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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 (행 1:6-8)

어제 코로나 확진자의 숫자가 몇 명이나 되는가 하고 살펴보니까, 어제 확진자의 숫자가 6,689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별로 놀라시지 않는 것 같은데요. 그것은 아마도 지난 며칠 동안 7천 명대를 넘어서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아 왔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객관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작년 대구에서 신천지 발로 인해서 집단 감염이 이루어져서 온 나라가 난리가 났을 때, 그때 하루 확진자가 몇 명이나 되었는지 혹시 기억하시는 분 계십니까? 대략적으로 한 500여 명 확진자가 나올 때, 그리고 가장 많이 나왔을 때는 813명이 나왔을 때, 우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마치 무슨 큰일이나 날 것처럼 모두가 벌벌 떨었던 것이 작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7천 명이 넘어도 무덤덤한 상태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작년에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바이러스라고 하는 거 겨울 지나면 끝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을 했었는데요. 끝나지 않고 여름도 계속되더니만, 1년이 지속되었고, 이제 백신이 나오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백신이 나오면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확진자들이 우리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벌써 2년이라고 하는 코로나 상황을 우리가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코로나가 발병할 때 질병관리본부에서 맨 처음에 어떤 한 직원이 나와서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그분은 나와서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어쩌면 우리는 이전의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 코로나가 시작될 때 했던 이 말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우리들의 대부분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어서 속히 빨리 코로나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으로 기다려 왔습니다. 그리고 예전의 삶으로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불편해도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전의 삶을 다시 회복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지금 잠깐의 불편은 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마스크를 쓰라고 하면 썼고, 같이 모여 식사를 하지 말라고 하면 식사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 예배를 비대면으로 드리고 집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면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성가대가 중단된 지도 벌써 2년째 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편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고 하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백신을 맞으라고 하면 맞았습니다. 백신을 맞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고, 그것으로 인해서 아프고 또 마치 몸살을 앓는 것처럼 부작용들도 있었지만, 돌아갈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런 것 정도는 참을 수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 외에도 하나 더 한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매 주일마다 대표 기도하시는 분들이 빠지지 않고 했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냐면, 어서 속히 코로나의 상황이 끝나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만유의 주이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고 하는 것을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2년이 지난 오늘 도대체 코로나가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아 보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코로나가 끝날 것 같습니까?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끝날 것 같습니까? 이러다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드십니까? 1부 때 한번 조사를 해봤는데요. 2부 때도 한번 손 한번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건 정답이 없는 겁니다. 우리 아무도 정답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한번 손 들어보시죠. 힘들긴 하겠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극복하고 언젠가는 코로나가 끝날 것 같다라고 생각 드시는 분 한번 손 들어보실래요? 네, 감사합니다. 이러다가 안 끝날지도 모르겠다. 안 끝날지도 모르겠다 한번 손 들어주십시오. 2부 때는 좀 끝날 것 같다는 숫자가 조금 더 많은데요. 일부 때는 거의 반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의사 선생님은 끝날 것 같다는 쪽에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이쯤에서 우리들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코로나가 끝나지 않는 것일까? 왜 코로나가 끝나지 않는 것일까? 도대체 코로나는 언제 끝날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우리가 던지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하면 들으시겠다고 성경에 약속하고 있는데, 우리가 기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고 있는 이 황당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부족한 것일까요? 아니라고 한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언제 코로나가 끝날 것인가라고 하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주님의 답변이 사실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한 주님의 응답이, 사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사도행전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의 말씀 가운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던졌던 질문,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도대체 하나님께서 언제 허락해 주실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왜 제자들은 이 질문을 던졌을까요? 그것은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아주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아서, 고통 가운데 악재 가운데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번 개관해 보면 좋겠는데요. 도표를 한번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많은 세월을 외세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왔습니다.

