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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때문에? (롬 5:12-21)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진리의 말씀은 진리 중에서도 진리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그 교훈들 교리들 진들은 정말 참된 보배로운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안타깝게도 불신자들은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강력하게 반발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러 가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면, 그 말씀을 들으면서 그것을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종종 거부하고 심지어 반발하는 그런 경우를 우리는 종종 느낄 수가 있습니다.

왜 불신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진리 중에서도 참된 진리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왜 불신자들은 그 말씀을 들려줄 때에 우리들과 똑같은 감동을 받지 않고, 우리들과 똑같이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담을 쌓아버리고 거부해 버리고 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성경의 진리를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일부만을 바라보고 오해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깨닫는다고 하면, 이것처럼 보배로운 말씀이 없을 텐데, 피상적으로 들으면서 전부를 보지 못하고, 그 일부만을 보면서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거역하는 것이죠. 거부하는 것이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불신자들을 볼 때에 우리 성도들은 그분들을 잘 설득시키고 싶은데, 설득이 되지 않아서 굉장히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답답함을 느끼게 될까요? 왜냐하면 우리 크리스천들도 불신자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불신자들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맞는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데, 왜 저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우리는 정말 성경 말씀을 가르쳐주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왜 저들은 거부할까? 그들이 거부하는 이유를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들도 답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크리스천들과 불신자들이 서로 만나면 대화가 잘 되지 않고, 전도도 되지 않고, 서로 불편한 일들이 반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복음을 불신자들에게 나누기 위해서는, 불신자들이 왜 거부하는지, 왜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한다면. 학생들이 무엇을 이해하는지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파악해서 그 막힌 부분을 해결해 줘야 됩니다.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한다면. 학생이 왜 이것을 모르고 있는지. 무엇이 막혀서 이 진리를 모르고 있는지 파악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줘야만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훌륭한 선생님은 누구냐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내서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지휘자가 있었는데요. 그 지휘자는 다른 지휘자가 성가대를 지휘할 때는 음악이 잘 안 만들어졌었어요. 그런데 똑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지휘를 하는 또 다른 지휘자가 있었는데요. 그 지휘자는 오더니만 한번 들어보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안 겁니다. 그래서 그 문제인 것을 지적해주고. 이걸 고치라고 이걸 고치라고 해서 쫙했더니. 불과 몇 분 만에 엄청나게 화음이 쫙 맞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래서 지휘자가 누구냐에 따라 음악이 달라지는구나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좀 뛰어나지 않은 지휘자는 이 음대로 하라고 윽박지르기는 하지만, 왜 그 음을 못 내는지에 대해서 분석이 안 돼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반면에, 정말 훌륭한 지휘자는 그 문제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꼬집어내고, 그것을 고치게 만들어서, 그래서 좋은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먼저 깨달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불신자들이 왜 복음을 못 받아들이고 있는가? 왜 거부하고 있는가?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거부하게 만드는지를 파악하고서,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어야만 하는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천들은 그냥 진리만을 일방적으로 선포해 버리고 맙니다.

내가 맞는 이야기를 하니까, 내가 옳은 이야기를 하니까, 듣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말해버리고 마는데요. 그러니까 소통이 되지 않고, 전달이 되지 않고, 내가 외치면 외칠수록 불신자들은 기독교인들은 꽉 막힌 사람들이라고 하는 오해가 더 심각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교리 가운데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그 진리들이 다 진리의 말씀인데요. 그 가운데서 불신자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말씀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원죄의 교리입니다.

한 사람, 우리들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인류가 죄 가운데 빠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원죄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그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원죄의 교리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이라고 한다면, 다 이해할 수 있고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인데, 불신자들은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이 닫혀 버립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거부해버립니다. 사람들이 왜 이 원죄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말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만, 그것을 내 마음으로 용납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우리 조상이 지었던 죄 때문에, 내가 심판을 받아야 된다고,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는데, 아담이 지은, 내가 만나지도 않았고,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 어떤 수천, 수만 년 전에 어떤 한 사람이 지은 죄 때문에, 내가 심판을 받아야 하고, 지옥에 가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 읽은 로마서 5장 12절 말씀은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었는데, 그것 때문에 모든 인류가 죄 가운데 있게 되었고, 심판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는 말씀을 설명해주고 있는데요. 이것을 불신자들이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반발하는 것이고요.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서도 이 교회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원죄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해서 설명을 합니다. 어떤 비유를 설명하냐면, 대표의 원리에 해당하는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리고 한 나라의 왕이 했던 결정은 그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국가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한 나라의 임금이 전쟁을 하기로 결정하면, 임금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전체가 전쟁의 포화 가운데 들어가게 되고, 모두가 다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한 가정의 가장이 결정한 것은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식구들 전체에 영향이 미치는 것이고, 한 회사의 사장님이 결정한 것은, 그 결정으로 말미암아 사장님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회사 구성원 전체에게 문제가 미칠 수 있는 그런 대표의 원리를 이야기하면 그러면 어느 정도 조금 이해가 될 것입니다.

