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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함보다 신실함 (마 25:14-30)

오늘 우리가 살펴볼 비유는 아주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어떤 주인이 종들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각 맡기고 먼 나라에 갔다가, 한참 뒤에 돌아와서 결산하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은 누구를 나타내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요. 이 비유에 등장하는 종들은 우리들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주인과 하나님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고, 종들과 우리들 사이에도 많은 유사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주인은 모든 것의 주인이며, 결국 종들에게 맡겼던 것들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신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주인을 닮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인은 먼 나라에 갔다고 하는데요. 먼 나라에 가 있는 동안에, 이 종들은 하나님이 이 주인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들도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들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의 상황과 이 종들의 상황은 닮아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인이 다시 돌아와서 종들을 결산한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들의 삶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마지막 때가 있을 것인데,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다 심판하실 것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따져보실 때가 있다고 하는 그 점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일 겁니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생각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지금 이 시간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 비유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를 살펴보고 교훈을 받았으면 좋겠는데요.

첫 번째 살펴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받은 사명은 놀라운 축복이며 은총이라고 하는 점을 먼저 눈여겨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은 이상한 주인입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주인입니다. 왜냐하면 그 주인이 종들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고, 두 달란트를 맡고, 한 달란트를 맡기고 먼 나라로 떠나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한 달란트라고 하면,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라고 하면 어느 정도 큰 금액이라고 생각이 됩니까? 아마 마음에 잘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도대체 한 달란트 정도면 얼마일까? 마음에 잘 실감이 나지 않을 겁니다.

대체적으로 이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1 데나리온은 어떤 정도의 가치가 있냐면, 하루 일당의 가치가 있다고 하니까, 6천 데나리온이면 얼마치의 가치가 있을까요? 6천일의 노동에 해당하는 가치입니다. 1년을 계산할 때 1년이 365일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안식일을 빼고 일을 한다고 하면 대략 300일 정도 일년에 일한다고 생각하면, 그러니까 한 달란트는 몇 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겁니까? 20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인 것이죠. 두 달란트면 40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것이고 다섯 달란트면 100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돈을 주인이 맡겨놓고 그냥 먼 나라에 가버린 겁니다.

