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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의 죽음 (삼하 18:1-18)

2020년 10월 14일 수요예배 설교

할렐루야.

오늘 본문은 압살롬의 군사들과 다윗의 군사들 사이에 있었던 전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피난의 길에 올랐다가, 이제 어느 정도 먹을 것을 먹고 기운을 차린 후에, 그리고 그 군사들을 3개의 병력으로 구분하여, 각각 전투에 임하도록 그렇게 조직하였는데요. 그 3개 부대의 군 사령관들로 요압과 아비새와 이때라고 하는 그 장수에게 각각의 부대를 맡겨서, 그래서 압살롬의 군대와 맞설 수 있도록 그렇게 조직하게 된 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도 그 전투에 나가려고 했지만 신하들이 말립니다. 다윗의 목숨은 다윗의 군사 절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고, 만 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고, 압살롬이 찾는 것은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목숨만을 찾고 있으니, 피하는 것이 좋겠다. 전쟁에 나가지 않고, 뒤에 있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는 그런 신하들의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그 말에 따라서, 전투에 나가지 않고, 오직 다윗의 군인들만 그 압살롬의 병사들과 함께 전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전투는 일방적인 다윗 군대의 승리로 끝나게 됐습니다. 모든 그 전투의 흐름이 다윗의 군사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게 되었는데요. 7절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 압살롬 수하에 있었던 그 군사들이 2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전사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그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압살론마저 죽임을 당하게 되면서, 이 전투는 아주 간단하게 다윗 군대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고 하는 그 이야기가 오늘 사무엘하 18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쟁이 진행되는 이 과정을 묘사한 내용들을 쭉 읽어나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우시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을 쓰면서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이라고 노래했고, “여호와는 나의 방패”이라고 이야기했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나의 보호자가 되시고, 나의 환난 날에 도움이 되시고, 힘이 되신다고 고백했는데, 정말 이 다윗이 싸우는 그 전투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을 보호해 주시고, 또 그 전쟁 가운데서 승리하게 하시고, 그 위험 가운데서 다윗을 보호해 주시는 그 장면을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읽을 수가 있겠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와주고 계셨다고 하는 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어디에 나오냐면, 8절 말씀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8절 말씀에 보면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날의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압살롬의 군사들이 2만 명이나 죽었는데, 압살롬의 군사들이 많이 죽었는데, 그 군사들이 어떻게 죽었는가? 수풀에서 죽은 군사들의 숫자가 칼에 맞아 죽은 사람들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수풀에서 죽었다고 하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전투에 나간 군인이 수풀에서 죽는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상황 가운데서 죽게 되는 것일까요? 잘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수풀에 무슨 독이 있었나요? 아니면 수풀에 무슨 함정이 있었나? 아니면 여러 가지 뭐가 있었나? 아무튼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8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압살롬 군사들이, 압살롬의 휘하에 있는 그 병사들이 전투에서 엄청나게 많이 죽었는데, 왜 죽었는가? 다윗의 군사들에 의해서 칼에 맞아 죽은 사람들보다 수풀에서 죽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다 잘하는 건 아니고요. 모르는 것도 많습니다. 잘 모릅니다. 도대체 수풀에서 죽는다고 하는 것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 민족과 전투를 하면서 승리할 때마다 많은 경우에 어떻게 표현하고 있냐면, 칼에 맞아 죽은 사람들보다 어떤 사람들이 더 많이 죽었다고 표현을 합니까? “스스로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해서 자중지란에 의해서 죽은 사람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더라”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 있잖아요? 또 어떤 표현이 있습니까? “도망가다가 죽은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 그런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수풀에서 죽은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수풀에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표현을 통해서 들려주시고자 하는 그 뉘앙스가 무엇이냐면, 그것은 전투에 의해서, 다윗의 군사들의 칼에 의해서, 압살롬의 군사들이 죽은 숫자들보다도 그런 다른 방법으로 죽은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고 하는 것을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이 전쟁이 어떻게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도우셨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 이 다윗의 군대 힘의 능력만큼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능력과 그 힘에 의해서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압살롬이 죽은 장면을 보면,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가다가 자신의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림으로 말미암아 매달리게 되었고, 그 매달리게 된 그 압살롬을 결국 요압 장군이 죽임으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압살롬의 머리가 나뭇가지에 걸렸다고 하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두 군데의 성경 구절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무엘하 14장 25절부터 26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압살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그런 표현인데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의 머리털이 무거움으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 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200세겔이었더라.” 