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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담임목사 칼럼

성찬식에 대하여

성찬식에 대하여 종교 개혁 자들은 참된 교회의 표지 가운데 하나로 “성례의시행”을 꼽았다. 성례의 시행이 참된 교회의 표지라는 것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찬식을 시행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성례를 “바르게 시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시 로마 천주교회는 성찬의 빵이 진짜 예수님의 살이며 성찬의 포도주가 진짜 예수님의 피로 변한다고 생각했다.결국 신부는 구원을 제공하는 자가 되고 성찬을 주느냐 주지 않느냐에 따라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게 되어 있었다. 결국 구원이 사람에게 달려있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영성체, 즉 성찬 빵과 포도주에 대한 미신적인 생각이 들어오게 되었다. 마치 그 빵이나 포도주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는 양 간주되기도 했다. 마치 기드온의 에봇에 열광했던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종교 개혁 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성찬식은 주님의 죽음을 기념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주님께서 영적으로 임재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성찬의 효력은 누가 주는 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믿음으로 참여 하는 것이 중요했다. 참된 교회는 이렇게 바른 관점으로 성찬식을 시행하는 교회이다. 상황에 따라 성찬식을 시행하지 못 하는 경우가 있다.매주 예배때마다 성찬식을 시행 하지 않아도 거짓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현대판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이나 교회의 신앙 행태를 자신만의 기준으로 비난하곤한다. 성찬식을 얼마나 자주 시행하느냐 시행하지 않으냐와 같은 성만찬의 시행도 종종 비난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는 다윗이 번제를 드리는 것보다 회개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갔던 것도 비난 할 일이 된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는 다윗에게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준 것도 비난거리가 될 것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주님의 마음을 배웠으면 좋겠다.

예배 때 성찬식을 행하기만 하면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참 순진한 생각이다. 마치 하나님이 제사를 드리라고 했으니 제사를 열심히 드렸던 이스라엘 민족의 생각과 비슷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 제사를 내가 싫어한다고까지 하셨다. 신앙은 무엇을 행하는가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다.

베데스다 게임

1. 베데스다로의 초대장

넷플릭스 한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요즘 전 세계적으로 뜨겁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이야기이고, 그리고 경쟁자들을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는 내용으로, 때로는 잔혹하기도 하고 사이코패스적 경향마저 보이는 이 드라마가 인기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코로나 시대에 영화관보다는 방에서 즐길거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도 맞물렸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가 성공한 비결은 그 <오징어 게임>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아주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오징어 게임>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둥거리고 있고, 그러면서 남을 제껴 내야만 내가 살아남는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탈락해버릴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는 매일을 <오징어 게임> 속에서 산다.

그런데 2천 년 전 베데스다라는 작은 연못에서도 일종의 <오징어 게임>이 있었다. 그 베데스다 연못으로 모여든 참가자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참가하였다. 모두가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맹인, 어떤 사람은 다리 저는 사람, 어떤 사람은 혈기 마른 사람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부단히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결국 그 의사에게 가진 돈을 강탈당하기만 했을 뿐,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일도 할 수 없었고, 가족들에게도 짐이 되는 인생은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어느 날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선생님, 저와 함께 게임 한번 하시겠습니까?”라는 말과 함께 시작된 <오징어 게임>으로의 초대장처럼, 그들에게 <베데스다 게임>으로의 초대장이 발부되었다. 베데스다라는 연못에 가면,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이 움직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누구든지 그 물속으로 제일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낫게 될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 채무에 시달려 신체 포기각서까지 써야 했던 사람들에게 <오징어 게임>이 유일한 소망이었듯이, 2천 년 전 환자들에게 베데스다로의 초대장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런데 베데스다에서의 게임의 룰은 <오징어 게임>의 규칙만큼이나 잔인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베데스다 연못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목적이 정해지면,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다. 속임수를 써서 외국인 노동자 알리의 구슬을 훔쳐버린 서울대 출신 조상우처럼, 베데스다에도 그런 사람들로 넘쳤을 것이 분명하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물속에 먼저 들어가려는 것이야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연못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려고 했을 것이다. 아쉽지만 네가 들어가지 않아야, 내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달려가려는 길 앞에 웅덩이를 파서 넘어지게 만들거나, 장애물을 슬며시 가져다 놓을 것이다. 친구들이 달려가는 사람의 발을 걸어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 예사였을 것이다. 그곳은 공평과 사랑이 있는 곳이 아니라, 음모와 술수가 넘치는 곳이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말은 사실이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은 그냥 뜬 소문일 뿐이다. 아니 누군가 벼룩의 간을 빼먹기 위해 악의적으로 만들어낸 소문일 수도 있다. <베데스다 게임>의 설계자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병이 나을 수 있는지 아닌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아무런 소망을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소망을 가질 수 있고, 그래야만 살 수 있는 이유가 있기에, 그들은 그 소문을 사실로 믿고 싶었다. 그리고 거기에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소망하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2. 베데스다 게임의 함정

