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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이 있어야 (롬 7:7-12)

오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시간에 우리가 함께 들었던 것을 복습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로마서 7장 1절에서부터 6절 말씀을 살펴본 적이 있는데요.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돌아서시면 잊어버리시나요? 저도 그렇습니다. 로마서 7장 1절에서부터 6절 말씀에서 바울 사도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우리가 율법에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기억나시죠? “우리가 율법의 굴레로부터, 율법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왜정시대 때 할 수 없이 일본어를 사용해야만 했었고, 할 수 없이 일본 이름을 가져야만 했었고, 할 수 없이 신사 참배를 해야만 했었던, 그런 왜정 시대가 있었는데, 우리가 광복절이 되고, 해방을 맞이하게 될 때, 더 이상 일본어를 쓸 필요가 없는 겁니다. 더 이상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더 이상 신사 참배를 강요받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율법에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고, 율법의 그 억압 율법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그 당시에 유대주의자들이 있어서, 할례주의자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찾아가서 한다는 이야기가, “당신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할례를 받지 않았다면, 구원을 못 받는다”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크리스천이 된 이방인들을 찾아가서, 유대인들이 한다는 이야기가, 성경을 들이밀면서 한다는 이야기가, 성경을 분명히 읽어보라고, 성경에 분명히 쓰여 있기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쓰여 있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에서부터 쫓겨날 것이라고 분명히 쓰여 있으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당신들이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만 가지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유대인들 할례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장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모든 요구들을 성취하셨고, 율법을 폐해버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율법에 얽매여 지낼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해방되었으니까, 더 이상 옛날의 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 로마서 7장 1절에서부터 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제 좀 기억이 나십니까? 네.

우리가 이 말씀을 듣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연스럽게 질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어떤 질문이냐면,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가 정말 율법에서 해방되었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이야깁니까?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일본군과 같은 건가요?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애굽 왕 바로와 같은 것인가요? 일본에게서 해방되었듯이, 애굽에서부터 해방되었듯이,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한다면, 그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나쁜 것이고, 우리가 결코 지켜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 율법은 우리를 얽매이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로 율법을 행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까?”라고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솟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는 것은 율법이 나쁘니까, 우리를 얽매게 하는 것이니까, 거기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나쁜 것이겠네요.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되는 것이겠네요.”라고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서 7장 7절에서부터 12절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이냐면,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율법이 나쁜 것인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서, 오늘 이 말씀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그게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이 나쁜 게 아니라, 사실은 좋은 거라는 겁니다. 율법은 나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만들고, 그 죄를 행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선한 기능이 있는 것이라고, 7장 7절에서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이죠.

7장 12절의 말씀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어떻도다? “선하도다.” 나쁜 게 아니다는 거예요.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었지만, 그 율법이 나쁜 거냐 하면, “나쁜 게 아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면, 그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군과 같은 것인가? “율법이 나쁜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 사도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을 하냐면, “아니다. 율법이 나쁜 게 아니라, 선한 것이고, 좋은 것이고, 거룩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도대체 율법이 어떤 점에서 좋다는 것일까요? 율법이 어떤 면에서 유익하다고 하는 말일까요? 다시 한번 7장 7절을 읽어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이 없다면 내가 죄인 줄 몰랐을 것인데, 율법이라고 하는 기준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까, 그 율법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여전히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기준으로 율법이라고 하는 게 있기 때문에, 이 율법은 나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한 것이고, 여전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고, 여전히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까 헷갈리는 거예요. 7장 1절에서부터 6절까지는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됐다. 율법을 이제 더 이상 지킬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 7장 7절에서부터 12절까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한다.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헷갈리는 거예요. 두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한마디 말만 하면 좋겠는데, 한편으로는 우리가 율법에서부터 해방됐다. “이제는 율법 안 지켜도 된다.”라고 말을 하다가, 또 바로 뒤에서는, “아니다. 그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 좋은 것이고, 우리가 그 율법을 지켜야 된다.”라고 말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겁니다. 도대체 율법이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율법을 지켜야 합니까? 지키지 말아야 합니까? 어느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혼란이 야기되는 것은 율법이라고 하는 그 단어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데, 그 율법이라고 하는 그 단어가 가리키는 그 내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할 때의 율법과 율법이 선하고 좋다고 말할 때의 율법이, 그 단어의 표현은 같지만,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말이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번 도표를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이런 도표를 볼 수가 있겠습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보면 도덕법과 시민법과 의식법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 모든 것을 다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의에 이르는 길”로서의 율법은 이제 용도 폐기됐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율법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 등 모든 율법들을 가지고서 “우리가 열심히 잘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의에 이를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길로서는 용도가 폐기됐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그런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기 때문에 용도가 폐기된 겁니다.

