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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할 데가 어디냐? (롬 3:19-31)

지금 중국의 베이징에서는 동계올림픽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아. 네. 텔레비전을 보시는군요.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날 우연치 않게 개회식 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요. 첨단 영상 기술을 사용해서 멋지게 개회식을 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참 중국이 많이 발전했고, 또 문화적인 그런 저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어쩌면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최고의 실력을 가진 그 선수들이 모여서 경쟁하게 될 텐데,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될 텐데, 우리나라가 이번에도 좋은 성적을 거두기를 기대하는 마음이고, 도대체 얼마나 좋은 성적을 거둘지 관심이 많이 가고, 또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싸운 그 보상이 있는 그런 좋은 경기가 되는 마음입니다.

이번에 동계올림픽에 어떤 선수들이 참여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에는 제가 잘 모르는데요. 예전에 보니까, 이상화 선수라고 한 8년 전에 나왔던 선수였던 것 같은데요. 500m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딴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선수가, 이상화 선수가 얼마나 빨리 세계 신기록을 세웠는지, 그것을 보도하는 신문 기사를 보니까, 신문 기자가 제목을 이렇게 달았습니다. “이상화, 지하철보다 빨랐다.” 지하철 2호선의 평균 속도가 8.09초에 100m를 달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화 선수는 7.272초의 100m를 달렸다고 하니까 정말 놀라운 실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정말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가능성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평범했던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연습을 하고, 또 연습하고, 또 연습을 하면서 정말 최선의 연습을 다하게 되면, 정말 어마어마한 일들을 해내게 되는 것이고, 또한 세계 신기록까지 세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스포츠 분야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모든 면에서 우리가 노력하고 애를 쓰면 많은 진보와 발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술문명의 발달도 아주 대단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가장 활발하게 기술 문명이 발달되는 그런 시기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발전이 우리가 사는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전화기만 해도 얼마나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휴대폰 다들 다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이 휴대폰이 엄청나게 발달해서, 불과 몇 년 전에는, 불과 몇십 년 전에는 생각하지 못하던 일들을 이 휴대폰으로 다 해내고 있습니다. 휴대폰으로 영상 통화는 해보셨습니까? 예. 해봤을 거예요. 저도 이 한국 땅에 살고 있지만, 저 미국 땅에 있는 우리 딸아이들하고 영상 통화를 하면 떨어져 있는 것 같지가 않아요. 그냥 마치 내 옆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아주 친밀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매일매일 그렇게 대화할 수 있는 것을 보면서, 참 문명의 발달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지 정말 놀랍기가 그지없습니다.

전화기로 은행 업무도 다 보고요. 방역 패스 출입 인증도 다 하고요. 고속버스 예매나 기차 예매도 휴대폰으로 다 하고 있고, 저는 휴대폰으로 무슨 일까지 하냐면, 제가 했던 설교 영상 음성을 활자화 하는 것도 휴대폰으로 합니다. 저는 설교 노트를 아직도 연필로 씁니다. 볼펜으로 씁니다. 타이핑을 하지 않고, 늘 쓰면서, 수기로 아날로그 방식으로 설교를 준비하는데, 이 아날로그로 쓴, 이 수기로 했던, 그 설교 원고를 어떻게 활자화할 수 있을까 했는데, 휴대폰에 음성을 집어넣으면, 단 몇 초 만에 글자로 쫙 나오는 거예요.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술의 발달이 불과 몇 년 전 몇십 년 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냥 전화기로는 전화만 걸었었죠. 아니, 그 이전에는 뭐가 있었나요? 삐삐가 있었습니다. 전화번호를 남기면, 삐삐를 보고, 전화를 해주는 그런 시절이 있었고요. 그것보다 훨씬 전에는 전화기가 어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는 전화기가 어떤 것이었냐면, 돌리는 전화기였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전화기를 가지고 돌리면, 그걸로 전자 신호가 가게 돼서, 그래서 전화국에 있던 전화 국원이 전화를 받아가지고, “손님, 어느 집으로 연결해 드릴까요?” 물으면, “아무개 집으로 연결해 주세요.” 얘기하면, 전화 교환원이 잭을 꽂아서 전화 연결을 해줬어요. 그래서 제 어렸을 때는 전화를 하면, 그 전화 통화를 전화 교환원이 다 들었어요. 비밀이 없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정말 많은 발전이 이루어지고 연습을 하고, 또 연습을 하면, 엄청난 실력을 키울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학 문명이 계속 발달되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가 걸어가다가 허공에 손을 싹 흔들고 비밀번호 눌러서, 아니면 이 허공에다 무얼 다 해서, 그런 시절이 과연 올 수 있을까요? 아니면 스포츠 선수들이 정말 열심히 하게 되면, 100m를 7.272초가 아니라 0.1초에 달리는 때가 올 수 있을까요? 우리 인간의 기술이나 실력들이 진보하고 또 발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아무리 애쓴다고 하더라도, 도달할 수 없는 목표가 있기는 합니다. 선수들이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한다고 할지라도, 100m를 7초 혹은 6 몇 초까지는 주파할 수 있겠지만, 100m를 0.1초에 가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할 겁니다. 그것은 백만 년이 지난다고 할지라도 이룰 수 없는 목표인 것이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육상 선수가 아무리 빨리 달리기 연습을 한다고 하더라도, 42.195 킬로미터를 0.1초에 달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높이 뛰기 선수가 열심히 높이 뛰는 연습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선수가 단 한 번의 도움 받기로 롯데월드 빌딩을 건너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사람들이 수련을 하고, 마음을 닦고,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하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영적으로 많은 진보를 이루게 될 겁니다. 그냥 주일날 한 번 예배만 드리는 사람보다는, 수요일 날도 나오고, 새벽도 나오고, 좀 더 많은 노력을 한다고 하면, 훨씬 더 많은 영적인 진보를 이루게 될 겁니다. 성경 책을 하나도 읽지 않는 사람보다는,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또 큐티를 하고, 성경을 계속해서 통독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훨씬 더 많은 영적인 진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부흥회, 말씀 사경회에 많이들 나왔으면 좋겠어요. 