주전 722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고, 주전 586년에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한 이후, 1차 포로 귀환, 2차 귀환, 그리고 445년에 3차 귀환이 이루어져서 약간의 자유를 누린 때가 있었지만, 주전 332년에 그리스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제패하면서, 이스라엘은 헬라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01년에는 지금의 이집트라고 할 수 있는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주전 2001년에는 지금의 시리아라고 할 수 있는 셀루키드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명확한 것은 아니고요. 서로 프톨레미 왕조와 셀루키드 왕조가 서로 번갈아가면서 여러 번에 걸쳐서 이스라엘을 지배해 왔었습니다.

그렇게 고생 가운데 있다가 주전 167년에 마카비 혁명이 일어나 독립을 하게 되었고, 그리고 하스모니아 왕조가 이루어져서 주전 63년까지 약 100여 년 동안 약간의 독립한 기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전 63년에 다시 이제는 세계 강대국이 되어 버린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그때부터 지배를 받기 시작해서 이스라엘은 한 번도 독립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나중에 1948년이 되어서야 이스라엘이 독립하게 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던 것이고요.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 정부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 시대에 살던 이스라엘 민족들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이냐면, 도대체 언제 우리나라가 독립하는가가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코로나 정국 가운데서 언제 코로나가 끝나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언제 그 정말 좋았던 그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까가 우리들의 관심이었듯이,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관심은 무엇이냐면 언제 이 외세의 지배가 끝날 것인가? 하나님, 제발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언제 우리 민족을 다시 독립시켜주실 겁니까? 우리 이스라엘을 언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까? 하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뭐 합니까? 로마 정부가 와서 다 빼앗아가 버리고, 장사를 하면 뭐 합니까? 저 로마 정부가 다 세금으로 거두어 가는, 정말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 우리 이스라엘을 언제 구원해 주실 겁니까?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외세의 지배를 끝내게 해 주옵소서. 옛날 다윗의 그 나라, 솔로몬의 그 영광을 다시 한 번 회복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그때의 영광을 다시 되찾게 해달라고 했던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저 갈릴리에서 오신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베푸시기도 했고, 병자를 살리시기도 했고, 오병이어로서 수천 명을 먹이기도 하는 등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를 살려주소서. 찬송을 부르면서 환호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는데요.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다가 보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십자가에 의해서 못 박혀 죽은 겁니다. 너무나도 처참하게, 너무나도 맥없이, 아무런 힘도 없이 처참하게 죽어 있는 십자가 위에 달려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지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소망이 누가복음 24장 21절에 있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고백 가운데서 들어 있었는데요. 그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스라엘 민족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 예수님이 우리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줄 사람이라고 그렇게 기대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좀 우리를 로마 정부에서부터 해방시켜줄 그런 메시아가 될 거라고 소망했는데, 그런데 무참히 죽는 그 예수님을 보면서 모두가 다 실망해 버린 겁니다.

그런데 또다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그 예수님이 다시 짠하고 나타난 거에요. 이제는 그 이전보다도 더 큰 소망 가운데 기대가 부풀러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몰려들어서, 예수님에게 묻기 시작한 겁니다. 주님,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가 이때니까? 지금 주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실 겁니까? 어쩌면 코로나가 언제 끝날 지를 기대하고 궁금해하는 우리들의 마음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주님께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7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이르시되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예수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은 그날이 언제인지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 올까? 거기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는 겁니다.

대신 무엇을 물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언제 그날이 오는가를 물을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관점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요. 우리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만나게 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언제 이 고통스러운 상황이 끝날 것인가라고 하는 언제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최고의 관심사가 되어 버리는 것이죠. 언제 이 지긋지긋한 상황이 끝날 것인가? 도대체 언제 이 힘든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가 우리들의 최고의 관심사가 됩니다. 도대체 언제 이 문제가 해결될까? 도대체 언제 이 상황이 끝날 것인가? 도대체 언제 이 지긋지긋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게 우리들의 관심사입니다.

