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카테고리:] 수요예배 설교

불을 품으면 (잠 6:20-35)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음행에 대해서 경고하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잠언서를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있는데, 특별히 음행에 대해서 경고하는 말씀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잠언서의 여러 교훈들 교훈해야 될 여러 주제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별하게 음행에 대해서 또 말하고 또 반복하고 또 강조해서 교훈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이 음행의 죄라고 하는 것은 언제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빠지는 죄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걱정이 없다” 할 사람이 없는 겁니다. 여건이 주어지게 되면, 조금만 상황이 바뀌게 되면, 이러한 죄로 빠질 수 있는 가능성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우리가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될 문제가 바로 이 음행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서는 특별히 이 말씀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2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내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내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제가 예전에 설명을 드린 것처럼, 이 표현법은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같은 내용 말을 반복하는 방식의 표현법을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20절의 말씀 가운데서 보면, 아버지의 명령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어머니의 법에 대해서는 떠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법이 있고, 어머니의 법이 있는데, 아버지의 법은 지키면 되는 것이고, 어머니의 법은 떠나지 말아야 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해입니다. 이것은 히브리 평행법적인 표현으로서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지키며 떠나지 말라. 다시 말하자면, 우리 부모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을 떠나지 말고 꼭 지켜야 된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법을 지키며,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말라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21절 말씀에서는 그 아버지의 법, 어머니의 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된다고 하는 말씀을 21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메라” 이것도 역시 히브리 평행법적 방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데요. 네 마음에 새기고 네 목에 매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다른 종류의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이중적으로 표현하는 그런 표현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내용이 좀 특이합니다. 내 마음에 새겨라. 마음의 새겨라고 하는 겁니다. 마치 돌에다가 이름을 새기듯이, 나무에다가 이름을 새기듯이, 그리고 어떤 곳에 하나의 이름을 새기듯이,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마음속에 새겨서 지워지지 않도록 새겨서, 그것이 끝까지 남아 있도록 하라고 명령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목에 걸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잃어버리는 것들은 어떻게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하죠? 목걸이를 합니다. 요즘 목걸이를 하는데, 무엇을 목걸이로 하죠? 입마개를 마스크를 목걸이를 겁니다. 왜냐하면, 이 마스크를 벗었다 썼다 벗었다 썼다 해야 되는데, 벗어놓으면 어디로 도망갔는지 찾을 수가 없으니까, 이 벗어놓은 마스크를 다시 한 번 그냥 쉽게 찾아서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목걸이를 만들어서 목걸이에 걸면, 언제든지 쓰고 싶을 때, 다시 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목걸이라고 하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다시 한 번, 언제든지 생각날 때마다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 목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안경도 우리가 목걸이를 달아가지고 보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늘 안경을 쓰기 때문에 목걸이를 사용하지 않지만, 제 아내는 평상시에는 안경을 쓰지 않다가, 그런데 글을 읽을 때만 안경을 쓰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안경을 어디다 뒀는지 늘 찾습니다. 저는 늘 쓰고 있으니까, 찾을 일이 없지만, 제 아내는 안경을 늘 벗고 있다가 책을 읽을 때 전화기를 볼 때, 그때 안경을 써야 되기 때문에, 그때 안경을 찾게 되는데 안경이 도대체 어디다 놔뒀는지 화장대 위에다 놔뒀는지, 화장실에 놔뒀는지, 냉장고 속에 나뒀는지 모르니까,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요즘은 목걸이를 달아가지고 목거리에다 차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갖다 쓰는 것이죠.

그런 것을 설명하면서, 오늘 말씀은 무슨 말씀을 하냐면,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또 우리들의 목걸이에 걸어두라라고 이렇게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연인들이 먼 곳에 여행을 가게 되면 그곳에 있는 나무나 바위에다가 이름을 새깁니다. 철수 영희 그리고 하트 모양을 그리면 너와 나의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의미에서 바위에다가 그 이름을 새기고, 사랑을 새기면서, 영원히 변치 말 것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도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마음판의 세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마음판에 새기고 그리고 목에 걸라고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목에 걸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말씀인데, 그것을 어떻게 우리들의 마음속에 새길 수 있고, 어떻게 우리들의 목에 걸 수가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안경이나 마스크 같은 거 경우야, 우리가 보이는 물질이기 때문에, 그냥 목걸이를 만들어서 걸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우리들의 목에 걸 수가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그 이 말씀을 이해할 때, 아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서 그 적은 말씀을 머리 이마에 달고 다니고 혹은 그렇게 적은 그 말씀을 옷 소매에 달고 다니면,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그런데 그렇게 달고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어디다 잘 적어놔라. 어디다 적어서 가지고 다녀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그 말씀을 항상 마음속에 기억하고 언제 어디서든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에 따라서 행동하라고 하는 그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인 줄로 믿습니다.

