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주기도문 강좌 1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1. 두 가지 버전(version)의 주기도문

오늘 주기도문 강좌에 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잘 알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에는 주기도문이 한 군데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군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디하고 어디에 기록이 돼 있을까요? 마태복음에 하나 기록되어 있고요. 마태복음 6장에 하나 기록되어 있고요. 또 하나 기록된 곳이 있습니다. 어디에 기록이 되어 있죠?

틀려줘야 앞에서 하는 강사가 신이 나서 열심히 할 수 있으니까, 틀린 대답들을 자신 있게 해 주시면 도움이 됩니다. 아무튼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누가복음 11장에도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의 내용을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서부터 13절까지 기록이 되어 있고, 또 하나는 누가복음 11장 2절에서부터 4절까지 두 군데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 두 군데에 기록되어 있는 주기도문을 비교해 본다고 하면, 마태복음에 기록된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주기도문이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문맥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는데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어떤 문맥에서 주기도문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산상수훈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운데, 주기도문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이죠. 특별히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너희가 기도할 때, 너희가 구제할 때, 너희가 금식할 때, 사람들에게 떠벌리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기도 구제 금식을 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앞에만 온전히 상달되는 그런 기도 구제 금식이 되어야 된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기도가 돼야 되고, 은밀한 중에 하는 구제, 은밀한 중에 하는 금식이 돼야 된다고 말씀하시는, 그 맥락 가운데서, 너희가 기도할 때 은밀한 가운데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 골방에 들어가서,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는 그 문맥 속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 주기도문의 말씀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이죠.

그런데 누가복음 11장 2절에서부터 4절의 말씀은 그 맥락이 다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맥락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치게 되냐면, 제자들이 나와서 예수님에게 요청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 요한도, 세례 요한도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주었는데, 우리들에게도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될지, 기도문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제자들이 요청을 하게 될 때,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하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이죠.

그러니까 첫 번째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그 주기도문이 가르쳐진 그 맥락이 문맥이 다르다고 하는 점을 먼저 우리가 살펴볼 수가 있겠습니다.

두 번째로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이 또 어느 점에서 또 다른가?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내용도 다르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에 있는 주기도문은 어떤 내용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주기도문의 마태복음에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 있는 주기도문이 뭐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 그런 주기도문의 말씀이 마태복음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하지만 누가복음에는 어떻게 돼 있는가? 누가복음에는 좀 간단한 형태의 주기도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주기도문을 한번 비교해 보면,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을 한번 비교해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요. 한번 그 차이를 한번 제가 정리했으니까, 그 차이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번 띄워주시죠. 여기서 새카맣게 표현된 글씨는 마태복음에만 있는 내용입니다. 파란색 글씨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빨간색으로 표시된 것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약간 차이가 있는 것이죠.

마태복음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에는 그냥 “아버지여”라고 간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소서. 당신의 왕국이 오게 하소서.” 이것은 마태 누가가 똑같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청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라고 하는 기도문은 마태복음에만 있고, 누가복음에는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청원이라고 할 수 있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필수적인 양식을 주소서”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은 마태복음에 있는 것인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어떻게 되어 있냐면, 오늘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에게 우리의 필수적인 양식을 계속해서 주소서.”라고 하는 그런 기도의 제목이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그다음으로 넘어가 보면, 다섯 번째 청원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마태복음은 어떻게 되어 있냐면, “우리의 채무들을 사면해 주소서.”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의 죄들을 사면해 주소서.”라고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채무로 되어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은 죄라고 되어 있는 것이죠. 그리고 여섯 번째, 여섯 번째죠? 여섯 번째 청원에서도. 우리 자신. 아니다. 이게 다섯 번째 청원의 연장이죠. “우리 자신도 또한 우리의 채무자들을 사면한 것 같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그게 “우리 또한 우리의 채무자들을 사면한 것 같이”는 마태복음 형태고, “우리 자신도 우리의 채무자들을, 우리의 채무를 진 모든 자들을 사면하는 것 같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누가복음의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죠.