그 돈을 종들이 가지고 튀면 어떻게 됩니까? 도망가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아마 실제 상황 속에서는 이런 주인은 없을 겁니다. 이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을 종들에게 맡기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어떤 주인이 종들에게 이 어마어마한 돈을 맡기고 먼 나라에 갔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렇게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주인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이상한 주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인가? 하나님은 그냥 단순한 주인이 아닌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주인과는 다른 주인인 겁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를 못 살게 구는 그런 그냥 일반 주인이 아니라, 우리를 믿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주시기 원하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상한 주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마어마한 것이며,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주신 은혜요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인데,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모든 것들이 그냥 하찮은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선물이고,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우리 모두가 기억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온 세상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그런 사명을 받게 되었는데, 이 파울 사도는 자기가 이렇게 사명을 가지고 온 세상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이 사명이 너무나도 과중하고도 너무나도 큰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했는데요.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서부터 13절 말씀 가운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으니라.” 자신이 원래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고 자신이 원래는 주님의 대적자였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극렬히 여기셔서 이런 어마어마한 은총을 허락해 주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갔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명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각각 다른 사명을 맡겨주셨는데요. 사람들마다 그 주신 사명이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 같은 사명을,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같은 사명을 맡겨주셨는데, 그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이 아니라, 내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고 하는 점입니다. 아마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깜짝 놀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왜냐하면 성경의 전체에서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배워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까? 공평하지 않으십니까? 송명희 시인은 <나 가진 재물 없으나>라고 하는 시를 통해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잊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고백하면서, 비록 자기 자신은 물질도 없고 재물도 없고 건강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인데요. 송명희 시인의 시가 너무나도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그 송명희 시인이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해도 그냥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비틀어가면서 겨우 한 단어 한 단어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뇌성마비 중증장애인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이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그 고백을 들을 때, 정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아주 울림이 되는, 아주 감동이 되는 시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공평한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정말 공평하게 우리들에게 대우해 주신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송명희 시인은 자신은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어서 공평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만일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공부도 잘해요. 잘생기기도 했어요. 노래도 잘해요. 피아노도 잘 쳐요. 스포츠는 만능이고, 그리고 아주 키도 크고 잘생기고 돈도 많고 거기다가 부자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저 아프리카 혹은 인도의 가난한 지역에서 태어났는데 돈도 지지리도 없고, 교육받을 기회조차도 없었고, 목소리도 별로 좋지 못하고, 건강도 좋지 못하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데다가, 장애들을 가지고 있어서 눈도 보지 못하고 손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거기다가 주님도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면, 과연 공평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실제로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본다고 한다면 공평하지 않은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더 많이 가진 것 같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비유를 살펴보면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하나님은 공평하게 모든 사람을 대우해 주고,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해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각각 다르게 대우한다고 하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만 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공평하시다고 하는 말씀을 우리는 종종 오해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공평하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똑같이 대우해 준다고 하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빵을 하나씩 다 나누어 주듯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준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평하시다고 하는 이야기는 선을 행한 자에게는 선으로 갚으시고, 상을 주시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벌을 내시는 공명정대하다고 하는 의미에서 하나님이 공평하시다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다 똑같이 대우해 주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공평하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시는 그 마음이 똑같다고 하는 것이지, 우리를 똑같이 대우해 주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사실 똑같이 대우해준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똑같이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녀들을 똑같이 대우해 줄 수 없는 겁니다. 부모가 똑같은 자녀가 있으면 그 두 자녀를 똑같이 사랑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 자녀들의 형편과는 상관없이 똑같이 대우해 줄 수는 없는 것이죠. 만일 어떤 아이는 당뇨를 가지고 있는 아이가 있고, 어떤 아이는 혈압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있다고 한다면, 부모가 자녀들에게 음식을 줄 때 간식을 줄 때, 똑같은 걸 줄 수가 없는 겁니다. 당뇨를 가지고 있는 아이에게는 가능하면 설탕이 들어간 것을 안 주는 것이고요. 혈압을 가지고 있는 아이에게는 그 혈압에 해가 되는 음식을 주지 않는 겁니다. 이 아이의 상황에 맞게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 그게 참되고 바른 것이지, 그 아이들의 형편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똑같이 대우해야만 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죠.

저희도 두 딸이 있어서 두 딸을 길렀습니다마는 두 딸 아이가 서로 앙숙이에요. 그래가지고 얼마나 싸우는지 모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서로 독차지하고 싶어서, 그래서 서로 싸우고 난리가 나는데, 한 번은 우리 큰아이가 대학에 가기 전에 우리 저와 제 아내를 불러놓고 펑펑 울면서 이야기하는 거에요. 왜 엄마 아빠는 동생한테는 잘해주고, 나한테는 그렇게 모질게 대하냐고 그렇게 펑펑 울면서 항의하는데, 우리 아이를 설득시키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내가 귀를 뚫겠다고 할 때는 그렇게 안 된다고 하더니, 동생이 귀를 뚫는다고 할 때는 그냥 허락해 주고, 내가 뭐 하겠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하더니, 왜 동생한테는 다 해주고, 왜 이렇게 차별하느냐고 그렇게 항의해 왔습니다.

그때 우리가 우리 아이에게 설득한 것은 무엇이냐면, 물론 미안하다고 이야기했고, 내가 너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너를 충분히 배려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러나 우리 아이들을 아이를 향해서 설득한 것이 무엇이냐면, 너는 네 동생과 다르고, 네 동생은 너와 달라서, 모든 것을 똑같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너에 대한 사랑의 방식과 네 동생에 대한 사랑의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해 줄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공평하시다고 하는 이야기는 모든 것을 다 똑같이 대우해준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다섯 달란트를 주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만 주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모두를 다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공평하다는 것이기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각 다르게 대우하시는 것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대우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 생각가해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많이 가졌다고 해서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인이 각각 종들에게 어떤 사람은 다섯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지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졌다고 해서 교만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를 받은 사람을 무시할 것도 아니고, 멸시할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을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 말씀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처럼,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충성인 것이지, 내가 신실하게 사역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구해야 하는 것이지, 교만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닐 줄로 믿습니다.

