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존중하는 믿음 (롬 14:1-6)

지난 수요일날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요. 그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결과를 보고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흡족하셨습니까? 아쉬웠나요? 화가 나셨나요? 아마 사람들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입장과 생각에 따라, 똑같은 결과라고 해도 느낌이 아마 다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르면, 그러면 그 생각이 다르다고 하는 것 때문에 서로 의가 상하고 마음이 갈라지는 경우를 우리가 많이 보게 되는데요. 특히 정치의 경우에 그런 모습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지지하는 그런 정치적인 입장과 다른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죽이고 싶기도 하고, 미웁기도 하고 때로는 증오스러운 마음들이 들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고 하면 그것은 정치가 우상의 자리에 올라가 버린 결과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우리들에게 유익한 우리의 종이 되어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버리면 우리가 정치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그래서 그 정치가 우리를 이끄는 대로 분노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잘못된 그런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경향들이 많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진단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좋은 것들이 우상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좋은 그것이 혹시나 내게 우상의 자리로 올라가지는 않았는지, 우리 자신을 진단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예를 들면 축구 경기나 야구 경기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있고 그래서 그 팀이 잘하면 기쁘고, 지면 속상하기도 하고, 그렇게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있어서 그 팀을 사랑하기도 하고 열렬하게 응원하고 하는 것들은 좋은 것일 겁니다. 무엇인가에 대해서 열정을 가질 수가 있고, 무엇인가에 대해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들의 삶 가운데 기쁨이 되기도 하고 활력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하지만 그 팀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도 지나친 나머지 우상이 되어버린 나머지, 상대편 선수나 상대편 응원단을 향해서 폭력을 행사하고, 그리고 싸우고 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스포츠가 우리들에게 우상의 자리로 올라가 버린 결과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안타깝게도 정치는 너무나도 쉽게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나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증오하기도 하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선과 악에 대한 구분이 사라져 버리고 정상적인 판단마저도 불가능해져서, 우리 편이라고 하면 그 어떤 잘못을 해도 다 용납이 되고, 우리 편이 아니라고 한다면 조그마한 잘못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난하게 되는, 그런 비정상적인 사고를 하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짜 뉴스가 있어도 그것의 진실성 여부를 따져보지 않은 채, 무조건 열광하거나 흥분하고 또는 또는 분노하기도 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래서 혹시라도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우상이 되지는 않았는지 우리 자신을 신중하게 진단해 볼 필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번 총선 결과를 보면서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너무나도 아쉬운데 동서가 극명하게 갈렸다고 그런, 그래서 너무나도 안타깝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향해서 이렇게 나뉜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상적인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쪽 편이 있으면 저쪽 편이 있고, 사람의 생각이 이쪽 생각이 있는가 하면, 저쪽 생각이 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나뉘어지는 것, 우리나라가 어느 한쪽으로만 쏠려버리는 것보다 의견이 나뉘어지는 것이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쁜 단계가 되는 것은 어떤 단계냐 하면, 그렇기 때문에 서로 증오하고 미워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고 하면 그것이 나쁘게 되는 것이죠. 나쁜 정치인들은 우리 시민들을 노예로 삼아서, 정신적인 노예로 삼아서, 그래서 자기편을 위해서 증오하게 만들고 폭력을 조장하기도 하면서, 그래서 자신들의 열렬한 지지자로 끌어모으려고 하는 그런 나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하지 않아도 주변에 여러 가지 주변 단체들을 통해서 증오를 조장하면서, 그래서 표를 모으려는 나쁜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스포츠를 통해서 좀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데요. 서로 경기를 하고 난 다음에는 서로 상대편 선수와 같이 안아주기도 하고 악수도 하는 그러한 모습들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혹시라도 이런 우상화가 되지는 않았는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우리에게 우상이 되어서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늘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이 정치의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에서도 비슷하게 발생하곤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적 입장이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 입장과 다르게 될 경우에,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고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요. 그런데 내 신앙적인 입장을 너무나도 고수한 나머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신앙적 입장에 대해서 비난하기도 하고, 증오하고 그리고 싸우게 되는 그런 경우가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이 발생하는지 모릅니다. 만일 그런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면, 역시 신앙도 우상화의 단계로 들어간 것이 아닌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죠. 나와 신앙적인 입장이 같지 않다고 해도 멸시하거나 증오하거나 싸우는 일이 있어서는 되지 않는 것이죠.