하지만 (계속 보여주세요.) 거룩한 삶을 위한 기준으로서의 율법은 여전히 유효한데, 그 유효한 율법은 이 가운데서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도덕법을 가리키는 것이죠. 모든 율법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 아니라, 도덕법이,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거룩한 삶의 기준으로서 유효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제는 지워져도 됩니다.)

율법에서부터 해방되었다. 이제는 율법이 용도 폐기되었다고 하는 말은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이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할례와 같은 그런 의식법 같은 것을 이제 더 이상 지킬 필요 없다고 하는 의미에서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7장 7절에서부터 12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식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한 것은 거룩한 삶을 위한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제 좀 이해가 되십니까?

이러한 율법이 있기 때문에,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성경을 보니까, 탐심을 품지 말라. 탐심은 죄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욕심을 부리며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이런 율법이 있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내가 그냥 내 가족만 사랑하며 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원수를 미워하고 있는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경찰서로부터 편지를 하나 받았습니다. 경찰서로부터 편지를 받으니까, 기분이 좋았을까요? 경찰서에서 왔다고 하니까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제가 횡단보도를 통과할 때, 우회전하면서 차가 이렇게 횡단보도를 만나게 되는데, 예전의 방식대로 그냥 생각지 못하고 통과했는데, 그것을 본 어떤 시민이 굉장히 불쾌했던 모양이에요. 사진을 찍어서 신고를 했습니다. 그래서 경찰서에서 날아온 거예요. 감사한 것은 그 경찰서에서 날아온 편지가 당신이 법을 위반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벌금은 안 때리고, 경고만 줄 테니까, “다음부터 조심하세요.”라고 하는 편지였습니다. 제가 예전의 습관대로, 그저 우회전할 때면 그저 안전하다 싶으면 그냥 통과해 버렸는데, 새로운 법이 생겨서 우리가 우회전할 때 일단 멈춤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과, 그리고 잘 통과해야 한다는, 아직도 좀 잘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그런 법이 새로 생겼기 때문에, 그 편지를 보고서, “아, 이제는 옛날 방식대로 운전하면 안 되는구나. 이제는 내가 잘못했다가는 벌금을 물겠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율법도 그런 기능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은, 의식법으로서의 할례와 같은 것들은 이미 다 폐지가 되어서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겠지만,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이 여전히 있는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내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해서, 그래서 우리가 더욱더 영적으로 거룩해지고 영적으로 성숙해지게 만들기 위한, 그런 좋은 기능 순기능이 율법에 있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다 보면 이해가 안 되는 표현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특별히 로마서 7장 8절에서부터 11절 말씀은 몇 번 읽어도 이해가 안 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이해가 안 되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 천천히 제가 읽어볼 테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인지 한번 이해해보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7장 8절서부터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니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혹시 이해가 되십니까? 좀 어렵죠.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표현입니다.

