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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노하심에서 구원 (롬 5:9-11)

참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군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이번 코로나 상황을 지나면서 코로나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평상시에 백신에 대해서 불신하면서, 또한 코로나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살았던 사람이라고 해요. 코로나는 그냥 감기에 불과한 것인데, 왜 이렇게 난리를 치느냐고 말하고, 그뿐만 아니라 방역 대책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 방역이라고 비난하는 그러한 유튜브의 선동을 들으면서, 백신을 접종하는 것을 거부하던 사람이었는데요. 그분이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걸로 인해서, 아 여러 가지 참 많은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 죽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를 걸리고, 그냥 무사히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냥 감기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정말 그 사람에게는 무서웠던 것이 코로나였던 것이죠. 지금 와서는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고, 지금에서는 후회할 수조차도 없는 그런 무서운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고 지내다가, 그런 큰일을 당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이 아닐 수가 없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판단하고 우리가 행동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모르고 행동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별거 아닌 것 같아서 행동을 하고, 별거 아닌 것 같아서 그냥 했던 일들인데, 그런데 막상 그 일로 인해서 아주 심각한 결과를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심각한 일을 저지르는 것은 이것이 심각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죠. 아주 무서운 거라고 생각했더라고 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것이 아주 심각한 것이라고 생각했더라고 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할 때에는,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을 때는, 그 하고 하지 않음에 따른 결과가 그렇게 심각할 거라고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데요. 우리가 정말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굉장히 무서워합니다. 별거 아니고 겁을 낼 필요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굉장히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반면에, (무서워 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무서워) 하는 반면에, 정작 무서워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그냥 막무가내로 행동하다가, 그래서 아주 큰 코를 다치게 되는 경향들이 많이 있는 것이죠.

우리가 정말 무서워해야 될 것이 무엇이고, 정말 무서워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구별하는 것이 지혜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선한 일을 하거나,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는 두려움이 많습니다. 선한 일을 해야 하고,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할 때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온갖 걱정과 두려움과 무서움 때문에 한 발짝도 떼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실패하면 어떡할까? 이러다가 망하면 어떡할까? 내가 시도했다가 아무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떡할까?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면서 시도하지 못하는 겁니다. 실패하면 어떡할까 하는 그런 두려운 마음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거죠. 찰싹거리는 파도를 보면서 그 작은 파도가 무서워서, 저 깊은 은혜의 바다로 나아가는 일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선한 일을 할 때에는, 그러한 일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나아가서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들에게 자산이 되고 또한 교훈이 되고,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산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담대하게 나아가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거나 좋은 일을 하거나, 주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때는, 두려운 마음에 걱정만 하고 두려워하기만 하고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무서워할 것은 실패가 아니죠. 99%의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단 1%의 실패의 확률을 바라보면서, 그것 때문에 두려워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오.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정말 무서워해야 할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서워하지 않는 경우도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무서워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뜻이 아닌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일들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우리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해야 할 일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우리들의 형제들 자매들 이웃들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시기하는 일들을 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해서는 안 될 일이죠.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을 왕따시키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 뒤에서 말을 하면서 비방하고, 사랑을 베풀지 않는 일을 하는 그런 일들을 하는 것들은 정말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그것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행하고 맙니다. 사람들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들을 하면서도, 전혀 두려운 마음이 없는 것이죠. 속이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취하면서도, 나쁜 짓을 하면서도, 그것이 가져올 그 엄청난 위험이 무엇인가?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런 일들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행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그냥 대수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그것에 걸려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일들이 있는 것처럼,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들을 행하거나,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은 이것이 아주 심각하고 무서운 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아주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파괴하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망치는 정말 무서운 죄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형제를 욕하고 저주하는 것은 비난하는 것은 그건 마치 살인죄와 같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형제를 향해서 분노하고 미워하고, 그 사람에 대해서 욕하고 비방하는 것은 그것은 괜찮은 것이 아니라,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아니라, 그것은 살인죄와 똑같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렇게 무서운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요.

