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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성전의 추한 모습 (요 2:13-22)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그 도시에는 성전이 있었는데요. 이 성전의 기능이 무엇일까요? 성전이 무엇일까요? 성전을 만든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성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성전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성전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서 더러워진 인생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겠다고 한 것이 성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러운 인생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성전에서 죄 용서함을 받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기 때문에, 성전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저는 은혜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고안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부터 해방되어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명령해 주셨습니다. 모세를 향해서 명령하시기를, ‘너는 성막을 만들어라’ 그랬습니다. 성막을 만든 데 사이즈는 어떤 사이즈로 할 것이며, 재료는 어떤 재료를 쓸 것이며, 성전 안에 들어가는 기구들은 무엇을 만들 것이며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성막에 대한 자세한 조감도를 일일이 알려주셔서 만든 것이 성막이었고, 그 성막이 계속해서 발전된 것이 성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막을 만들어주시면서,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죠. 광야 40년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이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과 함께 같이 가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성막이었고, 그리고 ‘내가 너희들을 만나주겠다’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 성막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성전에 나오면서, 죄의 용서함을 받고, 성전에 가서 힘을 얻고, 성전에 가서 문제의 해결을 얻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성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요한복음 2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성전 안에 몰려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 안으로 몰려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왜 몰려들었는가? 성전의 원래 목적, 하나님을 만나고 죄 용서함을 받고, 거기서 새 힘과 용기를 얻는 그런 목적으로, 성전에 나아간 것이 아니라, 성전의 원래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요? 오늘 말씀에 보면 장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서 소를 팔고 양을 팔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고, 뿐만 아니라 돈을 바꾸어주는 환전상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요. 이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그곳에 하나님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날려고 한 거죠.

장사하기 위해서 간 것이고, 거기서 이득을 얻기 위해서 그 자리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수많은 유대인들이 순례자가 되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마치 우리나라로 치면 추석과 같아요.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다 모여드는 그런 엄청난 절기이고, 축제의 날이 바로 유월절인데, 그 유월절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그 상황 가운데, 거기서 무엇을 보았는가? 사람들이 몰려들면 무엇도 같이 몰려드나요? 돈도 몰려드는 거지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돈이 있는 겁니다. 장사를 하려고 하면, 목이 좋아야 된다고 하는 말을 많이 하는데요. 목이 좋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 목이 좋은 것처럼, 유월절날 수많은 유대인들이 한꺼번에 모여드는 그 예루살렘 성전은 그야말로 돈을 벌기에 가장 적합한 때요. 아주 중요한 목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기에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거기에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편의를 위해서였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데, 자기 집에서 짐승들을 끌고 수 심리를 걸어서 먼 길을 걸어서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려고, 제사장 앞에 가면 제사장이 말을 하는 겁니다. ‘이 소는 흠이 있어서 불합격.’ ‘이 양은 이게 부러져서 불합격.’ 짐승이 깨끗하고 온전한 짐승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야 되는데, 먼 곳에서부터 가져온 그 짐승은 오는 도중에 다치기도 하고, 병들기도 하고, 염증이 생기기도 하기 때문에, 그 짐승들을 집에서 가져올 때는 정말 좋은 것을 가지고 왔지만, 정작 제물을 드리려고 하는 그 순간에 제사장이 보고서 이건 불합격이라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없다고 한다면 낭패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이미 제사장이 인증해 주었고, 이것은 제사들이기에 깨끗한 짐승이라고 인증마크가 찍힌, 보장이 된, 하나님께 드리기에 완벽한 짐승들을 구비해놓고, 그래서 제사드리는 사람들에게 공급해 줄 수만 있다고 하면 얼마나 편리한 일이 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환전상들도 있었는데요. 