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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으로부터의 해방 (롬 7:1-6)

예전에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떤 한 분의 장례식을 집전한 일이 있었습니다. 60대 부부였는데 그 가운데 아내분께서 먼저 지병으로 인해서 소천했기 때문에 장례식을 직전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식을 집전하는 가운데 그 남편분께서 얼마나 우시는지, 참 옆에서 보면서 마음이 짠하기도 했었고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펑펑 우는 그 모습 장례식 내내 그렇게 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두 분이 사랑했었구나.”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분께서 재혼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아마 6개월도 채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그렇게 장례식에서 펑펑 우셨던 그분이 1년도 안 돼서, 6개월도 채 안 돼서 결혼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제 마음이 약간 혼란스러웠습니다. 과연 그분이 그렇게 처절하게 울었던 게 진심이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하고 궁금증이 생기기도 하고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오늘 괜히 집에 가서 묻지 마십시오. 자기 남편에게.

하지만 아무리 일찍 간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정서적으로야 조금 “너무 빠르게 간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지만, 결혼의 서약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남편 한 사람의 아내가 되겠다고 하는 서약은 그 배우자가 죽기 전까지만 유효한 것이고, 배우자가 죽게 된다고 한다면, 더 이상 그 서약에 매일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재혼할 수도 (있고), 재혼한다고 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비난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없이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했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게 된다고 하면, 충분히 결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혼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배우자가 살아있을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그 배우자를 속박할 수 있는 것이지, 죽고 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보면 결혼할 때 두 남녀가 제게 와서 결혼 주례를 해달라고 부탁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오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법원에 가서 결혼 면허증을 가져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결혼 면허증을 법원에서 발급받아야 결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판사 앞에 가서 그 남자와 여자가 결혼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지를 면밀하게 검토를 합니다. 판사가 이 사람이 결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를 보는 것이죠. 결혼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결혼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 돼야 되는 것이죠. 싱글이거나 혼자 사는, 한 번도 결혼해 본 적이 없거나, 아니면 배우자가 죽어서 과부나 홀아비가 되어 있는 상태이거나, 아니면 법원에 의해서 법적으로 이혼이 정당하게 이루어진 그 상태가 되었을 때만이 결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고, 만일 결혼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또는 이미 다른 사람과의 결혼 면허증을 받은 상태라면, 그 면허증이 취소되기 전까지는), 결혼 면허증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이 판사 앞에서 결혼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고 하는 면허증을 받아와야, 그래야 제가 결혼식을 주례해 주었던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결혼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 배우자가 살아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갈 수 없는 것이 결혼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7년 전 우리나라는 일본의 36년간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광복 77주년입니다. 광복의 순간에 살아계셨던 분들 많이 계시죠? 그때 기뻤나요? 저는 그걸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아마 그때 많은 사람들이 기뻤을 것입니다. 그 일본 사람들의 아주 혹독한 그 억압 밑에서 살던 사람들, 예전에 저희 할머니를 생각해 보면, 우리 할머니께서 늘 입에서 했던 말이 뭐냐면, “순사 온다. 순사 온다.” 하면서, 우는 것을 달래고는 했습니다. “순사가 와서 잡아간다.”라고 하는 말을 했는데요. 그만큼 그 일제시대 때, 일본 경찰, 일본 순사가 얼마나 무서웠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해방되는 그 순간에 이제는 더 이상 우리는 일본의 법의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일본어를 써야만 했었고, 예전에는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어야만 했었습니다. 하지만 해방이 되었으니까,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어떤 tv 프로그램을 보니까, 그 해방 정국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가를 회상하면서 말하는 그런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요. 해방이 되니까 선생님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제는 더 이상 일본의 강압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아도 되어서, 모든 것들을 다 새로 바꾸어서 학교를 해 나가는데, 학생들의 이름을 부를 때 예전에는 일본 이름을 불렀다가, 해방이 되고 나서 학생들의 이름을 한국말로 불렀답니다. 아무개, 아무개 하면서, 한국말로 불렀더니 아이들이, 그게 너무나도 생소해서, 늘 일본 이름으로만 불러왔던 그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한국말로 불러줄 때, 그것이 너무나도 어색해서 아이들이 이름을 부를 때, 키득키득거리며 웃고 그랬다고 하는 그런 회상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해방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 이상 옛날의 법에 매이지 않게 되는 것이 해방인 것이죠. 오늘 우리는 로마서 7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이 7장의 말씀의 요지는 무엇이냐면,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인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마치 배우자가 사망하면,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거나 장가를 가더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들이 전에는 율법에게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고, 율법 아래에 있어서 그 율법의 지배를 받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율법이 없어져버렸다는 겁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인 사람들이 아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7장의 말씀입니다. 