머리카락이 아주 풍부해가지고, 부럽죠? 머리카락 머리가 자꾸 빠지시는 분들은 정말 부러울 건데, 이 압살롬은 머리카락이 정말 풍부하고, 너무나도 멋있게 자라서, 보는 사람들이 볼 때마다 정말 아름답고 멋있게 생겼고, 정말 장점이 많은 사람이 바로 이 압살롬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사무엘하 14장의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압살롬이 얼마나 잘생겼는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었는가를 나타내는 표현인데요. 이 압살롬의 그 머리털을 칭찬했던 적이 있는데, 그런데 압살롬이 왜 죽게 되었는가? 바로 그 압살롬의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는 머리털이 나무에 걸려 죽게 되었다고 하는 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단점 때문에 망하기보다는, 우리의 장점 때문에 망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장점들 지식이 많으므로, 혹은 재물이 많으므로, 또 건강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장점들이 많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요. 자식이 잘 되는 것 때문에, 그렇게 너무나도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생각되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넘어지고 망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단점 때문에 망한다기보다는, 사실은 장점 때문에 망하기가 쉽다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압살롬의 그 머리가 정말 교만의 재료가 될 수도 있겠고, 자랑거리도 될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그의 목숨을 앗아가 버릴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바로 그 머리가 압살롬으로 하여금 죽음으로 인도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 장점거리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이 사실은 그것들이 종종 우리를 넘어뜨리게 하고 우리를 패망하게 만드는, 그런 잘못된 경우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는 그런 연습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압살롬이 나무에 달렸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보면서 우리 어떤 성경 구절이 생각이 나냐면,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에서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신명기의 말씀에 따라서 사람들이 그 압살롬을 보게 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심판하셨구나. 저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래서 성공하는 것 같고, 정말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이룰 것처럼 보이는 그런 반짝하는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알고 보니까 이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셨구나.”라고 하는 그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장면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이 압살롬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고 생각하고, 결국 그를 죽이게 되는 그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압살롬의 군대가 패망을 하고, 그리고 압살롬이 죽는 이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압살롬을 한때 사용하시기는 하셨지만, 그러나 그 압살롬이 저지른 그 죄악과 잘못들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압살롬이 일어나게 된 것은, 영적인 관점에서 본다고 한다면, 왜 압살롬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윗의 범죄함을 심판하기 위한 방편으로 압살롬이 일어나는 거죠. 다윗이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정말 파렴치한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죄를 지었고, 그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고 예언해 주셨는데, 그 심판의 예언대로 모든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다윗을 향해서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그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압살롬이 일어나 다윗을 내어 쫓고, 그렇게 그 집 안에 칼이 떠나지 않게 되는 그런 엄청난 고난을 당하게 된 것은, 그냥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책망하시고,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압살롬이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다윗을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 압살롬이 사용되었지만, “그 압살롬의 행위 자체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의인을 들어 쓰시기도 하고, 때로는 악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도 하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선인을 사용하셔서 무슨 일을 이루시기도 하지만, 때때로 악인을 사용하셔서 적당한 시기에 그 악인의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실 때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 보면 요셉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어떻습니까? 요셉이 어떻게 애굽의 총리가 되고, 요셉이 어떻게 온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이 되고, 어떻게 요셉이 그런 자리로 옮겨갈 수 있겠는가? 그 요셉이 가는 길목 길목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냐면 악인들이 있었던 것이죠. 요셉의 형제들은 악한 마음을 품고,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요셉을 팔아서 저 애굽에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아버린 그 사악한 그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요셉은 팔려서 애굽 땅으로 갈 수가 있었던 겁니다.

