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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전도 (롬 4:9-12)

로마서 강해를 계속 진행하고 있는데요. 로마서 강해를 진행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같은 주제를 계속해서 반복한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했던 이야기를 또 이야기하고 또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 특별히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은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장점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은 다 불합격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기에 대한, 은총에 대한 반응인 믿음으로써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금 몇 주간에 걸쳐서 계속 이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데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로마서 4장 9절에서부터 12절 말씀에서도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냐 할례냐라고 했을 때, 할례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공로를 나타내는 것이고, 우리의 행위를 나타내는 것인데, 우리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위를 잘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장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어떤 무엇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그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도 다시 한 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꾸만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업적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받아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교만해질 수가 없는 것이죠.

종종 청와대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청와대에 초청해서 그 사람들과 대통령이 환담을 하기도 하고 만찬을 하기도 하고 같이 사진을 찍는 그런 일들을 하기도 합니다. 미국의 백악관에서도 정말 위대한 사람들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놓은 사람들을 초대해서 그래서 그 사람들을 격려하기도 하고 칭찬해 주기도 하는 그런 일들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인 강영우 박사라고 하시는 분이 시각장애인인데, 그런 분들이 초대되어서 백악관에 가게 된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고 그리고 정말 좋아해 주는 것이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있다고 한다면, 청와대로 초청해서 정말 수고했다고 격려하면서 거기 있는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면서 그렇게 청와대에 초청되었다고 한다면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 될 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초대 안 하잖아요? 혹시 청와대에 다녀오신 분 계십니까? 저는 한 번도 못 가봤습니다. 그 근처는 가보긴 했지만, 그 안, 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고 대통령과 만날 수도 없는 것이죠. 하지만 정말 엄청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일부러 초대해서 대화도 하고 만찬도 하고, 그리고 사진도 같이 찍게 되기 때문에, 누가 청와대를 다녀왔다고 한다면 엄청난 명예 명예가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될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를 받는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그 천국으로 우리가 초대된다고 한다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초대하셨는가? 그것은 우리가 영적인 금메달을 딴 금메달리스트이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로마서에서 계속해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그 어전 회의에 우리들을 불러주시고 저 천국의 잔치에 우리를 불러주고 계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영적으로 거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래뵈어도 내가 목사요 장로요 권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대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 실패자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언감생심, 하나님의 잔치 자리에 그 천국으로 초대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다고 하는 것이 로마서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어디에 비유할 수 있냐면 사무엘 하에 나오는 므비보셋에 비유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아마 신앙생활을 좀 오래 하셨던 분들은, 사무엘 하에 나오는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누구냐면, 바로 사울왕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왕의 손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울 왕조가 몰락해 버리고, 사울 왕조가 몰락해 버리고, 새로운 다윗 왕조가 탄생하게 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과 다윗왕은 어떤 관계냐?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끝까지 그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집안의 원수가 사울인 것이고 사울의 원수가 다윗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사울 왕조가 몰락해 버리고, 그리고 다윗 왕조가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고 한다면, 고대 세계에서 자연스러운 일이 무엇이냐 하면, 예전 왕조의 모든 그 왕족들은 다 몰살시켜버리는 것이 고대 왕국의 법칙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울 왕가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다윗 왕조가 탄생하게 되는 그 순간에 다 도망가야 했고, 다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 그 다윗 왕조의 그 눈을 피해서 다 숨어 들어가야만 했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 왕은 사울 왕가에 속한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사울 왕에게 속한 가족들이 혹시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느냐라고 수소문하고 수소문했는데, 누가 알려졌냐면 바로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사람을 알게 된 겁니다.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사람이 사울 왕의 손자인데, 아기 때 유모가 데리고 도망가다가 다리를 다쳐서 다리를 온전히 쓰지 못하는 그런 장애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 왕이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다윗왕의 신하들이 므비보셋의 집 안에 들어와가지고, 므비보셋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왕이 당신을 데려오라고 했을 때, 므비보셋이 느낀 그 공포가 무엇인 줄 여러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죽었구나. 다윗왕에 의해서 나는 이제는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구나 생각되는 그 순간에, 다윗의 신하들이 그를 극진히 모시고 왕궁으로 가서 그리고 다윗왕은 그 므비보셋에게 왕자의 대우를 해주는 거에요. 적의 아들이요. 손자요. 그래서 완전히 몰살시켜야 마땅한, 고대 세계의 법칙으로 보면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므비보셋을 다윗은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그래서 왕자처럼 대우해 주고, 왕자와 함께 식탁을 갖게 만들고, 그래서 왕자처럼 대우해 주는, 엄청난 놀라운 대우를 해 준 이야기를 사무엘 하에서 읽을 수가 있겠는데요.

