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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행 4:23-31)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건 누가 기도하는가, 어떻게 기도하느냐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여러분들은 어느 때 힘이 쭉 빠지십니까? 힘이 빠져서 아무것도 더 이상 하지 못하겠다고 생각 드는 때가, 그런 절망적인 순간이 언제이십니까? 제 경우에는, 제가 정말 열심히 수고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데, 그런데 실패했을 경우입니다. 모든 실패가 다 힘이 빠지고 맥이 빠지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한다면, 그래도 좀 소망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아 실패한 것이기 때문에, 다음번에 내가 좀 더 최선을 다한다면,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느낄 수가 있게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그런데 아무런 결과가 없게 될 때에는, 정말 난감하고 절망적인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죠. 제가 초등학생 때 일이었는데요. 혹시 여러분은 제가 초등학생 때 반에서 1등했다는 사실 알고 계십니까? 얘기를 하다 보면, 전부 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전교 1등 하지 않은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아무튼, 저희 반 선생님께서 제가 3학년 때인가 4학년 때인가였을 텐데요. 우리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시험을 보게 될 텐데, 이번 시험에서 1등에서부터 15등까지 상을 주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제가 열심히 공부를 했을까요? 그냥 열심히 안 하고 평상시처럼 했을까요? 전 그냥 평상시처럼 했습니다. 늘 1등을 했었으니까, 이번에도 1등을 하겠지. 적어도 15등 안에는 물론이거니와 상위권 그룹 안에 있어서 상을 다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험을 본 결과, 정말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됐는데요. 제가 몇 등을 한 줄 아십니까? 16등을 한 거예요. 평상시는 1등 했었는데, 그때 16등을 한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이 공책을 하나씩 나눠줬는데요. 그때 참 공책 하나 얻기 힘들었던 그 시절에 너무나도 아쉽고 너무나도 참 안타까운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실망을 했을까요? 실망을 하지 않았을까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쉽기는 했지만, 다음 번에 더 잘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종의 교만함이죠. 다음번에는 내가 조금만 더 하게 된다고 하면, 내 앞에 점수를 땄던 그 학생들보다 내가 더 잘할 거라고 하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그때 16등을 했다고 할지라도, 전혀 우울하거나 절망스러워지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저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언제 절망에 빠집니까? 그것은 내가 최선을 다하고 정말 내 모든 진액을 짜내어서 최선을 다 했는데, 그래서 이 정도면 내가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온 정신을 거기에 다 쏟아부으면서 수고했는데, 결과가 아무것도 없을 때, 정말 나는 내 모든 힘을 다 쏟아부었는데, 상대방이 나보다 훨씬 더 센 거예요. 그럴 경우에는 절망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아, 안 되는구나.’ ‘이거 가지고는 안 되는구나’라고 하는 그런 생각, 더 이상 내가 쓸 수 있는 아무런 카드가 없다고 생각될 때는, 절망감이 몰려오게 되는 것이죠.

