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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용서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7개의 말씀들을 가리켜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말씀하셨던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기도였다. 극심한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 가운데서, 다른 말이 아닌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사실이 놀랍다. 십자가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치 자녀의 잘못으로 사고가 나고 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어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자녀가 무사한지를 먼저 살피는 어머니처럼 주님은 사랑으로 이 기도를 드리셨다.

그런데 이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사람들의 행위가 죄라는 사실이다. 용서는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또는 떳떳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들은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그렇게 죄를 짓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창조되었고 양심을 갖비고 있기에 죄를 쉽게 지을 수 없다. 양심이 우리를 책망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죄를 짓기 위해서는 먼저 정당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도둑질을 하면서도 이것은 죄가 아니라, 탐욕스런 부자들을 응징하는 정의의 행위로 포장하거나 자신이 수고했지만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한다. 그래야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 모든 것이 죄라고 하신다. 우리가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고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죄일 수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는 사람들을 향해서 분노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까지 대라고 가르치셨는데, 그렇게 하셨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하셨다.

종종 용서는 교회 내에서 악용되곤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 때,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를 찾아가서 한다는 말이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말해서 피해자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곤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궁극적으로 용서를 해야 하는 것이 맞고, 그래야만 자신을 증오와 분노의 감옥에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회개도 하지 않는 가해자를 무조건 용서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회개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은 그들이 회개하든 말든 그냥 용서해달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 기도의 의미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시고, 그래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본디오 빌라도나 로마 병정들이나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바로 그 죄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 기도를 보면서 회개하며 나아가야 한다.

연관 설교: http://www.jjvision.org/?p=1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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