요셉이라고 하는 젊은 청년이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서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미혹하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고 있을 때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의 이마에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고, 그리고 옷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늘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늘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내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서 범죄의 길로 가지 아니하고, 그 음란한 여인에게서부터 도망쳐 나올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리고 목에 걸라고 하는 얘기는 우리가 써갖고 다니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써가지고 어디다 붙여가지고 다니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깊이 늘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는 그런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2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걸게 됐을 때, 유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역시 히브리 평행법적인 표현으로, 세 번에 걸쳐서 나누어서 이야기합니다.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할 것이다. 네가 잘 때, 너를 보호해 줄 것이다.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새기게 되면 그 유익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해 준다고요? 보호해 준다라고 오늘 22절 가운데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보호해 준다고 하는 말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부적을 아마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부적이라고 하는 게 뭐죠? 부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당이 써준 어떤 글씨를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면, 그 부적이 나를 재앙으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부적을 내가 가지고 다니게 되면,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게 해 준다라고 생각하면서 다니는 거죠. 요즘 보니까 뭐 부적 같은 걸 손에 써가지고 다닌 사람이 있어서 난리가 나던데요. 우리 한국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부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내가 써가지고 가지고 다니면, 그것이 나를 보호해 줄 거다. 이것을 내가 들고 다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가리켜서, 부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너희가 만일 그 하나님의 말씀을,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마음속에 새기게 되면, 그것이 너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런 부적과 같은 의미로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부적과 이 말씀과의 큰 차이점이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적은 귀신의 힘이 나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그런 개념입니다. 하지만 잠언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들고 다니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 때문에, 그렇게 의의 길로 걸어가 하게 될 때, 우리가 해를 당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부적과 하나님의 말씀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요. 부적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이지가 못한 거예요. 악한 사람도 부적을 들고 다니면, 보호를 받는다는 그런 개념이 이 세상 부적의 개념 가운데 있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잠언서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목에 건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을 부적처럼 내가 이용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 말씀대로 도덕적으로 행할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나아갈 때, 그 하나님의 말씀 대로 사는 것이 결국은 복된 길이고, 결국은 그것이 우리가 해를 입지 않는 그런 보호받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 도덕적인 차원을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생각하고 새기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오. 훈계와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또 세 번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의 법칙은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 빛에 걸어가게 만드는 것이고, 안전하게 걷게 만드는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악한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전체적으로 보면 무슨 교훈을 하고 있냐면, 악한 여인에게 빠지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음행의 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이고요. 성적인 범죄를 결코 범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성이라고 하는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선물인데, 그것이 정당한 울타리 안에서 사용될 때는 축복이며, 하나님의 선물이 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울타리 밖에서 행사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거리가 되는 것이고, 결국 우리가 악한 여인에게, 음행한 길로 따라가게 된다고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26절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너에게 딱 떡 한 조각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음행의 결과로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인가? 완전히 가산을 탕진하게 되고 폐가 망신당하게 될 거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실 뿐만 아니라, 음행을 저지르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 음란한 여인이 나의 생명을 사냥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음행의 죄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이 아니라, 처음에는 쾌락을 위해서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음행의 죄에 빠지게 되겠지만, 그 결과가 정말 비참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을 잘 절제하고, 이러한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27절과 28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이지 아니하겠느냐?‘ 여러분 불을 품으면 어떻게 되죠? 불을 품으면 다 타버립니다. 혹시 화재를 일으켜 본 분 계십니까? 불을 불내본 적 계십니까? 불이 나는 것을 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불이 나는 걸, 불이 나는 현장에서 있어봤습니다. 제가 몇 살 때였냐면, 아마 세 살, 세 살 정도 됐을 때, 어린아이 때였던 것 같아요. 형이랑 동네 형들이랑 어른들이 없을 때, 우리 형들이랑 같이 동네 꼬마 아이들이 모여 앉아서, 저 고산읍교회 바로 옆에 있는 집이었는데요. 그 초가집으로 된 그 집에서, 타이어, 이렇게 고무 타이어, 이렇게 줄이 있는 그것을 가지고 형들이 거기다 불을 붙이더라고, 3살짜리 정도 됐으니까, 그냥 꼬마아이로서 신기해서 다 쳐다보고 있는데 형들이 그 고무 타이어에다가 딱 붙이니까, 그 불똥이 툭툭툭툭툭툭 떨어지면서, 아, 신기해요. 신기한데, 신기한 건, 단 몇 초. 조금 있다가, 조금 있다가, 그 불똥들이 튀기 시작하는데, 화장실에 지푸라기로 된 문에 옮겨붙기 시작해서, 불이 나기 시작하더니, 그 집 전체를 불을 완전히 태워버리는 그 엄청난 화재 현장 가운데, 제가 꼬마 아이였을 때 있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이 굉장히 컸었는데요.

그 불이 있으니까, 집 전체를 완전히 살라버리는 그런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잠언서에서 말하기를,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불을 품게 되면 어떻게 된다? 다 타버린다. 숯불을 밟고 서 있으면 어떻게 된다? 발이 데인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입니까? 불을 절대로 품으면 안 된다. 숯불 위에 서 있으면, 안 된다.

우리 모두는 다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음행의 죄로부터 면역된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라든지, 교회 지도자들도, 조금만 틈이 보이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무너질 수 있는 너무나도 쉬운 것이 이런 음행의 문제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조심해야 되는 건데요. 조심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조심하는 방법 불을 안 만지는 거예요. 불을 만지면 타니까, 숯불 위에 서면, 데이니까, 숯불 위에 올라가지 않아야 되고, 불을 품지 않아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결혼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성과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든지, 또한 깊은 상담을 주고받는다든지 하는 일들은 우리가 피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잘못된 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조그마한 문을 여는 것이죠. 남편과 아내 사이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 그 남편으로부터 받지 못한 그런 관심, 아내로부터 얻지 못한 그 사랑, 그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워서, 주변에 이성들에게 내 가정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점 그 불이 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런 관계 속에 들어가지 않아야 돼요. 결코 결혼의 관계를 떠난 사람과 이성 간의 그런 관계를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기 시작하면, 쉽게 모든 사람들이 넘어갈 수밖에 없는 죄가 음행의 죄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합니다.

특별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 속상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곳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끼리 해결을 해야 됩니다. 말하기만 하면 늘 싸우고, 말해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는데, 그렇게 지낼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여러분의 남편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고, 여러분의 아내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있는데 그 사랑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서툴고,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표현해서 전달하는 그런 방법들이 서툴러서, 그래서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도 하고, 잘못된 길로 갈 때가 너무나도 많지만, 그래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때가 너무나도 많거든요. 그럴 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이성과 함께 이야기하고, 그 문제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되는 거에요. 내가 기분이 나쁘면, 왜 기분이 나쁜지, 내가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면, 왜 상처를 받았는지, 어떻게 나에게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지, 서로 이야기하면서 같이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마음의 문을 조금씩 조금씩 열면서, 깊은 사랑의 대화를 해 나가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닫혔던 그 모든 것들이 사르르 녹기 시작하면서, 관계가 회복되는 일들이 있게 될 것인데, 그러한 일을 시도하지 않고, 결혼의 울타리 바깥에 나가서, 어떤 해결을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결과만을 가져옵니다. 불속에 들어가는 것이고, 다 태워먹게 되는 일들이 발생한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분명하게 조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음행의 문제 외에도, 또 하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이건 도둑질의 문제입니다. 30절에서부터 31절의 말씀을 보면, 만일 누군가가 훔치게 된다고 한다면, 힘들어서 훔쳤겠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7배나 갚아줘야 되고, 패가망신하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음행의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도둑질의 이야기를 할까요? 두 개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마음에서부터 똑같은 일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상을 섬기는 일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정당한 내 바운더리 속에 있는 정당한 내 울타리 속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울타리 밖에 있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가져와서 만족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재물을 우상으로 섬길 때 나타나는 현상이고, 그게 도둑질입니다.