그리고 같이 나온 기도의 제목 여섯 번째 기도 제목이, “그리고 우리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는 것이 공통적으로 나오는 반면에, “대신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하소서.”는 누가복음에는 없고,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송영이 있는데요. “당신의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기에, 아멘”이라고 하는 표현도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것인데, 마태복음에서도 모든 사본에 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부 후기 사본에는 등장하지만, 전기 사본에는 없는 그런 표현이 “당신의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기에”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 전기 사본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을 비교해 보면, 문맥도 다르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도 조금씩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 말입니다. 조금조금의 차이를 보셨습니까? 제가 설명해 드렸으니까, 알 수가 있는 것이죠.

2. 예수님에게서 우리에게까지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질문이 떠오르는 겁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을까?”라고 하는 질문이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주기도문이 있을 텐데,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을 받아 적는 우리들에게 전달해 준 마테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누가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이 똑같이 예수님의 기도문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약간 다른 형태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면,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이 둘 가운데 어느 기도문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줬을까?”라고 하는 질문이 생길까요? 생기겠죠. 생깁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생각을 해보는 겁니다. 주기도문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전달이 됐을까? 아마도 예수님께서 맨 처음에 말씀하셨을 텐데, 그 말씀하신 예수님의 주기도문을 전달하는 과정 가운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들에게까지 전달이 됐을까?”라고 하는 추측을 해보는 거죠. 그래서 이 첫 번째 도표를 한번 보면 좋겠는데요. 예수님께서 똑같은 주기도문의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것을 전달하는 마태와 그것을 전달하는 누가가, 각각 약간 차이가 있게 우리들에게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죠? 있습니다.

그런데 요 모델로만 우리들이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다른 모델도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다른 모델도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겁니다. 두 번째 모델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예수님께서 전달하신 주기도문의 가르침을 마태복음의 저자가 기록했는데, 마태복음의 저자가 기록한 그것을 옮겨 쓰는 과정에서 누가복음이 몇 개는 빼고, 몇 개는 단어를 바꾸고 해서 우리들에게 전달했을 가능성도 있는 겁니다. 이럴 가능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어요.

이런 가능성만 있는가? 또 다른 가능성을 또 생각해 볼 수가 있겠는데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누가가 전달해 줬는데, 누가가 전달해준 것을 마태가 베꼈으면서, 좀 더 확장해서 우리들에게 전달해 줄 가능성도 있죠. 그러니까 아까는 마태복음이 이렇게 크게 전달을 했는데, 그것을 누가가 전달하면서 약간 빼먹고 우리들에게 전달했을 가능성. 정반대로 누가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우리들에게 줬는데, 그것을 마태가 또 전달하면서 좀 더 확대해서 우리들에게 주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어느 게 맞을까요? 모르는 거죠.

그런데 이런 가능성만 있는 게 아닙니다. 또 다른 가능성을 더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예수님께서 말씀했더니, 가르쳐주셨더니, 그것을 전달한 사람이 또 이렇게 전달하고 저렇게 전달하고, 마태가 전달하고, 누가가 전달하고, 이렇게 전달하고 이렇게 다양하게 전달이 되는 과정 가운데서 마태는 이렇게 전달하기도 하고, 누가는 이렇게 전달하기도 했다고 하는 그런 걸 생각해 볼 수도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어요.

그러면 실제로 어떤 일이 그 당시에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알 수가 없어요. 그것은 충분히 우리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예수님께서 기도문을 어떻게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어떻게 해서 마태복음은 이걸 우리들에게 전달을 했고, 누가는 어떻게 전달했을까라고 하는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펼 수가 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뿐이지, 이럴 수도 있겠다. 저럴 수도 있겠다고 하는 것이지, 우리가 확실하게 이것이 맞다고 말할 수 있는 이론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그거 가지고 아주 심각하게 연구를 했습니다. 무엇이 진짜일까? 어떻게 어떻게 전달이 돼가지고,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이 됐을까를 연구하고 또 연구해가지고, 그렇게 해가지고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오늘날의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이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은 도표입니다. 한번 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씀 모음집이라고 하는 어떠한 사람이 그것을 묶어놓았는데, 예수님의 말씀 모음집을 묶어놨는데, 그 말씀 모음집을 마태가 참조하고, 누가가 참조해서 각각 그 두 가지 버전으로 우리들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에 관해서는 마가복음의 것을,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관해서는 말씀 모음집이라고 하는 가상의 문서에서 가지고 와서,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것이 이런 절차를 거쳐서 아마도 마태와 누가에게 이렇게 전달이 돼서, 우리들에게 전달했을 거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확실한 건가요? 그냥 하나의 theory, 가설일 뿐인가요? 가설일 뿐입니다. 이게 확실한 게 아닙니다. 확실한 게 아니고, 그냥 학자들이 그냥, 되게, 보면 학자들이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을 해서, 그런 이론들을 만들어 낸 것이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지금 이런 전달 이론들을 설명하는 학자들의 생각은 어떤 생각이냐면, 거기에 달려 있는 하나의 학자들이 생각하지 않았던 맹점이 있어요. 맹점.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한 가지 형태로만 말씀하셨을 거라고 하는 그런 전제를 깔고서 학자들이 연구를 한 거죠.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것을 딱 하나의 고정된 형태로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전달되는 과정 가운데서, 마테는 이렇게 변형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누가는 이렇게 변형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졌다고 하는 그런, 그 이론의 전제가 뭐냐면,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딱 한 가지 형태로만 말씀했을 거라고 하는 전제를 가지고서 이런 연구를 한 것이죠.

