 왜 바울 사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복음의 전제가 하나님의 진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우리들에게 복음이 필요한가? 왜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여야 되는가? 왜 우리가 예수님이 필요한가? 예수님을 왜 우리가 믿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라고 하는 대답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어서, 다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아주 비참한 상태, 아주 심각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가 다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멸망당할 처지에 놓여 있지 않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지 않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하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를 구원해 줄 필요가 없어요.

여기 획기적인 약이 하나 있습니다. 이건 제가 복용하는 약인데요. 이 약은 비싼 약이고, 그리고 좀 구하기도 좀 힘이 들고, 그런데 아주 효과가 좋은 약입니다. 그래서 이 약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린다고 한다면, 여러분 이 약을 드시겠습니까? 안 되시겠습니까? 대부분 관심이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비싼 약이고, 효과가 좋은 약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그 병에 걸려야 그 약을 먹는 것이지, 병에 걸리지 않았는데 그 약을 먹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궁금하시죠? 이게 도대체 무슨 약인지? 이 약은 알러지 약입니다. 저는 평상시에는 괜찮지만, 봄이 되고 가을이 되면 알러지가 매우 심합니다. 특별히 봄철에 꽃가루로 인해서, 그리고 봄 가을에 날씨가 차가워졌을 때 훌쩍 훌쩍거리면서, 코를 많이 흘리게 되는데요. 콧물이 나게 되는데요. 특별히 앞에서 설교해야 되는 저로서는 굉장히 곤란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새벽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강단 위에 섰는데, 그래서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콧물이 줄줄 나오기 시작해가지고, 제가 설교하기가 정말 곤란한 적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이 너무나도 신기해요.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알약을 새벽에 복용하면,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 콧물이 딱 그쳐버리는 겁니다. 아주 대단한 약이죠. 여러분 이 약을 제가 드리면 복용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알러지 없는 사람은 복용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아무리 제가 좋은 약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시큰둥한 겁니다. 1부 예배 때, 제가 이 얘기를 해드렸더니, 교인들이 예배 마치고 나가시면서, 대부분 그냥 아무 관심 없이 나가버렸어요. 그런데 몇 분이 제게 다가와서 묻는 겁니다. “목사님, 그게 무슨 약입니까?” “나도 좀, 나도 알러지가 있는데, 나도 좀 복용하고 싶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약이라고 하는 것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인 것처럼, 알러지 약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알러지를 가지고 있지 아니한 사람에게는 아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향한 복음이다,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 모든 믿는 자에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예수님이 모두가 다 기쁜 소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왜 예수님이 모든 인류에게 복된 소식이냐 하면, 바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여져 있어서,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죽음을 죽을 수밖에 없는 아주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내가 정말 심각한 상태에 있는, 영적으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심각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해야만,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신다고 하는 그 사실이 감사하고, 그 사실이 우리들에게 아주 크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나이가 점점 들어가기 시작하니까, 약에 의존하는 그것이 점차 늘어나게 됐습니다. 그래서 영양제들을 많이 챙겨 먹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는데요. 제 아내가 영양제를 얼마나 많이 챙겨주는지 모릅니다. 영양제를, 이런 영양제, 저런 영양제, 많이 구해가지고, 그래서 매일매일 그 영양제를 먹으라고 저에게 강요합니다. 그런 아내가 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죠. 제 몸을 챙겨주고, 저에게 그런 약을 권유하는 아내가 있는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약을 잘 먹느냐 하면, 잘 먹을까요? 잘 안 먹을까요? 잘 안 먹어요. 그리고 약을 먹으라고 하면 고맙다고 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투덜거려요. 제가 약을 보면서 투덜거립니다. ‘도대체, 이 약을 이렇게 왜 크게 만들어 가지고, 마시면 목에 걸려서 안 넘어간다’고. 약이 이만 해요. 너무나도 커요. 그 약을 먹으려고 하는데, 그것도 한 4개 5개 되는 약을 먹으라고 하니까, 먹는 게 너무나도 불편해서 먹을 때마다 제가 왜 이렇게 약이 크냐고 투덜거리면서, 잘 안 먹을 뿐만 아니라, 옆에서 말하지 않으면 그냥 걸러버리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몸에서 느끼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현재 내가 불편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 약을 먹음으로써 내가 나아졌다고 하는 그런 느낌도 없는데, 그런데 먹으라고 하니까, 잘 못 먹는 거에요. 