사람들이 베데스다로 모여드는 이유는 거기에서 소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인공이 분명히 있고, 그 주인공이 456억을 받게 된다는 데,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오징어 게임>의 함정이다. 내가 주인공이라면, 그게 <오징어 게임>이든 <베데스다 게임>이든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는 희생만 당하고 들러리만 서게 될 뿐, 행운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베데스다 연못에 모인 환자들 중에서 1등으로 연못에 들어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 연못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그게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수억 년을 그 자리에 있어도, 38년 된 병자가 1등으로 연못 안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있는가? 무엇 때문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그것은 소망 때문이다. 소망은 누구든지 1등으로 들어가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문이다. 그런데 전혀 그 사람은 1등으로 들어갈 수 없음에도, 그 소문을 의지한다. 그런 소망마저 없어진다면, 그의 삶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룰 수 없어도, 그 소문이 진실일 것이라고 강하게 믿는다. 마치 사법고시에 합격할 실력이 되지 않지만, 사법고시를 없앤다고 하면 불만이 폭발해버리는 고시족과 비슷하다. 우리 사회가 부동산 불로소득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불로소득의 기회를 없애버리자는 정강 정책을 사실은 지지하지 않는 데, 그런 이유와 비슷하다. 나 자신이 그런 횡재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그런 횡재의 가능성마저 없애버린다면 더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더 힘들고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이다. 베데스다 연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절망하고, 다른 사람들이 성공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에 불평하고, 아무런 기쁨이 없이 살아간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런 모습으로 보내셨는지, 내게는 어떠한 사명이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은 채 말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는 456번이 결국 456억을 얻는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라는 <오징어 게임>에서는 우리는 늘 실패자일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다. 나도 제일 먼저 베데스다 연못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붙어가는 놈이 있다. 재수만 하면 일류 대학에 합격할 줄 알았는데, 성적은 오히려 더 초라하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면, 삶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병만 얻는다. 누군가는 7년만 일하고도 50억을 받는다는데, 나는 열심히 일해도 늘 손해다.

심지어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부처가 될 수 있는가? 누가 열반할 수 있는가? 누가 득도할 수 있는가? 출가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데 성공해야만 한다. 그런데 아무리 도를 닦아도 10년 수행 도로아미타불이다. 그런데도 정진을 열심히 하면 당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소리에, 사람들은 절간으로 모여든다. 정작 자신의 소유를 버리고 싶지 않으면서도,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은 열정적으로 읽는다. 가족과의 인연도 끊어버리고, 모든 미련을 버리고, 수행하는 길로 들어서건만 정작 부처가 된 사람은 없다. 그냥 옆에서 추앙하는 일들은 있지만 말이다. 대부분 종교의 길도 어쩌면 또 다른 <오징어 게임>이다. “조금만 욕심을 품으면 탈락입니다.” 그런 룰 속에서 고통스럽게 수행하지만, 늘 탈락자들만 양산될 뿐이다.