그게 제일 생생했던 적이 언제였습니까? 그런 질문이 가장 생생하게 느껴졌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아마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남성들은 그 시절이 군대 시절이었다고 고백할 겁니다. 젊은 시절에 20대 초에 그냥 학생으로 그 천진난만하게 지내던 젊은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군대라고 하는 괴물과 같은 집단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거기는 구타가 있고,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벌어지는 상상도 못 할 아픔이 있고, 정말 고통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군 입대하는 날부터 생각되는 가장 장 생각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언제 이곳을 떠나, 언제 내가 전역할 수 있을까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전역할 날 짜가 언제인가를 바라보는 것이 그때부터 계산이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전역할 날짜가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제대할 때까지 며칠이 남았는가를 세워보고 있는 겁니다 고참들은 졸병들을 약 올리는 거죠. 너희들의 제대할 날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제대할 날을 며칠 남았다고 말을 하면서, 너희들은 생각지도 말라고 하는데, 졸병들의 마음속에서도 며칠이 남았다고 세어가면서 그날을 기다리고 또 그날을 견디는 겁니다. 그날이 있기 때문에, 오늘을 견디는 겁니다. 끝날 날이 있기 때문에, 지금 견뎌낼 수 있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 이렇게 힘들어도 국방부의 시계는 가는 것이고, 하늘이 무너져도 국방부의 시계는 가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저 꼴 보기 싫은 고참은 전역할 것이고, 힘든 내 고생길도 신병이 들어오면 끝나게 될 것이고, 그리고 이렇게 지내다 보면 결국 나도 전력하게 될 거라고 하는 소망 때문에 버티고 또 버티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면 어떤 결과를 얻게 될까요? 그러면 지금이라고 하는 시간은 무의미해져 버리는 결과가 빚어지게 됩니다. 저 끝날 날을 바라보면, 저 마지막 때를 바라보게 되면, 지금이라고 하는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간이 됩니다. 지금은 빨리 지나가야 하는 시간이고, 무의미한 시간이고 괴로운 시간일 뿐입니다. 군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나요? 전역하는 게 목적이에요. 들어가는 날부터 전역하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복무 기간 동안에 시키는 일은 마지 못해서 하고, 그저 다치지 않게 있다가, 전역할 수만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게 자신의 목표가 되어 버린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군대에 들어가면서 내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사명을 가지고 군대 들어간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어요.

우리가 코로나 상황이 되면서, 어쩌면 우리도 비슷한 멘탈리티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도대체 코로나가 언제 끝날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지금이라고 하는 시간은 무의미해져 버립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해볼 수 있겠고, 코로나가 끝나면 뭔가를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움직이는 때가 아니고,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관망만 해버리는 시간이 되는 것인데요. 그것은 건전한 생각이 아닙니다.

주님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때가 도대체 언제입니까? 간절하게 묻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그건 너희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건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으니까 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날 끝나게 할 것이고, 그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오.” 우리가 던져야 될 질문이 무엇인가? 우리가 구해야 될 제목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언제 회복하시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라는 겁니다.

지금 상황은 낙망하고 있는 사람,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고민하는 게 우리들의 문제이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죠.

사실 성경에 보면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언제”를 물은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물었습니다. 예를 들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요셉이라고 하는 인물을 꼽을 수가 있겠습니다. 요셉은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아무런 고생도 해보지 못한 채 정말 행복하게 살던 한 소년이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서,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애굽 땅에, 이집트의 군대 장관 보디발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져 버린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이 그의 앞에 열리게 되었는데요.

