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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란 (롬 1:1-7)

오늘부터 시작해서 로마서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로마서라고 하는 이 책은 많은 사람을 흥분하게 만들었고,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던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사람을 예로 든다고 한다면,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를 들 수 있겠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 로마서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면서, 그 당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 마틴 루터는 결국 종교 개혁을 일으키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종교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던 성경이 바로 이 로마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성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총 66권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구약이 몇 권이죠? 39권입니다. 39권입니다. 신약은 27권. 너무 잘 아세요. 39 27 총 66권의 성경 말씀이 있는데, 이 성경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어떤 성경을 읽는가가 아주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 가운데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한 채, 특별히 로마서의 말씀이나 갈라디아서의 말씀 같은 그 말씀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구약 성경만을 읽게 되고, 구약 성경만을 살펴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지 않고, 일부만을, 구약 성경만을 읽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왜곡된 신앙으로 귀결되는 것이고, 잘못된 종교로 빠져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오늘날에도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왜? 구약 성경에 써 있기를,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분명하게 쓰여 있으니까, 성경 말씀에 먹지 말라고 했으니까, 먹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 토요일이 안식일이니까, 주일날 예배드릴 것이 아니라, 토요일날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왜? 성경 말씀에 ‘안식일을 지켜라.’ 다른 날이 아니라 ‘이 안식일을 반드시 지키라’고 성경 말씀에 쓰여 있으니까,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날 안식일을 지켜야 그게 진짜 교회라고 하는 엉터리 주장을 하는 겁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 성경 말씀에 보니까, 분명하게 할례를 받으라고 쓰여 있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끊어질 거라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약의 모든 율법의 요구들을 다 충족시키시고,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율법의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공로를 무시하는 해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하는 그 사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악의 굴레로부터, 율법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고 하는, 이 엄청난 구원의 기쁨의 소식이 있는데, 그 소식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 주셨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구약 성경에 쓰여져 있으니까, 돼지고기 먹지 말라고 했으니까, 먹지 말아야 되고, 그리고 구약 성경에 있는 그런 내용들을 다 지켜야 한다고 하는 그런 엉터리 주장들이, 놀랍게도 멀지 않은, 우리 근처에서 많이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왜 이런 엉터리 주장들이 나오게 됩니까? 그것은 성경을 골고루 읽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체적으로 다 살펴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별히 로마서의 말씀과 갈라디아서의 말씀,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그 놀라운 역사적인 사실을 무시해 버리고, 그저 구약이라고 하는 말씀만 편식하게 되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으로, 왜곡된 신앙으로, 잘못된 종교로 빠져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균형적인 말씀을 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무리 교회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교회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모든 것을 다 분별해서 함께 살펴보지 아니하면, 그 옛날 마틴 루터 시대에 카톨릭 교회가 잘못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도 잘못된 길로 가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고, 그 가능성을 현실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에도 편식하게 되면 발육에 문제가 되듯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도 골고루,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신앙의 이상 현상이 생기게 되어 있고, 왜곡 현상이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마틴 루터는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시대에 그 당시의 교회는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모든 유럽의 사람들이 사용한 언어는, 독일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했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어를 사용했고, 스페인에서는 Spanish를 사용했고, 영국에서는 영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사용된 언어는 이미 사어가 되어버린 라틴어만을 사용했습니다.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현장에서, 즉 미사를 드리는 그 현장에서는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이미 사어가 되어버린 그 라틴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평신도들은 물론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부가 된 사람들도 라틴어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저 주문을 외우듯이 전통에 따라서, 그냥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데,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고, 성경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늘 해오던 방식만을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그런 엉터리 신앙생활을 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틴 루터를 비롯해서 장 칼뱅과 같은 사람들은 성경을 원어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신약 성경을 헬라어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구약 성경을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성경 말씀을 제대로 발견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이 종교개혁자들은 놀라운 시각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로마서를 읽으면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 구약 성경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야기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었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생활을 완전히 어떻게 바꾸어 버렸는가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면서, 결국 그 종교 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성경적인 교회로 돌아가게 된 것이 종교개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10월 마지막 주일이 종교개혁 기념주일인데요. 10월 마지막 주, 10월 31일 날 마틴 루터가 당시의 모든 신학자들과 함께 토론을 하겠다고 95개 조의 토론 주제를 성당문에 걸어 붙인 것이 발화선이 되어서, 도화선이 되어서, 종교 개혁을 일으키게 되었는데요. 그렇게 이끌게 만들었던 중요한 성경책 가운데 하나인 로마서를 오늘 우리가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살펴보게 될 텐데,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성경을 강해하는데 16년이 걸렸습니다. 로마서만 강해하는데. 그러면서 은퇴할 때 다 끝내지 못한 채 은퇴해 버리고 말았는데요. 저는 그렇게 길게까지는 안 할 테지만, 아무튼 로마서의 말씀들을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텐데, 기대가 되시나요? 예, 저도 많은 기대가 됩니다.