바로 우리의 신분이 바로 그러한 것과 같다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장치에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 내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영원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그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교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의 고마워, 늘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이유 자꾸만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꾸만 망각해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엄청난 은총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됩니까?

물에서 건져서 살려놓았더니 무슨 반응을 하죠? 내 가방 내놓으라고 하는, 내 물건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그런 적반하장 안하무인 배은망덕의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만이 스물스물 기어 올라옵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교만함이 자꾸만 기어 올라오게 되어 있는데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그런 교만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주셨습니다. 저 갈릴리 바다에서 아무런 삶의 목적도 없이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불러주셨을 때, 제자들은 그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너무나도 연약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했는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불러주셔서, 내가 너희를 사람 낳는 어부로 만들어주시겠다고 하는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사실만 생각한다고 하면 겸손하게 따라가야 할 텐데,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어떤 마음이 들었냐면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주님,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우리가 얻을 게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가 무슨 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어떤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내가 받을 상, 내가 이만큼 수고하고, 내가 이만큼 노력했고, 이만큼 헌신했는데, 이만큼 반주자로 수고하고, 이만큼 설교자로 수고하고, 내가 이만큼 주를 위해서 헌신했는데, 주님 내가 받을 상이 무엇이냐고 하는 그런 질문들을 던지게 되는 것이죠.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겁니다. 주님, 제가 목사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장로가 아니었습니까? 권사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이 교회 짓는데, 내가 엄청난 헌신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받을 상이 무엇입니까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인 거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는 말이, 내가 귀신을 내쫓았는데 내가 받을 상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면서도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인하여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자신의 그 장점들을 드러내면서, 하나님 앞에 내가 가진 행위를 가지고 나아가려고 하는 그런 교만함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꾸만 솟아오르는 겁니다. 이래 뵈어도 내가 40년 신앙생활한 사람인데 주님 나한테는 뭐 없습니까? 이래 뵈어도 나는 교회를 한 번도 빠져보지 않은 사람인데, 나에게는 무슨 상이 없습니까? 내가 헌신을 한 사람인데, 하나님, 나에게 줄 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어떻게 의롭게 함을 받게 되었는가? 공로가 아니라, 나의 행위가 아니라, 나의 순종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되는 이유는 우리들이 자꾸만 그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교만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뿐만 아니라 이렇게 이 로마서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순종이라고 하는 것을 바른 위치에 놓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순종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거룩한 일을 하는 것, 거룩해지려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순종, 거룩, 행위, 믿음, 모든 것들이 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느 위치를 차지하는가? 정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긴 하는데, 그것이 있을 자리가 어딘가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로마서 4장 11절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그는 누구죠? 아브라함이죠.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그 믿음과 할례, 그리고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과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면서 이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데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은 무엇으로 의롭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의롭게 되었던 것인데, 그 의롭게 된 것을 인친 것이 무엇이냐면, 그 표를 인친 것이 무엇이냐면, 할례다 이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할례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제유법적인 표현입니다. 제유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영어로 synecdoche라고 하는 것인데요. 일부를 사용해서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법이죠. 요람이라고 하는 하나를 통해서 탄생 전체를 가리키고, 무덤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죽음 전체를 가리키는, 펜이라고 하는 하나를 가지고 문학이나 언론을 나타내고, 칼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를 통해서 무력이나 전쟁 같은 것을 나타내는 방법을, 이렇게 일부를 사용해서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을 가리켜서 synecdoche라고 합니다. 제유법이라고.