네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탁월함이 아니라 신실함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정말로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탁월함이 아니라 신실함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 비유를 통해서 발견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 비유를 읽으면서 종종 잘못된 결론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주인이 한 달란트 맡은 종을 향해서 했던 말을 보면, 주인은 오로지 돈에만 관심이 있고 돈에만 욕심이 있는 주인처럼 느껴집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했던 주인의 말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5장 2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이 그 돈을 땅 속에 가두얻어서 그대로 돌려준 것을 본 주인이 그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책망하면서 하는 말이, 그렇게 땅속에 감추어 둘 것이 아니라 은행에라도 넣어두어서 그래서 원금도 받고 이제라도 받게 해야 될 것이 아니냐라고 이야기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주인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돈에 대한 관심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겁니다. 주인이니까요. 사람이니까요. 사람은 돈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정말 하나님도 돈이 중요할까요? 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하나님도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가장 많은 것을 바치는 것, 가장 많은 것을 남겨서 돌려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까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주인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좀 다르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주인이라고 하는 비유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비유이기도 하지만, 이 주인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유를 읽을 때 이 주인이 가지고 있는 여러 특성들 가운데 하나님과 닮은 점은 무엇이고, 하나님과 닮지 않은 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만 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을 닮지 않은 모습이 무엇이냐면, 이 주인은 돈이 관심이 많다고 하는 것, 돈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과 닮지 않은 절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비유를 읽으면서,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은 하나님과는 다르다. 하나님이 이렇게 악착 같은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정말 이렇게 돈만 좋아하는 하나님인가? 이런 주인은 하나님일 수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을 하나님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라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주인은 그냥 악덕 주인인 것이고, 이 악덕 주인에 대한 바른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종의 반응이 바른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반응이 더 바른 반응이라고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비유는 항상 하나님을 드러내는 면도 있지만, 하나님과 대치되는 면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사람 주인이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그런 대로 잘 닮아가게 만들까? 하나님의 모습을 그런 데로 잘 나타내게 할까 해서, 가능하면 이 주인의 모습을 세상의 주인의 모습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하나님을 닮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내려고 많은 노력을 해서, 예수님께서 그런 비유를 만들어주셨는데요. 하나님은 돈이 최우선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왜 돈이 최우선 관심사가 아닐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부족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갖기를 원하고, 더 많은 것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한 게 뭐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돈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힘이 없습니까? 그 어느 것도 부족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돈이 더 필요하신 하나님이시겠습니까? 아니요! 하나님은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어요.

사도행전 17장 24절 25절의 말씀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니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돈이 궁핍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재물을 더 많이 갖고 자야만 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사명대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잘 이용해서, 더 많은 것을 남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실까요? 마치 조폭들처럼 앵벌이 시키듯이, 수많은 가출 소년들을 데려다가 앵벌이를 많이 시켜서, 그래서 그 소년들이 껌 팔아오고, 동냥해 오고 해서, 그 많은 돈을 다 긁어 모으는 거지 왕초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어서 파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각각 사명을 주어서 일을 맡겨서, 우리들로 일을 하시게 하는 목적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을 잘 활용해서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을 얻어가기 위한, 더 많은 것을 착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걸까요? 절대 아니죠. 왜? 하나님은 돈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만일 하나님께서 가장 최대의 이익을 원하신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어 맡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 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생겨나고, 물이 갈라지라! 하면 물이 갈라지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만 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대로 움직이는데, 왜 우리를 시켜서 일을 하게 만드십니까? 왜 우리에게 사명을 주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들더러 그렇게 하게 만드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이용해서 더 많은 것을 받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셔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요나 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저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라! 그때 니느웨 성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배를 타고 도망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탄 배를 흔들기 시작합니다. 풍랑을 보내어 배를 흔들게 만들고, 그래서 그 배가 바닷속에 빠질 위험 가운데 들어가게 해서, 결국 그 요나를 바닷물에 던지게 만들고, 그리고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가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와서, 얻어 터진 다음에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회개하며,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저 니느웨라고 하는 사역지를 향해서 갑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에 이 요나를 굳이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요나가 안 가면, 그래? 너 안 가? 필요 없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면 돼요? 말 한마디 하시면 돼요. 그러면 다 해결돼요. 요나가 안 가면, 다른 선지자 보내면 돼요. 그러면 다 해결돼요. 요나가 안 간다고 해서, 이 사역이 해결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다 돼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를 굳이 회개시키고, 굳이 변화시켜서, 니느웨 성으로 보내십니까? 그것은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 말을 잘하는 언어 특기자였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목적은 니느웨 성을 살리는 것도 목적이지만, 요나 한 사람 다시 변화시키고, 회복시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에, 요나를 위해서 요나에게 사명을 맡겨주시는 것이죠.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인이 많은 것을 남긴 사람을 칭찬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도 우리가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가 탁월한 능력을 보여줄 때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실 거라고 하는 오해를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을 산뜻하게, 구김 없이 잘 해내는, 탁월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찾습니까? 신실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주인의 이야기를 이 세상의 주인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일반 주인과는 다른 주인의 모습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주인으로 그려내고 있는데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을 향해서 칭찬했던, 이 주인의 표현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음에,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라고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을 향해서 칭찬해 줍니다. 그런데 두 달란트 맡은 종을 향해서는 어떤 칭찬을 할까요? 23절에도 보면 칭찬이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나 두 달란트 맡은 종을 향해서 했던 칭찬이 똑같아요. 1등과 2등에게 똑같이 금메달을 주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는 2등을 기억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만들면서 의도적으로 똑같은 칭찬을 해줍니다.

