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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네 어머니라 (요 19:23-27)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있던 그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완전히 그 옷을 다 벗겨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성화를 보면, 중요한 부위를 가린 그런 성화를 그려놓지만, 사실상은 완전히 발가 벗겨진 채로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 못 박혔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아마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육신을 가렸던 옷, 당시에 유대인들이 입었던 옷은 속옷과 겉옷을 입고 있었을 텐데요. 그 죄수의 옷은 이제 더 이상 죄수가 죽어버리면 죄수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었던 군인들이 그것을 나누어 갖는 그런 풍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서로 나누어서, 어떤 옷은 서로 분리해서 나누어 갖기도 하고, 속옷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제비를 뽑아서 누가 가져갈 것인지 서로 내기를 해서, 그래서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갖게 되었을 때, 이 군인들은 아마도 수지를 맞았다고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 군인으로서 받는 봉급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얻게 되는 부수적인 그런 수입들을 얻게 될 때, 너무나도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참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과연 예수님에게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소득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영생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시는 분이고, 그리고 우리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 바로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데, 그 예수님에게서 얻을 수 있는 영생의 선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이 세상에 이득만을 위해서, 옷을 더 누가 더 많이 가져갈까에 혈안이 되어 있는 군인들의 모습을 본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있었던 군인들만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어쩌면 오늘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도 정말 중요한 것은 놓쳐버리고 예수님의 겉옷 속옷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달려드는 우리들의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닮아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고,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고, 거기에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이 놓여져 있는 것인데, 우리가 갈망하는 것,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야말로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 얼마 가지 못하여 정말 허망하게 사라져 버릴 것들에 목매여 달고, 그것을 우리가 추구하면서 살아가면서도, 그게 신앙생활인 양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종종 우리 교회에서 교회 학교에서 하는 것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기도 하고, 또한 찬양을 하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것들을 하면서, 잘하는 자들에게 시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고요. 달란트 시장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것을 통해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들이 더 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일들을 하게 되는 것인데요. 또 전도를 잘하면 시상을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박수를 쳐주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하는데, 그 모든 것들의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주님을 더 많이 알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더 믿음이 커지기를 위해서 그런 일들을 하게 되는 것인데, 때때로 우리들의 관심이 하나님께 관심이 있기보다는, 주님께 관심이 있기보다는, 그러한, 마치 겉옷 속옷에 욕심을 냈던 군인들처럼,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을 욕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 이 아침에 저와 여러분들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귀하고 복된 이 아침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박수를 받고, 사람들이 나에게 칭찬해 주는 것에 목말라 하면서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집사요 권사요 장로요 또한 목회자라고 하는 그런 타이틀이 욕심이 나는 것이고, 정말 훌륭한 분이라고 하는 그런 칭찬, 사람들의 칭찬이 욕심이 나고,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나에게 박수를 쳐주는 그것에 우리들의 마음이 다 빼앗겨 버리고, 그러한 썩어질 것들에 우리들의 마음이 빼앗겨 버렸다고 한다면, 오늘 이 아침에 회개하고 나아가며, 참된 영생을 주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며 사랑의 관계 가운데 더 깊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또 다른 제자들이 있는 것을 보시고, 사랑하는 제자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요한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그 예수님의 어머니와 요한이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세 번째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라고 하는 말을 마리아에게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를 향해서는,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어머니를 가리켜서 “어머니”라고 표현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 우리들에게는 좀 생소할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방 예의지국의 그런 전통 가운데 살아왔기 때문에, 부모님을 향해서는 정말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너무나도 지극히 당연한 그런 삶을 살아오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어머니를 향해서 “여자여”라고 불렀다고 하는 사실이 좀 이상하고 생소하게 들릴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이것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던 어법이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낮추어 부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어머니와의 관계가 아닌 그저 객관적인 관계 주님과 성도의 관계로서 마리아를 부르는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머니를 부를 수 있는 그런 어법이었다고 하는 사실, 우리와 문화가 달랐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고, 이 표현을 보시면 좋을 것 같고요. 그냥 이것은 하대한 것도 아니고, 가족관계를 떠나는 것도 아니고, 애정이 담긴 사랑이 담긴 표현으로 어머니를 불렀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서 말을 하는데요. “보소서. 아들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원문을 보니까 단어 하나가 번역할 때 빠진 채 번역이 돼 있는데요. 어떤 단어가 빠져 있냐면 “당신의”라고 하는 말이 원문에 들어 있는데, 번역에서는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소서. 아들이니다”라고 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다”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죠.