또 바이러스와 같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인데요. 어떤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서, 바이러스가 확산되게 되었다고 한다면, 한 사람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온 나라 온 백성들이 다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 바이러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시대의 문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아담이 죄의 문을 열었고,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이르렀다고 설명하는 것이 있겠는데요.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느 정도 수긍하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 안 받아들일까요? 왜? 이러한 이야기들을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억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죄를 안 지었는데도, 내가 알지도 못하는 어떤 아담이라고 하는 사람의 죄 때문에, 내가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면 그걸 누가 받아들일 수가 있겠어요? 억울한 거죠. 말도 안 되는 것이죠.

이 불신자들의 마음 가운데는 어떤 질문이 있냐면, 원죄의 교리를 말하면 불신자들의 마음 가운데는 어떤 생각이 드냐면, 과연 그런 하나님은 공정하신 하나님인가? 공평하신 하나님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 아니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어떤 하나님이어야 합니까? 그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어야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공정하여야만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이 공정하지 않은 겁니다.

공정한 것은 무엇인가요? 선을 행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시고, 그리고 악을 행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어야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하나님이 전혀 공정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거부하는 겁니다. 세상에 그런 막 돼먹은 하나님, 공정하지 못한 하나님, 불공평한 하나님은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그렇게 반발하게 되는 겁니다. 법 집행관이라고 한다면 그 법을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해야, 그래야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가혹하게 대우하면서, 어떤 사람의 죄는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못 알아보겠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알아보는데 자신들은 못 알아봤다고 말하고, 증거가 없다고 말하고, 부실 수사하면서 그런 사람들은 풀어주는 편파적인 법 집행을 한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공정이고 그게 무슨 공평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마치 그런 불공평한 하나님인 것처럼, 정말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심판하신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공정한 하나님, 공평의 하나님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반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죄에 대해서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아, 그렇구나!”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한 하나님인가? 정말 정의롭지 못한 하나님인가라고 하는 질문만을 더 양산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죄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들에게 원죄가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지, 정말 근사한 비유로써 설명하기보다는 하나님이 공평하신 하나님이오. 공정하신 하나님인가에 대한 질문부터 대답해 주어야, 그 문제부터 해결해 주어야, 그래야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크리스천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 모두가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이 원죄라고 하는 것이 내가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내가 심판을 받을 수도 있겠다고 하는 오해입니다. 그렇게 들려요. 하지만 결코 그런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멸망을 당하는 것은 내가 죄가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멸망당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다 죄인이 되어서 죄를 지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죄를 지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심판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고 한다면, 마지막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억울하다고 항변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하나님 억울해요. 나는 그래도 인생을 잘 살았어요. 하나님 억울해요. 그래도 나는 인생을 착하게 살았어요. 근데 왜 내가 아담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가야 됩니까?”라고 항변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게 현실이에요.

