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내가 아직 지혜롭지 못하다고 한다면, 내가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여러 가지로 어리석은 면이 많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지혜로워질 수 있을까요?”하는 이 문제를, 오늘 이 저녁 시간에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묵상하고, 또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잠언서 17장 16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의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지혜를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겁니다. 미련한 자가 돈을 가지고서, 돈으로서 지혜를 살려고 하지만,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제대로 안 되는데, 과외만 열심히 시켜봤자 소용없다는 얘기일까요? 아무튼 “미련한 자가 돈을 쓴다고 해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미련한 자는 지혜를 돈으로 살 수도 없는 것일까요? 사봤자, 내가 지혜로워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지혜라고 하는 것이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지혜에 대해서 내가 마음을 기울이고, 그 지혜에 대해서 내가 들을 수 있는 그런 마음, 열린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지혜를 들려줘도, 그 지혜가 나의 것이 되는 것인데,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리 지혜를 들려줘도, 아무리 말을 해줘도, 그 지혜가, 그 충고가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뛰어난 현자를 모셨다 한들, 아무리 훌륭한 선생님을 모신다고 해서, 결국 그 지혜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런 이야기인 것이죠.
삼국지에 보면 유비라고 하는 사람이 제갈량이라고 하는 현자를 모시기 위해서 삼고초려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갈량이라고 하는 아주 뛰어난 책사가 있어서, 그 사람의 지혜를 구하고자, 내가 뜻을 가지고 온 세상을 참 통일했으면 좋겠고, 이 세상을 다스리는 현명한 군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에,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당시에 아주 뛰어난 책사로 알려져 있는 제갈량이, 저 형주라고 하는 곳에 은둔해서 살고 있다고 하는 소식을 들은 유비가 그를 자신의 선생으로 모시기 위해서 세 번씩 찾아갔다. 그래서 “삼고초려”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 유비라고 하는 사람은 제갈량을 모시게 되어서, 아주 좋은 결과를 얻게 되죠. 전쟁을 하거나, 아니면 어떤 일들을 할 때, 늘 제갈량한테 물어보았습니다. 이 경우에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전쟁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럴 때 제갈량이 이야기를 해줘요. “이걸 이렇게 해봐라. 이걸 저렇게 해봐라.” 하면서, 정말 엄청난 지혜를 들려주었는데, 그 지혜를 들었을 때, 유비가 그것을 잘 듣고서 그 방법대로 따라 하면서, 결국에 이 두 사람이 잘 콤비를 이루어서, 엄청난 유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이 유비는 제갈량이라고 하는 사람의 그 지혜를 얻을 수가 있었는가? 그 사람의 지혜를 어떻게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유비가 아주 현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명하기 때문에, 현명한 그 지혜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그래서 결국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이죠.
성경에도 보면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집트의 미래에 대해서 예언을 해주었습니다. 바로왕이 꿈을 꾸었을 때, 7년간의 풍년이 있을 것이고, 또 7년간의 대기근이 있을 거라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바로 왕은 요셉을 총리로 임명합니다. 그래서 이 요셉이 애굽 나라의 총리가 되어서, 모든 것들을 다 관장하게 될 때, 바로 왕의 그 존엄은 자꾸 올라가게 되고, 결국 아주 훌륭한 왕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죠. 결국 이 요셉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바로가 훌륭하고 현명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바로라고 하는 왕이 어리석은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요셉을 바라보면서, 요셉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누군가? 죄수가 아닌가? 저 사람이 누군가? 노예가 아닌가? 저 사람은 나와 신분이 다른 것이고, 나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신분으로 무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뿐만 아니라 이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군가? 이집트 사람이 아니라, “저 히브리 사람이다”라고 하는, 그런 민족적인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이 요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그것이 그 바로 왕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누가 얻을 수 있는가? 지혜를 들려주었을 때, 그 지혜는 누구에게 유익한 지혜가 되는가? 지혜가 있는 사람이 더 많은 지혜를 얻는 거예요. 근데 어리석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지혜를 들려줘도, 그 지혜가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아무리 생에 도움이 되는 수많은 이야기를 해줘도, 그 이야기를 전혀 자신에게 적용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아서, 아무런 유익이 없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2절 말씀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공감하고 있는,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는 그런 격언과 같은 말이죠. 있는 사람은 더 많이 얻게 되는데, 없는 사람은 그 있는 것마저도 빼앗겨버리는, 정말 이 현실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데, 지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는 누구에게 지혜가 되는가?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지혜를 들려주면, 그것이 배가가 되고, 더 시너지를 이루고,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될 수 있는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지혜를 들려줘도,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그 지혜가 그 어리석은 사람에게, 전혀 유익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미련한 자가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 냉정한 현실을, 오늘 잠언서 17장 16절의 말씀 가운데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를 받아들일 만한 최소한의 지혜가 없는 것이죠. 지혜가 내 것이 되려고 한다면, 정말 좋은 지혜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어야 하고, 그 지혜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지혜가 있어야, 그 지혜가 나의 것이 되는데, 그 최소한의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것을 주어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가? 