성경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참 대단한 선지자였습니다. 바알 제사장들과 함께 한판 승부를 겨루었는데요. 놀랍게도 이 엘리야 선지자는 ko승을 거두었습니다. 유도로 치면 한판 승을 거둔 것이고, 야구로 치면 콜드 게임을 한 것과 같은 엄청난 승리를 일구어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그 어마어마한 장면을 보면서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로구나’ ‘바알 신은 가짜지만, 하나님은 참되신 하나님이로구나’ 하는 사실을 모두가 다 깨닫게 되었고, 결국 그 자리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모두 다 처형시키는, 그런 어마어마한 일들을 거둔 사람이 바로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가 반전이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사역을 일구어냈던 그 엘리야는, 조금 뒤에 어떤 모습을 보이냐면, 완전히 절망감에 빠져서 완전히 우울증에 빠져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나 이제 더 이상 못해 먹겠습니다.’ ‘하나님, 더 이상 내가 선지자 노릇 못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거두어 가주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모습이 성경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렇게 정말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그런 엄청난 기적을 일구어냈던 그 엘리야에게서, 이런 절망적인 모습을 보게 되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세벨이라고 하는 왕비가 꿈쩍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정도 강한 펀치를 날렸으면, 모두가 다 항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이세벨 왕은, 여전히, 대적하면서, ‘내가 이 엘리야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그런 강한 결심을 보이는 그 모습을 보게 될 때, 이 강력한 펀치로도 쓰러지지 않는 그 이세벨 왕비를 바라보게 될 때, 엘리야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더 이상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엘리야 선지자는 그 순간에 무너져버렸고,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까지 이르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 4장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 있는데요. 베드로와 요한이 당한 이 상황이 어쩌면 그런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정말 엄청난 기적을 일구어 냈습니다. 성전을 향해서 가다가,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한 걸인이 구걸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이야기했을 때,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이게 뉘 집 애 이름입니까? 기적이 그게 아니잖아요? 엄청난 일이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걸을 수가 있겠습니까? 엄청난 기적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 주변에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베드로와 요한 앞에서 꿈쩍도 안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그게 누군가요? 유대의 관리들이죠. 유대의 관리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놓고서 말을 합니다. ‘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하지 마라.’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위협하면서 그들을 협박하기 시작할 때,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은 무너져 내릴 수가 있었을 겁니다. 이러한 기적으로도 저들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다고 한다면,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저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수가 있겠는가? 정말 맥 빠지는 상황이 아닐 수가 없고, 정말 힘이 빠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사도행전 4장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순간에 예루살렘 성도들이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2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이르되,” 예루살렘 성도들은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이 순간에 기도를 했을까요? 그것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들을 도와줄 어떤 정치적인 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지혜로 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때, 전후 좌우로 아무것도 해결할 방법이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예루살렘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성경에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와 역사로 기적을 베풀어 주시며, 상황을 반전시키고, 역전을 시키는 그런 어마어마한 일들을 보여주셨습니다. 히스기아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병들어 죽게 된 그 상황 가운데서, 의사가 고칠 수가 없어요. 그 어떤 것으로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살려주세요.’ 외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 히스기아 왕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 히스기아 왕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한나라고 하는 가련한 여인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자식이 없어서 손가락질 당하고, 조롱당하고 모욕을 당하는 그 정말 억울한 상황 가운데서, 어디에다 하소연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남편이 자기의 소리를 들어줍니까? 그 누가 같은 편이 되어줄 수 있습니까? 그 상황 가운데서 한나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간절한 여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고, 사무엘이라고 하는 귀한 아들을 안을 수 있게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믿음의 선조들을 따라서 우리도 함께 기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의 선조들에 따라서 그들도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에 보면 그들이 어떻게 기도했는가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24절 하반절에 보면, 그들의 기도의 제목이, 기도하면서 했던 이야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뭐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대주재요.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이시오.” 하나님을 부르는데 뭐라고 부릅니까? “대주재여”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렇게 부르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기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가 기도하느냐가 아닙니다. 기도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누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정적으로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열정적으로 그렇게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가 우상 앞에서 하는 기도라고 하면, 그것은 허공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움직일 수 없는, 그 우상 앞에서 기도해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는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대주재”되신 하나님이라는 거에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의지할 수 있었고 기도할 수 있었던 대상이 누구냐면, 바로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누구신가? ‘대주재’이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주재’가 뭐죠? ‘대주재’ 어려운 말인데요. 대주재라고 하는 그 말은 온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정말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지금 초대교회 상황 가운데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사람들은 유대 관리들이 다스리고 있고 로마 정부가 다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있는데, 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사람들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고백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유대 관리들이 실권을 잡고 있고, 그 유대 관리들이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그들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기도할 대상이 하나님 한 분 대주제 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기도한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을 지으신이시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단순히 동치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지으시고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 앞에, 정말 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엎드려 됐다고 하는 것인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보이는 그 돈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사장님이 내 운명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기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한 기도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을 우리가 살펴보기를 원하는데요. 29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 보시옵고” 예루살렘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하나님 지금 저들이 저희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 위협 때문에 우리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알면서, 하나님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보아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죠.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보를 제공해야만 하는, 그래야만 아시는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요?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셔요.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저들의 위협이 있는데, 저들의 위험을 보아달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겁니다. ‘하나님. 저들이 위협하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저희들의 목숨이 간당간당합니다.’ ‘죽을 것만 같습니다.’ ‘힘들어요. 무서워요. 걱정됩니다.’ 그 이야기를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이죠.