우리가 하는 그 행동 하나, 눈길을 돌려버리고, 말을 섞지 않고, 미워하는 행동을 보여주는 그 행동 하나하나가, 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들에 대해서 비방하고, 욕하는 그런 우리들의 말 하나하나가 우리 이웃들에게 얼마나 큰 타격을 입히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정말 절망적으로 만든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했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내어주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장난삼아 했던 그런 말 한마디가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고 엄청난 마음의 타격을 주는 것일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치 꼬마 아이들이 심심풀이로 던진 돌멩이 하나가 그 연못에 있는 개구리들에게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것이 되는 것처럼, 나는 그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실은 살인죄와 똑같은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하면서 정말 신중하게 우리들의 말과 행동을 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고, 심각한 것인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5장의 말씀은 그러한 우리들의 행동이 얼마나 큰 죄였는가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는데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어디서부터 구원받은 것인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인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부터 구원받은 것이라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했고 행동하고 말하고 또는 하지 않았던 그 모든 것들이 그냥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했었고, 그래서 영원한 지옥의 형발을 받아야 마땅한 엄청난 심각한 죄였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잘 망각해 버리는데요.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그렇게 심각한 것이라고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독버섯을 먹으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별거 아닌 것이라고 생각했고 맛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버섯인데, 그런데 그 독버섯을 먹으면 치명상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복어를 먹는데, 그것을 잘 손질하지 못하고 그렇게 먹게 된다고 한다면, 치명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사실은 엄청난 심각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일을 하는가? 왜냐하면 결과를 보지 못하고, 우리의 조그마한 행동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게 되는데요. 왜 선악과를 먹게 됐을까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그런 욕심에서 선악과를 먹었을 것인데요. 그런데 그 선악과를 먹게 될 때 아 우리가 이 선악과를 먹게 된다고 하면, 이게 우리를 죽이는구나, 우리가 이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리고 단절되어 버리고, 우리는 망하게 될 거라고 하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안 먹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그 선악과를 먹게 될 때는 그 생각으로 먹게 되었을까요? 별거 아니잖아요. 과일 하나 먹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과일 먹는 것 가지고 사람을 그렇게 멸망시키느냐라고 질문을 던지는 거죠. 별거 아닌 것 같은데요. 선악과 먹는 게 과일 하나 먹었다고 죽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과일 먹는 게 무슨 대수입니까? 그게 무슨 심각한 일이라고,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과일을 과일이니까 먹는다는 것이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먹는 것입니다.

아간이라고 하는 사람은 여리고 성과의 전투가 끝난 다음에, 여리고 성에 있는 모든 전리품들을 다 불태워버리고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전리품 가운데서 몇 개를 훔쳤습니다. 전리품을 다 불태워 없애버리라고 했지만, 아간의 마음 가운데는 이것을 훔쳐버렸는데요. 그 아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이거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이건 나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 악간의 행동으로 인해서 어떤 일들이 발생했는가? 그다음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군사들 수천 명이 몰살을 당했어요. 아간의 형제 자매들, 아간의 이웃들이 전투에 나가서, 거기서 모두 다 죽어버리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 그것을 알았다고 한다면 이 아간이 그것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이것을 훔쳐서, 내가 가지는 것이 결과적으로 우리의 형제들 자매들, 우리의 군사들이 죽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런 결과가 올 거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다라고 한다면,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었겠느냐 말이에요. 못 하는 거죠. 그런데 아간의 마음 가운데 이것은 그 심각한 결과를 보지 못하는 겁니다. 자신이 죽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 이웃이오 형제들이 군사들이 나가서 죽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는 겁니다. 전혀 깨닫지 못하고 감추어 두었는데,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 결과였는가? 아주 심각한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왜 잘못을 하는가? 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가? 그것은 별거 아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함께 어떤 사람을 죽이자라고 말하면, 그 죽이는 일에 여러분 동참하시겠습니까? 못하죠. 어떻게 사람을 죽여요? 못 죽여요. 사람을 죽이자. 그러면 못 죽이는 겁니다. 그러한 악한 일에는 참여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나쁜 일에 참여하게 됩니까? 죽이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앉아서 비난하고 욕하자. 이것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말로써 비난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거, 뒷담화 하는 거, 이거 별거 아니니까 하는 거예요. 만일 우리로 하여금 소를 훔치자고 하면, 훔치겠어요? 못 훔쳐요. 그 엄청난 소를 가져오라고 하면, 훔치라고 한다면 그것을 훔치고 싶은 그런 대범한 사람들은 별로 많지가 않아요. 그런데 바늘을 좀 살짝 하자니까, 바늘 훔치자고 하니까, 훔치는 거에요.