그런데 이성에 관한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쾌락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어떤 성적인 만족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고, 그리고 어떤 자기 만족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울타리 안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 밖으로 나가서, 그것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둑질이나 음행이나 사실은 같은 성격의 것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넘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 앞에 기도하고 엎드려야 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하나님 저희들의 마음을 고쳐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가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넘어졌다고 한다면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훌륭한 분들이 음행의 죄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만 보더라도 다윗이라고 하는 그런 엄청난 인물도 음행의 죄에 넘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다윗이 넘어질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다 더 잘 넘어지겠습니까? 쉽게 넘어질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아, 그렇구나! 훌륭한 사람도 넘어질 수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그러기에 우리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가야 됩니다.

우리가 완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완벽하지 못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주님께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늘 마음속에 기억이 나서, 우리가 발걸음을 걸을 때, 혹시라도 불 속에 들어가지 않는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는지, 우리 자신들을 잘 살펴보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 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짓된 혀 (잠 6:12-19)

12절부터 1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량하고 악한 자는 구부러진 말을 하고 다니며, 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 하며, 그의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며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악한 자는, 누가 악한 자인가? 구부러진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구부러진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말을 가리켜서 구부러진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왜곡하는 것이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말하는 것이고, 잘못된 것을 퍼뜨리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그리고 사람들 사이를 이간하고, 그리고 악을 꾀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그런 사람이 바로 악한 자요. 불량한 자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불량한 자, 악한 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15절 말씀에 보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재앙이 갑자기 내려, 당장에 멸망하여, 살릴 길이 없으리라.” 무슨 이야기입니까? 악을 행하는 자, 불량한 자, 구부러진 말을 하는 자, 즉 왜곡하는 말을 하면서 다툼을 일으키고, 여러 가지 악을 도모하는 그런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에게 재앙이 닥치게 될 것이고, 결국은 파멸의 길로 들어가게 될 텐데, 그러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없을 것이라고 오늘 성경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면서는 정반대의 현상을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며 힘들고 어렵게 사는 반면에, 포악하고 악을 행하고 술수를 부리는 자들은 오히려 잘 나가고 아무 문제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비춰질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느끼지 않으십니까?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분명하게 기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국에 모든 것을 심판하셔서 바로 잡으실 것이라고 하는 그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믿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선한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는 재앙을 내리실 거라고 하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인데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공의대로 판단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악을 행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 마음의 양심에,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두드리시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하다가는, 내가 이렇게 악한 일을 하다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상 악한 일을 하지 아니하고 중단하게 될 것입니다.