오늘 읽은 우리가 살펴본 로마서 14장 말씀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해 주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에는 두 부류의 신앙적 입장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특별히 음식 문제였는데요. 음식 중에서 우리가 어디까지 먹을 수 있는가의 문제로 로마 교회 안의 사람들의 생각이 나뉘었습니다. 한쪽의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한 편의 반대파 사람들은 “아니다. 고기를 우리가 먹을 수 있다.” 충분히 먹을 수 있다고 주장을 했는데요. 왜 이것이 큰 문제가 되었을까요? 왜 고기를 안 먹으려고 했었고, 또 먹자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먹는다고 주장을 했을까요? 먼저 고기를 안 먹어야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의 그 논리적인 근거는 이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이방 나라에서 고기를 잡으면 먼저 우상의 재단 앞에 그 고기를 바치고 먼저 우상에게 드린 다음에 그 고기를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죠. 그러니까 시장에서 그 고기를 산다고 한다면, 아마 열에 아홉은 다 우상에게 먼저 바쳤던 고기가 이 시장에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이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하는 이 성도들이 시장에 가서 고기를 사 왔다고 한다면, 과연 이것을 먹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정말 믿음을 온전히 지키고자 하는 그런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기를 먹는다고 하는 것은 그 고기를 바쳤던 우상에게 절하는 행위에 동참하는 것과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우상에게 먼저 바쳐진 이 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만 예배해야 되는데, 우상에게 절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성경적인 근거가 아주 뚜렷하고 그럴듯한 주장일 것 같습니다.


특별히 다니엘서 1장 8절 말씀에 보면 다니엘이 바벨론에 갔을 때 어떻게 했는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요.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에게 드린 이 음식이 한편으로는 먹어도 되는 정한 것과 먹지 말아야 될 부정한 것이 섞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고, 뿐만 아니라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이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성경 다니엘의 믿음을 본받은 그런 성도들이 우리가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라고 강하게 주장한 것이죠.


그런데 고기를 먹어야 먹어도 괜찮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근거에서 먹는다고 이야기를 했을까요? 왜냐하면 “이 우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우상이 신이냐? 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세상의 우상들은 전부 가짜일 뿐이고, 진짜 신이 있는 게 아니라, 순 가짜일 뿐이니, 우상에게 바쳤다고 한들, 그것이 진짜, 가짜. 진짜 신이 그 재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무런 신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누가 준 것인가 누가 줬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신 것이고,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믿고 받아들이고 먹는다면 무엇이 문제겠느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먹는 게 맞습니까? 안 먹는 게 맞습니까? 먹는 게 좋아요? 맛있으니까! 디모데전서 4장 4절 말씀 가운데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함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 게 없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다 선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는 그런 믿음으로 받는다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아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입장 중에서 안 먹는 것이 성경적인 교훈일까요? 먹어도 된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더 나은 생각일까요? 어느 생각이 더 나은 생각이겠습니까? 헷갈리시죠? 헷갈립니다. 왜냐하면 둘 다 맞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상에게 바친 것을 먹는 것은 우상에게 참여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본다면 우상이 내게 준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둘 다 다 논리가 있고, 둘 다 근거가 있는 성경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에 둘 다 맞는 겁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이렇게 생각하면 이게 맞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게 맞는 것이죠.

성경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진리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전혀 타협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우상에게 예배하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것은 절대 불변하는 타협 불가한 그런 절대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예배해야 되는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해야 된다. 하나님께만 섬겨야 된다. 하나님만 섬겨야 된다고 하는 것은 그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 불변의 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은 신사 참배를 강요받았을 때, 목숨을 내놓을지언정 우리가 신사 참배를 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믿음을 지켰던 것이 우리 선조들이었는데요. 그 모습 그 믿음이 제대로 된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됩니까?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해야 합니까? 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성시교독을 해야만 하나요? 성시교독을 안 해도 되나요? 찬송가를 한 장만 불러야 되나요? 여러 장 불러야 되나요? 찬송을 부를 때는 찬송가에서만 불러야 됩니까? 아니면 복음선가도 부를 수가 있습니까? 11시에 예배를 드려야 됩니까? 12시에 예배를 드려야 됩니까? 몇 시에 예배를 드려야 됩니까? 한국에서는 보통 11시 예배, 9시 예배, 8시 예배 이렇게 하지만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보면 어떤 교회는 11시 7분 예배 이런 것도 있었어요. 예배를 몇 시에 드려야 되는가 예배드릴 때,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 정장을 입어야 하는가 평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 아니면 우리가 예배 시간에 개혁 개정 성경을 읽어야 되는가? 아니면 현대어 역본 성경을 읽어야 할 것인가? 주기도문 사도신경이 있는데 새로 번역한 걸 할 것인가? 옛날 번역을 할 것인가? 세례를 준다고 하면 침례를 줄 것인가? 세례를 줄 것인가? 정치 제도를 쓴다고 하면 감리교 제도를 쓸 것인가? 장로교회의 제도를 쓸 것인가? 회중교회 정치를 쓸 것인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것이 옳은 어떤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이것이 채택될 수도 있고 저것을 채택할 수도 있는 가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들을 바라볼 때 이것이 타협 불가한 절대적인 것인가? 아니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하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을 가리켜서 전문 용어로는 “아디아포라”라고 합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아디아포라”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에서 나온 말인데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아디아포라”라고 하는 말이 무엇이냐면, 성경에서 분명하게 명령하지도 성경에서 분명하게 금하지도 않은 비본질적인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아디아포라”라고 합니다. 아주 본질적인 것은 뭐라고 할까요? “디아포라”라고 해요. “디아포라” 반대말은 “아디아포라” 그래서 이 비본질적인 것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디아포라”인 것인데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항상 질문을 던져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이게 절대적인 것인가? 타협 불가한, 아주 우리가 반드시 고수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상황에 따라서, 바뀔 수 있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비본질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항상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 것이죠.