근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제 생각은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실 때, 딱 한 가지 형태로만 기도를 가르쳐 주셨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그때그때 그때마다,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려고 할 때마다, 그때그때 다른 형태로 기도를 가르쳐 주셨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예수님, 제자들, 우리들에게 기도를 알려주세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래 너희들은 기도할 때,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고” 하면서 이렇게 얘기했다가, 또 다른 과정에서는 또 이렇게 또 표현하시기도 했다가, 그때그때마다 상황에 따라서 약간 약간 다르게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제 생각이 더 낫지 않습니까?

제가 설교할 때도 그렇잖아요? 제가 설교를 준비해 가지고, 1부 설교하고 2부 설교하는데, 1부하고 2부를 설교를 그냥 완벽하게 똑같이 설교합니까? 좀 약간 다르게 합니까? 똑같이 못해요. 그때 흐름과 분위기에 따라서 어떤 때는 이 부분을 더 강조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예화를 하나 더 섞기도 하고, 말 한마디를 더 섞기도 하고 해 가지고, 제가 똑같은 원고를 가지고 서도 똑같은 원고를 가지고, 여러 곳에서 해도, 제가 똑같이 강의하고, 똑같이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상황에 따라 어떤 때는 이 말을 덧붙이기도 하고 저 말을 덧붙이기도 하면서, 그때그때마다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도, 딱 한 가지 고정된 형태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 것이라기보다는, 그때마다 어떤 때는 이런 형태로 가르쳐 주시고, 어떤 때는 저런 형태로 가르쳐 주시고 이런 형태로 다양한 형태로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을 거라고 보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학계에서 아직 인정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제가 논문으로 써내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래요. 제 생각에 그래요. 그런데 이것은 그냥 웃으면서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좋은 지점을 우리들에게 주는데요.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주기도문을 어떻게 생각하냐면 하나의 주문처럼 생각합니다. 근데 주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주문이 되죠? 정확하게 표현하나, 악센트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그 주문대로 해야, 그 주문의 효과가 발휘되는 것이 주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해리 포터의 영화를 보게 되게 되면, 그 해리 포터 영화에서 마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주문을 외워서 여러 가지 변화를 주고 마술을 부리잖아요? 근데 “내가 저걸 새로 만들겠다.” 하면서 주문을 아다브라카브라 어쩌고 하면, 쫙 하는데, 이 마법의 책에서는 이렇게 이 주문을 외우면 새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문을 딱 했는데, 새가 안 나오고 뭐가 나와요? 뱀이 나온단 말이에요. 왜 뱀이 나왔어요? 주문을 외는 가운데, 약간 다르게 엑센트를 했다거나, 약간 다른 표현을 하게 되면 주문이 망가져버리는 거죠. 그래서 내가 의도했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나는 새를 만들고 싶어서 그 주문을 했는데, 내가 발음을 잘못해서 또는 내가 흔드는 것을 잘 못 흔들어가지고, 다른 방법으로 해서, 새가 아닌 쥐가 나타나기도 하고, 뱀이 나타나기도 하는 그런 엉뚱한 결과로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 우리들이 단 한 글자, 단 한 단어, 그리고 단 하나의 숨결 호흡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외워야만, 그래야 그 기도의 제목이 응답이 되는 하나의 주문처럼 우리들에게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이대로 주기도문을 그대로 외어야, 그래야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거라고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무엇으로 알려주셨어요? 우리가 어떠한 정신으로, 어떠한 그 마음으로, 어떠한 신학적인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나가야 되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가야 되는가에 대한 그 신앙의 태도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주기도문을 알려주신 것이지, 마치 주문을 알려주듯이 그래서 그 주문을 정확하게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해야만, 그래야 이루어지는 그런 주문을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주기도문을 알려주신 것은 그런 주문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로 어떤 생각으로 기도해야 되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주기도문 하다가 틀려도 돼요? 안 돼요? 틀려도 괜찮아요.