여기서 할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일종의 제유법적인 표현으로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어떤 믿음의 행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일부를 의미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할례가 차지하는 위치, 오늘날은 우리는 할례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결국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순종이라고 하는 것, 행위라고 하는 것으로 대체시켜도 되는 말인데요. 어떻게 우리 할례와 의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이 할례는 어떻게 받게 되었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할례로 인쳤다.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표시를 할례로 나타나게 되었다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도표로 한번 보시면 이렇게 볼 수가 있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믿음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표로서 할례를 받는 것이고, 또한 순종하는 모습, 거룩한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아 저 사람이 의롭게 된 사람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어떻게 착각을 하냐면, 내가 할례를 받음으로써, 혹은 내가 순종함으로써, 거룩함으로써, 그래서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을 획득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이 먼저고, 그것에 대한 표시, 그것에 대한 인침, 그것에 대한 증명으로서, 이 할례나 순종이나 거룩하는 것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나중이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먼저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있었기 때문에 할례를 받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게 된 것이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에서 순종이 나타나고 거룩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비유하면 좋을까요? 이것을 어떻게 비유하면 좋냐면, 제 생각에 이것은 통장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예금하면, 그 통장에 얼마가 예금되었다고 적혀집니다. 그런가요? 안 그런가요? 그렇죠. 통장 써봤죠. 그런데 오늘날에는 굳이 통장이 없어도 거래가 됩니다. 체크카드를 가지고, 현금카드를 가지고 물건을 쓰면, 그러면 내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갑니다. 처음에 100만 원을 예금을 해놓았는데, 그래서 내 통장에 100만 원이라고 찍혀 있어요. 그런데 그 통장에 들어있는 그 돈을 체크카드를 가지고 계속해서 돈을 쓰기를 쓰는데 통장 정리를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통장에는 얼마가 있다고 찍혀져 있습니까? 100만 원이 그대로 찍혀져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미 저는 체크카드로 돈을 여기저기서 많이 쓰면, 실제로 은행에는 100만 원이 들어 있나요? 쓴 만큼 차감이 되었나요? 쓴 만큼 차감이 되었을 겁니다. 통장에 찍혀 있는 게 중요한가요? 은행에 실제로 돈이 있어야 되는 것인가? 중요한 건 은행에 실제로 돈이 있는 게 중요해요. 거기에 돈이 있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 통장에 찍히는 겁니다. 나중에 그것을 정리하면, 아 이렇게 정리가 되는구나! 이렇게 나중에 통장 정리하게 되면, 이만큼 잔액이 남아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통장은 알게 해주는 것이지, 통장이 돈이 아니란 말이에요.

어쩌면 믿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의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의가 나타나는 것이고, 정말 이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통장에 이렇게 얼마가 찍히는 것처럼, 우리들의 행위로 우리들의 순종으로 우리들의 거룩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통장에, 실제로 은행에 돈이 한 푼도 없는데, 은행 잔고 증명서를 위조해서 이만큼 나에게 돈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돈이 있는 건가요? 없는 거예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건 거짓말이에요. 사기예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 성도들이 그걸 혼동한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혼동했어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가야 되는데,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내가 할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으로, 거짓 잔고 증명서로 나의 믿음이 있는 것처럼 내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처럼 그렇게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하지만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종종 성도님들 사이에는 이제 곧 임종하는 분들을 위해서 임종 세례라도 베풀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믿음이 없어도 그냥 군대에서 단체 세례라도 받으면 그러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효과는 없는 게 아니고, 있습니다. 안 받는 것보다야 받는 게 좋을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믿음을 갖게 되기도 하고, 신앙의 길로 들어서기도 하고, 그래서 목사님 되신 분들도 있고, 그렇게 그런 예들이 많이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세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레라고 하는 것은 내가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인친 것이지, 세례만 받았다고,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을 자동으로 증명해주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 로마서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우리의 행위로, 우리의 할례로, 우리의 순종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이 우리의 순종이라고 하는 것을 제 위치에 놓기 위해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을 제 위치에다 가져다 놔야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순종이라고 하는 것을 제 위치에 놓지 않고 잘못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순종하기 때문에 우리가 완벽하게 살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착각하거나, 또 정반대로 우리가 믿기만 하면 순종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아무렇게나 막 인생을 살아도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등, 이 순종에 대해서 오해하는 양극단의 이야기들이 우리 가운데 많이 있는데요.

둘 다 다 다 틀려먹었어요. 순종은 무엇인가? 순종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구원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순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니고, 순종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의 반응으로서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나와야만 하고, 반드시 따라 나와야만 하는 것이 순종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종종 오해를 받았는데요. 어떤 오해를 받았냐면, 율법을 지키지 않아야 된다고 하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복음을 전하고 다니니까, 유대인들이 그 바울 사도를 보면서 저 바울은 율법을 폐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비난을 받았는데요.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분이라고 그렇게 비난을 받았는데, 사실은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제 위치에 집어넣기 위한 것이죠.