3. 왜곡된 신앙

<오징어 게임>에는 “기독교”를 희화화 하면서 조롱하는 장면들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한국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조롱하는 내용이다. 첫째, 기도 아저씨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중얼거리며 기도한다. 그리고 줄다리기 게임에서 이겼다는 이겼다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상대를 죽였다는 죄책감은 없다.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의 삶을 사는 한국 기독교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이다.

둘째, 지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묘사되는 목사는 위선자이며 인간 말종이다. 자신을 성폭행해 놓고도 매번 회개 기도했다는 아버지 목사의 이야기는 왜 거기서 그런 과거사를 말해야 했는지 극에서의 적절성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게 일반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의 표출일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회개했으니 다 용서받았다고 하는 그 철면피적 뻔번함에 질색한다.

마지막으로, 456번이 결박당한 채 거리에 버렸을 때, 피켓을 들고 전도하는 전도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결박을 풀어주자 마자 뜬금없이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한다. 지금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시하고, 당면한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그저 피안의 세계에 대해서만 말하는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사실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기독교는 가짜 기독교이다. 복음에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왜곡된 신앙일 뿐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돈이나 성공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우상종교인일 뿐이다. 기도 아저씨에게 하나님은 그저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필요한 하나님일 뿐이다. 지영의 아버지 목사는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죄악을 합리화하는 거짓 종교인일 뿐이다. 거리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그저 같은 편을 많이 확대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 모습은 사실 2천 년 전에도 있었다. 그들은 38년 된 병자가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런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안식일날 왜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가가 문제였다. 낙타는 걸러내고 하루살이만을 삼키는 바리새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문자주의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원하시는데, 그러한 요소들은 다 생략한 채 형식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늘 있어왔고, 그런 종교인들에 대한 비판이 <오징어 게임>에 나온다.

<오징어 게임>에서의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은 참된 메시야 좀 보여달라는 절규이다. 자신의 구슬을 떨어뜨리고 “너는 꼭 살아서 나가. 그래서 엄마도 만나고”라고 말한 지영과 같은 메시야가 있으면 보여달라는 절규이다. 안타깝게도 2천 년 전 베데스다에서도 참된 메시야는 보이지 않았다. 38년 된 병자를 향해서 율법의 잣대로 비난만 하는 가짜 종교인들만 넘쳐났을 뿐이다.