지혜가 무엇인가?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지혜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께서 죄와 악을 범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안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악을 행하는 길을 멈출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악을 행합니다. 나쁜 짓을 하고, 또 잘못된 말을 하고, 거짓을 말하면서 사람들을 대적하고 악을 꾀하면서 이간질하고 다툼을 일으키는 그런 일들을 많이 하게 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셔!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아! 왜?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눈으로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내가 죄를 지어도 결코 하나님께서 나를 처벌하지 않을 거라고 하는 그러한 생각 때문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찬들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우리가 매 주일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마치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면, 우리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정말 힘들어지는 것이죠.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 과도하게 절망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과도하게 슬퍼하거나, 모든 일들이 다 막혀버렸을 때 정말 절망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조그마한 어려움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좌절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원수가 있으면 그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원수를 갚아주실 것이니, 그 원수를 갚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 원수를 갚아버리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악을 행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은밀하게 계속해서 죄를 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안 계시고, 하나님이 내가 이렇게 은밀한 가운데서 죄를 한다고 한다면 나쁜 짓을 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보지 않을 거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악한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악한 일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 내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더 이상 우리는 괴로워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과도하게 슬퍼할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일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라고 하는 종교 개혁을 일으킨 분이 계신데요. 이 마틴 루터라고 하는 사람이 종교 개혁의 운동을 하는데, 카톨릭의 박해가 너무나도 심해서, 그래서 그 카톨릭의 박해를 견디기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겁니다. 정말 참된 교회를 만들어보고자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된 교회를 만들어보고자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그런데 카톨릭의 세력이 너무나도 큰 거예요. 그 교황을 비롯한 추기경이나 그런 종교 권력들이 너무나도 강하게 버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종교 권력과 결탁하고 있는 세속 정부의 그 강력한 그 권세 밑에서, 너무나도 힘들고 두려워서 종교 개혁을 일으키기가 너무 힘들어서 좌절하고 슬퍼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하루는 그 마틴 루터를 일깨우기 위해서, 이런 퍼포먼스를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상복을 입고 앉아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마틴 루터가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여보, 누가 죽었어?’ 왜 상복을 입고 앉아 있느냐고 그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마틴 루터의 아내가 대답을 했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누가 돌아가셨습니까?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마틴 루터가 깜짝 놀라서, ‘아니, 이게 무슨 소리오?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하고 이야기를 하니까, 이 마틴 루터의 아내가 마틴 루터를 향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당신이 그렇게 절망하는 것이지. 왜, 그렇게 절망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한다면,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겁나며, 무엇이 슬픈 일이 있겠느냐?’고 해서 그래서 이 마틴 루타가 그때 큰 충격을 받고, 다시 종교개혁을 끝까지 밀어붙였다고 하는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행동이 완전히 바뀌게 될 것입니다. 불의한 자, 불량한 자, 악한 자들이 왜곡된 말을 하며, 또한 여러 가지 잘못을 끝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그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악을 행하게 되는데요.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매번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불신자들은 우리들의 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행동을 보는 것이죠. 우리들의 말로서는 예수님 믿으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크리스찬의 행동을 보니까,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행동으로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외치면서 행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전도가 어려운 것이죠.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그렇게 악을 행하면서 뻔뻔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그렇게 잘못을 범하면서도, 그렇게 후안무치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이 아무것도 보시지 않는 것인냥, 죄를 지으면서도 전혀 회개할 줄 모르고, 뻔뻔하게 악을 행하면서 사는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게 될 때, 세상 사람들은 비웃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이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하나 되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그렇게 서로 싸우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라고 하는 그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인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가운데, 악한 길에서부터 떠나고 왜곡된 말을 하고 잘못된 일을 행하는 길에서부터 떠나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하고 좋은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6절부터 19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여닐곱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7가지를 열거하면서, 하나님께서 정말 미워하시는 것이 이러한 것들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첫 번째는 교만한 눈입니다. 교만한 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교만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교만이라고 하는 죄가 어쩌면 가장 큰 죄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인 양,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가 열심히 수고하고 애쓴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거나 그리고 내가 수고하고 애쓴 것의 그 결과를 보면서 기쁨을 누리는 것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서, 마치 그것이 내 힘과 능력으로 된 것인냥,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내 자신이 뛰어나고 내 모든 수고와 내 모든 노력으로 다 된 것인냥 그렇게 마음을 품는 교만한 마음이 바로 교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높은 성과를 이루고 많은 것들을 이루어내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나 기쁨이 넘치는 것까지는 괜찮을지라도, 그것을 넘어서서 자신에 대한 교만한 마음으로 바뀌게 될 뿐만 아니라, 그리고 나와 같은 성과를 내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무시하고 경멸의 태도를 가지게 될 때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웃들을 본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것을 허락해 주셨다고 한다면, 그것이 왜 내게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겠습니까? 그것은 사명으로 주신 것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을 주시고 더 잘하는 것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특별한 재능과 많은 것들을 내게 허락해 주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똑똑하고 내가 열심히 하고 내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그렇게 얻었다기보다는, 물론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내게 주어진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것들을 가지고 연약한 자들을 섬기고 도와주고 사랑하라고 하는 그런 사명으로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주셨는데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주셨다고 하는 그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교만하라고 선택해 준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모든 열방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는 민족이 되게 만들도록 자신들을 통해서 모든 온 세상 열방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선택해 주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이 교만함이 되어서 다른 이방 민족에 대한 멸시와 차별로 행동했고, 감사의 마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멸시로 나아갔던 것이 바로 교만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한 것에 대한 결과가 너무나도 좋아서 기쁨이 생기는 것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러한 내가 열심히 수고한 것에 대해서 그래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 거기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는 것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넘어서서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경멸의 태도로 바뀌고, 나 자신에 대한 교만의 태도로 바뀌어 버리게 된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닐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점도 기억해야 될 것인데요. 우리가 아무리 수고하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성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될 뻔 뿐만 아니라, 성을 지키는 자의 수고가 다 헛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겸손한 마음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인데, 교만한 눈으로 교만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욱더 겸손하게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거짓된 혀를 주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거짓된 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죠.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진실을 말하게 될 경우에 내게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거짓말을 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물질이라든가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든가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우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내가 빼앗기지 않기기 위해서, 그러한 것들을 내가 계속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것들을 내가 얻기 위해서, 그래서 거짓말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진실을 말하게 되면 손해가 생기기 때문에 거짓을 말해서라도 그 모든 것들을 지켜내려고 하는 그러한 탐욕의 마음에서부터 거짓말이 나오는 겁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적군에 잡혀가서 그래서 적군으로부터 취조를 당하는데, 그 순간에 우리 아군의 모든 정보를 다 상대방에게 다 말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종종 그런 정도까지 정직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정상적인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거짓을 통해서 우리가 이익을 추구하고, 하나의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그러한 모든 잘못된 말이 그것이 거짓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거짓을 말하는 자를 미워하시며, 진짜 진실을 말하는 자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들의 말이 “예”면 “예”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는 그런 진실한 마음, 말들이 우리들의 말 가운데서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는데요. 그것은 맹세를 하는 경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은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맹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모면, 거짓을 추궁당하는 상황 가운데서 자신이 모면하기 위해서 맹세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말은 진실을 말해야 된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을 주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죄 있는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요?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잠언서의 말씀이 그 당시의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어떤 법이 있냐면 복수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복수의 법. 라틴어로 lex talionis라고 하는 그런 법이 있었는데, 그 법은 만일 누군가 우리 친족을 죽인다고 한다면, 친족 중에서 그 살인자를 찾아내어 죽여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의 누군가를 죽인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끝까지 찾아가서 그 사람에게 원수를 갚는 것은 그 당시에 법으로 보장이 되어 있는 상황인 겁니다. 그러니까 죄 살인자를 찾아가서 그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에 이 말씀이 주어진 것인데요. 그런데 그렇게 죄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 죄가 없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피를 흘리는 것은 안 된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그런 방법을 그대로 하라는 얘기는 아니죠. 오늘날에는 살인자든 살인자가 아니든 우리의 손으로 원수를 사적인 복수를 하면 되지 않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이웃을 행해야 하는 것은 아무런 죄가 없는 이웃에게 상해를 가하고 해를 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이고,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해를 입힐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를 베풀고 배려를 하고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가장 회복해야 될 그런 태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사람들이 늘 실수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면, 갑질이라고 하는 실수를 많이 합니다. 갑질이라고 하는 실수를 언제 하죠? 내가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될 경우에, 그리고 내가 어떤 권리가 있다고 생각될 경우에, 그 사람을 향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잘못, 폭력을 쓰기도 하고, 폭언을 하면서 갑질을 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믿습니까? 누군가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관공서에서 나온 사람이든 아니면 시장에서 만난 사람이든, 어디 거래처에서 만난 사람이든, 내가 식사를 하는 가운데 식당 주인 주인이 나에게 뭐 잘못을 한 것이든, 뭐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화를 내면서 분노하고 이렇게 내 화를 막 내버리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안으시기를 제발 부탁드립니다.