일본이 항복해 버리고 철수해 버리면, 더 이상 일본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일본의 법을 따를 필요가 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율법에게 속박된 존재가 아니라,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율법의 법으로부터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함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율법에 얽매여서 살아가야 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7장 1절에서부터 6절까지의 말씀의 요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율법이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이, 율법이 죽었습니까? 우리가 죽었습니까? 그게 좀 약간 헷갈립니다. 로마서 7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7장 4절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죽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율법과 상관이 없어졌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로마서 7장 1절에서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7장 1절에서도, 7장 4절에서도 율법이 죽은 게 아니라,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제가 헬라어 원문을 보니까, 그게 좀 약간 애매합니다. 헬라어를 잠깐 보여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제일 맨 마지막에 노랗게 표시해 둔 그 부분에 보겠지만, “그것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율법이 사람을 다스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말하는, 그 he(it) 그가, 그것이, 그것이 무엇인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석할 때 율법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율법이 사람을 다스린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사람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율법이 사람을 다스린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한 그런 문장이 바로 7장 1절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로 7장 1절 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과부의 예를 들고 있는 겁니다. 남편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결혼의 법이 살아 있어서, 그래서 그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로 갈 수 없지만, 그러나 남편이 죽어버리고, 그래서 나를 구속하던, 나를 그렇게 나를 그렇게 구속하던 그 결혼의 법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결혼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에게 결혼을 해도,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서, 사실은 7장 1절의 말씀이 사람이 살 동안이라기보다는, 율법이 아직 살아 있을 동안에는, 율법이 아직 유효할 동안에는, 그 율법이 사람을 다스리지만, 그러나 그 율법 자체가 없어져버리면, 그 율법의 효용 가치가, 그 율법의 유효기간이 지나가 버리면, 이제는 더 이상 그 율법에 대해서 우리가 그 율법에 얽매여 살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일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뒤에 가서 7장 4절에서는 사람이 죽는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고 표현하고 있어서, 보면 로마서 7장 1절에서부터 6절의 말씀이 율법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혼란스럽게 돼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차피 결과는 똑같습니다. 사람이 죽든, 율법이 죽든, 무엇이 죽든, 더 이상 그 율법이 우리 사람을 구속할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 율법에게 얽매여서 살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해방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남편이 죽어버렸다.”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왜 이 로마서를 쓰면서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이 되어서 더 이상 이 율법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그 당시에 복음과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시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냐면, 할례를 받아서 유대교로 개종해야만, 그래야만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었다고 하는 그 복음을 듣게 되었을 때,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겁니다.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방인들 크리스천들에게 가서 말하는 겁니다. 너는 이방인들이고, 당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야.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의 회중에 들어올 수 없다고 되어 있으니, 너희들이 예수님을 믿어보았자 할례를 받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가 없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가 없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회중 가운데 들어올 수 없으니까, 너희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면 너희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라고 그렇게 주장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고, 너희들이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할례의 법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치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면, 우리가 더 이상 일본 사람들이 정해 놓은 법, 일본어를 써야 하고 일본식 이름을 가져야만 하는 그 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처럼, 남편이 죽어버리면, 아내가 죽어버리면, 더 이상 결혼의 서약을 지킬 필요가 없이, 재혼해도 아무런 (문제없이), 무방한 것처럼, 더 이상 우리는 율법의 구약 율법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구약의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지 않아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에 있는 모든 율법의 요구들, 구약에서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그 수많은 규정들이 있는데, 그 구약의 모든 율법과 요구들과 굴레들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다 성취해 버리셨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그 구약의 율법의 요구와 굴레들을 지키면서 그 굴레 속에서 살아갈 이유가 전혀 없어졌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냐면, 내가 돈을 빌려서 돈을 갚아야 될 채무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갚을 능력이 되지 않는데, 놀랍게도 어떤 부자가 나타나서 내 대신에 그 빚을 다 갚아줘 버렸어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가서 채무 증서를 받아와서 다 찢어버린 겁니다. 