여기서 하고 있는 말이 무슨 내용이냐 하면, “율법이 없었다”라고 한다면, 내가 괜찮았는데, 율법이 있으니까, 내가 죄인이 돼 버렸다. “율법이 없었다.”라고 한다면, 내가 살았을 텐데, “율법이 있으니까, 내가 죽게 됐다.”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특별히 10절 말씀에서 하고 있는 말씀이 무슨 이야기냐면, 10절 말씀을 한번 다시 한번 봅시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계명이 나를 죽인다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계명이 율법이 나를 죽인다고 하는 말이 그게 무슨 뜻일까요? “율법이 나를 죽인다. 율법이 나를 죄인으로 만든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인데요. 그런 의미, 그런 말을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계명이 나를 죽이면, 계명이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면, 그 계명이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계명이 나를 죽인다면, 나빠 보이잖아요? 그래서 이해하기가 좀 혼란스러운데요. 사실 이 구절의 말씀은 영어식으로 하면 물주구문(物主構文)과 같은 거예요. 예전에 영어 배울 때, 물주구문이라고 하는 것을 배워보셨을 텐데요? 물주구문을 통해서 표현하게 되면, 그러면 그 사물이 나를 어떻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어떻게 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마치 거울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울이 있으면 그 거울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내가, 내 몰골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거울이 없다고 한다면, 내 모습을 알 수가 있나요? 모르는 거죠. 내 얼굴에 깜장이 묻어 있는지, 깜장이 묻어 있지 않는지 모르는 겁니다. 하지만 거울을 비춰보면, “어? 내가 괜찮은 줄 알았는데, 내 몰골이 말이 아니구나.” 하면서, 세수를 해야만 하게 될 것이고, 아니면 화장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거울을 보고 내 모습이 더럽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면, 거울이 나쁜 겁니까? 내가 나쁜 겁니까? 무엇이 나쁜 거예요? 내가 나쁜 거예요? 그것을 물주 구문으로 어떻게 표현하냐면, “거울이 나를 더럽게 만들었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물주구문의 방식이에요.