이 환전상들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은 성전세를 바치게 되어 있었는데, 유월절만 되면 가서 성전세를 바쳐야 되는데, 자기들이 실제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주화를 바칠 수가 없는 겁니다. 성전세로 그걸 받으면 좋겠는데, 성전에서 안 받아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사용하는 그 주화에는 황제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제우스 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형상들이 새겨진 그 주화를 성전에서 받지 않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에서 받을 수 있는 세겔, 두로 지방에서 찍어낸 그 세겔만큼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받아주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환전해서 형상이 없는 돈으로 바꾸어서 바쳐야 되는 그 일 가운데, 환전상들이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렇게 장사하는, 짐승을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은 처음에 선하고 좋은 목적으로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배를 드려야 되는데, 제사를 드려야 되는데, 여러 가지로 불편한 게 많은 겁니다. 동물들을 구하기가 정말 어려운 겁니다. 성전세를 바칠 돈을 환전하는 것이 어려운 겁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도록 ‘우리가 좀 돕자.’ ‘우리가 짐승을 제공하고 우리가 돈을 바꾸어주어서 그래서 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잘할 수 있도록 성전세를 잘 드릴 수 있도록, 우리가 편의를 제공하자’고 하는 그 일은 어쩌면 어쩌면 선한 동기 어쩌면 거룩한 동기에서 이 일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는데, 재미가 짭짤한 겁니다.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파니까 이익이 많이 남는 겁니다. 돈을 바꾸어주니까, 그 돈을 바꾸는 것을 통해서 엄청난 이득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마도 처음에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했을런지는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정착이 되면서, 그것은 하나의 큰 이권이 되었고, 어쩌면 제사장들이나 아니면 서기관들이나 이런 사람들하고 결탁을 해서, 더 좋은 자리에서 더 많은 것을 팔 수 있는, 그런 이권이 그 자리에 개입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경건한 동기로 시작이 되었을런지 모르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이권이 되고 탐욕의 재료가 되어버려서, 결국에는 그것이 타락의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일들이 2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있는 바로 이 현장 가운데서도, 똑같은 일들이 반복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선교를 하는 것, 너무나도 소중한 일이고요. 목회 사역을 하는 것도 너무나도 정말 좋은 일이고, 교회 내에서 봉사를 하고 섬기고, 여러 가지 사역을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어쩌면 정말 선하고 거룩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선하고 좋은 일, 거룩한 일, 주의 일이 그 자체로 끝까지 거룩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타락의 가능성들이 늘 존재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단순하게 생각해서, 선교 사역을 한다거나, 구제 사역을 한다거나, 전도 사역을 하고,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이런 것들은 다 좋은 일이지, 이런 것들은 다 선하고 좋은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이 순식간에 나쁜 것으로 바뀌어 버리기 쉽고, 타락하기 쉽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것을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했는가? 기도하는 것, 구제하는 것, 금식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정결법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 아주 철저하게 해서,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요. 어쩌면 우리가 보기에는 가장 완벽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참, 너희들은 믿음이 대단하구나.’ ‘너희들이 신앙생활, 참, 잘하고 있구나.’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거 보니까, 너무나도 좋구나.’ 주님께서 칭찬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생활이 곧 이내 바뀌어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열심히 기도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주변의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 저 사람은 정말 경관한 사람이야!’ ‘저 사람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이야!’라고 존경해주기 시작한 거죠. 구제하는 그 모습을 보고, 금식하는 것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겁니다.