주기도문을 그대로 똑같이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의 정신에 따라서 우리가 우리에게 맞는 우리의 상황과 처지에 맞는 그런 기도를 해 나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한국교회가 주기도문을 마치 주문처럼 외우려고 하는 경향들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주문 주기도문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외워야만 되는 것이냐? 그래야 뭐가 맞는 것이냐?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아니라 문구 하나 바꾸면 안 되는 그런 주문이 아니라, 정말 우리들의 삶 가운데 우리의 기도 생활 가운데 기도에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그 정신에 따라 기도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3. 주기도문의 새 번역

질문 있으면, 언제든지 손 들고 질문하시면 됩니다. 질문이 없나요? 예, 네 장로님. 안 들린대요. 이 앞에 나와서 질문 한번 하십시오. 우리 장로님. “제가, 제 이제 외할머니, 한 5년 전에 돌아가셔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드리기 전에 위로 예배도 드리고 여러 가지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근데 주기도문을 같이 하자고 했는데, 내용이 저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딱 달라요. 그래서 좀 당황을 했었었는데, 그게 차이가 금방 마태복음 하고 누가복음에 차 있는 것처럼 그렇게 차이가 있는 건지,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건지, 그게 좀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질문을 기다렸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하죠. 기도문이, 하는 게 약간씩 다른 것은 최근에, 사실 최근은 아니죠. 벌써 십몇 년 됐을 겁니다. 주기도문을 새로 번역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을 새로 번역했는데, 어디서 번역했냐면,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서 번역을 했습니다. 우리들에게 익숙한 것은 누가복음의 기도 주기도문이 아니라,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이 익숙한 거죠. 그래서 전통적으로 누가복음은 좀 간단한 형태잖아요. 그래서 누가복음의 주기도문보다는 전통적으로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이 많이 애용되어 왔고,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이 계속해서 마치 정통 주기도문인 것처럼 그렇게 많이 사용이 된 겁니다.

그런데 그 주기도문이 어디에 나오냐면, 성경에 나오기 때문에 그 성경의 번역을 그대로 우리가 사용해서 주기도문을 했는데, 근데 주기도문의 번역이 매끄럽냐면, 매끄럽지 않아요. 왜 매끄럽지 않을까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번역된 것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100여 년 전에는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였지만, 지금은 안 쓰는 용어가 주기도문에 포함돼 있어요. 예를 들자면,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할 때에 “대개”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그냥 “일반, 대충” 뭐 그런 뜻인가요? 대개라고 하는 말이 지금으로부터 백몇 년 전에는 “왜냐하면”이라고 하는 의미로 사용이 됐었다고 그래요. 그런 한국말 들어봤어요? 우리는 모르죠. 하지만 100여 년 전에는 대개라고 하는 말이 “왜냐하면”이라고 하는 말로 사용됐대요. 그래서 오래전에 번역된 주기도문이기 때문에, 그것을 좀 더 우리들이 이해하기 쉬운 한국말로 바꾸자라고 해서, 새롭게 번역한 주기도문이 성경책에 기록돼 있는 겁니다.

제 성경책에는 있어요. 주기도문만 그렇게 새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사도신경도 새로 번역해서 밑에다가 적어놨어요. 그래서 좀 진보적인 교단들에서는 새로 번역한 이런 주기도문, 새로 번역한 사도 신경을 사용을 합니다. 그렇지만 좀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어떻게 하나요? 우리는 안 바꾼다. 보수적인 교단들에서는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 우리는 무조건 옛날 게 좋다.” 그런 게 보수적인 교단이죠. 그래서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안 받고, 그냥 사용하는 건데, 그래서 주기도문을 할 때, 사도신경을 할 때, 좀 진보적인 교단과 보수적인 교단 사이에 사용하는 방법이 좀 달라요. 그래서 차이가 있는 것이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을 사용하는 게 아니고, 무조건 다 마태복음 걸 씁니다. 우리가 대부분은. 그런데 아무튼 그 차이는 그런 데서 온다 하는 것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해가 됐죠?