4. 예수님의 색다른 초대

그런데 그렇게 아무런 소망이 없는 38년 된 병자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를 고쳐 주셨다. 그가 병에서 나은 것은 가장 먼저 물속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은혜가 그에게로 임했기 때문이다. 그가 찾지도 않았고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에게로 다가오셨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고 그를 고쳐주셨다. 우리의 소망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말이다.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오셨던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로 다가오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초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참된 ○△□(예수님) 초대장은 <오징어 게임>의 초대장과는 다르다. <오징어 게임>의 초대장은 남이 죽어야만 내가 성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내가 죽게 되어 있는 죽음의 초대장일 뿐이다. 모두가 다 456억을 바라보고 참가하지만, 모두가 다 죽는다. 내건 것은 행운인데, 실제 결과는 죽임뿐인 초대장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초대장은 우리 대신 예수님이 죽어주신 초대장이다. 그리고 참된 깐부(니꺼 내꺼 할 것 없이 같이 공유하는 단짝 친구) 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 마치 일남 할아버지가 456번에게 자신의 구슬을 넘겨준 것처럼 말이다. 마치 지영이가 자신의 구슬을 포기하고 강새벽에게 다 내어준 것처럼 말이다. 오일남이나 지영과 같은 모습은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선 찾기 어렵다. 종교인이라는 게 위선적이고, 이기적이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그런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제발 우리들의 삶에서도 그런 메시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말이다. 어디 구슬을 양보한 지영과 같은 사람 없나요? 어디 구슬을 넘겨준 오일남과 같은 사람 없나요? 절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생명까지 내어주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산다.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사람들은 지영이나 깐부 오일남처럼 나를 위해 희생해줄 메시야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해서 악의적인 묘사를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진짜 메시야가 있으면 좀 나와달라고 애원하는 셈이다. 삶이 더 절망적일수록 우리는 메시야가 더욱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짓 그리스도만을 추종한다. 때로는 돈이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메시야일 것이라고 희망을 건다. 하지만 돈은 우리의 진짜 메시야가 아니다. 그것은 거짓 그리스도일 뿐이다. 그리고 그 돈을 추종하며 따라가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의 노예로 전락해버릴 뿐이다. 돈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착취해버리는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때로는 정치 지도자가 우리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메시야일 것이라고 희망을 건다. 그래서 기꺼이 정치 지도자의 노예가 되길 자처한다. 카톡 뉴스를 퍼나르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정치 지도자를 드높인다. 지금까지 수없이 그런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서 속아왔으면서도,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할 목회자들이 정치 지도자를 전하는 데 열정적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세상의 그 어떤 정치지도자도 우리의 참된 메시야일 수 없다. 그들은 거짓 그리스도일 뿐이다. 정치인들은 교회를 이용해먹기 좋은 수단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는데, 그러한 그들의 전략에 말려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우리는 참된 메시야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만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며 살아야 하고, 희생과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살아야 한다.

WEA 관련 106회 총회 결과 보고

지난 2021년 9월 13일 월요일에 울산에서 106회 교단 총회가 있었습니다.

WEA에 대하여 총 세 번 논의를 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1. WEA연구위원회 보고할 때에는 정치부 보고 때 결정하기로

2. 신학부 보고할 때에는 104회 총회 결의 유지하기로 (즉 WEA와 교류 단절은 바람직하지 않다)

3. 정치부 보고할 때에는 WEA에 대한 명확한 윤곽이 들어날 때까지 결의를 유보하고 불필요한 논쟁을 피할 것을 권고하기로 하다

결론적으로 106회 총회는 WEA 교류단절을 선언하지 않겠다는 104회 총회의 결의를 유지하면서, 더 구체적인 결의는 유보하고 WEA에 관한 불필요한 논쟁을 교단 내에서 일으키는 것을 피하도록 권고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저는 105회 총회 신학부의 위촉을 받아 WEA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정치부 보고할 때의 결론은 양쪽의 주장들에 대해서 판단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WEA 반대론자들이 교류단절을 주장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WEA에 대해 아무런 결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저의 주장을 받아들인 셈입니다. 이미 신학부 보고를 통해서 교류단절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도 인정해주었습니다.

합동 교단의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장로님들이,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선동가들에 휘둘리지 않고, 상식적인 판단을 해주셨습니다.

WEA관련 긴급호소문

주님의 이름으로 인사 올립니다.

저는 총회 정치에 참여한 적도 없고,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 어떻게 쉽게 들려지게 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학자이며, 조용히 묵묵하게 주님께서 맡기신 양 떼를 돌보며 매일매일 감사하며 목양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전주 예수비전교회 이국진 목사입니다.