안식일을 제대로 잘 지키고, 정결법을 지키고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면서 인정해 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마음에,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긴 하는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죠.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며, 내가 경건하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박수받기 위해서, 저 사람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 인정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이고, 결국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을 갈망하는, 어쩌면 그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우상이 되어버린 모습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9장 26절에서부터 27절의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다름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지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지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함이로다.” 참 바울과 같은 정말 위대한 사도의 고백이 놀라운데요. 바울 사도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랑거리를 다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다 내어버리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고난을 당하면서, 두드려 맞아가면서,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했는데, 그 바울 사도의 고백이 내가 이만큼 하면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 주시겠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열심히 수고했는데, 결국 내가 버림을 당할까 두렵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왜 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 마음 가운데 쉽게 교만의 마음이 들 수가 있는 겁니다. 자기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전도를 열심히 하고, 선교 사역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것이 나의 자랑거리가 되고, 나의 교만이 되어버리면, 결국에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섬겨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 자랑거리가 되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그런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 사탄이 우리에게 협조할까요?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릴까요? 사탄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를 넘어뜨릴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 사탄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어떻게 하면 넘어뜨릴까를 연구해서 넘어뜨려 왔는데, 지금까지 역사상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넘어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넘어뜨렸듯이, 그들이 기도하고 구제하고 금식하는 그것을 그냥 하게 내버려두면서, 결국에는 그들의 마음 가운데 교만한 마음을 심어주어서 무너뜨려 버린 것처럼, 우리가 선한 일을 하게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선한 일을 하면서 교만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고, 나보다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정죄의 마음이 들면서, 욕하고 비판하고 평가하면서, 결국 우리가 사탄이 원하는 대로 넘어질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되는 것이고, 항상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지 아니하면, 우리는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분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주를 위해서 섬깁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요. 그 봉사하는 사람들은 그냥 하는 거겠습니까? 믿음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재정을 담당한다거나, 성가대에서 일을 한다거나, 또한 주방에서 봉사를 하든지, 찬양 사역을 하든지, 섬기는 그 모든 일들을 하는 것은 그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시간을 들여야 되고, 내 재정을 들여야 되고, 내 열정을 들여야 되는, 그런 일들을 해나가야만 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 아무나 할 수 없는 것들인데, 그것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과정 가운데 우리는 넘어질 수 있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은 거예요. 재정을 담당하다가 탐욕이 생겨서 손을 대는 타락하는 길로 나갈 수도 있겠고요. 아니면 내가 재정을 관리하면서 ‘내가 이 교회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내가 이런 권세를 가지 가지고 있다’고 하는 생각으로 빠져갈 수도 있겠고요.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박수 쳐주는 것에 우리가 목말라 할 수 있는, 그런 잘못된 길로 갈 수가 있는 것이죠. 성가대를 하면서 정말 수고하며 애쓰며 하나님 앞에 찬양한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까 찬양을 하나님 앞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에게 잘했다고 박수 쳐주고 내 노래 솜씨를 다른 사람들 인정받기 위한 마음으로 바뀌어 버릴 때가 있는 겁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예요. 목회를 하는데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은혜받았다고 하는 그것에 목말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박수 쳐주고 사람들이 환호해 주고, 사람들이 나를 따라주는 것에 우리가 속아 넘어갈 가능성이 있는 거,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 이 세상의 모든 선한 것들, 이 세상의 모든 경건한 것들이 끝까지 경건하고 선하고 좋은 것이 아니라, 사탄은 그것을 모두 다 다 변화시켜서 우리를 넘어지게 만드는 재료로 만들 제주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스스로 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내가 열심히 복음을 전파한 후에 도리어 내가 버림을 당할 수도 있다고 하는 그런 경각심을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성전에서 내어 쫓으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주목해 봐야될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소나 양과 비둘기를 팔던 사람과 환전상들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요. 마치 설국 열차의 머리칸과 꼬리칸처럼 성전이라고 하는 곳에는 신분에 따라서 더 깊숙히 들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들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당시의 지도를 한번 도면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저기 성소가 있다고 한다면, 성소 바로 옆에 있는 그 조그마한 방이 지성소인데, 그 지성소에는 누구만 들어갔죠? 대제사장만 들어갑니다. 그 지성소 밖은 성소인데 그 성소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죠? 아무나 못 들어가고 제사장만 들어가는 겁니다. 그 성소에서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는 누가 들어갈 수가 있겠는가? 그곳은 이스라엘의 뜰이라고 하는 곳으로서, 유대인 남자들만 그 자리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이건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그 당시의 문화였던 것이죠. 그리고 남자들이 들어가는 뜰을 밖으로 나오면 어떤 뜰이 있었냐면 여인의 뜰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저 구역까지는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어떤 것인가? 이방인들도 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도 이 자리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 수 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거기에 경고문이 쓰여져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이 문을 넘어오면 죽일 것이다’라고 하는 경고문이 쓰여져 있는 그 이방인들은 저기까지만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요. 장사하는 사람들, 소, 양, 비둘기를 팔고, 또 돈을 바꾸는 사람들은 저 여러 구역 가운데서 어느 구역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을까요? 바로 이방인의 뜰을 차지하고서 거기서 장사를 했던 겁니다.