안타까운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성경적인 근거를 가져다 대기 때문에 모든 게 다 절대적인 것인 양 착각하기 쉽다는 겁니다. 그래서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놓고서 엄청나게 싸우는 거예요. “이것만이 정답이다. 이게 진짜다.”라고 하면서 서로 강요하고 싸우다가, 교회가 박살이 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왜냐하면 조금 전에 음식 이야기도 마찬가지지만, 그 음식을 먹는다, 고기를 먹는다 안 먹는다고 할 때 그냥 “맛있으니까 먹는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근거를 대면서 안 먹는다고 했거든요. 성경적인 근거를 대면서 먹는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꼭 절대적인 것처럼 보여요.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이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런 상황에서는 저럴 수도 있는 비본질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4장 1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어떻게 하되?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다고 한다면,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 거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연약한 자는 신앙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다른 성경 구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 그러면 믿음이 아직 미성숙한 자를 가리키는 것이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연약한 자는 누구를 가리키냐 하면, 음식 문제에 있어서 “아, 이거 먹으면 안 되는데, 저거 먹으면 안 되는데”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어쩌면 강심장파 약심장 파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까요? 강심장 파는 고기 까짓 껏 먹어도 괜찮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까 담대하게 먹으라고 하는 것이 강심장파라고 한다면, 이거 먹으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 이것을 먹으면 안 되는데 하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약심장 파라고 할 수 있겠는데, 로마서 14장 1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강심장파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 약심장파들을 어떻게 해라? 받아들여라! 그들을 비판하지 마라, 멸시하지 마라. 그들을 무시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못 먹어? 이 바보 같은 사람들! 그것도 몰라?” 하면서, 그렇게 그들을 무시하고 싸울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먹지 못하는 것을 인정해 주고 존중하면서, 나는 먹어도 그들이 안 먹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고 그들을 용납해 주라고 하는 말씀이 로마서 14장 1절의 말씀인 것이죠.


그렇게 할 때 우리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수많은 분열들이 지금까지 많이 있어 왔습니다. 세계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고, 특별히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지금까지 수많은 분열이 있어왔어요. 그 수많은 분열의 현장 가운데 교회가 갈라지는 모습들을 친히 경험한 우리 어르신들이 계실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 분열들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 정말 중요한 타협 불가능한 진리 때문에 교회가 분열한 것처럼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알고 보면 비본질적인 것 때문에 갈라선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하는 것으로 서로 싸우는 겁니다. 마치 정치인들이 싸우듯이 우리 성도들끼리 서로 비난하면서 서로 싸우다가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갈라져 버린 것이죠.