그리고 그 칭찬의 내용이 보통의 칭찬과는 다릅니다. 만일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한다면, 그 다섯 달란트를 보면서 “와, 다섯 달란트” 그럴 겁니다. 골을 외치는 것처럼, 축구에서 골을 외치는 것처럼, 주인이 다섯 달란트를 보면, 다섯 달란트 하면서 기뻐할 겁니다. 하지만 이 주인은 이 세상에 주인처럼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비유를 만들어 놓으셨는데, 이 주인의 칭찬은 무엇이냐면, 이 종의 “착하고 신실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거죠. “잘하였도다. 착하고” 네가 착해서 잘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뭐예요? “충성된 종아” 저는 “충성된 종아”라고 하는 번역보다는, “신실한 종아”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원문의 의미에 더 가깝게 번역한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주인이 목격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돈이 얼마나 남겼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착했다고 하는 사실을, 신실했다고 하는 사실에 주목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주인에 가깝기보다는 아버지의 훨씬 더 가까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여러 비유로 비유할 수 있겠는데,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할 수도 있겠고, 하나님을 반석으로 비유할 수도 있겠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비유할 수도 있겠고, 하나님을 왕으로 비유할 수도 있겠는데, 가장 하나님을 잘 나타내는 비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시면서, 너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 주인의 모습보다는 하나님은 아버지의 모습이 훨씬 더 가깝습니다.

만일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이 다섯 달란트를 남기기는커녕 원금마저도 깎아 먹었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아주 큰 문제가 될 겁니다.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로 생각하면 문제가 될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네가 인생 공부 수업료 냈다고 생각하라고 하실 겁니다.

다섯 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닮기보다는 이 세상 주인의 모습을 닮을 때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일을 잘했는가 못했는가로 평가하고, 그리고 옛날과 지금을 평가하고, 다른 사람보다 그 사람을 평가하면서 함부로 말을 해 댑니다. 우리는 그런 이 세상의 말보다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6절에 37절 말씀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따뜻하게 사랑으로 격려하고 위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사역하는 목표와 상급이 있다고 한다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21절 23절의 말씀 가운데서 주인이 종에게 했던 말이 무엇이냐면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서 얼마나 기뻐하실까를 생각하면서 사역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고,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 목표여야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이 남겼는가로 교만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교만할 것이 아니라, 그리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내가 신실하게 일했다고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에 우리 모두가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7번째 말씀을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목숨을 내놓을 대상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두 종을 이 비유에서 만납니다. 왜냐하면 그 두 종은 주인이 없는데,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안돼요. 주인이 없는데, 왜 일해요? 주인이 없는데 왜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어요? 이 세상의 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종이 등장하는 겁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 건축할 때 보면, 건축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감독관이 있으면 열심히 하는데 감독관이 사라지면 불을 쬐면서 담배 피면서 시간을 노닥거리면서 보내는 거에요. 시간이 돈인데, 누가 뭐라고 하지 않으면 쉬려고 하고, 일하려고 하지 않고, 남이 칭찬하지 아니하면, 보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군대에서 상관이 뭐라고 하면 일을 하지만, 보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그게 병사들의 마음입니다.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비유에는 이상한 종이 등장합니다. 주인이 없는데, 보지도 않는데, 열심히 일을 하는 겁니다. 열심히 일할 때 다른 종들이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일하지 마! 주인 없어! 뭐 하려고 그래? 이 바보야! 보지도 않는데, 네가 왜 그렇게 열심히 해? 비난하고 조롱하는 소리 미친 놈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을 겁니다.