저는 총회에서 WEA를 연구하라는 과제를 맡겨 주셔서 총회를 섬기는 마음으로 순종하여,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합동 교단의 저력을 보았습니다. 순수한 개혁주의 신앙을 지키려는 열정들을 보았습니다. WEA와 관련된 논란들은 모두 그러한 열정에서부터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고, 교단의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단은 개혁주의 신앙을 수호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잘못된 신신학의 사조가 밀려오는 가운데서도, 굳건하게 바른 신학을 수호해야 합니다. 우리 교단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으며 예수님이 아닌 다른 길을 통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우리 교단은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이점은 합동 교단 내에 있는 모든 분들이 동의하는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만일 WEA가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고 성경의 영감설을 배격한다면 우리가 교류를 단절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만일 WEA가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연합단체인데, 근거 없는 비방을 한다면, 우리의 동지가 될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를 잃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WEA에 대해서 면밀히 연구하고 WEA를 반대하는 주장들을 면밀히 연구한 결과, WEA는 우리가 그렇게 배격해야 할 단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WEA는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종교 세계의 기독교 증언>이라는 문서는 결코 종교다원주의를 용인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초기 번역자가 그 문서의 일부를 잘못 번역하여 “다른 종교의 관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번역했으나, 사실은 그런 내용이 아니라 다른 종교를 오해하여 종교 간의 폭력적인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서로 방지하자는 의미일 뿐입니다.

전쟁이라는 파국을 피하기 위해 적국들도 회담장에 앉아 휴전협정을 하는 것처럼, WEA는 타종교 단체와 폭력적인 대결을 피하자는 합의를 이끌어 내어, 선교 현장에서 선교사들을 보호하려는 일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척화파에게는 배신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게 휴전합의를 하는 것은 적국과 내통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WEA는 결코 종교다원주의를 용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토마스 쉴마허가 총회에 답변한 문서나 WEA 문건에 충분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매도할 것이 아닙니다.

WEA가 타 종교와 만남을 갖는 것은 위와 같은 목적에서입니다. 안식교, 유대교, 천주교, 이슬람교 등과 만나 대화를 하고 문서를 만드는 것이 종교통합을 추구하려는 것이라고 오해를 받아 오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만남을 통해 지금까지 만든 그 어떤 문서도 정통 기독교의 입장을 단 한 구절이라도 포기한 문서는 없습니다. 안식교나 유대교와 통합을 추진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WEA는 성경의 영감설을 부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이며, 신뢰할 수 있으며, 오류가 없다는 게 WEA의 공식 입장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무오(infalliable)하다고 한 것처럼, WEA도 똑같이 표현합니다. 우리 교단 헌법에 명시된 성경에 대한 고백과 다르지 않습니다.

WEA에는 현재 우리가 교류하고 있는 대부분의 건전한 개혁주의 단체들이 가입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미국장로교회(PCA) 교단, 세계개혁주의협의회(WRF)는 모두 우리가 동반자 관계처럼 생각하는 개혁주의 신학을 가진 단체이며 교단입니다. 그런 곳에서 모두 WEA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인정하고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매일성경을 발행하는 성서유니온도 WEA 가입단체이며, 세계 대부분의 건전한 선교단체들이 여기에 모두 가입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PCA, WRF와는 교류하면서 WEA를 배격한다면 그것은 모순적인 행동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학과 더 차이가 있는 것은 한국교회총연합(UCCK)입니다. 거기에서는 우리와 신학이 다른 교단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고, WCC 참여 교단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여러 가지 공동의 선한 목적을 위해 참여합니다. 그러한 참여가 우리 교단의 신학에 영향을 미치거나 하지 않습니다. WEA 교류단절 논리라면, 한교총을 먼저 교류단절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WEA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단체는 아닙니다. 한교총이 한국의 많은 개신교회가 가입해 있는 것처럼, WEA도 세계의 모든 개신교회와 단체들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충분히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유지한 채 교류는 가능합니다. 한교총 안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106회 총회는 WEA 가입 건을 다루는 게 아닙니다. 가입하자는 주장은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단과의 교류 단절하듯, WEA에게도 교류 금지 딱지를 붙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WCC 가입교단이 활동하는 한교총과의 교류 단절을 시도하지 않는데, PCA, WRF가 들어와 잘 활동하고 있는 WEA를 교류 단절하자고 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이 아닙니다. 충분히 우리의 신학적 입장을 유지하면서, 제한적인 분야에서 충분히 교류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국진 목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