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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좌 7 – 시험에 들지 않게

1. 시험과 유혹

오늘은 주기도문 강좌 일곱 번째 시간이 됐습니다. 시간이 빨리 흐르죠? 7번째 강좌지만 우리가 다룰 청원은 여섯 번째 청원을 다루게 되는 것이죠.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군사 된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군사인 우리들이 영적인 전투를 해 가는 가운데, 영적인 전투를 할 수 있도록 “보급품을 좀 달라” 영적인 전투를 할 수 있도록 “이렇게 힘을 달라.”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래서 제4청원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영적인 전투를 해 나가면서 필요한 그런 영적인 물자들, 영적인 보급품을 공급해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가 되겠고요. 제5청원은 우리가 영적인 전투를 하면서 부상을 당합니다. 전쟁을 하다 보면 부상을 당하잖아요? 영적인 전투를 함에 있어서도, 우리가 부상을 당하게 될 텐데, 그런 부상을 당했을 때, “하나님 치료해 주세요.”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은 사탄의 공격에 의해서 우리가 부상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죠. 이런 부상을 당했을 때, 우리를 그냥 그냥 없애버리지 말고,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들의 영적인 부상을 치유해 주셔서, 다시 회복하여서 영적인 전투를 더 해 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간청하는 기도가 될 것인데요.

오늘 우리가 다룰 제6청원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달라.”라고 하는 간구인데,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것은 더 이상의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달라고 하는 거겠죠. 우리가 지금 영적인 전투를 하러 나가는데, 영적인 전투를 하다가 우리가 시험에 빠져서,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그래서 사탄의 유혹에 끌려가지 않도록, 포로로 잡혀가지 않도록, 또는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그 영적인 전투 가운데 더 이상의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달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이 시험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페이라스모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단어 한번 봐야 되겠죠? “페이라스모스”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인데요. 이 헬라어 단어 “페이라스모스”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시험, 테스트”라고 하는 의미로 번역이 가능하고, 또 하나 번역이 가능한 것은 “유혹”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temptation, 시험과 유혹이 같은 건가요? 다른 건가요? 달라요. 그렇죠?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 한번 보자. 실력이 있나, 없나, 보자. 악에 빠지나, 안 빠지나, 한번 보자.” 테스트해 보는 겁니다. 시험해 보는 겁니다. 유혹이라고 하는 건 뭐죠? 잘못된 길로 끌고 가는 것이 유혹인 것이죠.

그러니까 아 시험과 유혹이 다른 의미인데, 그 다른 두 가지 의미를 헬라어 단어 “페이라스모스”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로 똑같이 사용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우리를 “페이라스모스”로 들어가게 하지 마시고, 목적격이기 때문에 “페이라스몬”이라고 합니다. 목적격은 어미가 “온”으로 바뀌어야 되기 때문에, “페이라스모스” 하면 주격이고, “페이라스몬” 하게 되면, 목적격이니까, 우리를 “페이라스몬”으로 인도하지 마세요라고 하는 그런 기도 제목인데, 여기서 시험으로 인도하지 마옵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까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맞을까요? 그렇죠. 유혹으로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번역하는 게 훨씬 더 나은 번역입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시험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면, 항상 그런 것은 아닐 수 있겠지만, 시험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면, “이게 시험이라고 하는 말보다는 유혹이라고 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될까?”라고 한 번쯤 질문을 한번 해보시고, 성경을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그 말은 시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유혹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입니까? 유혹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은 시험하는 하나님이 아이다라고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게 번역을 해놓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입니까? 시험하지 않는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시험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우리를 항상 시험하시죠. 믿음이 있는가? 믿음이 없는가를 보시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이런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거,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시험은 불가피한 것이고, 반드시 있는 것이죠. 그것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지 않는다”라고 표현된 그 말은 사실은 시험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페이라스모스” 이 말을 “유혹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로 번역을 하는 게 훨씬 더 맞을 겁니다.