하지만 로마서를 읽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른 성경의 경우에는 이야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스토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읽기만 해도 어떤 내용인가가 쉽게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아, 무슨 이야기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로마서는 편지이고, 로마서는 긴 논문과 같은 그런 책이기 때문에, 이 로마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를 파악하는 것 자체가 쉽지가 않습니다.

오늘 로마서 1장 1절에서부터 7절 말씀을, 7절까지의 말씀을 읽었는데,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아, 지금 이 1절에서부터 7절까지의 말씀이 무슨 내용이었다’ 하는 것이 감이 오신 분이 계십니까? 혹시, 아마, 성경을 읽었지만, 오늘 무슨 내용으로 읽었지? 아마, 다들 마음속에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스토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죠. 지금 바울 사도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하는데, 도대체 무슨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 쉽게 다가오지 않도록 되어 있는 글이 이 글입니다.

고대 문헌을 살펴보면, 오늘날에는 문장을 아주 간결하게 글을 씁니다. 짤막짤막한 글들을 모아서, 오늘날은 글을 쓰지만, 고대 사람들은 글을 쓰는 스타일이 질질 늘어 쓰는 스타일입니다. 문장 하나가 한 페이지, 두 페이지, 3페이지를 넘어갈 정도로 긴 문장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고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의 책을 읽는다든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는다든지, 그리고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이런 고대 문서를 읽으면, 문장이 짤막짤막한 문장이 아니라, 아주 길게 연결되고 연결되어서, 한 문장이 엄청나게 긴 문장인데, 오늘 우리가 1절에서부터 7절 말씀을 읽었는데, 이 1절에서 7절까지의 긴 말씀도 여러 문장처럼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은 두 문장밖에 안 됩니다.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고, 두 문장밖에 안 되는 것이죠.