4. 기도의 대상은 아버지이신 하나님

그러면 주기도문 서론을 했는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살펴볼 것이 무엇이냐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는 호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셨냐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이죠.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어떻게 되어 있나요? 그냥 “아버지여”라고 하는 말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의 표현과 누가복음의 표현이 다른 것이죠. 하지만 그 내용은 같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누구냐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어떤 하나님이에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되는데요. 마태복음 7장 9절에서부터 1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누구라고요? 아버지다. 아버지에게 요청하듯이, 기도할 때도 아버지께 기도하라라고 하신 겁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이죠. 마태복음 6장 6절에서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너는 기도할 때 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누구에게?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되어 있고요.

마태복음 6장 8절에서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아버지는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달라고 떼써야, 그때서야 겨우 주시는 마지못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어떻게? 구하기도 전에, 구하기도 전에 막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다. 이 말이에요.

마태복음 6장 31절 32절 말씀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시고, 공급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인데, 그 아버지께 구하라는 것이죠.

마가복음 11장 25절 말씀. “서서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누구라고요? 아버지니까, 아버지께 기도하듯이 아버지 부르면서 기도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하는 얘기는 하나님이 누가 아니라는 얘기죠? 재판장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가 나오는데, 그 재판관은 과부의 간청을 외면합니다. 아는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귀찮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겨우 들어주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나를 괴롭게 하니까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억지로 들어주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시냐? 그런 재판장과 같지 않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런 재판장과 같지 않으시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이고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누가 아닙니까? 우리 이웃집 사람과 같지 않다는 거예요.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누가복음 11장 5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어떤 사람이 밤중에 손님이 찾아오게 됐을 때, 이웃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는 겁니다. 손님이 왔으니까, 손님을 대접할 떡이 부족하니까, 떡 세 덩이만 빌려달라고 할 때, 이웃집 사람이 싫다고 거부할 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금 밤중에 왜 나를 깨우고, 이렇게 귀찮게 하냐고, “떡 못 줘.” 이럴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집에 문을 두드리고, 좀 빌리러 왔다고 하면 싫어할 분이 계셔요? 안 계셔요? 안 계셔요. 기쁘게 환영해 주고, 더 줄려고 할 거예요. 게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에요.

하지만 그런데 그중에 어떤 사람은 너무나도 피곤해서, 잠이 곯아떨어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이제 막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괴롭게 하면 그 마음에 짜증이 날 리가, 날 수 있겠죠? 그래서 아이고 힘들어 죽겠는데, 왜 문을 두드리는 거야? 하면서도 일어나 줍니까? 안 줍니까? 일어나 줘요. 왜 일어나 줍니까? 안 줬다가는, 동네 사람들한테 아주 참 못돼 먹은 놈이라고 하는 그런 비난을 받을까 봐라도, 일어나서 주는 거죠.

근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그냥 주고 싶지 않아도 자기 체면 때문에 주는 그런 이웃집과 아저씨와 같지 않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는 겁니까? 우리들의 부모님과 같다는 거예요. 부모님과. 부모님은 어때요? “엄마, 아빠” 그러면 줘요? 안 줘요? 줘요. 바빠 죽겠는데, “엄마, 아빠” 그러면, “바빠. 오지 마.” 그래요? 어떻게 해요? 모든 일을 중단하고, 그 아이를 향해서 달려가는 게, 부모의 마음 아닙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멋진 것을 해 주시기 원하시는, 그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이죠.

마태복음 7장 11절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로마서 8장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가장 줄 수 없는 거라고 한다면, 무엇을 줄 수 없어요? 자기의 아들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 가장 줄 수 없는 일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목숨을 우리 위에서까지 기꺼이 주신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 게 뭐가 있겠는가? 그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라고 하는 학자는 말하기를,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가르친 이 가르침이야말로, 이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획기적인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획기적으로 가르쳐주셨다고 하는 건데요.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은 이 세상의 미신, 이 세상의 타 종교의 신과는 다른 신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 세상의 신은 어떤 신이죠?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에요. 이 세상의 신은 능력은 있지만, 애정이 없는 신이 이 세상의 신인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가짜 종교의 미신의 신은 언제 응답이 가능하는가? 내가 얼마나 정성을 보였느냐에 응답, 응답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달려 있어요.