다윗은 말년에 인구 조사를 합니다. 교만함의 동기에서부터 비롯된 것일 것이고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 사람을 의지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겁니다. 인구 조사하는 게 뭐 무슨 죄라고, 그게 무슨 나쁜 짓이라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의 마음을 다루고 계시는 것일까요? 다윗이 그 일을 할 때는 별거 아닌 거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까짓것 이거 다른 왕들도 다 하는 것이고, 왕으로서 할 수 있는 통치행위라고 그냥 가볍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일 겁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서 엄청난 재앙이 이스라엘 가운데 쏟아졌습니다.

웃사라고 하는 사람은 흔들리는 수레에서 법궤를 만집니다. 법궤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 법궤를 만지는데요. 그거 만지는 거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냥 만지면 되지, 그냥 움직일 때 “떨어뜨리지 않게 내가 도와주면 되지”라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그것이 가족을 죽음의 결과를 알았다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해야 될 모든, 우리가 한 그 모든 잘못들이 그냥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죄의 삭은 사망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아주 심각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런 진지한 결단들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진노 가운데 우리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만, 복음을 이해할 수가 있겠는데요. 복음의 기쁜 소식은 무엇인가? 우리가 여러 가지 잘못으로, 죄악으로, 우리가 보기에는 별거 아닌 것들을 행해서,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이 엄청난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고, 영원한 지옥의 불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들을 보시고, 그냥 내 팽개쳐 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냥 심판해버리고 끝낸 것이 아니라, 그냥 심판만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시고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신데, 바로 이것이 복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무서운 진노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우리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어떤 분입니까? 부모님은 자녀들의 잘못을 보고 책망만 해버리고 끝내버리는 것이 부모가 아니라, 부모는 뭡니까? 자녀들의 망가진 그것을 다 품어서, 그래서 그것을 온전히 회복시켜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이죠.

바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그냥 심판만 해버리고 끝내버리는 염라대왕과 같은 그런 하나나님이 아니세요. 이 세상 모든 종교에서의 신은 어떤 신입니까? 염려 대왕과 같은 신이에요.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우리가 이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신 거죠. 이 세상의 모든 거짓 종교의 하나님은 마치 염라대왕과 같은 그런 하나님이기에,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무심한 하나님이 무심한 염라대왕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무심한 염라대왕 앞에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정말 최선의 노력을 해야만 하는 그런 무심한 신일 뿐입니다.

하지만 참된 성경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그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그 망가진 상태를 보시고, 우리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그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민진 작가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 이민진 작가라고 하는 분이 쓴 파칭코라고 하는 소설이 아주 유명해져서, 그것이 애플 tv에서 드라마로 촬영해서 공개해서 한동안 크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혹시 보셨습니까? 보시기가 좀 힘들 거예요. 애플 tv라서. 그런데 이 파칭코라고 하는 드라마가 아주 참 잘 만들어져서, 한 번쯤 보았으면 하는 그런 드라마인데요. 아직 다 보지는 않았는데, 거기에 보면 선자라고 하는 여자 주인공이 나옵니다. 선자라고 하는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데 이 처녀가 한수라고 하는 야쿠자를 만납니다. 너무나도 멋있게 생기고 정말 남자답고 정말 멋있는 사람입니다. 근데 그 한수라고 하는 사람과 만나서 그 한수라고 하는 남자의 아기를 가지게 된 거죠. 근데 그 한수가 유부남인 것을 몰랐습니다. 유부남의 아기를 가지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 선자가 한수라고 하는 사람에게 가서 아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을 했지만, “그래서 어머니를 언제 볼까요?” 했을 때, 몰랐느냐고 나는 유부남이라고 하면서 차가운 말을 듣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나중에 이 선자가 고민고민하다가 자기 엄마한테 가서 이야기를 해요.

