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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의 법정(눅 23:1-7)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는 그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의 재판정 가운데 고발한 사람이 있는데요. 예수님을 고발한 사람이 누구로 기록되어 있습니까? 23장 1절 2절을 보니까,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였다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리가 일어나서 예수님을 빌라도의 재판정 가운데 고발했다고 하는 것인데요.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 무리, 군중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겠습니까? 불과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환호하며 찬양했던, 바로 그 무리들이 오늘 예수님을 빌라도의 재판정에 고발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런 사람들과는 다른 어떤 무리로 보는 것이 좋을까요?

제 생각에는 후자라고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을 환영하고 환호했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영접했던 그런 무리가 아니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무리는 다른 무리들일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물론 같은 무리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순식간에 돌변해 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환호했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순간에 돌변해 버리고, 예수님을 고발하는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그 무리가 지금 고발하고 있는 무리일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해서 설교하시는 분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여기서 등장하는 무리들은 그때 그 환호했던 무리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민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서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들 예루살렘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추종하고 따르고 있는 그 상태였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예수님을 처단하게 되면 그런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민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서, 그래서 조용히 은밀하게 처치해 버리고 싶었던 것이 그게 대제사장들 제사장들의 속셈이었으니까, 아마도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을 추종하는 그런 세력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 예수님을 환호하던 무리가 아니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동원된 관제 데모 무리들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해석일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마태복음 27장 20절에 보면, 이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사주를 받아서, 풀어주려고 한다면, 명절 때마다 죄수 하나를 풀어주려고 한다면,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사주를 받아서 외친 것으로 보아서, 이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사주를 받은 그런 무리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무리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아침 일찍부터 끌고 갔습니다. 언제 끌고 갔는가? 오늘날의 시간으로 하면 새벽 6시 정도 되는 이 시간에,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 가운데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무리라고 하는 표현 가운데 숨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한 사람들이 누구냐라고 하면 개인이 특정되지 않고 무리가 고발하였다고 표현이 되어 있는데요. 이 무리라고 하는 말속에 누가 들어가 있냐면, 바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숨어 있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사주하면서, 사람들을 움직이고 그들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지시하고 모든 작전을 세워나가고 있지만, 이들은 전혀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겁니다. 그들이 죽이고 싶어 했고,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고 싶어 했지만, 전혀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 그 무리 뒤에 숨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무리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여기에는 개인들의 이름이 하나도 등장되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 개인이 그 무리 가운데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무리라고 하는 것은 그냥 무리가 아니고 개인들의 집합이 무리일 텐데, 그 무리라고 하는 집합 명사 속에 개인이 사라져 버리고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리가 주는 안정감이라고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내가 개인이 드러나게 되면, 악한 일을 함부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나쁜 짓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무리 가운데 숨어 들어가면, 그 어떤 악한 일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양심의 가책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마음속에 심어주신 그 양심에 해주시는 음성이 들려 있기 때문에, 자신이 드러나게 되면 어둠은 빛 가운데로 나올 수가 없고, 그래서 악을 행할 수가 없는 것인데, 그런데 무리라고 하는 집단 속에 들어가게 되면, 정말 포악한 짓들도 해버리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서는 존경받는 선생님 의사 변호사라고 하는 분들이 예비군 군복만 입혀놓으면 어떤 일을 합니까? 다 같이 예비군 훈련장에서 예비군 훈련을 하면서, 아무 데서나 오줌을 싸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예비군복이라고 하는 그 무리 속에서 내가 숨겨지고, 숨겨지는 가운데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저 미얀마라고 하는 곳에서는 자신들의 국민을 향해서 총격을 가하는 군인들이 심지어 나이 어린 아무것도 모르는 한 살배기 어린아이를 향해서도 충격을 가하고 있는데, 그런데 개인이면 그렇게 못하는 거죠. 내 이름이 드러나면 못하게 되는 것이고, 내가 누구라고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되면 못하는 것인데, 군대라고 하는 그 집합의 명사 가운데 무리 가운데 들어가게 될 때,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라고 하는 숫자 속에 숨어 들어가서 고발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선 사람들의 그 모든 사람들의 이름들은 드러나지 않고 오직 드러난 것은 빌라도의 이름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무리 속에 숨어 들어간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히 숨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숨어서 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것 하나하나가 내가 무리 가운데 안전하다고 생각하면서 저지르고 있는 그 모든 악행들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불꽃같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나타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우리들의 죄가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당장 심판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리고 이 세상이 전혀 내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은밀한 가운데 숨어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가운데 죄악을 저지른다고 해도 그래도 안심할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의 때가 된다고 한다면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이 고난 주간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악을 고백하며 회개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무리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면서 거짓말로 예수님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해 주셨던 아주 유명한 말씀이 있는데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는 그 말씀은 예수님의 어록 가운데 아주 유명한 말씀으로, 불신자들도 알 수 있는 그런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가이사에게 항거하며 저항하며,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을 꿈꾸며 저항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가이사에게는 가이사에게 바칠 세금을 바쳐라. 