기도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인데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처한 그 위협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 29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걱정할 일이 없죠. 온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유대 관리들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 논리적으로는 두려워할 일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거니까.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다고 한다면, 아무런 해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이 안 생기는 게 아니에요. 우리들의 마음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믿어도, 두려움이 안 생기냐면, 두려움이 생기게 돼 있어요.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자연스러운. 우리가 힘든 일을 만나면 정말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만나면 슬플 수밖에 없고, 부활이 있다고 해도 우리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고통스럽고 슬플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우리들의 감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꼬마 아이가 아빠랑 같이 손을 잡고 산책을 하는 길에 아빠의 손을 붙잡고 있으면 아무런 걱정도 두려움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갑자기 그 앞에 사나운 개가 나타나게 되면, 그 아이는 아빠의 손을 붙잡고 있어도 무서워 벌벌 떠는 거죠. ‘아빠, 무서워’ 하면서, 아빠 뒤로 도망가는 겁니다. 아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가 나를 지켜줄 거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개를 보면 무서울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할지라도, 정말 우리들에게 엄청난 일들이 다가오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합니다’ 하는 그 소리에 우리는 무너지게 돼 있어요. ‘우리 자녀들의 미래가 정말 암울합니다’ 생각되는 그 순간에 우리는 무너지게 돼 있어요.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을 수가 있겠는데, 기도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마음을 알리는 거예요. ‘하나님, 이래서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우리들의 사정을 아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님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기도의 내용들 가운데 우리가 눈여겨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29절과 30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기도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기도한 기도의 제목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단순히 위협이 사라지기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이 없어지고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래서 우리가 평안하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그 정도로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런 유대 관리들의 위협이 생생하게 시퍼렇게 살아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여기서 우리가 쓰러지지 않게 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력이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의 제목을 저와 여러분들이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라고 하는 것이, 늘 우리들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기도들만으로 채워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저 부자가 되게 해주고, 성공하게 해달라고 하고, 그저 자녀들 행복을 위한, 그것이 다 의미가 없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 기도해야죠.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음이 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할 것이지만, 그러나 거기서만 멈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 제목은 어디로 나가야 되는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거룩하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단순히 고난에서 벗어나 그저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담대하게 능력 있게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러한 기도의 제목들이 우리의 기도 제목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만난 이 상황은 초대교회 예루살렘 성도들이 만난 상황과 비슷합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벌써 1년이 넘고 2년이 거의 다 돼가는 이 상황 가운데서,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 사람들의 마음이 위협을 당해서 교회로 오기보다는 교회의 발걸음을 멈추어 버리고, 저 위협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 상황 가운데서도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그냥 무조건 윽박지르면서 전도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을 돌리고, 사랑으로 품고,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이러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도의 제목들을 늘려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그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모인 곳이 진동하였고, 또 모두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따지면, 문제가 해결된 것은 없어 보입니다. 유대 관리들이 다 쫓겨난 것도 아니고요. 유대 관리들의 위협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계속 유대 관리들은 계속해서 위협을 해오는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은 기도하였고, 그들은 담대함을 얻었고, 그래서 그 위협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잘 증거하며, 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잘 실천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온 것을 오늘 우리가 눈여겨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모든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될 때는 만나지 못할 겁니다. 더 이상 아무런 아픔도 없고, 더 이상 어떤 고난도 없고, 더 이상 어떤 슬픔도 없는, 그때를 맞이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건 언제 맞이할 수 있게되죠? 우리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가게 되는 그 순간에, 모든 슬픔들이 사라지고, 모든 아픔이 사라지고,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날이 그 마지막 때가 그때가 그때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동안에는, 여전히 끊임없이 공격이 있고, 끊임없는 위협이 있고,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히는 일들이 끊임없이, 산 하나 넘어가면 또 하나의 산, 또 하나의 산을 넘어가면 또 하나의 산이 있는, 그런 어려운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계속해서 펼쳐지게 될 텐데, 그 순간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그 기도를 통해서 모든 고난이 싹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기도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그런 놀라운 은혜의 축복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들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하는데, 성령의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이상한 신비한 현상을 체험하는 것을 성령의 충만함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이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위험 속에서도 담대하게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는 것이고, 주님과 동행하는 힘을 얻는 것이 성령의 충만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 이야기를 좀 하면은요. 이야기하기가 좀 저는 늘 부끄러운데요. 왜냐하면 제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즘 젊은 가정들을 보면 참 그렇게 존경스러워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그 모습, 우리 사위만 보더라도 우리 딸을 위해서 얼마나 자상하게 배려를 해주는지,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데요. 안타깝게도 저는 그러질 못했습니다.