그런 식으로 오늘 로마서에서 7장 8절에서부터 11절까지,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인데, “율법이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율법이 나를 죽여버렸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 말은 율법이 나를 죄인으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괜찮은 줄 알았는데, 율법을 들여다보니 “내가 괜찮은 사람이 아니구나.” 율법을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 내가 괜찮은 게 아니라, “내가 죄인이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거울을 보면서, 내가 나쁘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거울을 깨뜨려버려야 되나요? ㅎㅎ 거울을 깨뜨려 버릴 게 아니고,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세수해야죠. 몸을 단장해야죠. 율법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거예요. 율법이 나를 죽였도다. 율법이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이 표현은, 그러니까 율법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7장. “그렇게 율법이 나를 죽인다. 율법이 나를 죄인으로 만든다.”라고 쭉 이야기해놓고, 우리들의 생각에 그러니까, 율법이 나쁘다고 하는 결론이 나올 것 같은데, 7장 12절에서 무슨 결론을 내립니까?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을 보니까, 내가 더러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고,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오. 내가 하나님 앞에 더러운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그 율법은 깨뜨려 버릴 것이 아니라, 더러운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선하고 거룩하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고,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이제는 더 이상 할례의 법이나 제사의 법이나 이런 의식법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도덕법으로서의 그 율법은 우리들에게 유익하고, 우리들의 더러움을 씻게 만들어주는 선한 기능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율법이 우리의 더러움을 보여주고, 우리의 죄도 죄된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율법을 자꾸 읽어야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자꾸 들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외출할 때 거울을 보죠? 오늘 교회 오실 때, 거울 안 보시고 나오신 분 계십니까? 아니요. 다 거울을 들여다봤을 거예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아, 내가 왜 이렇게 멋지지?” 하면서 나왔을 거예요. 제 딸아이도 보니까 거울을 얼마나 열심히 보는지 몰라요. 우리 큰 딸은 학교 가라고 하면은, 늦게 일어나서 학교 가기 직전에 일어나서, 겨우 눈곱만 떼고 학교를 가는 데, 둘째 딸아이는 그렇지 않아요. 둘째 딸아이는 밤 1시 2시까지 숙제를 마친 다음에 그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납니다. 미국의 고등학교 당시 우리 딸아이들이 다닌 그 고등학교는, 학교에 7시 반까지 가야 돼요. 그때까지 가서 한 7시 50분부터 1교시 수업이 시작이 되는 그런 시스템이 있으니까, 일곱 시 반까지 가려고 하면, 집에서는 적어도 일곱 시, 혹은 그 이전에 출발을 해야 된단 말이죠. 그런데 이 아이가 언제 일어나는가? 집에서 나가기 1시간 반, 2시간 전에 일어나는 거예요. 새벽에 일어나서 목욕탕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그리고 거울을 보고 계속 계속 치장을 합니다. 한 시간 내내 치장을 해요. 그래서 저를 닮아서, 별로 예쁘게 생기지 않았는데, 그런데 정말 예쁘게 화장을 해가지고 학교를 맨날 가더라고요. 왜? 거울을 들여다보니까, 예뻐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의 영적인 아름다움을 위해서 우리의 거룩함을 위해서 우리는 율법을 바라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거울인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보아야 하는 것이고, 그 말씀에 비추어 나에게 더러운 게 묻어 있는 것은 아닌지, 영적으로 주한 모습이 내게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허물을 바라보고, 그리고 회개하며 씻어서 그리고 바르게 만들어서 영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성경을 읽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요.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거울 속에 투영돼 있는 내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면서도 내 모습을 바라보지 않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생겼는가? 내가 얼마나 더러운가를 보지 않아요. 그냥 읽어요. 내 모습은 바라보지 않고 성경만 읽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 성경을 어떻게 읽는가? 성경이 나를 들여다보게 하는 그 거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성취의 수단, 종교의 수단으로 바꾸어 버려서, 나 자신을 드러내고 영적으로 나 자신의 교만함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성경을 일독했어. 이독했어. 성경을 몇 독했다고 하는 자랑거리로, 성취의 도구로 삼아버리고, 내가 성경을 필사를 몇 번 했어. 내가 이번에 성경을 얼마나 완벽하게 써냈고, 예쁘게 썼는가?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아버리고, 나의 더러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자랑거리로 바꾸어 버린 성경 읽기와 쓰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성경의 기능이 아니라, 그저 거울에 아름답게 장식해 놓고,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죠, 물론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들여다볼 영적인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성경을 묵상하고 암송하면서, 그리고 필사를 하면서 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기에, 필사할 수 있다고 한다면 필사하면 좋을 것이고, 성경을 몇 번씩 읽으라고 한다면 읽는 것이 좋을 것이고, 암송하는 것이 좋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 암송을 하든, 읽든, 필사를 하든, 그것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지 않은 채, 나의 종교적인 장식용으로 변질해 버린다고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더러운 모습을 봐야 합니다. 거울을 보고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냈듯이, 성경 말씀을 보면서, 내가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해야 돼요. 사랑해야 되는데 미워하는 마음이 내게 있구나. 회개하며 자복하고 나가야 되는 것이죠.

내가 자비롭게 대하고, 너그럽게 대하고, 온유하게 대해야 되는 데, 분노하고 갑질하고 있구나. 내 자신의 더러움을 봐야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지족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되는데, 불평하고 원망하며 탐욕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바라봐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이 있는데, 그 사명에 따라 신실하게 수고하고 헌신하는 삶이 아니라, 나태하고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는 나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성경을 사용하는 방법이 잘못된 것일 겁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에서 25절의 말씀 가운데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오.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그게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들을 수도 있고, 설교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요나는 배가 파손하게 된 그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다윗은 선지자의 책망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고, 바울은 꿈속에서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거울을 비춰주고 계세요. “:네 모습 좀 봐라. 네 꼴을 좀 봐라.” 거울을 들여다보게 만드시는데, 그 거울 앞에서 우리가 애써 외면하면서, 나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지 아니하면서, 그래서 외면해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일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거룩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주님의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고, 그리고 그 말씀을 음미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모습을 영적인 아름다움 거룩함을 만들어 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첫째로는 우리들의 더러운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길을 가게 만들도록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면, 오늘 또 회개하는 가운데 주님 손 붙들고 믿음의 길 영적인 성숙의 길을 향해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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