그럼 어떤 내용인가? 첫 번째 도표를 한번 제가 보여주면서 설명해야 될 것 같습니다. 1장 1절서부터 7절 상반절까지의 내용은 이런 내용입니다. “바울이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7절 하반절은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보냅니다”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말을 좀 회색으로 제가 표시를 했는데요. 왜 이렇게 회색으로 표시했냐면, 원문에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문은 그냥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라고 하는 말로 되어 있고,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라고 하는 말로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편지글이기 때문에, 바울이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고, 그리고 편지를 맨 처음에 쓰다 보면, 인사말을 먼저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축복의 인사말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오늘 읽은 말씀은 바울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하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요. 그렇게 바울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이야기하면서, 그런데 왜 이렇게 길게 썼는가? 바울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부연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 이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 도표를 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다. 바울이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런데 그 바울은 누구냐? 그 바울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두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이다. 그리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다’라고 소개를 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 편지를 여러분들에게 보냅니다’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사도라고만 표현하다 보니까, 이해가 잘 안 되기 때문에, 거기에 덧붙여서 사도는 사도인데, 어떤 사도냐?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따로 구별하여 세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라고, 자기 자신을 소개하면서 편지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 자신을 소개하면서 두 가지로 자기를 설명했다고 했는데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종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해 보면 좋겠는데요. 종종 사람들은 자신을 종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바울은 자신을 종이라고 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모두가 다 종이에요. ‘아, 나는 종 되기 싫어’라고 말할 수, 말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우리는 어차피 종입니다. 누구의 종인가? 예수님의 종, 하나님의 종이 되든지, 아니면 사탄의 종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종이 되기를 싫어.’ ‘내가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지는 않아’라고 생각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 예수님의 종이라고 하는 것을 거부하게 되면, 그러면 나는 자연스럽게 자연인,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으로 전락하게 되냐면 사탄의 종으로 전락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자유인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냐? 예수님의 종이냐? 사탄의 종이냐? 둘 중에 하나인 것이고, 그 중립지대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마치 정치와 비슷해요. 여러분은 중립입니까? 여당편입니까? 야당편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중립’이라고. 근데 알고 보면, 중립이던가요? 아니요 분명히 저 사람은 여당 편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저 사람은 야당 편입니다. 여당 편이 아니면 자동으로 야당편이 되는 것이고, 야당 편이 아니면 자동으로 여당편이 되는 겁니다. 악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으면, 악에 동조하는 편이 되는 것이고, 악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은 악을 거부하는 편이 되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든지, 아니면 사탄의 종이 되는 것이지, 중립지대는 없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신앙을 거부하면서, 나는 그런 신앙을 갖고 싶지 않다고, 나는 그냥 무종교인, 무교로 살고 싶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사람들은 무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싶지 않고, 나는 누구를 섬기고 싶지 않고, 나는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사람들은 자유인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 아닌, 돈을 섬기는 것이고, 권력을 섬기는 것이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고, 무엇인가 갈망하는 대상이 있는 것이지, 전혀 아무것도 섬기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느냐? 아니면 돈의 노예, 탐욕의 노예, 이기심의 노예, 한마디로 뭉뚱거려서 말하면 사탄의 종이 되느냐? 둘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인데요. 바울 사도는 나는 그런 이 세상의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사도라고 하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을 가리켜서 사도라고 이야기합니다. 대사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나라의 명령을 받아서 자기 나라를 대표해서 행동하라고 명령을 받은 사람이 대사가 되는 것처럼, 사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명을 가지고 보내심을 받은 사람을 사도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모든 보냄을 받은 사람 ,모든 심부름꾼이 다 사도인 것이죠. 만일 제가 어떤 초등학생을 만나서 돈을 주면서 ‘너, 슈퍼마켓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와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다고 한다면, 그 초등학생은 저의 사도가 되어 아이스크림을 살아가는 아이스크림의 사도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을 소개하면서, 내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까지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불충분하기 때문에, 내가 무슨 사도인가? 나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사도가 아니라, 무슨 사도인가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바로 복음을 위한 사도라고 자기 자신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다른 것을 위해서 사도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사도다. ‘복음을 위해서 내가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에 대해서도 또 설명할 필요가 생겼어요. 복음이 무엇이죠? 문자적인 의미는 복된 소식인데, 원문의 의미는 좋은 소식, 기쁨의 소식. 그것이 복음, 도대체 기쁨의 소식, 좋은 소식이 무엇일까요? 우리들에게 정말 좋은 소식, 우리들에게 정말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백신이 나왔다고 하는 소식이 좋은 소식입니까? 456억을 벌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좋은 소식입니까? 몇 년만 일해도, 50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좋은 소식입니까? 그게 좋은 소식이 아니라, 바울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음 도표를 한번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복음의 사도가 되었는데, 내가 전하는 그 복음 소식이 무엇인가? 설명하기를, 그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미리 성경에 약속하신 것이오. 그런데 어떻게 약속하셨는가?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하신 것이고, 그 아들에 관해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서 약속하신 것인데, 그 아들에 대해서도 또 설명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 아들은 어떤 아들인가? 육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탄생한 아들이면서, 동시에 영적으로는 부활을 통해,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그 아들에 관해서 구약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 예수 복음인데, 바로 그 복음이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고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라고 자기 자신을 설명하면서 설명하고 있는데, 복된 소식이 무엇인가? 다른 게 복된 소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복된 소식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로마서 전체가 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복된 소식인가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들에게 좋은 소식인가를 설명하는 책이 로마서인데요.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살려내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복된 소식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에 선지자들이 미리 예언해 놓았습니다. 하나님, 주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미리 예언되어 있다고요? 성경에! 어떤 성경? 그 당시에 성경은 구약 성경에 그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누구를 바라보아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을 발견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전부가 예수님에 대한 예언들입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잘못 읽은 거예요. 구약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구약 성경을 잘못 읽은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도, 성경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으로만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해 주고 있다고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은 구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발견하셨습니까?

구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이 쓰여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 내셨습니다. 그렇게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모세를 보내주실 것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악의 지배 가운데서부터 해방시켜주실 것이라고 미리 예언해 주고 계시는 것이죠.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불뱀에 물리게 되었습니다. 불뱀에 물리게 되면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원망하던 그 사람들이 모두 다 죽게 되었을 때, 죽어도 싼 그 인생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요. 놋뱀을 만들어 장대 높이 매달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누구든지 저 놋뱀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정말로 아무런 소망이 없던 그들이 저 놋뱀, 장대에 달린 그 놋뱀을 바라보는 그 순간, 죽지 않고 살아나는 기적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와 비슷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예수님을 바라보면, 구원을 얻을게 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예언해 주고 계시는 것이죠.