안타까운 것은 종종 우리 교회 교회에 찾아와서 요즘 코로나 상황이니까 코로나 상황이 돼서 코로나 확진을 방지 해보겠다고 공무원들이 나와서 교회를 점검하고 돌아가는 케이스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못마땅한 우리 교인들이 그렇게 나온 공무원들을 향해서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해대면서, 신앙의 자유를 지킨다고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전화를 걸어서 욕을 해대고 화를 내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야, 저 사람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저렇게 열정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이렇게 통쾌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절대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배려를 해야 돼요. 정말 연약한 사람 나보다 힘이 없는 사람에게도 배려해서 그들을 위하고 이해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줘야지, 우리가 갑질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악을 행하면서, 그래서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우리 교회의 재정을 맡으신 어떤 분이 있었습니다. 연세가 좀 많이 드신 분인데 은행에 가서 우리가 매주 돈을 현금을 저축하고 저축하고 이렇게 예금하고 예금하고 하는 그 일을 계속하셨는데, 그러니까 은행에 은행으로 보면 우리가 큰 고객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헌금을 많이 예치하는 것도 아니니까, 큰 고객도 아닌데 아무튼 예치하는 그런 손님은 왕이다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뭔가 가서 좀 갑질을 하고 싶은 마음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뭐 하나 서비스를 요청했습니다. 우리 한국식으로 하자면 돈, 돈을 묶는 띠를 좀 달라고 얘기를 한 겁니다. 근데 그 띠를, ‘이것은 우리가 제공하는 게 아닌데요’ 하면서 안 주는 거예요. 또 달라고 하니까, 겨우 몇 개 주니까, 기분이 나빠가지고, 그러면서 막 화를 내고 나와버린 거예요. 한국식으로 생각한 거죠. 미국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다 돈 주고 사야 되는 건데, 그런데 한국식으로 생각해가지고 그래 가지고 화를 내면서 그렇게 온 뒤로 제가 은행에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떤 교회 목사님 담임 목사님이시죠?’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런 일들이 계속된다고 한다면 우리와 거래를 끊어주시기 바랍니다. 그 은행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안타까운 일이었었는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는 그런 식으로 반응 안 할 겁니다. 아마 우리나라는 ‘너 손님한테 왜 그렇게 친절하지 못하게 했냐?’ 하면서, 아마 직원이 우리나라는 혼날 것 같은데, 그 미국에서는 오히려 그 직원을 두둔하면서 그런 손님은 우리에게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좀 창피하기도 했었고 했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좀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갑질의 향기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화내고 성질 부리고 욕하고 하는 그런 포악한 모습의 그런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의 모습들이 연약한 자들을 안아주고 배려해주고 사랑해 주는 그런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말씀 보면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선을 행하는 일에는 왜 그렇게 사람들이 미적미적거리는지 몰라요. 누가 이걸 좀 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 누가 좀 선한 일 좀 하게 할 수 있나요? 누가 좀 이 좋은 일에 참여할 수 있나요? 하면 왜 그렇게 미적미적거리는데, 악을 행하는 일에는 왜 그렇게 열정적인지 몰라요.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파멸시키는 데에는 자기 돈 써가면서 열정적으로 나서서 정말 그 열정이 식어지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끌어내리고 그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열정을 다해가면서 열심히 하는데, 선한 일을 할 때에는 좀 일해달라고 하면 아무도 나서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하는 일이 과연 어떤 일인가를 질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인가? 죽이는 일인가? 사람을 돕는 일인가? 사람을 해하는 일인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인가? 질문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악한 일이 아니라, 선한 일에 앞장서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언을 주님께서는 싫어하신다고 했는데, 재판에서 거짓 증언을 해서 무죄한 자를 죄로 만들거나, 악한 자를 아무런 죄가 없는 것으로 거짓된 증언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7번째,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 장점을 말하고, 그래서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일에 도움이 돼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단점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분열을 일으키고 이간질을 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이웃들을 볼 때 우리 교우들을 바라볼 때 단점을 보지 마시고 칭찬할 점이 무엇인가를 보시고 그 칭찬할 점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다 하나가 되고 한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일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일까 하나님께서 미워하실 일일까를 질문, 과연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가? 질문하면서 우리들의 삶의 방향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로 바뀌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해서 그렇게 하기가 어려워요. 늘 넘어집니다. 늘 쓰러집니다. 그 누가 완벽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열심히 해보려고 하지만 또 쓰러지고 또 넘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주셨습니다. 넘어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시 한 번 또 나가고 또 나가서, 하나님 실수했던 모든 죄약들 다시 한 번 회계케 하시고 씻어내게 하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게으름의 죄 (잠 6:6-11)

오늘 잠언서의 말씀은 게으른 인생을 살지 말고, 부지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살아야 하는데, 부지런히 살라고 하는 교훈을 하면서, 개미의 부지런함을 예로 들면서 배우라고 합니다.

개미는 어떻게 하는가요? 여름 동안에 예비하고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는데, 그러한 개미의 부지런함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고, 오늘 잠언서의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개미가 여름 동안에 예비하고, 추수할 때 양식을 모으는 게 정말일까요? 이게 과학적으로 맞는 이야기이고 정확한 묘사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개미가 굳이 여름이나 추수할 때, 즉 가을에만 예비하고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 개미는 사시사철 늘 열심히 모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봄에도 모으고 여름 가을 할 것 없이 겨울에도 모으고, 끊임없이 모으고 있는데, 오늘 잠언서의 말씀에서는, 그런데 특별히 뭐라고 이야기하냐 하면, 여름에 예비하고, 가을에 양식을 모은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정말로 개미가 그때에만 모으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들의 사이클을 반영해서, 우리 사람들이 이해하기 좋도록 설명하기 위한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우리 사람들은 주로 언제 일을 하고 모으죠? 여름에 일하고 가을에 추수하게 되는 것이 우리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을 개미에 투영시켜서, 그런 언어의 표현들을, 사람에게 쓸 수 있는 언어의 표현들을 차용해서, 개미에게 설명하고 있는 그런 문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그냥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아, 개미는 열심히 일을 하고 모은다’라고 하는 그런 개념을 말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건 과학적으로 맞지도 않는 말이다.’ ‘이건 정확한 묘사가 아니다.’고 시비를 그렇게 걸 것이 아닙니다.