우리가 정성을 많이 쏟으면 이 미신의 신은 응답을 합니다. 처녀를 바쳐야 되는데, 못생긴 처녀 바치면 응답이 되나요? 안 돼요. 근데 이쁜 처녀를 바치면 응답이 돼요. 공양미 1석을 바치면 응답이 되나요? 안 돼요. 하지만 공양미 3천 석을 바치면 응답이 돼요. 왜? 정성을 보이니까. 우리가 천일 동안 기도를 하면 응답이 되지만, 한 열흘 하면 응답이 되나요? 안 돼요. 왜? 이 세상의 신은 아버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냥 무지막지한 힘은 있지만, 우리들에게 애정이 없는 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은 어디에 달려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정성을 철저하게 보여주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기도의 응답이 달려 있는 것이죠.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이 세상 종교의 가르침이 정말 나쁘고 그리고 참 사악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 종교가 참으로 나쁜 이유가 뭐겠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 종교는 신이 아버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정성을 얼마나 쏟느냐에 따라 응답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신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래서 우리의 뭘 뺏어가요? 우리로부터 재물들을 뺏어가기 위한 수단인 것이죠. 미신과 이 세상의 모든 거짓 신은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된다.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된다. 치성을 보여야 그래야 신이 응답한다고 그렇게 거짓말 함으로써, 결국 그 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그 사람들로부터 누가 가져가요? 무당이 가져가는 거예요. 굿을 하는 사람들이 챙겨가는 거죠. 신을 이용해서 그 가짜 종교인들이 자신의 배를 배 불리기 위해서 우리들로부터 착취해가기 위한 그 잘못된 신학이 신을 만족시켜야 된다고 하는 그런 신앙인 것이죠. 하지만 성경은 어떤 가르침인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그런 매정한 차가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들의 아버지라고 하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하는 점을 우리가 생각해 보게 될 때,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점에서 우리들의 아버지와 닮았고, 우리들의 아버지와는 어떤 점이 다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추상적인 존재이고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가 잘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면, 그 하나님을 이 세상의 것과 비교해서 비유해서 하나님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데요. 하나님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아버지에 비유하는 것이죠.

하지만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버지와 닮은 점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닮지 않은 점도 있다고 하는 점을 바라봐야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항상 비유를 볼 때 조심해야 될 건데요. 한번 도표를 보면, 이런 도표가 우리가 보면 좋겠습니다. 유사점 때문에 비유가 성립을 하지만, 그러나 닮지 않은 측면도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돼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대상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버지라고 하는 비유를 사용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아버지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죠. 어떤 점에서 하나님과 아버지는 유사점이 있습니까? 아버지가 자녀를 무한대로 사랑하듯, 하나님도 우리들을 무한대로 사랑하신다고 하는 그런 점에 있어서 하나님과 아버지는 유사점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과 아버지가 닮지 않은 점도 있는 겁니다. 어떤 점에서는 닮지 않았어요? 여러 가지를 닮지 않았죠. 우리 아버지는 어때요? 우리들에게 해주고 싶지만 능력이 없는 아버지예요. 그렇죠. 능력이 없어서 못해줍니다. 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수명이 끊어지면 더 이상 우리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능력 있고 수명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이 변해서 우리들을 도와줄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능력도 있고 수명도 아직 다하지 않았고 마음이 변하지도 않았지만, 그러나 판단을 엉터리로 해서 우리에게 좋은 줄 알고 줬는데 사실은 우리를 해롭게 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게 이 세상의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그런 인간 아버지와는 다른 종류의 아버지이신 것이죠. 그래서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신실하게 믿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5. 하늘에 계시다는 뜻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냐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표현합니다. 누가복음에서 뭐라고 표현해요? 그냥 “아버지”라고 표현합니다. 마태복음의 표현을 우리가 먼저 보겠는데,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표현했을 때, 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계신 것이 아니라, 저 천상이라고 하는 그 장소에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렇게 오해하기 쉬워요. 근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헬라어를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헬라에 이렇게 표현돼 있습니다. “파테르 헤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라고 하는 말입니다. “파테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라고 하는 말이고, “헤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호”는 관계 대명사처럼 사용되는 정관사입니다. “엔”은 “안에,” “토이스”는 정관사. “우라노이스”는 하늘이라고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늘의 우리 아버지”예요.

