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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지 않은 수고 (고전 15:55-58)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사람들마다 그 경험에 따라 그것이 약간 다를 수가 있겠는데요. 불이 가장 무서운 것일까요? 어쩌면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는 불이 가장 무섭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십 년간 쌓아놓았던 것들도 한순간에 앗아가 버리는, 그런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는 게 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쩌면 물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물속에 들어가 버리면, 모든 것을 삼켜버리면 꼼짝도 할 수 없는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물을 제일 무서워하는 거죠. 어쩌면 공포가 가장 무섭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공포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마음 가운데 공포심이 들어가게 되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쩌면 공포가 제일 무서운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소문이 가장 무서운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떤 한 사람을 매장시켜 버리기에 충분한 것이 소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국회의원 선거를 앞에 두고 있는데,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나서던 사람들도, 악의적인 소문 때문에 도중에 낙마해 버리는 경우를 우리가 많이 보았습니다. 그만큼 소문이라고 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이것이 완전히 우리가 대처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을 이겨낼 방법들이 충분히 있는 것이죠. 불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물로 끌 수가 있는 것이고, 소화기를 통해서 그 불을 제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배를 타고 가면 안전할 수 있겠고, 수영을 하거나 아니면 구명조끼를 입으면 그 물에서도 건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죠. 공포심이 아무리 무섭다고 한들 우리가 마음의 수련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해 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고 하면, 공포심도 어쩌면 극복해 낼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함께함이 또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죠. 소문이 아무리 무서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진실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할 것이기에, 이러한 모든 것들이 강력하다고 해도, 사실은 우리가 다 극복해 낼 수 있는 것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정말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이 가장 강력한 것이고 가장 무서운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죽음입니다. 이것이 왜 강력한가? 왜 무서운가? 왜냐하면 그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 그리고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과학의 발달을 통해서 의술의 발달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그럴 것이 성공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죠. 예전에는 60을 사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어서 60만 살면 너무나도 좋아서 환갑잔치를 했는데, 지금은 환갑잔치를 잘 안 하잖아요? 그러나 아무리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세월 앞에 장사가 없고, 그 누구라도 그 죽음 앞에서는 손을 들어야만 하는 것이기에, 가장 강력한 것, 가장 무서운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죽음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나는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손들어보십시오. 없을 겁니다. 저도 안 됩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 최고의 갑부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피해 갈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오늘날 최고의 권력자가 누구인가요? 푸틴이 가장 최고의 권력자입니까? 누가 큰 권력자입니까?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어쩌면 가장 강력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가장 무서운 게 있다고 하면 죽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인해 잃게 된다고 한다면 슬프죠.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아있다고 한다면 소망이라도 있잖아요? 아무리 실패했어도, 아무리 불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아무리 엉망징창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목숨이 붙어 있다고 한다면, 소망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목숨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잠시 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렇게 슬프지 않을 수 있어요. 약간 슬프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절망적이지는 않는 겁니다. 예전에 제가 미국의 우리 두 딸아이를 보러 가기 때문에 잠시 헤어진다고 했을 때, 슬퍼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고요. 아무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올 거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국에 가서 우리 딸아이들하고 잘 지내다가 이제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도, 우리 딸아이들은 밝은 웃음으로 인사하면서 잘 가라고 그랬습니다. 헤어지는 것이 약간 슬프긴 하겠지만, 그러나 죽는 게 아니고 통화도 할 수 있고 얼굴 화상통화를 할 수도 있고 또 언젠가 또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이 슬픈 것은 그러한 소망이 없기 때문이죠. 다시 옛날처럼 행복한 시간, 다시 옛날처럼 소소한 것을 나눌 수 있는 그 시간, 그 행복한 그 시간을 다시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슬픈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시 무엇인가를 도모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죽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그 죽음 앞에서는 위로할 말이 없는 것이죠. 그 무엇으로도 위로하여 줄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죽음으로 인해서 수많은 보상을 얻게 되었다 한들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1세기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바울 사도가 쓴 편지 가운데 있는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게 된 그런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슬픔을 당하고 있었을 때, 그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더 힘들게 만들고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이 있었는데요. 그건 무슨 어떤 사람들이었냐면, 죽음으로 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난 다음에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죽으면 끝이야. 죽으면 부활 같은 게 없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사두계파 출신이었을 거라고 추측이 가능한데요. 당시 1세기에 유대교 내에 있었던 여러 종파들 가운데 바리새파 같은 경우는 부활을 받아들였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영생을 믿고, 천사의 존재를 믿고 하늘과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고,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믿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라고 한다면, 하지만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죽으면 끝나는 것이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고, 흙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고, 더 이상 아무것도 그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바로 사도계파 사람들이었는데, 그 사두개파 사람들 출신들이 고린도교회 내에서 아마도 이 죽음을 경험한 그런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죽으면 끝이다. 