요셉이 어떻게 왕궁으로 왕궁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고, 그 팔려간, 종으로 팔려간 그 요셉이 어떻게 왕 앞으로 인도될 수 있었는가? 그냥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면, 요셉이 왕 앞으로 인도될 수가 없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 왕 앞으로 인도가 됐습니까? 거기에는 보디발의 아내라고 하는 악역이 거기에 있어요. 그 보디발의 아내라고 하는 그 악역이 그 요셉을 유혹하고 거짓말로 비방하고, 그래서 억울하게 요셉이 감옥에 갇히는 그 일을 통해서, 요셉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감옥에서 왕의 관원들을 만나게 되고, 왕의 관원들에게 꿈을 해석해 줌으로 말미암아, 결국 바로 왕이 꿈을 꾸었을 때, 그 왕의 관원들에 의해서 요셉에 소환되게 되는 그 기적 같은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지는데, 그 요셉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역할들이 했던 사람들이 누구냐면, 악인들이 중요한 역할들을 감당한 것이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이고, 그래서 요셉의 고백에 하나님 당신들이 나를 팔아버렸지만, 나를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고 믿음의 고백을 하고, 감사의 고백을 하고, 그리고 온 세상을 구원하는 그런 구원자로 요셉이 우뚝 세워지게 되는, 그런 엄청난 일들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오늘 이 압살롬의 역할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의미입니다. 압살롬은 악한 일을 했습니다. 은혜를 배신해버리고, 배은망덕하게. 아버지가 자기에게 베풀어준 그 은혜를 배은망덕을 하면서, 결국은 쿠데타를 일으킨 그 나쁜 짓을 통해서, 그런데 그 나쁜 짓을 한 것은 그냥 자신은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에게 해주셨던 그 예언들을 다윗에게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가고 있는 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다윗을 책망하시고 징계하시고 훈련시키시고 다루시는 그 도구 가운데 압살롬이 사용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바로 그 한때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사용되었던 바로 그 압살롬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무 위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압살롬의 행위 자체는 정당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악한 행위였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다시 한번 깨달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나쁜 짓을 해놓고도, 우리가 양심의 꺼리는 일들을 하고도. 그 일로 인해서 좋은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했던 그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그런 악한 습성이 우리들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위안하면서, 내가 행했던 바로 그 일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하는 그 사실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고 해서, 정당화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어떤 도둑놈이 있어가지고, 그 도둑이 아주 뛰어난 도둑이어서, 어떤 자물쇠도 다 열고, 어떤 그 잠금장치도 다 열어서 뚫을 수 있는 그런 어마어마한 도둑이 있다고 한다면, 그 도둑 때문에 무엇이 발전이 되겠습니까? 방범 체계가 발달이 되는 거죠. 도둑들이 없으면, 방범 체계가 발달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돼요. 그런데 도둑들이 있으니까, 방범 장치가 자꾸 개발이 되는 거예요. 도둑들이 자꾸만 이렇게도 뚫고, 저렇게도 뚫고, 아무리 잠가놔도 자꾸 뚫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도둑들을 막기 위해서 방범 장치들을 자꾸만 개발해가지고, 또 개발해서, 아주 수준 높은 아주 철저한 방범 장치를 개발해 냈다고 한다면, 나중에 그 도둑이 하는 말이, “저런 방범 장치는 다 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야! 내가 얼마나 공로를 많이 세웠는지 몰라.” 하면서 자부심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인가요? 아니요. 예? 아니요. 압살롬의 반역은 다윗의 범한 범죄를 심판하시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압살롬의 그 쿠데타 그 자체는 바로 악한 일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종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한 자들을 통해서도 선한 결과를 빚어주시기 때문에, 그래서 좋은 결과가 오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한 일은 정당하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가롯 유다를 향해서 해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의 말씀에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무엇이 있으리로다?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어쩌면 우리 기독교의 가장 큰 핵심적인 구원의 그 행위 가운데 가롯 유다가 차지하는 위치가 엄청 큽니다. 가롯 유다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해버렸고 그 가롯 유다의 배반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궤변을 늘어놓기를, 가롯 유다가 있었으니까,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이고, 그런 가롯 유다가 팔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니까, 가롯 유다는 정말 좋은 일을 한 것이라고, 그렇게 궤변을 늘어놓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가롯 유다가 없어도, 가롯 유다가 없다고 할지라도,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갈 거예요. 십자가의 길을 반드시 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가 없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십자가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인데, 놀랍게도 안타깝게도 그 십자가를 가는 그 길에 누가 악역을 자취 담당했냐면, 가롯 유다가 악역을 담당한 것이고, 빌라도가 악역을 담당한 것이고, 제사장들이 악역을 담당한 것이고, 그 군인들이 악역을 담당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일에 모두가 다 악역을 감당하게 되었을 때, 그 악역을 감당한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었기 때문에 괜찮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분명하게 선언해 주시는 겁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나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뻔하였느니라.”