예루살렘에 왜 이방인의 뜰이 있느냐고 의아해하실 분들이 계실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당시에는 이방인들 중에서 유대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헬라 문화가 있으면서, 다시 말하자면 알렉산더 대왕이 전 세계를 제패하고, 그리고 여러 문화가 섞이면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요. 그렇게 활발하게 교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보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유대교 신앙을 보니까 너무나도 고상한 신앙이에요. 이방인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다신교에다가, 신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사람보다 조금 더 능력이 강한 것들이 다 신들인데, 다신교인데, 유대교는 보이지 않는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라고 하는 그 점이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방인 종교는 정말 더럽고 난잡하고 도덕적으로 정말 저질스러운 종교였던 반면에, 유대교는 정말 고상한 도덕적 수준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유대교를 접하게 되면서 우리도 저런 신앙을 갖고 싶다고 해서, 수많은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그런 일들이 많이 벌어지게 되었고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유대교 신앙을 받아들여서 할례를 받으면, 유대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인데, 차마 할례까지는 못 받는 거예요. 그 당시의 문화가 할례를 받으면 수치스러운 것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할례까지는 못 받아서, 이방인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그 시기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에도 많이 등장하는데요. 누가 등장합니까?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고,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앞에 나와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했던 백부장, ‘주님, 내 집에 들어 오는 것을 저는 감당할 수 없으니, 말씀으로만 하시옵소서’라고 말했던 이방인 백부장도 그런 반절짜리 개종자인 이방인들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어디에 와서 예배를 드렸냐면, 이 그저 이방인의 뜰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거기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 생활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인데요.

이 장사하는 사람들이 어디를 차지하고 있냐면, 바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방해하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볼 때에, 주님께서 그들을 책망하면서 쫓아내시는데,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 내용 가운데 무슨 내용이 있냐 하면, ‘내 집은 만민에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지 않느냐?’ 유대인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 나와서 기도하는 집이 있는 것인데, ‘왜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느냐?’고 하면서 주님께서 책망하신 내용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정작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정작 그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오지 못하게 되는 그런 일들이 그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2천 년 전에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나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고 하고, 사람들에게 박수받기를 원하고, 내 자존심을 살리려고 하고, 내 권세를 주장하려고 하는, 잘못된 크리스찬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어서, 그들이 서로 싸우는데, 서로 싸우면서 내세우는 목적은 주님을 위해서 싸운다고 말하고 있는데, 결국 그러한 것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게 만들어버리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믿음이 허접한 사람들에게만 믿음에서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주를 위해서 헌신한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다 있는 것이죠. 여기에는 백신이 없어요. 코로나도 독감도 대상포진도 백신을 맞으면 예방이 되는데, 영적인 이 문제에는 백신이 없어서, 사탄이 언제든지 우리를 공격 가게 되면 누구든지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고, 우리도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장사하는 자들처럼 타락해 버릴 가능성들이 우리에게 언제나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19절의 말씀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중의적인 말씀인데요.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무너뜨리면 3일 만에 다시 세운다고 하는 그 말씀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고 할지라도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이며, 주님께서 친히 성전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성전이 되어주셔서, 성전이 가지고 있었던 원래의 목적,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늘 넘어진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과 연결시켜주는 그 일을, 우리 주님께서 하시겠다고 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 사도가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을 늘 쳐서 복종시켜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수고한 후에 버림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몰려들고 있는데요. 그런데 교회 안에 들어오는 오는 목적들이 2000년 전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들었던 사람들과 비슷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가면 장사할 수 있으니까 모여들고, 이곳에 오면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쳐 주니까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오고,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발걸음을 내 디딥니다. 