아무것도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을 향해서 오늘 그리고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2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사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교회인데, 그 교회 안에서 우리 성도의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오늘 책망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는데, “왜 우리 성도의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왜 우리가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말하면서 강하게 질책하면서, 우리 성도들도 부활할 거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 말씀에서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무엇이냐? “첫 열매와 같은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부활은 마치 첫 열매와 같아서, 첫 열매가 맺히고 나면 그 뒤에 똑같은 열매가 계속해서 다 열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한다면, 첫 열매로서 부활하셨다고 한다면,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에게 삶 가운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 뒤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담대하게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그리고 우리도 부활할 거라고 하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무 과도하게 절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 말씀에서 이렇게 권면해 주고 있는데요.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여기서 자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인데요. “죽은 자들에 관하여는”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죽음을 잠에 비유하고 있는데,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잠을 자면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가 다시 일어날 거라고 하는 사실을 말하면서, 자는 자들이라고 비유하고 있는 것이죠.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불신자들은 죽음을 만나면 절망적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무엇을 소망하며 살 수 있는가? 우리가 다시 살아나서 다시 만날 거라고 하는 그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이겨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잠시 떨어지는 것으로 인해서는 슬퍼하지 않잖아요? 그죠? 우리 자녀들을 군대에 보낸다고 한다면, 그 군대를 보낼 때 부모의 마음에 슬플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절망하지는 않아요. 왜 그렇죠? 군대 가서 끝이 아니고 어떻게 되죠? 다시 돌아옵니다. 얼마 안 있으면, 다시 올 거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에, 군대에 보낼 때 약간 눈물을 흘릴 수는 있지만, 절망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끝이 아니라, 다시 만날 거라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완전히 절망하지 않는 것이죠. 만일 우리들의 자녀를 멀리 유학을 보낸다든가, 만일 어느 먼 곳으로 보내게 된다고 한다면, 헤어짐이 아쉬울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완전히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다시 만날 거라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보았을 때 완전히 절망할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고 하는 것도 잠시 떨어지는 것이고, 잠시 잠자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우리가 다시 만날 거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완전히 절망하거나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기다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가장 무서운 것, 가장 강력한 것이 죽음이 아니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크리스천들에게는 하나의 과정이고 천국으로 가는 문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 그것이 엄청나게 무서운 것 엄청나게 우리의 절망으로 몰아놓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고린도전서 15장 55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바울 사도는 지금 사망을 앞에 두고, 마치 사망이 사람인 것인 양, 사망을 향해서 도전하고 있는 것이죠. 사망을 향해서 말을 걸고 있는데,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냐 하면, “사망아, 네가 그렇게 강력하다며? 사망아, 그렇게 네가 대단하다며? 그렇게 무섭다며? 어디 너의 승리가 무엇이야? 한번 보여줘 봐. 너의 그 독침이 어디 있어? 한번 보여줘 봐.” 이야기하는 것이죠. “아무것도 아니잖아?”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오늘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이 고린도전서 15장 55절을 보면서, 마치 이것은 그 옛날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서 있는 장면과 비슷할 거라고 연상해 보았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 앞에 골리앗이라고 하는 장군이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골리앗이 너무나도 엄청난 거구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사람과 맞붙어서 싸워서 이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나가면 죽을 것 같고, 나가면 완전히 멸망당할 것만 같아서, 그 골리앗 앞에 나갈 수 없어서,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면서 무서워서 숨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세워놓았던 사울 왕도 그 골리앗 앞에 나갈 수가 없어서, 다들 벌벌 떨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누가 나타났습니까? 다윗이 나타난 거죠. 어린 소년 다윗이 나타나서 그 골리앗 앞에 나가는데, 그 골리앗을 보면서 무서워하거나 쫄은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나가는 거예요. 담대하게 나가면서, 이 다윗이 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너는 칼과 창을 앞세우고 나오는데, 그게 무섭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야. 너의 승리가 무엇이야? 너의 독침이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지금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은 무엇이에요? 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 앞에 간다. 그 골리앗을 보면서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나갔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죽음이라고 하는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며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너의 승리가 무엇이냐? 너의 독침이 무엇이냐?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하면서, 담대하게 그 죽음의 골리앗 앞에 서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무서워하거나 슬퍼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그 죽음을 물리치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사탄의 권세,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이 죽음 앞에서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담대해야 할, 담대할 수가 있는 것이죠. 고린도전서 15장 57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다시 부활하셔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 승리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그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유대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재판정으로 끌고 갔고, 빌라도의 재판장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유죄 판결 내리게 만든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못 박게 되었을 때, 유대 권력자들은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겼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던 그 예수를 우리가 재판에 넘겨서 완전히 죽여버렸으니, “우리가 승리했다”라고 유대 권력자들이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겠죠. “어디 감히 우리들에게 도전을 한단 말인가? 