아무튼 개미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해서 모으는 그 예를 들면서, 우리로 하여금 배우라고 교훈하고 있는데, 우리 인간들이 배워야 할 개미의 특성이 있다고 한다면, 부지런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개미들이 어떻게 부지런한가? 오늘 잠언서의 말씀에서는 두령이 없어도, 그리고 감독자가 없어도, 통치자가 없어도, 부지런히 일을 하면서, 양식을 모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러한 표현이 정확한 묘사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 곤충학자들이 연구를 한다고 하면, 아마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강제하는 어떤 강제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그 모습, 일반인이 바라볼 때에는 어떤 강압적인 어떤 폭력이 있거나, 어떤 강압적인 제도 하에서, 할 수 없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개미라고 하는 것이 본성적으로 그렇게 열심히 양식을 모으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또는 이렇게 협력해서 일을 하고, 그렇게 부지런히 일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간들에게 해주시는 교훈이 열심히 부지런히 일해야 된다고 하는 교훈의 말씀을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 크리스찬들 중에서도 부지런히 열심히 살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요. 우리가 부지런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누군가 감독을 하고, 그리고 감독을 하면서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화를 내고, 닥달을 하고, 뭔가 칭찬과 혹은 책망과 이러한 시스템에 의해서 강제해야만, 열심히 일을 하고, 그러한 감독이 없을 경우에는 누군가 무섭게 하거나 닥달을 하지 아니하면, 나에게 그렇게 강요하는 것이 없으면,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 나태하게 행동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보면 일꾼들이 일을 하는데요. 일을 하라고 불러오면,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슬렁슬렁 일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좀, 제발 열심히 일하라’고 ‘우리가 당신들에게 월급을 주려고 하면, 일당을 주려고 하면, 열심히 일해야 된다’고 하면서 좀 기분 나쁜 소리를 하면, 그때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정작 감독자가 잠깐 자리를 비우면, 열심히 일하지 않고, 둘러 서서 잡담을 하거나, 또는 담배를 피거나 하면서,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경우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서도 일을 할 때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신실하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보지 아니하면, 상관이 보지 않거나, 또한 어떠한 강요나 어떠한 장치가 없으면, 그저 슬슬 눈치 보아가면서, 적당히 일하고 또 나태하게 행동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데요. 이것은 마치 달란트의 비유에 나오는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겁니다. 주인이 멀리 떠나버려서, 더 이상 보지 않기 때문에, 주인이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내가 열심히 일을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이고, 그냥 게으르게 있는 그런 모습을 보일 수가 있는데요.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가르침, 에베소서 6장 5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가져야 할 선한 덕목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고, 만일 어떤 사람이 성실하게 일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 게으르게 요령을 피운다고 한다면, 그것은 악한 모습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 크리스천들 중에는 성경적인 가르침대로 순종하기보다는, 이 세상의 지혜를 따라가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지혜는 열심히 안 하는 겁니다. 눈치를 봐서 감독자가 없다? 눈치를 봐서 나를 감독하는 사람이 없으면, 슬슬 요령을 비우면서, 적당히 내 이득을 찾고 내가 얻을 수 있는 유익들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지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이 세상의 지혜가 가장 널리 통용이 되고 가장 잘 체화시켜서 가르치는 곳이 있는데 그게 군대입니다. 군대에서 우리 남자들은 그곳에서 어쩌면 평생을 살아갈 잘못된 학습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군대에 있으면서 배우게 되는 하나의 원리가 무어 무엇이냐 하면, 튀지도 말고, 뒤쳐지지도 말고, 그냥 ‘중간에 숨어 가는 것이 제일 좋다’라고 하는, 하나의 삶의 요령을 배우는 곳이 군대가 되어 버렸고, 그래서 모든 남성들이 그 군대에서 배운 것이, 괜히 내가 앞서 나갔다가, 괜히 내가 잘난 척하고 튀었다가,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니까, 열심히 하지도 않고, 그리고 뒤로 쳐지지도 않고, 중간 정도만 따라갈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게 제일 좋다고 하는 것이 몸에 익숙하게 베어져 버리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배운 하나의 일종의 삶의 방법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더 강화되면서, 어쩌면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서도, 행동의 방법, 그것이 이 세상의 지혜의 방법을 따라가면서, 그렇게 요령을 적절하게 피우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고, 그렇게 요령을 잘 피우면, 내가 정말 지혜롭게 행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저는 교역자들 중에서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때가 있습니다. 어떤 한 청년이 군에 들어가게 되니까, 그 군에 들어가는 청년을 향해서 어떤 교역자가 충고를 하더라고요. 군에 들어가는 청년을 향해서 어떤 교역자가 충고를 하면서 하는 말이, ‘군대 가게 되거들랑, 튀지도 말고, 뒤쳐지도 말고, 그냥 중간만 따라가. 그게 제일 안전한 거야.’라고 이야기를 해주는데, 물론 그 마음에, ‘이 청년이 군대에서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청년이 군대에서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무사히 잘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에서 그 이야기를 해준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기는 알았지만,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 제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더라고요. 과연 이게 군에 들어가는 우리 크리스찬 청년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인가? 적당히 행동하다가 남들에게 혼나지도 말고, 뛰어난 일을 해서 그래서 그렇게 자신을 나타내지도 말고, 적당하게 눈에 띄지 않게, 잘 숨어 지내다가 제대하라고 하는 것이 ‘과연 우리가 청년 크리스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인가?’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큰 충격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그 교역자가 평상시에도 사역을 그런 식으로 하는 것 같아서 너무나도 안타까웠는데, 왜 그렇게 사역을 하는지, 나중에 그 이유를 알 수만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것을 하라고 시키고, 화를 내면서 이것을 하라고 말하면, 그러면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말하지 아니하면 자기가 창의적으로 자발적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일을 안 만들려고 하고, 가능하면 어떤 일을 만들지 않고, 그저 시키는 일만, 문제되지 않게, 적당히 따라가는 것만 하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저 사람은 왜 목회자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을까?’ ‘교회에서 사역을 왜 하고 있을까?’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교역자를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청년을 향해서, 군대 가는 청년을 향해서 해주는 말이, 군대 가서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뒤쳐지지 지만 말고 그냥 적당히 따라가라고 하는 그런 권면을 하는 그 모습을 보고서,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될 삶의 태도가, 그런 태도로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잠언서의 말씀은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는 것이죠. 부지런한 것이 성실한 것이고, 성실한 것이 신실한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신실한 자를 찾으시는데, 그런 신실함이 아니라, 성실함이 아니라, 부지런함이 아니라, 적당하게 눈 가리고, 사람들이 보는 그 선 안에서만 적당하게, 요령껏 해 나가려고 하는 그런 삶의 자세가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는 아닐 것입니다.