그래서 선거철만 되면, 수많은 정치인들이 신앙인인 것처럼 행세를 하고, 교회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지만, 심지어 목사님에게 안수 받겠다고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데, 그런데,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찬들의 표를 구하고자 하는, 그런 이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서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고, 목사님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러나 정치인들과 가깝다고 하는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고 하는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고, 그런 일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취업을 위한 방편으로 교회에 오는 것이고, 우리 꼬마 아이들은 교회 와서 친구 만나고, 또 교회 와서 놀고, 아이스크림 먹기 위해서 오기도 하는 거에요.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왜 몰려들었는가 했더니,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몰려드는 것이 아니라, 미국 생활 가운데서 미국 사람들에게 이리 치고 저리 치면서 힘들고 고통스러우니까, 한국 사람들끼리 만나서 서로 사귀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교회 안으로 몰려드는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다 없앨 수 있는가? 물론 우리가 처음에 교회에 발을 들이밀 때에는 이 세상에 관심 때문에 발을 들이밀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좋아서, 여기에 가면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여기에 가면 국물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가면 박수쳐주는 것 때문에 교회 안에 올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 바라본다고 한다면 망하는 것이고,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이런 것들을 다 없애버릴 수 있을까요? 그 옛날 예수님께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았던 것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빼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빼고, 이 세상에 잘못된 동기를 제공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없애버릴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이런 거 저런 거, 정말 쓰잘데기 없는 거, 다 없애버리자라고 말하는 그런 교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그것을 너무나도 갈망하기 때문에, 우리 그런 거 다 없애버리자. 장로라고 하는 직분 없애버리고, 권사라고 하는 직분 없애버리고, 그냥 모두가 다 형제 자매로 부르자. 그렇게 바꾸려고 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정말 우리는 완벽해질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요소들을 다 제거해 버린다고 해서, 타락의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그 모든 잘못된 부수적인 요소들을 다 없애버린다고 해도, 여전히 사탄은 우리들의 마음을 넘어뜨릴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그게 불교식 해법이 불가능한 거죠. 불교식 해법은 무엇입니까? 나의 욕심, 나의 탐욕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고, 더 이상의 고통을 주는 것을 다 끊어버리고, 저 산속에 들어가서 아무런 인연도 없이 그저 산만을 바라보며, 거기서 참선하면서, 나를 속썩이는 거, 다 끊어버리고, 그저 참선만 하게 되면 마음이 평안해질 거라고 생각해서, 산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산속에 들어가면 정말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이 다 사라져버리나요? 아니요. 그 산속에도 역시 탐욕의 거리가 있고, 그 산 속에도 역시 자신들을 넘어뜨리는 것이 상존하고 있는, 소유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니까, 무소유가 되면 그러면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힘든 일들이 없어질까요? 아니요. 무소유라고 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박수치는 거에 넘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목숨을 가지고 살아 있는 한, 우리가 느끼고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는 그런 요소들로 다 쓸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없애는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가야 하는 것이고, 날마다 날마다 나 자신을 복종시켜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왔다가도, 사람들이 눈에 보여서 마음에 시험이 들기 시작하면 정신 차리고, ‘아, 이게 아니지.’ ‘내가 사람 보러 온 게 아니지.’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왔다가 사람들이 박수 치는 것에 취하다 보면, 빨리 정신을 차리고, ‘내가 이런 박수 소리 때문에 신앙생활하는 거 아니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다시 원위치로 또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유산을 주기도 하고 사랑을 베풀어 주기도 하는데, 우리 자녀들 가운데 부모의 유산이 탐이 나서 효도한다고 하면, 그것이 참된 효도가 아닌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선물들을 다 제해야만, 그래야만 하나님을 참으로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에게서 오는 많은 은혜와 축복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러 가지 이 세상의 조건들에 취해버려서 하나님을 망각해 버릴 것이 아니라, 썩어져버리는 것, 없어져 버릴 것, 이 세상에 배부르게 못할 것 때문에 우리가 마음이 빼앗길 것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마다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가서, 잠시 교만했다가도 또다시 내려놓고, 잠시 이기적으로 내 마음이 이 세상의 것을 향했다가도, 다시 주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주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풍성하게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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