2.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이유

제6청원에서 “우리를 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요. 우리가 유혹에 들어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온 세상천지가 지뢰밭이기 때문에 그런 거죠. 온 세상천지가 지뢰밭이어서, 우리가 혹시라도 잘못 내딛으면, 지뢰가 터져버려서 우리의 목숨을 잃게 되듯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우리를 유혹으로 넘어가게 만들어서, 우리를 망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가능성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고 하는 겁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24시간 내내, 우리가 만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유혹거리들이 있다 이 말이에요. 그 모든 유혹거리들이 있는데, 그 유혹거리들에게 우리가 넘어가버려서, 사탄에 굴복해버려서, 그래서 죄를 짓지 않도록 그렇게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하는 것이 “주여, 우리를 유혹에 들어가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하는 그런 기도의 제목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말씀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사탄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이렇게 공격하려고, 웅크리며, crouching tiger처럼, 이렇게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사탄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않은 때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예. 없어요. 우리가 예배드리는 순간은 사탄이 우리를 건드리지 않죠? 아니요. 예배드리는 그 순간에도 사탄은 우리들의 마음을 공격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거예요. 설교를 듣는 가운데 사탄이 우리들의 마음을 호시탐탐 노리는 겁니다. 목사님이 무슨 설교 하나 잘 들어봐라. 삐져라. 우리가 주를 위해서 찬양대에 서서 찬양 부르는데, 사탄은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찬양을 부르면서 “네 목소리가 얼마나 좋은지 한번 뻐겨봐라.” 하면서 자꾸 우리를 공격하고 있단 말이에요.

우리가 하는 그 모든 것에서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매 순간순간이 지뢰밭과 같아서, 우리는 그 영적인 지뢰를 밟는 것이 순식간이에요. 우리는 주의 일을 하면서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면서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 어느 순간에도, 완전히 면역이 되어 있는 때가 없는 것이죠? 마치 무엇과 같은가? 코로나와 같아요. 코로나, 괜찮나 보다 했는데, 어때요? 걸리잖아요. 조금만 방심하면, 걸리잖아요. 상가에 가서 밥 먹었더니 걸리고, 친구들하고 얘기하다가 걸리고, 괜찮은가 했더니 걸리고, 우리가 방심하게 되면, 코로나에 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탄의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늘 우리를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목사든 평신도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을 하든, 주의 일을 하든 어떤 상황에 있든지, 우리는 언제든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타락할 가능성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데요. 우리는 주의 일을 하면서, 기도하면서, 예배하면서, 찬양하면서, 헌금을 드리면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그 어떤 것들을 하면서도 언제든지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먼저 알고, 인식하고, 그리고 날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넘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봐야 되는 것이죠.

3. 구원파의 오류

이러한 점은 구원파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생각입니다. 우리 기독교 이단 가운데 하나가 구원파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구원파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인이 된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전혀 죄를 지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를 해요. 우리가 이미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러한 구원파의 주장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느끼고 있는 현실과는 꽤 다른 주장이잖아요? 우리의 현실은 어때요? 늘 넘어지려고 하는 게 우리들의 현실이잖아요? 그런데 현실과 다르게 구원파는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구원파의 파에 따라서, 구원파 내에도 한 가지 파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종파들이 구원파라고 하는 큰 구원파 중에도 여러 가지 갈래들이 있는데, 어떤 갈래는 어떻게 주장을 하느냐면, 지금은 그런 극단적인 파가 없다고 생각이 되는데, 구원파의 어떤 갈래에서는 어떤 주장을 했냐면, “성도가 되어서 하는 그 모든 것들은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을 해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가게에 들어가서 막 훔치고 그래도,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기까지 해요. 극단적인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거죠. 왜냐하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 생각을 극단적으로 강화시켜서, 결론을 내리다 보니까, 말도 안 되는 그런 주장을 하게 되는 거예요. 성도라고 한다면, 더 이상은 아무것도 죄가 안 된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다 의로운 것이고, “다 괜찮은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그런 파도 구원파 내에 있는 것이죠.