나오지 않는 것보다, 참여해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 가운데서 나 자신을 돌이켜보고 회개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진보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하고 수고를 한다고 하더라도, 영적인 노력을 아무리 기울인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올라갈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그 기준까지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나아질 수 있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는 좀 더 영적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너그러울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그 높은 그 수준까지 우리가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문제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라고 하는 기독교 베스트셀러 작가가 있는데요. 그 맥스 루케이도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In the Grip of Grace, 번역하면 <은총에 붇들려>라고 하는 그런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맥스 루케이도라고 하는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달까지 가보려 했으나 땅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했다. 대서양을 헤엄쳐 건너려 했으나, 모래톱조차 넘지 못했다. 구원의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했으나, 비탈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 베이스 캠프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넉넉한 양식이나 근력이나 기술이 아니라, 헬리콥터가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대서양을 건너갈 수는 없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달까지 갈 수는 없는 거예요. 아무리 노력해도, 에베레스트 산을 넘어갈 수는 없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달까지 가려면 우주선이 필요한 것이고, 대서양을 건너려면 배가 필요한 것이고, 그리고 에베레스트 산을 넘기 위해서는 비행기가 필요한 것이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그러한 것들을 다 정복해 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착한 면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에 비해서 좀 더 거룩하고,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의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허물이 많고 죄가 많고 흠이 많다는 겁니다. 다 감춰놓고 있어서 그렇지, 다 멋진 옷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어서 그렇지, 다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고, 다 허물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태양까지 갈 수 없는 것처럼, 영적인 면에 있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 없다고 하는 것이죠.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그건 젊은 관원이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했던 말 속에서 알 수가 있는데요. 그 젊은 관원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랍비님, 제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부족한 게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 “부족하다”라고 하는 말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라고 하는 말하고 똑같은 단어입니다. 혼인 잔치의 이야기에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져서 모자라게 되었다고 했을 때, 그 “모자랐다”고 하는 그 단어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라고 하는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가야 되는데, 모자란 것이고, 부족한 것이고, 아무리 영적인 노력을 한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까지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상시에는 그걸 잘 느끼지 못합니다. 평상시에는 우리들이 괜찮아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괜찮아 보입니까?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 대로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을 하면서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 주변에 도둑놈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우리 주변에 흉악범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사기꾼들도 많고, 악한 사람들도 많은데, 저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저 나쁜 짓을 하는 사람에 비하면 그래도 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나는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도 나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고, 그래도 나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괜찮은 줄 알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인 것이죠.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알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존 칼빈 선생은, 장 칼뱅이 선생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우리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보지 않고, 우리를 바라보면, 우리가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그 순간, 내 자신이 진짜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에요. “아, 내가 죄인이었구나.” “내가 부족한 사람이구나.” “내가 여러 가지로 모자란 사람이구나.” 내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나는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만을 보고 있으면, 우리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를 바라봐야 됩니까? 하나님을 바라봐야 해요. 하나님을 봐야, 내 모습을 정확하게 보는 거에요. 이웃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을 보면, 내 모습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교해 보면서, 내가 괜찮아 보이거든요. 내가 그런 대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나아 보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에 대해서 착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의 빛에 우리를 비추어 보게 될 때, 우리 자신의 그 더러운 모습들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인데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 앞에 서야 됩니까? 