“있는(계신)”이라고 하는 표현은 우리가 이해하기 좋으리라고 그렇게 추가해서 첨가해서 번역한 번역이지, “있다”(계시다)고 하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의(에) 우리 아버지”죠. 그 “하늘의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얘기는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장소가 하늘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늘의 차원으로 존재하는 아버지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적인 차원의 우리들의 아버지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하늘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요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저 높은 하늘에, 나와는 떨어져 있는 저 먼 곳에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고, 어떻게 기도해야 돼요? 하나님은 어디 계셔요? 우리 앞에,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우리 옆에,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먼저 잘 알아야 되는 것이죠. 근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했을 때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아버지와는 달리 영적인 차원에서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늘의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점을 기억했으면 좋겠고요 누가복음에서는 “하늘에 계시다. 하늘에”라고 하는 말이 빠진 채로 그냥 “아버지여” 그랬습니다. 그러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여”는 하늘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겁니까? 우리 진짜 아버지를 가리키는 겁니까? 예? 좀 대답 좀 하시면서. “하늘의 아버지”를 가르치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하늘에”라고 하는 말이 누가복음에 빠져 있어도, 이 세상의 아버지를 뜻하는 게 아니고, 하늘의 아버지를 뜻하는 것이죠.

우리가 종종 성경을 해석하면서 성경을 잘못 해석할 때가 많이 있는데요. 꼭 “영적인”이라고 하는 수식어, “하늘에”라고 하는 수식어가 있어야만, 그래야 영적인 혹은 하늘의 아버지가 되는 게 아니고, 그 앞에 수식어가 없어도, 영적인 아버지 하늘의 아버지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하는 시편 23편의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말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하는 얘기는 진짜 이런 양들을 다스리는 그런 목자를 의미하는 겁니까? 영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목자처럼 돌보시는 그런 분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잖아요.

그니까 “하늘에”라고 하는 표현이 있든 없든, 무슨 의미예요? “하늘에”라고 하는 의미가 들어가 있는 표현이란 말이에요. 이해가 되세요? 종종 산상수훈을 해석하면서 산상수훈에 보면 팔복이라고 하는 그런 게 있는데, 이 팔복이 마태복음에도 있고, 또 어디에도 있습니까? 누가복음에도 나와요. 그러니까 마태복음에 나오고,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냐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오.”라고 하는 표현이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근데 누가복음에는 어떻게 표현이 되나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표현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나오는데, 누가복음에는 “마음”이라고 하는 말이, “심령”이라고 하는 말이 빠져 있어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랬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마태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누가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게 아니고, 진짜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가요? 예? 아니죠. 대단합니다. 하나를 가르쳐줘도, 열을 알아요. 아니에요. 종종 성경해석을 엉터리로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마태복음은 심령이 가난하다고 그랬으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한 이야기지만, 누가복음에는 심령이라고 하는 말이 빠져 있으므로 진짜 돈이 없는 진짜 가난한 사람, 거지 같은 사람, 진짜 돈이 없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그렇게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이제 이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는 말을 통해서, 다 같이 연결해서 말씀드리고 있는데요. 아무튼 누가복음에서는 “아버지여”라고만 표현하고 있지만, 그 말은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는 표현이 없다고 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닌 이 땅의 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아시겠고,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을 꼭 붙여야만 됩니까? 안 붙여도 됩니까? 안 붙여도 돼요. 붙여도 되고, 안 붙여도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나의 영적인 아버지, 우리들의 정말 하늘의 아버지라고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면 되는 것이지, 표현을 꼭 그렇게 붙여야 되느냐? 붙이지 않느냐?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기도하는 것인데요. 그렇다고 한다면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인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우리의 시민권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고 기도하는 그런 기도의 훈련들을 계속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시간이 많이 됐으므로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에는 이제 첫 번째 기도의 청원을 함께 살펴보려고 하는데, 혹시 강의를 듣는 중에 질문이 떠올랐던 것, 질문하고 싶은 것, 또 다른 질문이 있든지 하시면 질문해 주시면, 대답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40,157 total views,  3 views today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