이렇게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간절하게 기도한 기도의 제목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셨어요. 요한복음 17장 20절에서 21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오.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을 위해서 주님께서 기도하셨던 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죠?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우리 교회가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성도들이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까? 다 통일해 버리면 하나가 되나요? 아니요. 세 아들을 둔 아빠의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자, 우리 저녁 밖에 나가서 먹자. 뭐 먹을래?” 그랬더니 세 아들의 의견이 다 다른 거예요. 그럼 뭘 먹어야 됩니까? 새 아들의 의견이 다 달라요. 결국 이걸로 통일 그랬더니, 하나가 됐나요? 하나가 된 게 아니고 삐져서 자기 방에 들어가는 거예요. 획일화를 시켜버리면 하나가 되는 게 아니고, 우리 생각에 맞추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되는가? 자기가 먹고 싶은 거 먹으면 돼요. 짜장 먹을 사람은 짜장 먹고 짬뽕 먹을 사람은 짬뽕 먹고 자기가 먹고 싶은 것 먹으면, 나는 이것을 먹지만 너는 그것을 먹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해 주고, 그래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인정해 줄 때, 그때서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그들을 강제적으로 하나의 입장으로 통일시켜 버리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마음이 나뉘게 되는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결과로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며 서로가 선명성 경쟁을 하면서 자꾸만 분열해 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느냐? 선명성 경쟁을 하면서 너희들처럼 섬기면 안 된다, 우리처럼 섬겨야 된다고 하면서 교회가 자꾸 나뉘고 있는데, 과연 이것이 정말 우리가 붙들어야 될 타협 불가한 절대적인 진리인지, 아니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비본질적인 것 “아디아포라”라고 하는 것인지 구분해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취미생활이 제일 좋은가요? 낚시 가는 게 제일 좋은 취미입니까? 바둑을 두는 게 좋은 취미인가요? 독서하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게임하는 게 좋습니까? 골프 하는 게 제일 좋습니까? 어느 게 제일 좋죠? 자기가 좋아하는 거 하면 됩니다. 남이 좋아하는 것은 그냥 인정해 주면 되는 것이죠. 좀 신앙의 문제는 좀 복잡해요. 취미의 문제과는 좀 달라서 이 신앙적인 문제는 성경에 근거를 가져다 댔기 때문에 이 “아디아포라”의 문제가 마치 본질인 것이라는 생각이 되어서 서로 싸우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우리가 오늘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와 다른 약심장을 가진 그런 사람들 무시하거나 깔보거나 멸시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그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늘 마음속에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4장 5절 말씀에서는 이번에는 날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낮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어떤 사람은 주일날이 제일 좋다고 그랬어요. 그날이 거룩한 날이라고 했어요. 어떤 사람은 일주일 내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선물이니까, 모든 날이 다 똑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서로 싸우지 말고 서로 인정하고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하는 걸 인정하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주변에 있는 나와 다른 생각, 나와 다른 방식, 나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증오하고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을 용납해야 할까요? 나와 다르다고 하는 것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고 욕하고 배척할 게 아니라, 나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용납하고 받아주어야 되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가 있겠는데요. 첫 번째는 우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서로 싸운다고 한다면 우리는 피차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싸우면 망하는 거예요. 그것이 정당이든 직장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어느 공동체든 싸우면 망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부터 15절의 말씀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어떻게 할까?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싸우면 망하는 거예요. 싸우면 이기는 게 아니라 같이 망하는 거예요. 피차 망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교회 안에서 분쟁이 우리가 진리를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길이 아니라, 그것은 사탄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주는 갈라치는 영이에요. 우리를 망하게 만들기 위한 사탄의 속임수를 사탄이 우리에게 악한 마음을 주어서,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거룩의 열망을 주어서 우리가 더욱더 진실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주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미워하고 증오하게 만들어서 결국 갈라지게 만들고 무너지게 만드는 것이죠. 수많은 교회가 이런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망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이러한 사탄의 속임수에 우리가 빠져들어가면 안 되는 겁니다.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입장이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그리고 인정해 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할 텐데요.


문명사 연구학자인 월 듀런트라고 하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대 문명은 외부로부터 정복되기 전에 먼저 내부에서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 월 듀런트라고 하는 사람은 유명한 문명사 연구가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문명들이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고, 그리고 그 문명이 어떻게 망하게 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연구해 와서, 그 연구한 이 사람의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문명은 왜 무너졌는가? 왜 망했는가? 외부의 공격에 의해서 망한 게 아니라, 내부로부터 먼저 붕괴됐고, 그 내부적인 붕괴가 외부의 공격으로 인해서 망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피차 물고 먹으면 나는 이기고 저 사람이 죽는 게 아니고 피차 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정해야 하는 것이죠.


두 번째로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을 용납해야 됩니까? 내 생각과 다르고 내 가치관과 다르고 내 입장과 다른 사람을 왜 용납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35절의 말씀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고, 사랑을 하는 것이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 그게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그래야 됩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을 용납해야 됩니까?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주인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판단할 자격이 없어요. 나는 비판할 자격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내 하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14장 4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누구에게 있음이라? “주께 있음이라.”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내가 주인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 사람이 주인인 것이고, 우리는 같은 동료일 뿐입니다. 그런데 동료인 우리가 동료를 향해서 판단하고 비판하고 그들을 정죄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누구의 자리로 올라간 거예요?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는 교만함을 보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형제를 비판하고 용납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는 교만함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남의 하인 하나님의 하인을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로 우리는 왜 이웃들을 용납해야 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납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장 3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없신 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하나님께서 받아줬는데, 하나님께서 용납해 줬는데 왜 우리가 용납하지 못하냐 왜 비판하느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가 용납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왜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을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완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아준 게 아니라, 우리는 죄가 많고 허물이 많아서,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영원히 지옥에 처넣어도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았기에, 오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정죄하고 비판하고 물리칠 것이 아니라 멸시할 것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이고 용납하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