군인들이 너희로 하여금 오리를 가게 하며 심리를 가게 하라고 말씀해 주셨고 원수가 너희들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까지 돌려대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지만, 예수님께서 전혀 하지도 않은 그 말을 가지고 이 예수님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군가? 반역 죄인으로서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거부했고, 선동해서 결국 반역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는 그런 죄목을 가지고 예수님을 고발하고 있는 것인데요. 거짓을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측은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현상은 2천 년 전에만 있었던 현상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우리가 늘 접하는 현상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진짜 뉴스보다는 가짜 뉴스들이 퍼지고 퍼지면서, 상대방을 헐뜯고, 그리고 그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우리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 어떤 거짓말을 만들어서라도 서로를 비난하는 그런 가짜 뉴스가 우리 가운데 너무나도 많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가짜 뉴스에 휘둘려서도 안 될 것이고 이런 가짜 뉴스를 전달하는 그런 전달자가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하냐면, 목적이 세워지게 되면 수단은 무슨 수단을 써도 괜찮은 것이 사람의 모습입니다.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공격하고 무너뜨리고 죽이겠다고 하는 그런 계획이 세워지면, 그 어떤 것이라도 다 동원해서 가짜 뉴스라도 동원해서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 그게 인간의 악한 본성의 모습인데요. 진영이 나뉘어 싸우게 된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목적이 강하게 된다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고 악한 잘못을 통해서도 거짓을 통해서라도 무너뜨리려고 하는 그런 나쁜 습성이 우리들에게 내재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스스로를 조심해야 되는데요. 왜냐하면 우리들에게도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적이 아주 강한 목적이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가지고 있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고, 기독교를 더 부흥시켜야 되겠다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고, 영적인 세계와 더불어 싸어서 이겨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영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목적이 너무나도 과도하게 강하게 된다고 한다면, 심지어 거짓말을 동원해서라도 그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그런 결과가 나타나게 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영적인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 영적으로 무너지게 되어 있는가? 우리의 영적인 싸움의 대상은 누구냐면,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래서 나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고, 나로 하여금 거짓말하게 만들고, 나로 하여금 악하게 행동하게 만드는 그런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그 사탄의 유혹과 싸워서 이겨야 되는 것이 영적인 전쟁인데,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어떻게 생각하냐면, 내 내부에서의 싸움이 아니라,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외부의 적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야말로 영적인 전쟁이라고 그렇게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외부의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칼을 빼들기도 하고, 우리가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이겨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될 텐데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외부의 적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화를 내거나 우리가 폭력을 사용한다고 한다면, 이미 사탄의 그 시험에 넘어가게 된 것이고 지게 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라고 했던 그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영적인 전쟁 가운데서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외부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사용하는 것도 이것도 우리가 영적으로 지는 행위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가짜 뉴스를 동원해서라도 우리 편이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그 생각은 건전한 생각이 아니라, 신앙적인 생각이 아니라 잘못된 생각이고, 거짓으로 진실을 수호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거짓으로 진실을 수호하려고 하는 그 생각은 사실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는 거짓의 아비라고 할 수 있는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는 그런 잘못된 행위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거짓에 휘둘려서도 안 되고 거짓으로 진리를 수호하려고 하는 잘못된 욕망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도 다 밀어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는 사람들은 가짜 뉴스로 예수님을 고발했는데요. 놀랍게도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빌라도는 그 가짜 뉴스 가짜 증거를 들이댈 때 그러한 증거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무조건 예수님을 심판하고 재판한 것으로만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빌라도는 분명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4절 말씀에 보면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라고 빌라도가 선언을 합니다.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빌라도가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했을 때,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냥 담대하게 대답하십니다. “I am.” 내가 그렇다. 내가 바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런 대답이 얼마나 무서운 대답입니까? 이것은 로마 황제를 반역하는 그런 반역죄로 잡아놓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지금 그 재판장 앞에서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백하게 되면, 반란죄로 잡아넣을 수 있는 그런 혐의가 충분한 것처럼 보이는 그 말을 예수님께서 하셨는데도 놀랍게도 빌라도는 “예수님은 죄가 없다. 반란죄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그런 놀라운 판결을, 놀라운 그 생각을 고발자들을 향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사실 로마라고 하는 그 나라는 무엇이 유명하냐면, 로마는 여러 가지로 유명했는데요. 