저는 군대 가는 청년을 향해서 권면합니다. ‘가거들랑 정말 열심히 하라.’ 남이 시키지 않아도, 가서 하고, 먼저 자원에서 봉사하고, 힘든 건 내가 먼저 하고, 그 군대에 3년 동안, 지금 3년이 아니죠, 어느 정도 봉사를 군대에서 지내게 된다고 한다면, ‘국방부 시계는 흘러간다’ 하면서, 가만히 시간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군대에 가서 정말 내가 할 일은 무엇이 없는지, 정말 힘들고 연약한 전우가 있다고 한다면, 그를 위해서 내가 봉사해 줄 것은 없는지, 청소한다고 한다면 내가 먼저 더 많이 청소를 하고, 무엇이 힘든 일을 한다면, 내가 먼저 자원해서 그 힘든 일을 내가 먼저 하고, 훈련 받는다고 한다면, 내가 더 열심히 해서, 정말 최고의 훈련을 받는, 그리고 그 군대에서 최고의 병사가 되어서,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부지런하게 그렇게 있다가 군대를 제대하라고, 그게 우리 성도의 모습이라고 권면해 줍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목사님은 군대에서 그렇게 하셨나요?’라고 물으면,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몸이 힘들어서 그렇게 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고, 실패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저의 모습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게 정답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은 ‘가서 개미에게 배워라’는 거에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감독자가 있고 통치자가 있어서, 그래서 마지못해서 안 하면 안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그 개미에게 가서 배워라‘ 하는 것이 성경에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직장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면, 그 직장에서 월급을 받는 정도, 그냥 받는 만큼만 시키면 시키는 대로 수동적으로 일만 하다가, 안 시키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내가 나서서 일을 더하고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고 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정말 나를 고용한 사람을 위해서 더 열심히 일을 해서, 그래서 정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보여야 되는 것이고,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그냥 하는 일이 아니라, ‘주께 하듯 하라.’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만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그것이 그냥 하찮은 세속적인 일이 아니라, 주님께 하는 일이오. 군대에 가서 내가 훈련받고 군대에서 일하는 그것도, 그것도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신 주님께 하는 일이고, 우리가 하는 그 모든 일들이 다 주님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주께 하듯 하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 내 일인 것처럼 성실하게 부지런하게 해야 된다. 왜?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며,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떤 것을 하든지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되고, 주님께 하듯 해야 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는 이 주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일 우리가 부지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잠언서 6장 10절에서부터 1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면, 내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내 궁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당연한 겁니다. 부지런하면 풍성해질 것이지만, 게으르면 궁핍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부지런하고 수고한 자에게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결과가 뒤따르게 되는 것이고, 게으른 자는 빈궁을 당하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이솝 우화에 보면 “개미와 베짱이”라고 하는 동화가 있습니다. 개미는 여름 동안에 열심히 일을 했고, 베짱이는 낮에 음악을 즐기며 놀기만 했는데, 언제가 다가왔는가? 항상 여름만이 아니라, 겨울이 곧 다가오게 되는데, 겨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때를 가리킵니까?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없을 때를 의미하는 것이죠. 고통스러운 때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 겨울의 때에는 미리미리 준비했던 개미는 편안하게 잘 여유 있게 지낼 수 있지만, 베짱이는 그 겨울에 아무것도 먹을 게 없어서, 곤란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솝 우화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베짱이나, 그리고 개미와 베짱이가 아니라, 원래는 매미라고 하는데, 아무튼 매미든 베짱이든, 사실은 이 곤충들도 게으른 곤충들이 아니고 정말 부지런한 곤충들이라고 하는데요. 아무튼 이 이솝 우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자 하는 그런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열심히 일해야 풍성해지는 것이고, 게으를 경우에는 결국은 궁핍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그 이솝 우화에도 이야기하고 있고, 오늘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서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개미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고 수고했는데, 그래봤자 그냥 직장에서 근근히 먹고 사는 그런 정도의 수준밖에 안 되는데, 베짱이는 늘 기타 치고 놀고 그러다가 나중에 연예인이 돼서 돈을 엄청나게 번다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요즘에는 좀 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요즘은 무슨 얘기를 합니까? 정말 성실한 사람들은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봤자, 그저 힘들게 힘들게 그렇게 직장생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베짱이처럼 지내는 사람은 부모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받아서 계속 여유롭게 늘 해외여행 다니면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는 그런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질문을 던져보게 되는 것이죠. 정말 하나님의 법칙이 맞습니까? 부지런한 자가 보상을 받고, 게으른 자가 궁핍하게 될 거라고 하는 이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 맞습니까? 하나님의 법칙 맞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져보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주변에서 어떻게 사는가를 보면, 부지런한 사람이 항상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고 겨우 오후 2시 3시 그때서야 겨우 일어나는 사람이 알고 보면 수천억 대의 돈을 가지고 있는 부자들은 그러고 있고,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새벽부터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보면 사실은 돈이 없는 사람들이나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질문이 던져지는 겁니다. 하나님 정말 맞습니까? 부지런하게 살면 부유하게 되고 게으르면 가난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법칙이 맞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죠. 종종 그러한 예외적인 사건들을 보면서, 그런데 예외가 한두 건이 아니라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성경 말씀은 ‘이제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닌가?’라고 의문을 품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사실 모든 것이 하나의 요인만 가지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함과 게으름, 이 한 가지 요소만 가지고, 어떤 사람이 잘 사느냐 못 사느냐를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성경 말씀에 보면 내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장수할 것이고 잘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거라고 하는 말씀도 있는데, 다 따지고 보면 안 그런 것 같거든요 그런데 왜 그렇게 되는가?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판단할 수 있는 요소가 딱 하나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지런함으로 모든 사람을 다 평가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부지런함으로도 평가할 수도 있겠고, 부모를 공경하는 걸로 평가할 수도 있겠고, 운동을 하고 있느냐로 평가할 수도 있겠고, 무엇을 먹느냐로 평가할 수도 있겠고, 잠을 어떻게 많이 자느냐? 적당하게 자느냐를 가지고 평가할 수 있겠고, 그리고 그 삶의 스타일이 위험한 짓을 많이 하느냐? 안전하게 행동하느냐에 의해서 차이점이 있을 수 있겠고, 그 사람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래서 상식적이고 그리고 현명한 판단들을 내리느냐? 아니면 어리석은 판단들을 내리면서 사느냐 등등 우리의 인생의 요소들을, 우리 인생의 모습을 결정할 요소들이 한 가지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요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볼 때에는 그 모든 요소를 다 고려하지 않고 그냥 어느 한 가지 요소만 가지고 이게 맞느냐 틀렸느냐를 따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이거 하나님 말씀 안 맞는 것 같다라고 하는 그런 느낌을 느낄 때가 많은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 그 말씀들이 다 진리의 말씀입니다. 부모에게 똑같이 유산을 어마어마하게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어마어마한 유산을 받은 사람이 있는데, 그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게으르고 한 사람이 부지런하다면, 그 똑같이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어도 부지런한 사람이 게으른 사람보다 어쩌면 더 잘 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고요. 그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상황 가운데 있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은 또 부지런하고 어떤 사람은 게으르고 한다고 한다면, 그 요소가 어느 정도 차이점이 있을 수 있겠는데 우리가 아무튼 그것을 객관적으로 산술화시켜서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삼을 수는 없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일반적으로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법칙으로 우리가 신실 부지런한 것이 그것이 더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고 우리가 게으른 것이 우리가 멸망의 길이라고 하는 것만큼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실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문제는 우리가 죄성으로 너무나도 많이 있어서 가득 차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부지런해야 되는데, 부지런한 것보다는 좀 더 자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욕망이고, 좀 더 쉬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욕망이고, 우리가 게으르지 않고 그냥 우리가 낙태해 버리고 싶은 그런 육체적인 욕망들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하기보다는 눈치 보면서 쉬고 싶고 눈을 가리고 아웅하고 싶고 한 그런 마음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어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정말 내 신분에서 열심히 수고하고 애쓰고 최선의 나하고 신실해야 되는데, 그러한 마음들이 내 마음 가운데서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죄성이 있어서 그럴 수가 있겠는데, 그러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서 우리들의 죄를 자복하고, ‘주님, 다시 회복하여 모든 사람을 대할 때 모든 일들을 할 때 주님께 하듯 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부지런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교훈을 받을 수가 있겠는데요. 다섯 달란트 받은 종 두 달란트 받은 종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4절에서 25절의 말씀이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게으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인이 미웠기 때문에 그래요. 주인은 나를 앞제하는 주인이고, 주인은 포악해서 내 것을 뺏어가는 주인이고, 나에게 은혜를 베푸는 주인이 아니라, 나를 나쁘게 대하는 주인이라고 하는 그러한 나의 생각 때문에, 열심히 일해 줄 수가 없는 거죠.