만일 가롯 유다가 이 순간에 배반하지 않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가롯 유다가 자신의 양심을 팔아버리고, 돈을 더 많이 사랑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팔아버린 것이고, 그 악역 때문에 결국 그 가롯 유다는 너무나도 비참한 길을 가게 된 것이죠. 오늘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압살롬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심판하시기 위한 계획이 이미 세워져 있어요.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형벌하시기 위한 계획들이 세워져 있는데, 압살롬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이루실 수 있어요. 굳이 압살롬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거예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악역의 자리에 누가 나타났는가? 압살롬이 나타난 겁니다.

그 압살롬에 대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그 사실을 보면서, 오늘 이 저녁 시간에 우리가 경각심을 가지고, 기왕이면 우리가 악역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역할을 담당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 중에는 악역을 담당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런 악역은 내가 담당할래.” 선한 일을 담당하라고 하면, 다들 꿀 먹은 벙어리예요. “누가 좀 선한 일 좀 해볼래요? 누가 좀 이 좋은 일 좀 해볼래요?” 하면 다들 묵묵부답이에요. 그런데 악역은 안 해도 되는데, 내가 나서서 악역을 하겠다고, 이 일은 내가 내가 욕을 먹더라도 내가 나서서 하겠다고 하는 그런 악역을 담당하겠다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생기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바로 그 악역이 어떻게 되었는가? 나무 위에 달려서 죽임을 당하는 그 장면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결과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아무리 정당화하고 자신의 마음을 속인다고 할지라도, 그 악행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한 그 일을 하는 것이 복된 일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복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순종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압살롬의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또 한 사람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압살롬이 나무에 달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게 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또 한 사람을 기억하게 되는데요. 누가 기억이 납니까? 예수님이 기억나요. 놀랍게도 압살롬처럼 예수님께서 나무 위에 달리셨어요. 나무 위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그 신명기의 말씀이 있는데, 그래서 압살롬은 자신이 지은 그 죄와 잘못 때문에 하나님께서 결국은 그를 나무에 매달고 심판하는 그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신약에 가면 예수님께서 나무 위에 메어 달리시는 겁니다.

압살롬이 나무 위에 달려 있는 그 모습을 볼 때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다 도망가버렸습니다. 왜 도망갔을까요? 또 16절에 보면 요압이 나팔을 불면서, 이제는 더 이상 공격하지 말고 중단하라고 했지만, 더 이상 다윗의 군사들이 공격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의 군사들은 다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돼버렸을까요?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압살롬이 나무 위에 달려 죽는 바로 그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으로 압살롬이 죽는구나.” “네가 행한 일이 악한 행위였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사람들이 다 도망가 버린 것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도 똑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그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다 접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괜찮은 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사람이구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렸구나.”라고 하는 그 사실이 제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다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와 성정이 다 똑같은 분이로되, 그러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하셨는데, 죄가 없으신 그분께서 마치 압살롬처럼 엄청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죄인처럼, 나무 위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죄악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사실은 우리가 나무에 달려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생각은 악하고 처음부터 악하고 늘 죄의 투성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 이상으로 더 더러운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무 죄가 없으신 바로 그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대신 용서를 받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감사함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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