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주면, 그 진주를 보면서, “야, 이게 정말 좋은 진주구나! 이건 정말 값진 것이구나!” 하면서, 잘 받아들이고, 고마워하고, 그리고 너무 감사하다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개와 돼지의 반응은 어떤 반응이에요? 왜 이런 걸 나한테 해줬느냐고, 먹지도 못하는 걸, 그 진주를 주는 사람을 향해서 공격하고, 오히려 더 대적하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성경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의 예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르호보암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제 왕위로 올라갔을 때, 그 아버지를 섬기던 노 신하들이 르호보암을 향해서 권면을 합니다. “왕이시여, 백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십시오.” 그렇게 어질고 정말 백성들을 위하는 왕이 된다고 한다면, 왕께서는 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지혜로운 말씀을 전달해 주었는데, 안타깝게도 어리석은 르호보암은 그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그냥 내버린 것으로 말미암아, 결국 이스라엘 나라는 둘로 나뉘어지게 되는, 그런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는 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압살롬은 무슨 소리를 들었는가? 어리석은 충고를 듣는 겁니다. 지혜로운 충고를 듣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히도벨이라고 하는 사람이 들려주는 멋진 지략을,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아무리 좋은 지혜를 들려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혜가 없고, 그것을 알 수 있는, 그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마음이 없을 때, 결국 그러한 수많은 지혜들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래서 오늘 고민이 생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혜가 있어요? 없어요? 만일 우리들에게 이런 최소한의 지혜도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주님, 내게 그래도 지혜가 있어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데, 그런데 내게 그런 지혜마저도 없다고 한다면, 과연 나는 그럼 아무런 소망이 없는가? 내 인생은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지혜로워질 수 있겠는가?” 하는 이 문제를 오늘 우리가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제일 먼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간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의 말씀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너희 중에 지혜가 부족하거든, 어떻게 해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엎드리라는 거예요. 안타까운 것은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어리석은 줄 몰라요.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도 않아요. 하나님 앞에 구하지도 않는 것이죠. 가장 지혜의 첫걸음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부족하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의 첫걸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완벽한 게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다 어느 경지에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부족한 게 있고, 단점이 있고, 생각하지 못하는 게 있고, 여러 가지 부족한 것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인생인 것이죠.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완벽한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는 아무리 똑똑해 봤자, 하나님의 어리석음보다, 어리석을 뿐이며, 우리는 아무리 능력이 있어 봤자, 하나님의 연약함보다도 더 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제일 먼저 우리가 가져야 될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엎드리는 것이죠. “하나님, 제가 어리석어요. 하나님, 제가 지혜롭지 못합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이 사실을 먼저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며,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이 지혜의 길로 들어가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늘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 지혜를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엎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 오늘 하루 살아갈 텐데, 오늘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오늘 결정해야 되는 그 일들 가운데서, 저의 본성에 따라서 행하지 말게 하시고, 저의 그 못된 습성에 따라 행동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분노하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하나님, 그 순간에 그냥 급하게 결정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묵상하고, 또 기도하며, 정말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도하심을 찾아가는, 그런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주옵소서. 자신이 완벽하다고 하는 그런 착각에서 깨어나서, 내가 부족하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매일매일마다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바로 내 눈앞에 보이는 것들만 바라보며, 그것을 보고 낙망하거나, 그것을 보고 실망하거나, 그것만 보고 좌절할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허락해 주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볼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시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기억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날마다 날마다 기도해 나아가는 것이, 그것이 우리들의 첫걸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외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지혜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지혜를 얻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어떻게 지혜로워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성경을 매일매일 읽어나가고 있는 가운데 있는데, 그냥 해치우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오늘 읽었다.” 이게 우리의 목적이 아니고, 우리의 목적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려고 하시는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죠.