이 이야기는 반대로 말하자면, 두 달란트 받은 종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어떻게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을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 주인이 없는데, 어떻게 종들이 열심히 일해서 다섯 달란트를 가진 종이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종이 어떻게 또 두 달란트를 남길 수 있도록 열심히 일했을 수 있을까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정말 그렇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그런 가능한 사람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에 대한 답을 우리가 추측해 본다고 한다면, 한 달란트 받은 종과는 생각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그래요.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밉고, 주인에게 강포함을 당해서, 내가 너무나도 주인이 너무 미워요 싫어요. 그러니까 충성할 수 있는 이유가 없는 거죠.

그런데 두 달란트 받은 종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너무 고마운 거예요. 주인만 생각하면 너무 감사한 거예요. 어떻게 종이 주인에게 감사할 수 있죠? 그 가능성을 우리가 만약 추측해 본다고 한다면, 어느 나라 전쟁을 하다가 전쟁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을 이 장군이 살려주어서 그래서 너 우리 집에 와서 일해라라고 목숨을 살려준 그 주인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말 나를 살려주셔서 너무나도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감사의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종은 최선을 다해서 일해주는 거에요. 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주인에 대한 감사의 마음 사랑의 마음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 사도가 등장합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온 세상을 다니면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무엇을 얻었을까요? 명성을 얻었습니까?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습니까? 고위 관직에 올라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바울 사도가 복음 전해서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바울 사도는 무엇을 얻었는가? 두드려 맞았어요. 태장으로 맞고, 곤장으로 맞고, 또 강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온갖 위험을 당하면서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데, 바울 사도는 왜 이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러 다닐 수가 있었는가?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서 10절 말씀에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핍박하던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서, 지옥불에 쳐넣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죄인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주셨어요. 그 사도를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하나님의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아 주시겠다고 받아주셔서, 그래서 그 바울 사도를 사도로 삼아 주신 그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고맙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고마워서, 목숨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부지런한 것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부지런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때, 최선을 다할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바로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이사야서 37장 32절의 말씀에,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산에서 나올 것이니라. 만군에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죄로 인하여 영원히 심판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저 먼 곳에서 한가롭게 구경하시면서, ‘거참 안 됐네. 아이고 그러지 말지. 왜 그랬을까?’ 한가하게 저 높은 곳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그냥 보고만 계셨던 것이 아니라, 열심을 가지고 달려오시는 거에요. 죄악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을 하시는 그 하나님의 열심히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죠.

마치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쉬지 않고 모든 일들을 다 계획하고, 계획해서, 사랑하기 때문에 쉬지 않고 모든 걸 계획해서. 결국은 그 룻을 자기의 아내로 삼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부 삼으셔서, 영원히 멸망받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신부 삼기 위하여. 열정을 가지고 쉬지 않고, 우리를 구원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어떤 대가도 다 치러주셔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사명은 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축복이에요. 우리가 일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감사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어느 분야에서든, 늘 감사하며 성실하게 신실하게 일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그것이 감사해서 최선을 다해서 정말 주를 위해서 섬기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그 열심히 섬기는 그 열심이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주신 바로 그곳이 우리가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해야 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사명의 현장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으로 불러주셨습니까? 남편과 아내로 부모와 자녀로 불러주셨다고 한다면, 그 자리가 곧 하나님의 신실한 일을 해야 될 그 자리입니다. 우리를 직장으로 불러주셨습니까? 그 직장이 별 내놓을 것도 없고, 사람들한테 자랑할 것도 없고, 허접한 직장처럼 보여도, 그곳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셨다고 한다면 거기서 신실하게 일을 해야 되는 거예요. 부지런하게 일을 해야 되는 거예요. 마치 요셉처럼.

요셉은 채색 옷을 입는 그런 정말 귀한 아들이었으나, 끌려가서 종이 되어서 보디발의 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내가 이런 허접한 집에서 종으로서 내가 무슨 기쁨으로 살 수 있는가?’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피해 다니면서,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일을 적게 하기 위해서 피해 다니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능하면 내가 일을 가장 적게 하고, 편하게 지내는 것이 나의 목표가 아니라, 요셉은 그 보디발의 종으로, 정말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들어갔지만, 거기서 최선을 다해서 주께 하듯 섬겼어요. 최선을 다해서 보디발을 섬겼을 때, 보디발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보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감옥으로 더 떨어졌어요. 감옥으로 떨어진 그 순간에, ‘이제는 내 인생 끝났구나. 도대체 여기서 무슨 소망이 있나? 이 억울함 누가 풀어주나?’ 한탄하며 그리고 좌절하며, ‘여기서 무슨 일을 하겠나?’ 그냥 피해다니면서, 밥을 먹은다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밥을 먹고, 그리고 일을 피하려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피해서 일을 조금만 하는 것이 나의 삶의 목표가 아니라,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먼저 나가서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더 수고하고 감옥에 나오는 밥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더 많이 먹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 배고플까 봐 하나 더 다른 사람에게 주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디에 있든지 감사하며, 성실하고 신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를 어디에 집어넣으시든지 하나님의 큰 도구로 사용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있는 곳은 마음에 안 드는 곳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나를 무시하고, 내 능력과 내 처지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종의 옷을 입혀 놓았을 때, 우리는 불만과 원망 가운데 한탄하면서 그냥 시간만 보내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권고의 말씀은,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배워라.’ 가서, 집안 일 할 때도, 가서 배워라. 내게 오는 손님을 대접할 때에도, 그냥 눈가리고 아웅하고, 적당히 해버리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진실하게 주님께 하듯이 섬겨라.

오늘 이 말씀처럼, 게으른 자가 결국 빈궁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부지런한 자가 결국 풍성해질 거라고 하는 것이, 눈으로 만져지지 않더라도, 이 죄가 많은 세상 가운데서는 정반대의 모습처럼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