이때 요셉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죠.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도대체 언제 내 신세가 역전될 수 있을까? 언제 이 지긋지긋한 노예 생활을 끝낼 수 있으며, 언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신세 한탄을 하면서 지내는 선택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선택의 길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곳에 보내셨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곳에 보내셨고,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요셉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살면서, 그냥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발견했고, 그래서 거기서 성실하게 일을 했어요. 최선을 다해서 일한 겁니다. 열심을 다해서 일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면서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사명을 실천한 거죠. 주인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돌보며,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그 자리에서 다 하다가, 그러나 거기서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 아니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 갇혔을 때도 요셉이 던진 질문은 언제 이 감옥에서 나갈 수 있을까를 질문한 것이 아니고, 이 감옥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이 감옥 속에 넣었는가를 질문하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깨닫기 시작했어요. 거기서 최선을 다해서 일을 했고, 함께 감옥에 들어온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그런 일들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이 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늘 문제를 만나면서 삽니다. 이미 우리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코로나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만이 우리들의 문제가 아니죠. 가정의 불화로 인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자녀들의 문제 때문에, 이것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몰라, 이것 해결할 수 없어서, 정말 고통스럽고 방황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고쳐지지 않는 그 질병으로 인해서 마음이 상심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문제 해결될 수 없을 것 같은 이 문제,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고 아무런 해결책도 없는 것 같은 그 상황 가운데서, 우리들의 마음은 무엇이냐면, 하나님 도대체 언제 끝납니까? 언제 끝납니까? 그것이 우리들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이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 없어요. 지금 당장은 내 자신의 문제가 제일 커 보이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각자 자기에게 가장 큰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요. 그때 우리가 던져야 될 질문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언제 언제 끝나느냐의 질문보다는, 우리가 던져야 될 질문은 “하나님, 지금 끝나지 않은 이 상황 가운데,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그걸 우리가 질문을 던져야 해요. 언제 끝날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자연스럽게 던져질 질문이겠지만, 지금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던지는 것이 그게 믿음의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고, 따라서 우리의 질문은, 우리의 기도의 제목은 단순히 코로나를 빨리 끝내 달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을 넘어서서, (물론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도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차원에서 머무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 이 코로나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상황 가운데 넣어 주셨습니까? 여기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질문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히 이 코로나 시대에는 주님의 사랑이 더 갈급한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외로워졌고, 사람들은 더 아프고, 사람들은 더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 그런 강도 만난 것과 같은 사람들에게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내 옆에 쓰러져 있는 우리들의 자녀들, 내 옆에 쓰러져 있는 우리들의 형제들, 고통받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 저를 어떻게 사용하셔서, 이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질문을 던지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사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이 죄로 인하여서 완전히 망가져 버렸을 때,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멸망받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던지신 질문은, “도대체 이 인간들이 언제 정신 차릴까?”가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이 못난 인간들이 언제 정신 차리고 돌아올까?”를 물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고 저란 이 땅까지 내려오셨어요. 그게 바로 성탄절이에요.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가 당해야 될 그 십자가의 심판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을 우리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줄을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황수관 박사님이 했던 아주 유명한 강연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 모든 분들이 다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주 여러 번 봤는데요. 황수관 박사의 강연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었던 강연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라고 하는 강연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강연이었죠. 아버지에 대해서 재밌으라고 한 얘기일 겁니다. 그 황수관 박사의 아버지는 일본에 있을 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혼자 살겠다고 뛰쳐나갔다가, 나중에 보니까 자기 아내는 아이들을 껴안고 있는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해요. 다시는 그런 일 없겠다고 다짐하셨던 그 아버지 6.25 전쟁을 만나서 피난길을 가시다가 자기 옆에 수류탄이 터졌을 때 또 나 살려라 하면서 도망가 버렸는데 그 상황 가운데서 어머니는 세 자녀를 붙들고 그 자리에서 그 자녀들을 품고 쓰러져 있는 그 모습을 보았다는 거 아닙니까?

근데 그게 바로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죄악으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을 때, 저 더러운 인간들 언제 정신 차릴까? 언제 돌아올까를 질문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어요. 그리고 우리를 껴안으셨어요.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이 받은 줄로 믿습니다.

이 코로나의 상황을 지나면서 그리고 우리가 우리 개인마다 사람마다 각각 다른 환경 가운데서, 다른 처지에서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겁니다. 그때 도대체 언제 이 지긋지긋한 이 문제 끝날 것인가만 생각하며 한탄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왜 내게 이 자리에 오게 하셨는가? 왜 이 남편을 내게 붙여주었고, 왜 이 자녀를 내게 붙여주었고, 왜 주님께서는 나에게 이 직장에서 일하게 해 주셨는지, 왜 이 사람을 만나게 했는지, 강도 만난 자 옆을 지나가는 우리라고 한다면, 주님 그 사명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기에 우리의 기도의 제목은 “주님, 성령의 권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감당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문제를 끌어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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