우리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가?” 이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때, 결국 예수님은 힘없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님을 보면서 완전히 그 마음이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알았는데, 십자가에 달린 것을 보니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구나.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인 줄 알았는데 순 사기꾼이었구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순 엉터리였구나. 침 뱉고 욕하면서 모두가 다 예수님에게서부터 멀어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의 개가를 불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울부짖었으나, 하나님께서 전혀 응답하지 않고, 그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끝났다.” “이제는 예수는 끝났고, 우리가 승리했다”라고 생각을 한 것이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 조그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마저도 완전히 바닥에 내팽개쳐지면서, 아무런 소망도 얻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가? 축구 경기를 하는데 90분의 시간이 흐르고, 그리고 추가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심판이 호루라기를 삑삑삑 불어 버리면, 이 팀이 이겨버린 거예요. 이 팀이 승리해 버린 거예요. 지금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많은 세계 최고의 실력을 가진 선수들도 세 번의 휘슬이 울리고 나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는 거죠. 지금은 볼을 몰고 가봤자, 넣어도 골로 인정이 되지 않는 거예요. 그냥 끝나버린 거예요. 이제 그 패배의 쓰디쓴 맛을 안고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놓인 것과 똑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순간에 이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고 모든 사람들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소망을 완전히 무너뜨려버리는 것이죠. 그런데 끝난 줄 알았는데 3일 만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늘 바라보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끝내진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승리하셨다고 하는 이 놀라운 역사적인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늘 마음속에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쫄지 마십시오.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그 모든 일들이 아무리 황당한 일이 일어나고,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그리고 이제는 끝났다 싶은 것 같은 상황들이 벌어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 앞에 다시 살아날 거라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담대하게 믿음으로 소망을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겁니다. 실패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죽음이 우리 앞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여전한 소망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다시 살릴 거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를 흔드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다가 여러 가지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 때문에 우리는 늘 당황하기도 하고, 그리고 낙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계획했던 일들이 실패로 돌아가는 일들이 많을 거예요. 꿈꾸었던 일들이 아무런 소득이 없이 무너지는 일들이 있을 거예요. 우리의 건강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일들이 생길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있을 거예요. 우리의 인생 가운데 슬픔과 아픔과 걱정들 그리고 고난들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절망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고, 심지어 죽음과 같은 상황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결국에는 우리를 다시 일으키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실 것을 소망할 수 있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무엇을 우리가 살아가야 됩니까?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 이 세상에 없어질 것에 우리가 목매달고 있을 게 아니에요. 우리의 자존심이나, 우리의 알량한 그 명예나, 우리가 이 세상에 얻을 그 조그마한 부유함이나, 이 세상의 조그마한 승리에, 거기에 연연할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썩어지고 아무런 가치가 없고 영원하지 못한 것에 우리의 희비를 거기에 다 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들이 무엇일까? 영원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시는 그런 사명들을 믿음으로 신실하게 감당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다가 우리의 수고가 막히고 우리의 노력이 중단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때로는 실패처럼 보이는 거라고 할지라도, 영원히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독일에 가면 마틴 루터가 청소년기에 머물렀던 지역인 아이제나흐라고 하는 동네에 2층집이 있는데, 그 집 앞에 조그마한 기념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한번 그 기념비를 한번 사진으로 봤으면 좋겠는데요. 이런 기념비가 마틴 루터가 청소년기에 살았던 그 생각 그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 앞에 독일어로 뭐라고 쓰여 있죠? 한번 읽고 해석 한번 해 주실래요? “und wenn ich wüßte daß morgen die welt untergeht würde ich heute noch ein apfelbäumchen pflanzen.”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내일 세계가 끝난다고 하는 것을 내가 안다고 할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그런 말이에요.

스피노자가 한 말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스피노자보다 루터가 훨씬 오래전에 살았던 인물이니까, 아마 루터가 원조일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어떻게 이 루터는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고 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했을까요? 예전에는 그 말이 잘 이해가 안 됐어요. 내일 종말이 되면 여러분 사과나무 심겠습니까? 왜 사과나무를 심어요? 놀지 왜 내일 종말이라고 한다면 아무 소득이 없는 거, 왜 할까? 잘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어요. 하지만 오늘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의 말씀을 보니까 이해가 돼요.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내일 내 목숨이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사과나무를 심는 그게 아무 의미도 없이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것을 알기에, 우리에게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시 부활할 것이고, 또한 우리의 수고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거라고 하는 사실을 알기에, 오늘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게 오늘 우리들의 자세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만 바라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절망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면, 그리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총을 우리가 기억한다고 하면 오늘 우리도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이 부활의 소망을 날마다 날마다 기억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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