시편 19편 7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읽으면서 묵상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떠한 길로 걸어가도록 만들어 주시는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지, 그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근데 성경을 읽어도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지혜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으로 성경을 재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생각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생각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으면서, 성경을 읽어나갈 때, 내 생각과 맞는 것 같으면, 그 성경 말씀을 “아멘” 하면서 받아들이지만, 내 생각과 맞지 않는 것들은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죠. 그냥 내게 적용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냄으로 말미암아,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는 읽었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지혜롭게 만들고, 나를 더 온전하게 만드는 그런 역할을 하도록 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너무나도 강해서, 마치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이 꼭 애굽 왕 바로 왕의 마음과 똑같아요. 바로 왕 앞에 모세가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내어,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바로 왕에게 들려주었을 때, 바로 왕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부해 버립니다. 10가지 재앙을 만나는 그 상황 가운데서, 또 번복하고 또 번복하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거부해 버리는,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이 바로, 바로 왕의 태도인데, 그게 사실은 바로 왕의 태도뿐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 똑같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말씀해 주고 계셔요. 우리를 향해서 말씀해 주시기를, 이렇게 하라고 말씀해 주시고, 저렇게 하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우리는 바로 왕처럼 마음의 문을 꽉 닫아버리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은 다 거부해 내는 거예요. 다 받아들이지 않는. 성경을 일독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백독을 한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그 많이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거부해버린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내게 지혜가 되지 못하고,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나아가게 만드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겁니다. 그 옛날 사무엘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내 이기적인 욕심과 내 고집을 내어놓고, 내 생각을 내어놓고,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이 말씀이 나의 심령 가운데 들어와서, 내 영혼을 하나하나를 수술하고, 내 심령을 찔러 쪼개고,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암들을 다 제거해내며, 우리의 썩어진 그 부분들을 다 제거해 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고, 온전하게 만드시고, 지혜롭게 만드실, 그 하나님의 수술대 앞에 날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이 서야,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혜로워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지혜의 말씀들 충고들에 대해서 신중하게 고려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지혜를 우리들에게 들려주시기 위해서 우리 주변에 수많은 조력자들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들려줄 말씀들을 그 사람들을 통해서 들려주고 계시는 것이죠. 그 옛날 발람이라고 하는 선지자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길을 가려고 했을 때, 나귀가 그 앞에 길을 막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사실 우리들의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때로는 우리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때로는 우리 동역자들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때로는 아내나 남편의 이야기를 통해서, 또 우리 자녀들이나 우리 부모님들의 말들을 통해서, 우리들의 양심을 찌르고, 우리들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해주실 때가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대적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실 때도 있어요. 우리를 미워하는 자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올 때가 있는 것이죠. 그럴 때 그것을 무시해 버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그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들에,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족하구나. 내가 다 보지 못했구나. 나는 앞에만 보고, 뒤는 바라보지 못했구나. 나는 이쪽만 보고 저쪽은 바라보지 못했구나. 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수많은 사람들의 말에 지혜를 들어야 되는데, 그 지혜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좋은 진주와 같은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들에게 무용지물로 돼버리는 그런 안타까운 결과가 될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상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하지만, 그런데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하면서, 사실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늘 생겨납니다. 정말 좋아하는 것,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기가 쉬운 것이죠. 때로는 그게 돈일 수도 있겠고, 때로는 성공일 수도 있겠고, 때로는 우리 자녀들일 수도 있겠고, 우리가 갈망하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버리는 것인데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 지름길입니다. 내게 있어서 자존심이 제일 중요하거나, 내게 있어서 명예가 제일 중요하거나,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생기는, 그래서 우상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기게 되면, 그 우상은 우리들의 눈을 가려버리고, 우리들의 귀를 막아버려서, 어리석은 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죠.
시편 115편 4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상을 섬기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되는가? 우리가 우상처럼 되어버린다는 거예요. 우리가 우상을 섬기면, 우리가 우상을 닮아가게 된다는 거예요. 우상처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우리가 우상을 섬기게 될 때, 돈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버리면 보이는 게 없어집니다. 들리는 게 없어집니다. 아무것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니 어리석은 판단과 행동만 나오는 것이죠. 내 자존심이 우상이 되어버리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우상과 똑같이 되어버려서, 우리의 판단 능력이 제로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지혜로운 길은 무엇인가? 우상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부터 제거하는 것이 그게 지혜로운 길입니다. 탐욕이라고 하는 우상이 우리들의 눈에 쓰이면, 모든 것을 다 보지 못하게 되고, 듣지 못하게 되어서, 결국 망하는 길로 어리석은 자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스피싱에 속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사기나 이런 것들에 그렇게 허무하게 속아 넘어가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되는데요. 왜 그렇게 속아 넘어가게 될까요? 그것은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귀가 막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이라고 하는 우상이 크게 보일 때, 우리가 우상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지혜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잠언서 맨 처음에 들려주었던 것처럼 다른 것이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게 지혜의 본질이고, 지혜의 첫 출발점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 안에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리석은 우리들을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고, 또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주님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평강, 그 축복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