이스라엘 민족이 골리앗의 침입으로 인해서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을 때, 벌벌 떨고 죽게 되어버린 그 상황 가운데서, 어린 소년이 나타나서, 골리앗과 싸우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나약한 소년이 나타나서, 물맷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그 장면을 보여주시면서, 우리에게도 정말 힘없는 자가 나타나서, 죽는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그러나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그 골리앗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죠.

완전히 망해버린 가정 나오미의 가정, 남편도 죽어버리고 아들도 죽어버려서 더 이상 소망이 없던 그 나오미의 가정에, 남편이 죽어버려서 이제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던 그 룻이라고 하는 그 여인에게 보아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가정을 품어주고 사랑으로 덮어주셔서 또 다른 소망이 있게 만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새로운 신랑이 되어 주셔서 우리를 품어주신다고 하는 그 구원의 이야기, 이스라엘 민족이 하만이라고 하는 사람에 의해서, 계략에 의해서 모두가 다 멸절당하게 되었을 때, 에스더라고 하는 왕비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그런 각오로 왕에게 나아가게 되었고, 결국 이스라엘을 구원해내는 역전의 발판을 만들어낸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이야기. 성경에 있는 모든 이야기들이, 삼손이 기둥을 무너뜨려서, 자신을 죽임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했던 이야기와, 기드온의 300 용사들이 정말 상대도 안 되는 그 조그만 숫자를 들고나가서, 미디안을 물리친 이야기. 속죄제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고, 살인죄를 지어도 도피성으로 도망하게 되면 살 수 있는, 그 구원의 이야기들이 구약 성경에 수도 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만드는 겁니다.

다윗이 우리의 구원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백성의 아내를 빼앗아버리고, 그리고 그 백성을 전쟁터로 보내서 죽이는 그런 파렴치한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 다윗이 우리들에게 진정한 구원자가 아니라, 다윗을 능가하는 우리를 영원히 구원해 줄 수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이야기로 구약 성경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결국 복음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이 복음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5절에 5절부터 설명을 더 해 나가는데요. 네 번째 도표를 보여주시면 이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복음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얻었고, 사도의 직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사도라의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도의 직분인가? 모든 이방인으로 하여금 믿음의 순종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사도의 직분을 우리가 받은 것이고, 그렇게 우리가 그런 사역을 하는 이방인들 가운데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 바울 자신을 소개하면서 계속 설명 설명 설명 설명이 붙어가지고, 7장 상반절까지 바울 자신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다음 도표를 한번 보여주십시오. 그다음 도표 1절서부터 7절 상반절은 주 문장이 바울이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낸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사람들인가? 로마에 있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를,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바울이 편지를 보내는데, 바울은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사도는 어떤 사도인가? 복음을 위한 사도인데, 복음은 무엇인가? 미리 성경에 약속한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복음이고 그 아들은 누군가? 육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났는데,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고, 그분이 바로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사도 직분을 받았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고, 여러분들도 그리스도에게 속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한 절로 요약하면, 바울이 모든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고 하는 내용이 7절 상반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7절 하반절에서 인사를 하는 겁니다.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그 은혜와 평강은 어떤 평강인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원한다고 인사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아주 장황하게 제가 설명을 드렸는데요. 복음의 사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간구한다고 하는 그런 내용의 말씀이 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울이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며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종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우가 호랑이 앞에 가면서, 마치 자기가 동물의 왕인 것처럼 호가호위하는 일이 있는데요. 오늘날 종교계에도 주님이 우리의 소망이신데, 주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무엇인가 대단한 권세를 지닌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정치권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요. 마치 자신이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해서 이득을 취하는, 정치권에 들러붙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과 비슷하게, 종교계 안에서도 예수님을 예수님을 핑계로 자기 자신이 호가호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이고, 성도들도 목회자들이 혹시 그런 잘못된 목회자인지 분별하지 아니하면 잘못된 복음에 속아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나는 복음이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인데요. 물론 우리가 목회자를 무시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복음의 기쁜 소식은 다른 어떤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기쁨의 소식이요. 복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종종 우리는 예수님이 아닌 것들에게 소망을 둘 때가 있습니다. 돈이 우리의 소망인냥, 인생의 성공이 우리의 소망인 냥, 아니면 어떤 정치인이 우리의 소망인 양, 우리가 잘못된 대상에 우리의 소망을 걸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선거철만 다가오면 새로운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우리의 구세주인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정치인의 노예가 되어서,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 목회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망은 정치인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돈이 우리의 소망이 아니고, 우리의 참된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소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성도로서 바울 사도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은혜를 나누며,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며 사는 귀하고 복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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