그런데 왜 다섯 달란트 맡은 종 두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이 보지 않는데도 주인이 멀리 떠나가 버렸는데도 열심히 일을 할까요? 이 비유를 가지고는 모릅니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길이 조금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달란트가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엿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없으니까 그냥 놀았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냥 땅속에 감춰 뒀었습니다. 열심히 수고할 필요도 없고 열심히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요? 한 달란트 맡았던 종의 마음이 마태복음 25장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당신을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열심히 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악덕 갑질하는 주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충성할 이유도 없고,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될 이유도 없고, 더운 시간에 내가 땀을 흘리면서 일할 이유도 없고, 졸린 시간에 내가 잠을 덜 자면서 일을 해야 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거예요.

그렇다고 한다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인이 너무 고마운 거예요. 주인이 너무 감사한 거예요. 이 주인이 너무 사랑스러운 거예요. 주인과 있으면 너무 행복한 거예요. 말도 안 되죠. 근데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할 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이 종을 전쟁터에서 죽게 된 상황 가운데서 그 장군이 목숨을 건져주고, 그 주인이 자신의 몸을 다쳐가면서 그 사람을 살려내서, 그래서 그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이 사람 때문에 살아나게 되었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할겁니다.

사무엘하 23장 말씀에 보면 다윗과 세 용사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두목이었고, 세 용사는 그 두목 밑에서 있는 종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다윗이 베들레헴을 목전에 두고 한탄하는 겁니다. 누가? 언제 내가 저 베들레헴의 우물 물을 마실 수 있을까? 다시 마실 수 있을까?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이 바로 목전인데, 거기는 블레셋 군인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들어갈 수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다윗이 한탄하는 소리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고향 베들레헴에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언제 다시 그 우물의 물을 마실 수 있을까? 한탄하고 있는 그 소리를 누가 들었는가? 그 종들이 들은 거예요. 세 용사가 들은 거예요. 그 세 용사는 그 순간, 같이 블레셋의 진영을 향해서 뛰어 들어가는 겁니다. 목숨을 내놓고 뛰어 들어가는 겁니다. 들어갔다가 블레셋의 군인들한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데, 목숨을 내놓고 그 진영에 들어가서, 거기서 물을 떠가지고 돌아오는 겁니다. 자신의 핏값과 같은 그 물을 떠가지고, 다윗 앞에 다윗에게 바치는 겁니다. 왜?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것은 내가 열정을 내야 될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열정을 내야 될 나의 진정한 주인이 없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내가 목숨을 바칠 대상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가장 행복한 일이죠. 우리 부모는 자녀들의 말 한마디를 그냥 흘려 듣지 않습니다. 떡볶이 먹고 싶다 하면 그 말이 마음속에 울려요. 아 나도 저 장난감 갖고 싶다. 그러면 그걸 사주고 싶어 안달이 나는 거예요. 이 종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그 주인의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기에, 주인이 맡겨준 그 사명을 받았을 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면서 충성을 다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근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주신 하나님 우리를 사명의 자리로 불러주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당연히 받아야 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셨고, 우리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주시되, 다… 쏟아주시며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마음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옆에 보면서, 저 사람보다 내가 조금 더 나아지고, 저 사람들보다 내가 더 박수받고, 저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인정받고,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 보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목표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고, 사람들로부터 박수받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목표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때문에, 늘 기쁨과 감사로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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