아마 대부분의 다른 구원파는 그렇게까지는 얘기를 안 할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렇게 구원파 쪽에서 왜 그런 얘기를 하냐면, 성경 말씀 중에 종종 그렇게 오해하게끔 만드는 구절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요한일서 5장 1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 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일서의 이 구절만이 아니라 이와 비슷한 구절이 또 하나 더 있습니다. 3장에. 아무튼 이 구절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하나님을 믿는 자인, 크리스천 의인이라고 한다면, 죄를 안 짓는다고 쓰여 있잖아요? 성경에, 성경에 죄를 안 짓는다고 쓰여 있으니까, 안 짓는다고 믿는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냥 막무가내로 믿어버리면 안 되는 거죠.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정말 그러한가?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의 말씀인가?”라고 질문을 던져야 되죠. 우리의 현실과 성경 말씀과 뭔가 좀 안 맞는 것 같으면, 안 맞는 설명을 성경에서 하고 있는 것 같으면, 성경 말씀이 의미하는 게, 바로 그 말씀인지, 우리가 따져봐야 되는 거죠. 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 “범죄 하지 않는다.”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러면 더 이상 죄를 안 짓는다는 이야기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현실 하고도 맞지 않는 얘기예요.

그런데 그러면 왜 요한복음 5장 18절에서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범죄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뭐예요?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이 말이 현재형으로 되어 있는데, 그 현재형으로 되어 있는 이 말씀의 뉘앙스가 어떤 의미가 있냐면, “계속해서”라고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얘기는 뭐예요?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고 거룩하게 된 자, 하나님의 성도가 된 사람은 계속해서 죄를 범할 수는 없다. 늘 죄를 범하면서 살 수는 없다. “악한 일을 계속하면서 살지는 않는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의 번역을 보면 continue to sin이라고 번역을 해놓았어요. 한국말로 이해가 안 되면, 영어 성경이라도 보면, 이해가 돼요. 한국말 성경만 보고, 엉뚱한 결론, 현실에도 맞지 않는 결론을 그냥 내릴 게 아니라, 한번 어떻게 생각해 봐야 돼요. 헬라어 원어를 몰라도 돼요. 헬라 원어는 너무 어려우니까, 배우지 않았으니까, 모르잖아요. 다만 뭐가 있어요? 영어 성경이라도 있잖아요? 영어 모르는 사람 어떡하죠? 영어 아는 사람한테라도 물어보면 되죠. 한번 보시란 말이에요. 보시면 그런 의미일 수 있겠구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아예 안 진다고 하는 말이 아니고, 늘 죄를 지으며 살지는 않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탄이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않는다.”라고 번역을 해놨는데, 사실 “도”라고 하는 말은 좀 번역상 오버인 것 같아요. “사탄이 ‘항상’ 그를 만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이 말은 “당위”의 표현이에요. 당위의 표현. 학생은 그러면 안 돼. “성도라면 죄를 짓지 않아야지.”라고 하는 당위의 표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경을 그냥 막무가내로,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오해를 해서, 그렇게 구원파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우리는 언제든지 유혹에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해야 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우리가 죄를 안 지을 수 있고 의롭게 살 수 있다고 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럴 능력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강력하신 보호하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기도가 필요한 것이고, 시험에 들어가지 않게, 즉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4.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분인가?