전혀 불편함이 없는 것 같은데, 약을 먹으라 하고, 그리고 약을 먹어서 내 몸이 좀 더 슈퍼맨이 된다거나, 뭔가 대단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먹으나 안 먹거나 똑같은 그 약을, 목에 걸리는 그 약을 먹으라고 하니까, 너무나도 힘들어서, 자꾸만 걸러버리는 겁니다. 아마 그 약을 먹는 게 좋겠죠. 심각한 상태에 있는 것을 제가 모르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 “예수님 믿으세요.” “복음을 받아들이세요.” “교회에 나오세요”라고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시큰둥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제가 약을 안 먹는 이유와 똑같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그냥 아무에게나 ‘예수님 믿으세요’ ‘교회 다니세요’라고 이야기하기보다, 우리 자녀들에게 그냥 ‘교회 다녀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복음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영적으로 타락한 존재여서,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너무나도 영적으로 타락한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실감해야만,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고요. 만일 그렇게 심각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세요’라고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이겠습니까? ‘너나 믿으세요’ 하는 거죠. ‘나는 필요 없어요.’ ‘예수님 필요 없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이 복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죄악 가운데 있어서, 정말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서부터 멀리 떠나 있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늘 거짓말을 하고, 정말 그 어느 것 하나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없는, 그런 더러운 품성을 가진 우리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고 받을 수 있겠는가? 그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요.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복음을 소개하면서, 그다음 단계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하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까? 18절 말씀에 보면 경건하지 않은 사람과 그리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두 종류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진노가 있고, 불의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같은 사람이죠. 불의 한 사람이 곧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고, 경건한 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불의를 행하는 사람인데,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있어서, 엄청난 그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고, 영원한 형벌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고 지금 설명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아도 되는, 그 형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요?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깨끗하고 의롭고 아무런 죄를 행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것입니다. 두 번째 피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 있냐면, “나 몰랐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미워하시는 줄,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라고 하는 줄을 내가 몰랐다.” “만일 나에게 그 법을 알려주셨다라고 한다면, 내가 행했을 텐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법을 공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법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몰라서 못 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피할 수 있을 겁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피할 수 있는 것이죠.

첫 번째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을 것인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로마서 뒷부분에서 이야기할 것이고요. 오늘 본문에서는 핑계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칙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법칙을 나에게 알려주고 그 법칙대로 살아라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셨다고 한다면, 내가 행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안 알려주셨으니까, 그런 법이 있는 줄도 몰랐기 때문에 나는 못했습니다”라고 그렇게 핑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그 가능성에 대해서 오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9절과 20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법칙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알려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 나 몰랐습니다”라고 핑계가 불가능한 거죠.