그러면 더 이상 우리가 채권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까? 아니요. 그 채권자에게 여전히 돈을 갚아야 될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요. 내가 갚지 않았어도, 어떤 정말 자비로운 사람이 정말 어떤 너그러운 사람이 나 대신에 내가 지고 있던 모든 채무들을 다 갚아 주어 버렸다고 한다면, 더 이상 우리는 채무를 갚아야 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다 갚아버렸고, 채무 증서를 다 찢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그 채권자에게 기죽어서 살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에 있는 모든 율법의 요구와 율법의 억압과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구약의 율법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고,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 복음의 원리를 잘 기억해야 하는데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를 모든 율법의 요구와 억압과 굴레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 옛날 미군이 한반도에 진격을 해서 일본 사람들을 쫓아내 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죽음 가운데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권세를 물리쳐버리고 모든 율법의 요구들을 다 깨부수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그 율법의 굴레 가운데 우리가 있지 않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율법의 굴레와 억압 가운데서 살아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고, 은근히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종교적인 굴레들을 사람들에게 씌워서, 그래서 우리를 착취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도 종종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할 것이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우리들에게서 나와야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그래서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인가 대단한 신앙적인 열정을 해야만, 내가 대단한 어떤 신앙적인 열정을 보여주어야만, 그래야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고, 내가 어떤 대단한 신앙적인 열정을 해내야만, 그래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잘못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복음에서부터 전혀 벗어난 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날에도 잘못된 교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구약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으니까, 오늘날에도 주일이 아니라 안식일을 정확하게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거라고 말하는 그런 잘못된 교회들이 있는 겁니다. 오늘날에도 구약에서 요구하고 있는 대로 피를 먹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순대를 먹으면 안 되는 것이고, 비닐이 없는 물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 것이고, 성경에 약속한 대로 먹고살아야지, 성경이 아닌 방식으로 먹고살면 안 된다고 그렇게 가르치는 그런 잘못된 사람들도 있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오늘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는 그런 말을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는 겁니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는 말은 전혀 복음적이지 않은 말이에요. 그것은 우상 종교에서 가르치는 말이고, 미신에서 순진하고 나약한 인간의 심리를 착취하기 위한 말인 것이죠. 우리가 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한다면, 우리가 정성을 보여야만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낼 수 있다고 잘못 가르쳐서,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많은 착취를 하려고 하는, 복음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들이 교회에서 들려질 때도 있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착취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시고,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시는), 응답해 주시는, 그런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말은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는 이 말은, 그러니까 마음대로 악하게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율법에서 할례와 같은 것들 우리를 얽매이는 그런 율법의 굴레와 같은 것들은 다 사라진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뻐하시고 정말 선하신 그런 뜻 같은 것들은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비유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을 때, 그때 어떤 일들이 있었냐면, 일본 사람들이 다 일본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우리나라의 일본 사람들이 운영하는 회사들이 그대로 남게 됐습니다. 김명식이라고 하는 분이 해방 때 있었던 일에 대해서 회상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요. 이분은 어떤 분이었냐면 조선 차량 주식회사, 일본 사람이 세운 그 회사에서 일하던 기차를 만드는 그런 회사의 직원이었습니다. 해방이 되기 전까지는 그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아주 힘들게 일을 하는 것이죠. 윗사람들이 시키면, 일본 사람들이 일을 시키면, 그 일을 해야만 하는데 아주 힘들게 힘들게 하는 겁니다. 그야말로 그 월급을 받기 위해서, 얼마 안 되는 그 월급이라도 받지 않으면 안 되니까, 억지로 정말 힘들게 힘들게 그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산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해방이 되고 나니까, 일본 사람들이 다 물러가 버리고, 그 회사가 덩그러니 남게 되었어요. 그런데 고급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다 일본 사람들이었고, 한국 사람들은 그저 단순한 노무직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만 남아 가지고 그 기차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겁니다. 기술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는가? 그때 그나마 그곳에서 더 일을 많이 한 자기가 그 일을 하는데, 어떻게 했는가? 도면을 봐가면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그 도면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도면을 연구하면서, 어떻게 해야 기차를 잘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기차를 만들 수 있고, 안전하게 만들 수 있을까를 집에 가면 집에서도 그걸 연구해가면서, 그래서 기차를 만들어냈다고 얘기를 해요.