첫 번째는 길을 아주 잘 닦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세계를 정복하면서 가는 곳곳마다 도로를 너무나도 잘 닦아놓았기 때문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을 정도로 로마에게 유명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길을 잘 닦은 것이 로마의 유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게 또 하나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뛰어난 법률 체계가 뛰어난 체계였습니다. 오늘날 지금 21세기에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이 채용하고 있는 법률 제도 가운데서도 그 법률 제도가 생긴 것의 기원을 추적하고 추적해 나가다 보면, 그 옛날 예수님 당시에 로마 시대 때 만들어졌던 그 원칙들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로마는 아주 법률이 뛰어나게 아주 발달된 그런 나라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증거가 있어야만 그 증거에 근거해서 판단을 해야 된다고 하는 것, 그리고 내가 고소를 변호하기 위해서 1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소하고 또 항소해서 3심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죄형 법정주의라든가, 소급입법 금지라든가, 이런 모든 법률 체계들이 사실은 로마라고 하는 그런 아주 법률이 발달된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고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고발하고 있을 때, 그들의 고발만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밀어붙일 때, 그것에 의해서 판단한 것이 아니라,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이었고 로마의 재판관으로서 자신이 볼 때는 아무런 근거가 없고, 증거 불충분으로 증언만 가지고는 죄를 줄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고 하는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무리가 계속해서 반발하는 겁니다. 고발하는 자들이 소리를 외치면서, 이 빌라도를 압박해 가고 있는데, 그렇게 판단한다면 당신은 가이사의 부하가 아니다 하고, 반란죄를 저지른 사람을 그냥 남겨둔다고 한다면, 죄를 정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가 로마 황제에게 고발해서 당신을 무너뜨리겠다고 하는 그런 협박 그런 여러 가지 협박에 의해서 하는 수 없이 빌라도는 자신의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헤롯 왕에게로 넘겨버립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는 빌라도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고, 갈릴리 지방은 헤롯 대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고 하는 것을 안 빌라도가 마침 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헤롯 왕에게 예수님을 넘기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로마법의 판단을 받는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무죄 방면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 뛰어난 로마의 법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법률에 의해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고 하는 심증을 굳혔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반발하는 그 무리들 앞에서 빌라도는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근거가 없는 고발 죄가 입증되지 아니하면,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엉터리 재판을 하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가 사법체계를 통해서 엉터리 재판이 난무하는 것을 보는 것 이상으로 그 당시에 엉터리 재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 아이러니인데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심판의 주이신데, 그 심판의 주님께서 오히려 재판을 당하시면서, 말도 안 되는 재판을 통해서 그냥 풀어주면 되는 것이고 무죄라고 선언하면 되는 것을 결국 빌라도는 끌고 질질 끌고 가다가 엉터리 재판을 해서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런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게 된 것이죠. 엉터리 재판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도 또 다른 심판이 있을 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주님께서 만왕의 왕으로서 또 만유의 심판주로서 심판하시게 될 것이고, 그때는 우리 모두가 다 주님의 심판정 앞에 서게 될 때인데, 그런데 마지막 때 있을 그 심판은 정당한 심판일까요? 엉터리 심판일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또 다른 종류의 엉터리 심판입니다. 빌라도의 법정 가운데서는 죄 없는 자를 죄 있는 것으로 엉터리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면,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대에서는 또 다른 엉터리 심판이 있을 것인데, 죄 있는 자를 죄 없다고 판단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죄 없으신 분으로서 죄 있는 것으로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한 그 보혈에 근거하여, 이제는 영원히 멸망시킬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보시면서도 죄 없다고 무죄 방면하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그 마지막 때에 심판이 있게 되는데, 그 놀라운 수혜자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그런 정반대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입니까? 마지막 날에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무죄로 방면받게 된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떻게 나오는 것이 옳습니까? 나 용서받았어. 내가 죄를 지었지만 괜찮아라고 그렇게 뻔뻔함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사실은 그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바른 태도가 있다고 한다면 삭개오와 같은 태도가 우리가 보여야 할 태도입니다. 삭개오는 이야기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곱절이나 갚겠나이다.” 이 삭개오는 자신이 주님께서 자신을 용납해 주시고 받아들인다고 하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내가 지금까지 잘못했지만, 주님께서 나를 받아주신대. 난 괜찮아.”라고 뻔뻔스럽게 그렇게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엎드려서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 내가 지금까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네 배를 갚겠나이다. 내 재산의 반절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될 때, 우리 주님께서 그 삭개오를 향해서, “너도 하나님의 자녀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인정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죽여 놓고도, 나는 용서받았다고 뻔뻔스럽게 말하고, 악한 정권 밑에서 고문을 저질러 놓고도,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정말 힘들게 만들어 놓고도, 나는 예수 믿으니 구원받았다고 뻔뻔스럽게 말하기도 하고, 성추행을 저지르고 성폭력을 저지르며 많은 여성들을 고통스럽게 몰아넣고도, 나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뻔뻔하게 말하는 그런 경우들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것은 참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뻔뻔함으로 자신의 죄를 가리는 것은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한다고 한다면, 죄 없으신 자가 나를 위하여 엉터리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그 놀라운 구원으로 말미암아, 나도 정반대의 엉터리 재판으로 인해서 살아났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뻔뻔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회계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주님 앞에 믿음으로 살아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선한 삶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또한 일주일 동안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회계에 합당한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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