만일 내가 정말 몰랐다고 한다면,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법을 만들 때, 그리고 시행령을 만들 때에는, 바로 단속하는 것이 아니라, 계도 기간이라고 하는 것을 둡니다. 법을 제정하고 시행령을 제정했지만, 그러나 그 시행령과 법을 그대로 즉각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계도 기간을 둡니다. 그래서 그 계도 기간에는 처벌하지 않아요. 교통법규가 바뀌었지만, 범칙금이 바뀌었지만, 그 계도 기간에 범하면 “아, 나, 몰랐습니다. 그런 법이 새로 만들어진 줄 몰랐습니다.” 그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계도 기간 가운데는 처벌하지 않습니다. 그 법을 집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계도 기간이 지나고 나면, 이제 모든 사람들이 다 이 법에 대해서 충분히 숙지했을 거라고 생각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변명할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의 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법을 만들어 놓으셨는데요. 그 하나님의 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셨는데, 어떻게 알려주셨는가?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알려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들 가운데 죄를 범해 놓고, 하나님 앞에 가서 “나, 하나님, 몰랐습니다”라고 변명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들에게 법을 알려주실 때, 어떻게 알려주셨냐면, 등기 우편을 보내서 수취인 확인을 한 것과 비슷하게,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알려주셨기 때문에, “하나님, 나, 그 법에 대해서 통보받지 못했어요. 몰랐어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들에게 법을 알려주셨습니까? 양심의 수취 확인을 하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개명을 우리가 직접 귀로 들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들의 양심 가운데 수취 확인이 되도록,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주셨고, 하나님의 법칙에 대해서 우리들의 양심에 이미 알려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고, 하나님의 법칙을 몰랐다고 무시할래야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양심 가운데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에 어떤 한 청년이 제 방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이 제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을 제게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C. S. 루이스의 대답을 그 청년에게 들려주었습니다. C. S. 루이스가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우리가 태양이 떴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그것은 우리가 집 밖에 나가서 태양이 떴나 하고, 하늘을 쳐다보고 태양이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만, 태양이 하늘에 떴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물체를 보고 사람을 볼 수 있는 것을 통해서 ‘태양이 떴구나.’ ‘아침이 밝았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아야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만물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가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싱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C. S. 루이스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마치 태양을 보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요. 우리가 공기를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숨 쉬고 살 수 있는 것처럼, 살 수 있기 때문에 공기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 천하 만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계시구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들을 알게 되는 것이죠.

자동차 부품들을 다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모아서 한 자리에 모아 놓으면 100년이 지나거나, 천 년이 지나거나, 수만 년이 지나거나, 수억 년이 지나면 자동으로 그 부품들이 이리저리 조합해서 우리가 탈 수 있는 자동차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휴대전화 부품들을 다 모아서 한 상자 안에 넣어놓으면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고, 수천 년이 지나고, 수억 년이 지나면 그 휴대전화 부품들이 저절로 조합이 돼서 우리가 쓸 수 있는 휴대폰이 만들어질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동차보다도, 휴대전화보다도 훨씬 더 복잡한, 우리 인생들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가 있겠는가? 인생은 생각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양심의 가책를 느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랑을 하기도 하고, 증오를 하기도 하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우리 인간인데, 어떻게 이런 인간이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아미노산과 칼슘과 그리고 단백질과 여러 가지 우리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그 요소들을 다 한 자리에 모아 놓는다고 해서 사람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가 이렇게 살며 기동하며 이 세상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자연이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아,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의 양심 속에 심어져 있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거짓말하면 그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거, 도둑질하며 우리들의 얼굴이 후끈후끈거리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드는 거, 살인을 하게 되면 우리가 견딜 수 없고, 음행을 하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들의 양심의 법에 그 모든 것들을 알려놓았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도덕 관념이 생기고, 하나님에 대한 개념들이 생길 수 있는 거에요.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에 심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내가 하나님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거짓말하면 안 되는 줄 몰랐습니다. 