저희가 미국에 살 때, 운전을 제 아내에게 연수를 시켜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대중교통이 발달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늘 운전하면서 다녀야 되는 곳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집에서 우리 제가 섬기던 교회까지는 고속도로로 달려서 30분을 갔으니, 전주에 살면서 군산에 있는 교회를 다니는 것과 같은, 그렇게 먼 곳에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으니까, 저는 먼저 가 있으면 제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로 와야 되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운전을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옆자리에 앉고, 제 아내에게 운전 연수를 시켜줬습니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서 이제 쭉 직진하는 도로를 만나게 됐습니다. 제가 제 아내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쭉 직진하다가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 나오면, 거기서 좌회전하면 돼.’ ‘그전까지는 그냥 쭉 추진하면 된다’고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그랬더니 제 아내가 어떻게 운전을 한 줄 아세요? 두려워하면서, 막 가다가 사거리가 나온 겁니다. 사거리가 나오는데 신호등이 있냐면, 신호등이 없어요. 근데 제 아내가 그 순간에 뭐라고 얘기하냐면, ‘여기? 여기서 저희 전해야 돼?’ 막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대답했냐면,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서 좌회전.’ 그래서 그걸 그냥 직진해가지고, 또 가다가 또 사거리가 나오는데 신호등이 없는 사거리예요. 그런데 그때 제 아내가 뭐라고 했냐면, ‘여기서 좌회전? 여기서 좌회전?’ 막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얘기했을까요?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서 좌회전.’ 저는 제 아내가 왜 이렇게 제 말귀를 못 알아듣는지, 너무나도 답답했어요. 결국 그날 대판 싸웠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불안하다는 거예요. 내가 과연 운전을 제대로 해서 갈 수 있을까? 불안하고, 불안한 그 마음에서, 거기서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그렇게 매정하게, 격렬하게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걱정하지 마. 내가 함께 가잖아. 그냥 직진해서 가’라고 이야기해 주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었을까? 그런 아쉬움이 있어서 늘 죄스러운 마음으로 삽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그렇게 무심한 남편 같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 무서워요’ ‘하나님, 힘들어요’ 할 때, 하나님께서, ‘왜 믿지 못하느냐?’ 심판해 버리고 끝내시는 것이 아니라,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고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우리들의 실수와 우리들의 허물을 책망해버리고 끝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들의 더러운 죄악들을 다 십자가에 지시고, 피 흘려주시며, 모든 피를 다 쏟아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에 방정식의, 기도의 공식에 채점을 하다가, ‘네 기도는 이래서 빵점이니까 안 들어줘.’ ‘그딴 식으로 기도하면, 나 못 들어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마라. 그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에 내가 너를 혼자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들이 다 막혀 버렸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놓지 아니하시고, 손잡아 이끄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아뢰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으로 함께하시고, 함께하시고,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들의 삶을 인도해 주실지는 모릅니다. 모든 아픔들을 다 제거하거나, 모든 고난의 문제들을 한꺼번에 다 없애버리지 않으실 수는 있어도, 그러나 우리를 그냥 내 팽개쳐 버리는 일은 없으시고,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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