그런데 이 기도문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좀 약간 애매해요. 왜냐하면 “하나님,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지 마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그 표현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해 주실 수도 있는 분이라고 하는,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우리를 유혹으로 막 집어넣으려고 하나님께서 하고 있는데, “하나님, 우리를 유혹으로 집어넣지 마요.” 하면서,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약간 애매한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실 수도 있는 분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데요.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으로 집어넣을 수 있는, 집어넣기도 하고 안 넣기도 하시는 분입니까? 전혀 안 넣으시는 분이십니까? 어떠한 분이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유혹으로 집어넣으시는 분이기도 하고, 안 넣으시는 분이기도 하는 그런 분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전혀 유혹에 넣으려고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까? 1번? 2번? 그 말, 그 대답이 어려운 것이지요. 왜냐하면 애매한 질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1번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 다스리고, 하나님 의외에는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하나님 외에는 이 세상을 다스리는 자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탄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습니까? 사탄이 하나님보다 낮은 위치에 있습니까? 사탄이 낮은 위치에 있단 말이에요. 하나님과 결코 동등하지 않아요.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한다면, 사탄이 우리를 유혹으로 빠뜨리려고 하고 했을 때, 하나님 책임이 없는 것처럼 보여요. 왜? 하나님은 신경 안 썼어요. 하나님은 손 못 댔어. 근데 사탄이 우리를 유혹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우리를 유혹에 집어넣는 그 책임이 사탄에게만 가고, 하나님에게는 안 돌아가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 전체에서 가르쳐주시는 그 중요한 원리가, 사실이 무엇이냐면, 사탄이 하나님 밑에 있다는 거예요. 사탄이 지 맘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결국은 누구의 재가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어요? 하나님의 재가를 받아야만 이 사탄이 움직인다는 얘기죠. 그것을 우리가 어디서 보았습니까? 욥기에서 본 것이죠. 욥을 괴롭히고 싶어도, 욥에게 여러 가지 유혹을 하고 싶어도, 사탄이 제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래. 해 봐.” 하는데, “이 범위 안에서만 해봐.”라고 얘기를 하고, boundary를 정해줘야, 그때 그 하나님의 그 boundary 안에서만, 사탄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여기에 기록돼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구조를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결국은 우리가 유혹에 빠지는 것도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느냐?”라고 질문을 던져본다고 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거잖아요? 하나님 밑에 사탄이 있고, 사탄이 우리를 유혹에 집어넣고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유혹에 집어넣는 것처럼, 그리 집어넣기도 하고, 안 집어넣기도 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 표현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죠.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고, 심지어 바로 왕이 마음을 강퍅하게 먹은 것도, 누가 강퍅하게 만들었다고 나와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었다고 나오는 겁니다. 요셉을 팔아버린 그 형들의 그 악행도 누구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거라고 나와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일어난 거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고요. 뿐만 아니라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는 것도 사탄의 충동에 의해서 인구 조사를 한 것도 나오지만, 성령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하게 했다고 하는 말도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크게 봐서는 하나님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유혹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구절들이 성경에 많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선하신 하나님이란 말이에요.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유혹으로 집어넣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를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시지, 우리를 유혹에 빠뜨려서 파멸로 이끄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3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무엇을 “받을 때” 이 시험을 뭘로 읽으라고 그랬어요? 유혹이라고 했죠? “사람이 유혹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유혹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유혹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유혹하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시는 분이 결단코 아니라고, 성경이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좀 애매하긴 한데, 이것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예요. 뭐라 대답해도 늘 난제가 있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전체를 다스린다고 해도 난제가 있고, 전체를 다스리지 않고 뭐 그런다고 해도 난제가 있는 그런 표현이기는 한데, 아무튼 그러나 여기서 우리를 유혹에 인도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사탄이 우리를 충동질할 때 우리들을 보호해 달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 기도문을 이해하는 것이 옳을 거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지 않는 것은 아니죠.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합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셨고, 욥을 시험하셨고, 가난한 여인의 경우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들의 삶은 늘 시험 내 연속입니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를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고 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른 길로 가기를 원하시고 계시는데, 그럴 때 우리가 바른 길로 가려고 하는 소망을 가져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5. 시험 자체가 없게 해 달라는 기도인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 유혹으로 인도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기도는 우리가 시험 시험 자체가 없게 해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는 아닙니다. 우리 학생들의 소망이 뭐예요? 시험 안 보는 거. 하지만 우리 성도들의 소망도 어쩌면 시험 자체가 없게 해달라고 하는 걸 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 기도는 시험 자체가 없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시험이 있을 때에 유혹으로 빠지지 않게 해 달라. 선한 길을 선택할 수 있게 해 달라.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셔서, 의의 길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게 되는데요.