아마 해방이 되기 전에 그 일을 할 때는 일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만 일을 했을 겁니다. 이거 해 하면,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해 하면 저것을 하고, 일을 시키지 않으면 쉬려고 하고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회사가 자신들의 것이 되고 자신들이 운영해야 되는 그런 주인이 되었을 때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집으로 가서 이것을 밤새도록 연구하도록 하면서까지 그 일을 하면서, 그 일을 기쁘게 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것이죠. 그 마음 가짐이 완전히 달라진 겁니다. 예전에는 그저 시키는 대로, 내가 마지못해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했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자기가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가 운영을 해야 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가 있게 된 것이죠.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해방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전에는 우리가 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망할까 봐,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당할까 봐, 이 율법을 지켜야지 않으면 우리는 지옥에 쳐 넣어질까 봐, 두려운 마음에 할 수 싫어도 억지로 억지로 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기쁜 마음을 닮아가고,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키게 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억지로 마지못해서 그냥 하고 싶지 않은데, 내가 이것을 안 하면 망할까 봐, 두려움 가운데, 그렇게 그 두려움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오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그 율법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 다 되었다고 하는 그 기쁨과 감격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오고 계십니까? 원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 주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신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 앞에 나오고 또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결단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셨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를 살리시려고 할 때, 억지로, 하고 싶지 않은데, 그냥 마지못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구원해 주신 것이죠. 우리가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죽어가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우리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이 아이를 어떻게 살릴 수 있겠는가? 그런 안타까운 마음에,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온갖 피와 물을 다 흘려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이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요즘 중부권에 엄청난 피해가 난 것을 알고 있는데요. 이렇게 폭우가 내리고 위험 상황이 생기면 항상 난세는, 그 난세 가운데서 희생하고 또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그런 영웅들이 나타나고 있어서, 그래서 뉴스를 통해서 그런 정말 그 힘든 상황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원해내고 살려내고 도와주었다고 하는 그런 훈훈한 뉴스들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이번 물난리 때가 아니라, 1972년에 이런 비슷한 상황 가운데서 있었던 하나의 이야기를 제가 본 적이 있는데요. 굉장히 감동적이었습니다. 1972년 태풍 베티가 한반도를 강타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중부지방에 엄청난 폭우가 내려서 물난리가 나게 되었는데요.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단양군 적성면 남한강 줄기 안에 있는 조그마한 섬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시루섬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섬인데요. 남한강에 물이 불어나기 시작하면서 그 시루섬이 물에 잠기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섬에 살고 있던 250명의 주민들이 꼼짝없이 물난리 통에 죽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그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이 어디였냐면, 물탱크였어요. 그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이 물탱크 뭐 하려고 만들어 놨는가? 별 효용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물탱크가 그 섬 한가운데 있는데요. 높이가 7미터, 그리고 폭이 4m 정도 되는 그 물탱크가 그 시루섬에 세워져 있어서, 그 시루섬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모두 다 다 비를 피해서 다 그 위로 올라가게 된 겁니다.

4미터 원 안에 몇 명이 올라갔냐면, 250명이 올라간 거예요. 250명이 올라갔으니 빡빡하게 올라가서, 그 위에서 떨어지면 바로 밑에 지금 한강이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떨어지면 죽는 겁니다. 밤새도록 250명이 팔짱을 끼고, 한 사람도 여기서 누군가 팔이 풀려버리면 쓰러져 버리게 될 것이고, 떨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밤새도록 그 물탱크 위에 서서 버텨서 살아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죠. 그런데 그다음 날이었어요. 물이 빠지고 그리고 이제 그 물탱크에서 내려오게 됐는데 한 여인이 우는 겁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봤더니, 그 위에서 서로가 팔짱을 끼고 그렇게 확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매달리는 그 순간에 백일 된 아기를 그 엄마가 안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아기가 압사돼서 죽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 순간에 이 엄마가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워서 그래서 그 순간에 울어버리고 자기 아이가 죽었다고 오열하기 시작하면, 결국 동요가 일어나서 모든 사람들이 떨어질 수 있는 그 상황 가운데, 밤새도록 그 슬픔을 참고 참고,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냥 버틴다는 거죠. 참 감동적인 이야기인데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시루섬에 가면 그 동상이나 이런 것들이 지금 제작이 돼 있다고 합니다. 그걸 설명하는 걸 한번 봤는데요. 한번 보여주시죠. 없나 보죠? 안 봐도 됩니다. 아무튼 그렇게 그 상황 가운데서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참고 견뎌내 준 것이죠.

그런데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도, 그리고 그 슬픔을 참으시면서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품어주시고 구원해 주셨다고 한다면, 우리가 율법의 노예가 되어서 억지로 억지로 하기 싫은데, 그냥 그 하나님의 율법을 내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속에 기억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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