바울 사도는 로마서 1장 5절 말씀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기 위한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순종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데, 순종의 위치가 어딘가? 믿음의 믿음으로 반응한 자들이 나타나야 되는, 반드시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라고 하는, 제 위치를 찾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에서 이 말씀을 자꾸만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항상 기뻐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확신하고, 그것 때문에 안심하고, 그리고 감사하고 기뻐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게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신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만일 우리의 구원이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 우리의 행위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up and down이 심하죠. 내가 신앙생활을 좀 잘하는 것 같으면, 나는 구원받은 사람 같다라고 느껴지다가도, 어느 날 실수할 때도 있고, 어느 날 분에 못 이겨 화를 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심각한 죄를 지을 때가 있는데, 그때, 아, 이제 나는 망했구나! 나는 구원받지 못하는구나! 하고 심각한 영적인 절망 가운데 빠지게 될 겁니다.

우리들의 기분에 따라서, 어떤 때는 내가 구원받을 것처럼 느껴지다가, 어떤 때는 나는 완전히 절망스럽고, 나는 완전히 구원받지 못할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 영적인 감정의 기복이 심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의 구원이 어디에 달려있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완벽함에 구원이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데 구원이 달려 있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구원이 달려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 있어도,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지 않기에, 담대하게 언제 어디서나 기쁨으로 믿음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죠.

제 딸이 바이올린을 했는데요. 학생 때 바이올린을 공부하면서 거치는 과정이 무엇이냐면 콩쿠르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딸 아이를 데리고, 여러 콩쿠르을 데려다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콩쿠르에서 우승을 해가지고, 영예스럽게 그런 상을 받기도 하고 그랬는데, 상을 타면 기분이 좋고 행복한데, 상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훨씬 더 많아요. 한 번은 제가 우리 딸을 데리고 콩쿠르장으로 아침에 일찍 데리고 드라이브를 하면서 데려다 준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콩쿠르을 하게 되는 거야! 이제 콩쿠르장 안으로 들어가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우리 딸이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빠, 나 콩쿠르에서 1등 못해도 괜찮아? 1등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요? “너 일등 못하면, 집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마”라고 한석봉 엄마처럼 얘기를 했었어야 되는데, 저는 그렇게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손웅정 옹처럼 좀 했어야, 손흥민 같은 사람이 나올 텐데, 그렇게 대답해 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 딸을 보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괜찮아. 네가 바이올린 콩쿠르 대회에서 1등하지 않아도, 너는 내 딸이야. 물론 네가 열심히 수고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래서 그 결과가 좋게 나타나서, 1등을 한다고 한다면, 정말 기쁠 것이고, 그런데 네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 게으르고 열심히 하지 않고, 그냥 인생을 대충 살아서, 그래서 초라한 성적표를 가져온다고 한다면, 슬플 것이지만, 네가 1등을 하든 꼴등을 하든, 네가 어떤 상태이든, you are my 내 딸이야! my precious daughter. 너는 나의 소중한 딸이야!

대학을 가는 우리 딸을 향해서 해준 말도 그 말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게 되면, 아예 부모를 거의 떠나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이 되는데요. 우리 집에서부터 차로 운전해서 12시간 운전해야 되는 인디아나 대학에 우리 아이를 데려다주고 올 때 그 아이를 향해서 했던 말도 이 말입니다. “예림아, 다른 거” 마지막에 해준 말이 무엇이냐면, “다른 거 기억하지 말고, 이 말만 기억해라. 네가 이 대학 생활을 하다가 무슨 일을 만나도, 넌 내 딸이야. 네가 대학생활 하다가 분에 넘쳐서 화가 나서 사람을 죽여도, 네가 대학 생활하다가, 엉망 진창이 돼서 술에 쪄들고 마약에 쪄들고, 그래서 인생을 망치는 그런 일을 하더라도, 그래도 너는 내 딸이야. no matter what 네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너는 내 딸이야!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엄마 아빠 믿고, 우리에게 연락해. 너를 사랑한다.” 라고 이야기해주고, 우리 딸아이를 거기다 내려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게 우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합당하지 못해서 영원한 죄로 인하여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너 같은 놈 쓸모 없다. 내 앞에서 얼씬거리지도 마라” 하면서 우리를 쫓아내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셨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점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되고, 그리고 그 사실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그 사실 앞에서, 담대하게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고, 기쁨과 감사로 확신 가운데,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더욱더 기쁘시게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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