우리가 만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우리는 그 순간에 우리가 지은 그 모든 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통곡해야만 할 겁니다. 평상시에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나는 그런대로 저 사람보다는 낫고, 저 사악한 인간보다는 내가 낫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순간에, 우리는 발가벗은 것처럼 드러나게 될 것이고, 우리의 숨겨놓았던 죄악들이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서면서 내가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심판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원죄의 교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로마서 5장 12절의 말씀 다시 한번 살펴보면, 그 구절을 세밀하게 읽어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아담이 죄를 짓고, 다른 사람들은 죄를 안 지었어도 망하는 게 아니라, 아담이 죄를 지었듯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 이래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죄성으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죄를 지으며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이고, 지난주에 설명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항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하는 점을 먼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오늘 유신이가 아주 멋지게 읽어줬는데요.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 헷갈리게 만드는 표현들이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아무래도 매끄럽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담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고 하는 식으로 그렇게 읽힐 수 있는 표현이 여기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바울 사도는 왜 이렇게 헷갈리는 표현, 우리가 정말 오해를 할 만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 사실을 아담과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그 죄의 역사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와 왔는데, 그런데 결국 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놀라운 은혜의 사건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첫 사람 아담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멸망하게 됐다고 하면 반발을 하는데, 한 사람 때문에 살게 됐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발이 좀 적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좋은 소식이고, 기쁨의 소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한 사람 때문에 망하기도 하고, 한 사람 때문에 흥하기도 하는 것이 맞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다 피해를 보는 경우들이죠.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매국노들 때문에 왜정 시대 때 우리 선조들은 엄청난 고난을 당하며 살아야만 했었고,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켰던 독재자 때문에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만 했었던 것이 우리나라의 슬픈 과거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들이 그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오늘날 지금도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죠.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기분 나쁘다고 불을 질러서, 산불이 나게 되고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모든 재산이 다 소실되게 되는, 그런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되기도 하고요. 어떠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탐욕적인 사업가가 공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래서 그것이 무너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재정적인 피해를 보게 되는, 그런 엄청나고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런 피해를 당하며 사는 게,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과연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해 줄 참된 구세주 참된 메시아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정치인에게 소망을 둡니다. 정치인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까? 지금까지의 모든 잘못된 것들을 뒤엎어버리고, 새로운 정치인이 당선된다고 한다면, 새로운 교육감이 당선이 된다고 한다면, 그래서 정권을 바꿔버린다고 한다면, 그래도 좀 나았지 않을까라고 하는 그런 기대감 가운데 있는데요.

그런데 우리는 늘 실패해 버립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집권했던 사람들이 그런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안일함만 추구하다가 그저 그냥 물러나 버리는 그런 정말 안타까운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인이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분명 이 정치계에는 비교적 사악한 정치인도 있고, 비교적 더 의로운 정치인들도 있기 때문에, 선거 때마다 우리가 잘 구분해서 투표해야 하는 것이고, 아무리 실망스럽다고 할지라도 더 나은 자가 누구인가를 살펴보고 투표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한들 정치인이 우리들의 메시아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돈이 우리의 메시아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문제들이 해결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항상 실망해 버리고 맙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자꾸만 도망가버려서 버는 것 같은데, 벌린 게 없는 것이 돈이고, 그리고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다고 한들, 행복이라고 하는 것을 살 수 없는 것이 돈인 것이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돈 없이 그저 돈과는 담장을 쌓고 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옳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가능하면 열심히 수고하고 애써서 정당하게 돈을 벌고, 최선의 노력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아직 힘이 있을 때, 미리미리 대비해 놓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돈이 우리들의 메시아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또한 자녀들에게 소망을 걸기도 합니다. 우리가 좋아 보이는 모든 것들에 우리들의 소망을 겁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배신하는 것이고 우리들의 궁극적인 메시아가 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이 우리의 참된 메시아라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 참된 순종을 하셨습니다. 수많은 유혹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순종하셨고,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두를 위하여 피 흘려주시고 우리가 죽을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려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이 우리의 소망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 때문에 억울하게 우리가 심판을 당하는 것은 아닌데요. 그런데 그 한 사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심판을 받을 그 위치 가운데서 살아나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날마다 믿음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98년에 나왔던 아주 오래된 영화 하나가 있는데요. <아마겟돈>이라고 하는 영화입니다. 브루스 윌리스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배우가 출연을 했던 영화인데 혹시 보신 분 계십니까? 영화는 담쌓고 사시는 것은 아니죠? 어떤 내용이냐면, 이 브루스 윌리스가 맡고 있는 헤리 스탬퍼라고 하는 사람은 바다 한가운데서 시추를 하는 시추공입니다. 그런데 이 시추공이 지구를 살려낸다고 하는 그런 스토리죠.