하나님 앞에 서야 되는 거죠. 하나님 앞에 서야, 우리가 우리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면, 내 자신이 형편없는 사람이고, 내가 정말 죄로 가득 차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게 바로 로마서 3장 20절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무엇을 깨달음이라?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율법을 주셨는데요. 성경을 주셨는데, 이 성경을 주신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거울입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 자신의 그 더러운 모습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성경이고, 율법인 것이죠. 그래서 이 성경을 보면서 무엇을 봐야 되냐 하면, 우리들의 더러운 모습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자신을 비추어 볼 때, 내가 더럽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되는 것인데요.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을 잘못 사용합니다. 어떻게 사용합니까? 성경을 보면서 나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봐요? 옆에 있는 사람들을 자꾸만 비춰 보는 것이죠.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보면서, 정죄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죠. 결국 다른 사람을 보면 우리가 영적인 소경이 되는 것인데요.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가 영적인 소경이 되어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나 자신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보면서,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을 봐야 하고, 내가 누군가를 봐야 해요. 내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해요. 거기서 우리들에게 소망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는 그 얘기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3장 24절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갈 수가 없는데,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가 나아갈 수가 없는데,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데, 그런데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었다고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 우리들의 죄가 없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의인이라고 인침을 받게 되었다”라고 오늘 24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속량”이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속량”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평상시 “속량”이라고 하는 말을 써서 대화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번 지난 한 주간 동안 살면서, “속량” 좀 해줘. “속량” 좀 나한테 줘. 내가 “속량” 줄게. 이런 말하면서 대화하신 분 계신가요? 한 분도 없어요. 제가 성경을 보면서 참 안타까운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번역을 하나마나한 말로 번역해 놓은 것이 제일 안타까워요. 우리가 사용하지도 않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외계어 같은 그 단어를, 성경으로 번역해놓고, 이해하라고 하니, 도대체 이해가 됩니까? 안 되는 것이죠.

“속량”이라고 하는 말은 무엇이냐면, 이런 상황에서 쓰는 말입니다. 어떤 인질범들이 인질을 잡았는데, 인질을 잡아놓고 이 인질을 풀어줄 테니까, 풀어주는 대가로 돈 내놔라 했을 때, 풀어주는 대가로 받게 되는 돈을 가리켜서 “속량”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해가 됩니까? 내가 돈이 없어서, 전당포에 들어가서 내가 가지고 있는 휴대폰을 맡기고, 혹은 반지를 맡기고, 목걸이를 맡기고, 또는 시계를 맡기고, 그래서 돈을 얼마를 빌려왔는데, 그리고 그 돈을 급전을 잘 썼다가, 그런데 내가 전당포에 맡겨놓은 그 반지가 내 결혼 반지니까, 다시 찾고 싶을 때, 그냥 달라고 하면 줍니까? 안 주죠. 어떻게 해야 됩니까? 돈을 가지고 가서, “내가 예전에 맡겨놓았던 그 반지 다시 주세요”라고, 돈을 내놓고 다시 그 반지를 찾을 수 있는 것처럼, 그때 다시 찾기 위해서 맡겨놓는 돈을 “속량”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속량”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하기보다,는 무슨 말로 번역하면 훨씬 더 좋을까요? 좀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좀 알려주십시오. 저는 “교환금”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석방의 대가”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석방 요구금”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냐면,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가 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어떤 상태인 것을 나타내는 것인가요? “속량”이 필요하다고 하는 이야기는 어떤 상태인 것을 말합니까? 우리가 사탄의 포로가 되어 버린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지옥의 자식이 된 상태를 의미하는 겁니다. 우리가 수렁텅이에 빠지게 된 겁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 멸망에서부터 건져내기 위해서, 우리를 그 구렁에서, 구렁텅이에서 꺼내기 위해서, 우리를 저 영원한 지옥에서부터 꺼내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었는데, 우리를 찾아오기 위한 “교환금”을 지불해야만 했었는데, 그 “교환금”으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셨다는 겁니까? 예수님을 내어주셔서, 예수님 우리를 찾아오기 위해서 예수님을 내어줬다는 거에요. 우리를 꺼내오기 위해서, 예수님을 다시 죽음에 내모는 일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만일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좀 더 거룩해지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적인 훈련을 많이 하고, 도를 닦고, 또 도를 닦고 또 도를 닦아서, 내가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갈 수 있는 그런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면 “속량”이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냥 우리가 노력하면 되니까요.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우리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종교들입니다. 거봐라. 이상화 선수가 100m를 7.272초에 주파할 수 있는 것처럼, 당신도 열심히 노력하면 0.1초에 주파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이 세상 종교의 주장입니다. 열심히 도를 닦는다고 한다면, 열심히 마음을 비운다고 한다면, 욕심을 내려놓기만 한다고 하면, 당신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되나요? 안 되는 거죠. 