당시에 그 왜정시대 때 한 처녀가 결혼도 하지 않고, 유부남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 때, 사회로부터 손가락질 당할 뿐만 아니라,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하는 그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그 아이가 태어날 것을 생각한다고 하면,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죠. 그 선자가 자기 엄마한테 가서 얘기를 합니다. “엄마, 내가 잘못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선자의 엄마가 그 선자를 보면서 말을 합니다. “걔가 누구냐? 그놈아가 누구냐?” 말을 못합니다. 그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를 말을 못합니다. 다그쳐서 물어보는 거죠. 왜 말을 못하느냐고, 왜 말을 못하느냐고 하면서, 엄마가 자기 딸을 향해서 물어보는데, 그 엄마가 묻는 이유가 뭡니까? 그 아이에 대해서 물어보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 아이의 잘못을 책망하기 위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에요. 그 아이를 다그치기 위해서, 잘못했다고 때리기 위해서, 그 아이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아픔과 그 아이의 그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서, 이 아이를 어떡하면 좋을꼬?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온 이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마음에, 그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그 아이의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래서 걱정 가운데 물어보는 것이죠.

그게 부모의 마음인 거예요. 자녀가 망가져버리면, “너는 내 자식 아니다”라고 내 팽개쳐버리는 것이 부모가 아니고, 자기가 아이가 망가져버리면, 그게 나의 아픔이고, 그게 내가 해결해야 될 문제고, 그것 때문에 내 목숨을 바쳐서, 그 아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은 것이 그게 부모의 마음이에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바로 우리 부모님과 같은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죄를 지어서, 결국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우리의 그 모습을 보고 책망해 버리시고, 지옥에 보내버리시고 끝내버리신 하나님이 아니라, “네가 왜 그랬니? 왜 내 말을 듣지 않고, 그렇게 나쁜 짓을 했니?”라고 하면서, 우리를 안아주신 것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세요.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이냐면, 우리들이 그렇게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시고 그 진노로부터 구원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로마서 5장 9절의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만들어졌습니까?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불화가 생겨나게 된 것이죠.

그럴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다시 화목해지기 위해서는, 사이가 틀어져 버렸을 때, 사이가 다시 회복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누가 누구에게 나쁜 짓을 해가지고 사이가 틀어져 버렸다고 한다면, 다시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배상을 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해야 화해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가 잘 가까워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일본이 가해자이고, 우리는 그 일본의 가해 가운데 엄청난 고난을 당했는데, 저 가해자가 사과하거나, 배상하거나, 잘못 쳤다고 잘못했다고 하는 뉘우침이 없이 그저 미래를 향해서 우리가 같이 잘 살아보자라고 하는 이야기만 하고 있기 때문에 관계가 개선이 안 되는 겁니다.

종종 우리들 이 세상에서는 뻔뻔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죠. 피해자들을 찾아가서 한다는 이야기가, “가해자를 용서하고 잘 지내보자”고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피해자들을 찾아가서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여러분들이 마음을 열고 가해자를 용서합시다.” 그런 헛소리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몰라요. 화해가 이루어지려고 하면,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피해자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내가 잘못했다고 하고, 그리고 배상을 하고, 용서를 구하며, 진정으로 뉘우칠 때에야 그때서야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게 유일한 화해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께서는 정반대로 하셨어요. 도표를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원수지간이 되었고, 그 관계가 깨어져 버리고 불화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화해의 방법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어야 하고, 배상을 해야 하고, 목숨을 바쳐야 되고, 그래서 배상이 되어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우리가 그렇게 할 능력이 안되는 거예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화해하자고 청하신 거예요.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빨리 그 고발하는 자에게 가서 배상을 해주고, 그래서 화해하는 것이 그게 정상인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가해자인 우리들의 께서 무엇인가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아들을 화해의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해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해하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화해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로마서 5장 11절의 말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성도 여러분, 이제는 주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을 마음속에 기억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고 주님 때문에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기 전까지는 늘 넘어지고 늘 쓰러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가 원하지 않는 행동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 자신을 보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화해의 재물을 보내주신 친히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오늘도 기억하면서, 감사함으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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