여기서 “당신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도대체 누가 이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십자가 위에 달린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 지금 이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을 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하는 제자가 지금 저 앞에 있는데, 이제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어서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이제는 내가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저 요한 제자가 이제부터는 마리아 당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두 가지 다 가능성이 있겠지만, 아마도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사랑하는 그 제자를 가리켜서 “이제부터는 요한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표현했을 거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죽어가고 있는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슬퍼하고 있는 마리아를 향해서, 충격에 빠져 있는 그 어머니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해주신 것은 “이제는, 이제 제자가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는 이유는 바로 그 다음 편에 제자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향해서, 그 어머니를 가리켜서 “이제는 그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 요한 너의 어머니”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고, 그 이야기를 들은 요한이 그 이후부터는 마리아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그리고 마치 어머니처럼 모시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게 되시면서, 그래서 죽음을 당하시게 되었을 때 남겨진 그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예수님 대신에 요한을 아들처럼 그렇게 보시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아들을 빼앗겨버린 그 어머니를 요한 더러 어머니처럼 섬기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께서 하실 수 있는 여러 말씀들이 있는데, 이렇게 마리아를 향해서 요한을 향해서 이 말씀을 해 주시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어머니를 효도하는 마음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런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이제는 예수님께서 떠나신 이후에 남겨진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면서, 여러 사역들을 행하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기 시작했고,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께서는 때에 따라 먹이기도 하시고,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도 하고, 위로해 주시기도 하고, 책망하시기도 하시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되는 이 상황 가운데서, 이제는 남겨진 사람들이 되어 버린 것이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왔는데 이제는 남겨져 버린 겁니다. 예수님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자들의 상태가 어떤 상태가 되었습니까? 우리 한국 속담으로 한다면 마치 “닭 쫓는 개”처럼 그런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죠. 지금 예수님만 바라보고 쫓아왔는데 예수님이 사라져 버리게 된 겁니다. 이제는 도대체 누구를 따라다녀야 하는 겁니까? 망연자실한 상황 가운데서, 어쩌면 심각한 우울증을 겪을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물론 예수님께서는 다시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지만, 부활하신 이후에 또한 다시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가 버리고 나면, 이제는 재림하실 그때까지 예수님이 없는 상황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해야 됐던 그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마리아에게만 했던 말씀, 제자 요한에게만 했던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님이 없는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그리고 마리아를 보시고 이제부터는 요한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마리아가 제자의 어머니라고 이야기해 준 이유가 무엇이냐면, 이제는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던 그 모든 자들이 서로 가족처럼, 어머니처럼, 아들처럼, 딸처럼, 형제자매처럼 그렇게 서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라고 새로운 가족 관계로 맺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8절에서부터 50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그 예수님의 가족들이 와서 예수님을 찾고 계셨을 때, 그때 제자들에게 해 주셨던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데요. 이 말씀은 어머니를 무시하겠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을 이제는 더 이상 모른 척 하겠다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서로 마치 가족처럼 아버지 어머니 형님 동생 그리고 아들 딸 그런 관계로 함께 신앙의 공동체 새로운 영적인 가족을 이루어서 살아가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27절 말씀에 보면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마리아와 요한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아직도 이 세상의 풍파 가운데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나면서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계셨을 때는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가면 됐습니다. 예수님만 따라가면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자 하면 가면 됐었고, 멈추자 하면 멈추면 됐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렇게 따라가면서 살아갈 수가 있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없어져버린 그 상황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남겨진 제자들을 향해서 해 주시는 말씀이 이제는 어머니로 모시고 이제는 아들로 생각해서 그리고 서로 가족관계로 생각해서 살아가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영적인 가족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 말씀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혼자 떨어져 있으면, 우리가 신앙생활하다 보면 마음이 서로 맞지 않아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그리고 괴로운 일도 있고 여러 가지 힘든 일들도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서로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같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까, 생각이 다른 사람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같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까 마음이 상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들이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똑같은 것을 바라보아도 이쪽에서 바라보느냐 이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게 각각 다른 겁니다. 원통을 놓고서 이쪽에서 보면 네모처럼 보이는 것이고, 위에서 보면 동그라미처럼 보이는 것이고, 서로 자신이 보는 그 입장에 따라서 의견이 완전히 달라지게 될 때, 서로 자신이 본 것만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을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 신앙생활하면서 조그마한 일을 같이 하다가 아무 일도 안 하면 교회가 평안한데 무슨 일을 하고자 하면 마음이 서로 맞지 않아서 의견이 달라서 서로 이야기하다 보면 내 의견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서 서로 마음이 상하고 상처를 입고 하다가 보면 이렇게 함께 신앙생활하는 것보다는 그냥 내 팽개쳐버리고 나 혼자 조용히 있는 게 낫겠다라고 그렇게 시험받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더 이상 이제는 헌신도 하지 않고 더 이상 이제는 참여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 가장 최고의 방법인 것처럼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모이기를 폐하는 그런 습관처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가족처럼 뭉치고 함께 사랑을 나누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 말씀에 보면 초대교회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데요.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영적인 가족이 된 것처럼 함께 같이 떡을 떼고 함께 교제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는데요. 오늘 예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은 두 사람을 향해서 다 말씀을 해 주셨어요. 어머니만 향해서 “보소서. 이제부터는 저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어머니에게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부탁하고, 아들에게도 부탁하는, 제자에게도 부탁하는 거죠. “보라 너의 어머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물론 당시 유대사회 속에서 도움을 더 많이 받아야 될 사람은 당시 경제적인 면에서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많은 경제적인 도움을 많이 필요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움이라고 하는 것은 경제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서로 돕고 주고받는 것이죠.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것인 것이죠. 어머니도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아들도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고, 서로 가족이라고 한다고 하면 일방적으로 한쪽이 한쪽만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가족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베풀어줄 때 그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처럼, 우리 교회 공동체를 주님께서 만들어주셨는데, 그 교회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때, 그래 그 공동체가 영적으로 성숙해져가면서 믿음이 성장해 나갈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다 누구예요? 다 형제요. 자매요. 아버지요. 어머니요. 아들이요. 딸입니다. 믿습니까? 우리 서로 앞뒤 옆 사람 보면서 한번 얘기해 봅시다. “아, 우리 어머니셨군요. 우리 아들이네. 우리 아버님이시군요.”

이 세상은 참 매몰찬 세상입니다. 조금만이라도 손에 가보면 싸우려고 들고 갑질을 해야 되는 세상입니다. 사랑이 메말라가는 세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힘든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예수님께서는 가르쳐주고 있는데요. 믿음의 가족이 되어서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속에는 a형 b형 o형 ab형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주님의 피로 바뀜을 받은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는 그런 똑같은 가족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버려두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해 주시기를 두 세 사람이 모인 그곳에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고,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또한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주셔서 우리와 함께하셨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 나의 아들 나의 딸 나의 형제 자매라고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면서, 이 사랑의 공동체가 더욱더 믿음으로 깊어져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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