어느 정도는 조금 개선의 여지가 있고, 조금 발전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부처와 같은 모습의 그런 영적인 최상위의 단계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죠. 우리 모두가 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에게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에 피 흘려주시고,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이 그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되냐면, 내가 죄인인데, 내가 정말 부족한 사람인데,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셨다. 나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면서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아, 그렇구나” 하면서 당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나도 구원받을 수 있겠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면, 당신 같은 더러운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나 같은 사람도 사랑을 받을 수 있겠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복음이 전파가 가능한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반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크리스천들이 불신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하면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반응이 돌아오나요? “너나 잘하세요”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불신자들이 크리스천들 앞에서 역겹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마치 무엇인가 영적인 높은 위치에 올라간 것처럼 거룩한 모습을 흉내내면서, 그리고 당신같이 그런 더러운 사람들은 예수 믿어야 된다고 말할 때, 기분 나쁘고, 또 우리들을 바라볼 때, “아, 저분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로구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똑같거든요. 목사라고 해서 거룩한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똑같이 탐욕적이고, 똑같이 더럽고,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그 모습을 보게 될 때, 욕하게 되는 것이죠. 장로요, 권사요, 집사이고, 또 교사이기 때문에 괜찮은 줄 알았는데, 똑같이 더러운 모습을 보게 될 때, 사람들이 너나 잘하세요라고 하는 비아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내가 이만큼 거룩한 사람이니까, 내가 이만큼 멋진 사람이니까, 당신도 예수 믿어서 행복해 보세요라고 말하면, “당신이나 잘하세요”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말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면, 내가 이렇게 요리를 잘하기 때문에, 내가 만든 요리 잘 먹어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요리를 못하지만, 저 식당에 갔더니 맛있더라 라고 말하면 귀를 기울이는, 내가 음식을 아무리 못한다고 할지라도, 저 식당은 정말 맛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이게 바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인데요.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오셨는가? 내가 이만큼 거룩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를 받아준 것이 아니라, 나 같은 망할 사람도, 나 같이 연약한 사람도,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해주셔서 받아주셨다고 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게 될 때,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가 가져야 될 마땅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겸손입니다. 로마서 3장 27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런 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이내 교만해져 버립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성경을 많이 읽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전도를 많이 하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헌신을 하고, 내가 수고하면, 이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교만한 마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만함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적이고 독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 말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말이냐면, 바로 우리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실을 늘 망각해 버리고, 늘 교만해지기 쉬운 것이죠.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그렇게 자신들만큼 지키지 못하는 이웃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저 세리들.” “저 창기들” 하면서 비난했고, 세리 창기들뿐만이 아니라, 당시에 일반인들을 가리켜서 “암하아레츠”라고 했습니다. “암하아레츠”라고 하는 말은 “땅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말인데, 히브리어로, 우리는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저 땅의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들을 제대로 잘 지키지 않은 저 평민들,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그들 앞에서 교만한 마음을 가졌던 것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현대 크리스천들의 모습이 바리새인들이 많아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조금만 더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하면, 늘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나는 주를 섬기기 위해서 이렇게 아침부터 나와서, 열심히 수고하고 애쓰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게을러 터져가지고 무슨 신앙생활을 하는가? 저 사람은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왜 저 모양 저 꼴인가? 저 모양인가? 저 사람은 왜 집사 장로 권사라고 하는 사람이 왜 저 모양 저 꼴인가? 왜 크리스천 학생이 크리스천 학생답게 살게 못하는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단점들만 자꾸만 바라보고, 그리고 정죄하는 모습이 우리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만해졌음을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의 은총을 저버리고, 마치 내가 무엇인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고, 그리고 내 자신이 더러운 죄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겸손하게, 다시 한 번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수 있는 그런 귀한 믿음의 역사들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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