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일들이 있는데, “하나님, 이런 고난 좀 없애주세요. 이러한 어려움들 없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은 주기도문을 보면 가능할까요? 주기도문에서 그런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인가요? 그런 기도는 하지 말고, 다른 기도만 하라고 한 건가요? “하나님 고난을 없애주세요.” 이런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물론 오늘 이 기도의 제목, “하나님,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은 “고난을 없애달라.”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은 아닙니다. 고난이 있을 때에, 시험이 있을 때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을 때에, 그때 우리가 유혹에 빠져서 잘못된 결정을 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기도가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고난이 좀 없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어요? 없어요? 주기도문에 그런 가르침이 있어요? 없어요? 어디에?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하는 얘기는 유혹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이지, 유혹 자체를 없애달라는 기도의 제목이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그 고난 자체를 없애달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이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 자체가 없도록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그랬잖아요? 지난번 배운 기도의 제목이 바로 그 제목이잖아요? “오늘날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은 배고픈 일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이잖아요? 그러니까 아픈 일도 없게 해 주시고, 또 어려움 겪는 일도 없게 해 주시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환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옵시고, 하는 기도의 제목들이 주님께서 가르친 기도문에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있어요. 우리의 양식을 위한 기도는 우리의 필요, 우리의 평안함, 우리의 모든 우리의 필요, 소망들을 위한 기도가 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는 기도문 가운데 다 들어있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이 기도의 제목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이 기도의 제목은 어떤 기도의 제목이냐면, 고난을 없애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고난이 다가올 때에,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을 모른다 할까” 하오며, 그렇게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근데 우리에게 고난만 옵니까? 고난이 아니라 부유함도 오잖아요. 부유함도 올 때 우리는 어떤 유혹에 빠져요? “내가 교만하여 하나님을 모른다 할까 하오며.” 그런 유혹에 빠질 수가 있는 거죠. 유혹은 어려운 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게 다 유혹거리로 다가오는 거예요. 우리에게 평안함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유혹거리예요. 아픔이 있어도 유혹거리고, 그 어떤 우리가 만나는 24시간 내내 만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유혹거리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죠. 좋은 일이 있어도 유혹거리고, 나쁜 일이 있어도 유혹거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해 달라. 우리가 사탄에게 굴복하는 일이 없게 해 달라.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죠. 예전에 필라델피아의 영생교회라고 하는 곳에 단기 선교팀이 있었어요. 단기 선교팀이 멕시코로 단기 선교를 간 겁니다. 젊은 청년들 해서, 단기 선교를 갔는데, 그 단기 선교를 하는 가운데, 청년 하나가 죽었어요. 거기서 뭐 아무튼 사고를 당해서 죽게 되는 일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 일이 있을 때, 그 부모는 어떠한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요? 아마 그 순간에 아마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고, 믿음에서 떠날 수도 있고, 그리고 여러 가지 시험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들이 많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부모님들은 그것 때문에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녀가 죽은 바로 그곳에 재산을 털어서 교회를 세워주고, 자기 자녀가 죽은 바로 그 자리에 정말 주를 위해서 더 헌신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반응을 보인 것을 보면서 참 엄청난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그런 힘들고 어려운 일들만 우리들에게 유혹거리가 아니라, 그걸 통해서도 우리가 시험에 들 수가 있겠지만, 어 어떤 때는 좋은 일이 있을 때, 또 유혹거리가 돼서 우리가 넘어질 수도 있는 것이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도 있고 교만해질 수도 있고, 또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일 수가 있겠는데, 아 그런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라도,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가 이 기도의 제목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6. 사탄의 통치에 굴복하지 않게

사실 6 청원은 1, 2, 3 청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사탄의 지배가 없어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인데,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탄의 그 통치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따라 살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고, 하나님의 백성을 지켜달라고 하는 기도인 것이죠.

우리는 결국 궁극적인 승리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늘 지뢰밭 사이를 걸어가다 보면 꼭 지뢰가 터져서 죽을 것만 같잖아요? 그런데 수많은 사탄의 유혹이 있지만, 우리 주님께서 이루신 그 승리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면서, 매 순간순간마다 이 기도를 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죠.

우리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 아침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외부와의 싸움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있는 싸움들인 것이죠. 종종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전투를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 어느 마을에 절간도 많고, 점집들도 많고, 그러면 “저기에 악한 영들이 꽈리를 두고 있는 동네구나.” 해서, 그 지역 가서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하고, 지신밟기도 하고, 하면서, “영적인 세력을 물리쳐야 된다.”라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영적인 승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그런 유혹들이 있을 때 우리가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매 순간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죠. 미워하지 않고 탐욕과 시기와 질투와 분노와 의심과 불평과 원망과 절망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을 해 나가는 게, 그게 유혹에 빠지지 않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기도를 하며,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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