미워하면 안 되는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법칙을 만들어 놓으신 줄 몰랐다고 핑계 댈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종종 던지는 질문 가운데 어떤 질문이 있냐하면, “목사님, 예수님이 전해지기 전에 살던 사람들은 어떡합니까?” 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조선시대 말기에 예수님이 전파되었는데, 그 이전에 살던 사람들 예수님이 전해지기 전에 살던 조선시대 사람들, 고려 시대 사람들,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전해지지 않았는데, 그 사람들은 억울한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아야 돼요. 뭐냐 하면, 예수님은 심판의 이유가 아니라, 구원의 이유인 것이고, 심판,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 하나님의 형벌의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이미 고조 시설 시대에 살던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법은 새겨져 있어요. 그들의 양심 가운데 새겨져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라고 하는 그 양심의 법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등기우편으로 다 배달되어 있어서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그 하나님의 법칙을 다 알고 있는 건데, 그 법칙에 따라 살지 아니한 거예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당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망하게 되는 이유,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심판의 이유인 것이고, 예수님은 치료제입니다.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치료제를 만들어주셨는데, 그 치료제 때문에 우리가 그 예수님 때문에 그 영원한 진노의 형벌 가운데서 치료받고 구원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법을 모른다고 자신의 양심을 억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난 몰라. 모른다. 나는 하나님 안 믿는다.” “하나님의 법칙, 나 모른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억눌러서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고 그렇게 우기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그런데 사실, 등기 우편도 일부러 안 받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예전에 우리 교회가 저쪽에서 이쪽으로 이사 오면서 보증금을 받아야 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주인이 보증금을 다 준 게 아니라 500만 원은 안 주고 나머지만 준 거예요. 그래서 “나머지 500만 원도, 잔금을 다 주세요. 보증금 다시 돌려주세요.” 하는데 안 돌려주는 겁니다. 곤란하게 됐습니다. 500만 원, 안 주니까, 그걸 어떻게 받아내야 되는가? 굉장히 곤란한 상황이 되어서, 할 수 없이 법률적인 행위를 들어가게 됐습니다. 어떻게 해야 됐을까요? 등기 우편을 보낸 겁니다. “맨날 며칠 며칠까지 잔금을 채무 채무를 갚으십시오.”하고 편지를 등기우편으로 보냈어요. 그러니까 그분이 등기우편을 접수를 해야 되는데, 안 받아버려요. 수취 거부를 해버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수취 거부. 그런데 다 해결됐어요. 수취 거부를 한다고 해서 모르는 게 아니에요. 알고 있으면서도 억누르는 거죠.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겁니다. 하나님의 양심의 법이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새겨져 있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데, 사람들이 그 양심을 누르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법칙을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수취 거부를 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그 누구도,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을 몰랐다고 핑계댈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법칙을 몰랐다고 핑계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수취 거부해봤자, 그것은 핑계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자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아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이 세상에 착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알게 된 사실입니다. 목사님은 괜찮은 줄 알았더니, 순 엉터리에요. 오히려 성범죄도 저질러요. 저 스님들은 괜찮은 줄 알았더니, 순 욕심꾸러기예요. 저 정치인은 깨끗한 줄 알았더니, 뒤로 뇌물을 받아 먹어요. 저 사람은 깨끗한 줄 알았더니, 저 사람이 뒤에서 나쁜 짓을 하고 있어요. 우리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서서 나는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기에, 심지어 이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그 예쁜 꼬마 아이들의 마음 가운데도 자기 형을 미워하고, 죽이도록 미워하는 그 마음이 그 꼬마 아이의 마음속에 들어 있고, 엄마 아빠의 말을 몰랐다고 거짓말하는 그 악한 심정이 우리 꼬마 아이들의 마음 가운데 있고,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법에 완벽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법에서부터 멀리 떠난, 진노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할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알러지에게 알러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이 약을 먹으면 알러지에서 낳을 수 있다고 하는 그 증상을 줄일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놀라운 소식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당할 하나님의 진노를 그 몸에 대신 지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줄로 믿습니다.

11월은 감사의 달인인데요. 우리는 무엇을 감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종종 물질적인 것,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을 헤아려보고, 그것이 있으면 기뻐하고, 그것이 없으면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기뻐해야 될 것, 우리가 정말로 감사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영원한 진노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때, 늘 감사와 기쁨이 넘쳐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귀신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오직 너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생명을 얻게 된 것,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얻게 된 것 자체가 감사한 일임을 기억하면서, 늘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게,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이 전달되고,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