어느 날 하늘에서부터 갑자기 이상한 물체들이 땅으로 자꾸 떨어지는 겁니다. 우주에서부터 유성우 같은 것들이 자꾸만 내려서 자동차에 떨어지고 건물에 떨어지고, 온 세상이 지금 난리가 나게 된 상황을 가정한 영화입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하고 연구를 했더니, 알고 보니까 지구를 향해서 다가오는 소행성이 하나 있는 것이죠. 텍사스 크기만 한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서 달려오는 가운데, 진입해 오고 있는 가운데, 거기 주변에 있던 유성우들이 지구로 떨어져서 지금 재앙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계산을 해봤더니 그 소행성이 18일 뒤면 지구와 부딪혀서, 지구와 지구에 부딪혀 큰 재앙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러면 그 재앙으로 인해서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될 것인가? 지구에 있는 모든 인류가 다 죽게 된다고 하는 그런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쓰는데요. 그것은 무엇이냐면 우주선을 보내서, 그 소행성에 도착하게 만들어서, 그 소행성의 드릴을 뚫어가지고, 땅 속 깊이 800피트의 긴 동굴을 뚫어서 그 안에 폭탄을 집어넣고 폭파시켜서, 그 행성이 지구로 오는 것이 아니라 반쪽으로 갈라져서 지구를 비껴가도록 만드는 작전을 수행하기로 한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뽑힌 사람이 누구냐면 바다 한가운데서 시추하고 있던 시추공들이 뽑힌 것이죠. 해리 스템퍼와 14명의 시추공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진해서 그 우주선에 두 대로 나눠 타고 소행성을 향해서 날아갑니다. 그리고 그 소행성에서 구멍을 뚫고 폭파시키고, 폭탄 집어넣고 돌아와서 지구 상에서 폭발을 시키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끝나면 얼마나 좋겠어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는 거죠. 소행성으로 가는 동안에 부딪히고, 유성우에 부딪히고 해서 망가지고 불시착하게 되고 해서, 겨우 내려서 땅을 파는데, 땅이 강철과 같은 곳이어서 파는 게 쉽지 않은 겁니다. 그래도 여차저차 해가지고 아주 긴 걸 짧게 얘기하자면 결국 800m를 아니, 800피트를 뚫었죠. 800 피트면 얼마나 됩니까? 아주 더 길죠. 미터보다 더 길 텐데, 그래 가지고 뚫어서 이제 거기다 핵폭탄을 넣고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멀리서 단추만 누르면 되는 겁니다.

근데 원격 장치가 고장 난 거예요. 그래서 14명의 중에서 몇 명 살아남았는데, 그중에서 한 사람만 남아서 그 폭탄을 수동으로 폭파시켜야 되는 임무가 주어진 겁니다. 제비뽑기를 한 거죠. 제비뽑기를 했는데 누가 뽑혔는가? 이 주인공이 주인공의 딸을 사랑하는 어떤 한 남자가 뽑힌 겁니다. 근데 이 주인공이 이 남자를 굉장히 싫어하는데, 그 사람이 뽑혀서 이제 그 사명을 받게 된 겁니다. 해리스 템퍼는 자기 사위가 될 그 사람을 데리고 배웅을 나가고, 내가 배웅해주겠다고 하면서 가다가, 이제 동굴 그 굴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그 순간, 그 AJ이라고 하는 딸의 남자 친구를 밖으로 밀쳐버리고 해리 스템퍼가 자기 자신이 문을 닫고 그 밑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내 딸을 부탁하네.” 결국 그 사람이 희생됨으로 말미암아, 임무는 몇 초를 남겨놓고 성공시키고 소행성은 깨져버리고, 지구가 살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나 보는 이야기죠. 영화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을 수 없는 그런 갈망들을 표현하는 것이 영화입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만날 수 없는 거죠. 어디 우리를 구원해 줄 메시아가 없는가라고 하는 그런 갈망을 영화 속에 투사하고 있는 것인데요.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누굽니까? 우리를 살리겠다고 해놓고, “서울 시민이여, 안심하라.”하고 먼저 내빼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고, 우리를 위해서 정말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이 알고 보면, 자기 것만 다 챙겨버리고 결국은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배신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놀라운 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우리를 구원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저 핵폭탄을 폭파시켰던 그 해리 스탬퍼처럼, 십자가 위에 올라가셔서 최악의 권세를 물리치고, 우리를 구원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한 분 예수님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받게 된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늘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우리에게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사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바라보면서, 기쁨으로 살아나가고 감사로 살아나가고, 또한 넘어질 때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 주변에 사람들에게 우리 이웃들에게 그 사랑을 보여주면서, 나누어 주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 아마겟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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