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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나 노새같이 (시 32:1-11)

2020년 11월 8일 주일2부예배 설교

설교를 좀 짧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 감사 카드도 써야 되니까, 하지만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이 정말 복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로또에서 거액의 당첨을 한 사람이 복된 사람일까요? 아니면 무병장수하면서 건강하게 오랫동안 살 수 있는 사람이 복된 사람일까요? 물론 그런 사람들도 정말 복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모두 꿈꾸는 바죠. 돈이 많았으면 좋겠고, 건강했으면 좋겠고, 또 오래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소박한 꿈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오늘 시편 32편 1절 2절 말씀에서는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실 가장 복된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모든 것들이 완벽한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이겠죠. 모든 것들이 다 완벽하고, 흠이 하나 없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사람이 어쩌면 가장 복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죠. 돈이 많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게 아닌 것 같아요. 돈이 많아도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도 많이 보고 있는 것이고요.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장점들이 있지만 저 사람은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생각되는 그런 사람이지만, 그런데 그 가정 안에 들어가 보면 역시 고민이 있고 아픔이 있고 여러 가지 단점들이 있더라고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성도님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을 보면 참 좋은 가정이 있어요. 꽤 돈도 많은 부자인데다가, 인텔리일 뿐만 아니라, 건강하고 그리고 자식들도 참 잘 되는 것 같고, 겉으로 볼 땐 참 괜찮은 것 같아서, “저 집은 참 행복한 집안 같다. 저 집은 참 괜찮은 집안 같다” 하고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까,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고민과 아픔들이 있는 것이죠.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완벽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도 늘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정말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완벽하고 정말 의롭게 산 사람이라고 한다면 좋겠지만, 문제는 우리들 모두에게 다 허물이 있는 것이고, 여러 가지 단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 가운데서는 누가 복된 사람인가? 오늘 시편 32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허물의 사함을 받은 자 그 죄가 가려진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그런 고백이 참된 고백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은 다 흠이 있지만 그러한 흠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흔히 우스갯소리로 11계명이 있는데, 그 11계명에 대해서 들어봤습니까? 10계명이 아니라 11계명이 있다는데, 그게 뭐냐 하면, “들키지 마라.” 1부에서는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들으시던데, 2부에서는 그래도 다 알아들었네요. 사람들이 죄를 지어놓고도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 모두가 들키지 않기 위한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들키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들이 많이 있는데요. 첫 번째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정의를 주장하는 겁니다. 바른말을 하는 것이죠. 내가 바른말을 하고 정의를 주장하고, 사랑을 말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으로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심지어 나 자신도 속일 수가 있는데요. 내가 사랑을 많이 하고 정의를 많이 이야기하면, 내 스스로가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나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말을 아무리 번지르르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옳은 주장을 하고 사랑을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자동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거나,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러한 함정이 바로 우리 크리스천들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특히 목사님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늘 제가 고민하는 문제가 무엇이냐면 바로 그거예요. 매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거라고 이야기하고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냥 자동적으로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고 하면, 말하는 것만 가지고는 그 사람이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 그리고 옳은 사람인지 정의로운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서는 우리를 향해서 권면하기를, 요한일서 3장 18절 말씀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어떻게 하자? “행함과 진실함으로 가자.” 이게 바리새인들의 문제였고, 수많은 성도들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고 정의를 이야기하고 사랑하자고 말하고, 옳은 것을 주장하는데, 그렇게 주장하면 그러면 자동적으로 내가 옳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착시 효과를 가져오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여서 내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나 그렇게 정의를 주장한다고 해서, 사랑을 말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옳은 사람이 되거나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죠.

두 번째로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 우리들의 죄를 가리는 방법이 있는데요.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비난하게 되는 그 순간, 내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어쩌면 정치인들이 하는 행위들이 바로 그런 행위들인데요. 서로 상대방을 향해서 비난하는 겁니다. 아주 상대방의 죄를 들춰내면, 그러면 자기 자신은 자동적으로 괜찮은 사람처럼 보여줘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더 많이 들어내면 들추어낼수록, 나는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생각되게 되는 그런 착시 효과들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그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표를 많이 주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선 사업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여러 가지 선하고 좋은 일들을 하게 되면, 그러면 그 사람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착각을 주게 됩니다. 밤에는 하이드 씨처럼 행동을 하지만, 낮에 치킨 박사처럼 행동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박수 쳐주고, 저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 주면서,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사실은 그 뒤로 호박씨를 까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대비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켜 버립니다. 아담의 경우가 바로 그랬는데요.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물었습니다. “왜 내가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었느냐?”라고 물었을 때, 아담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여인 그 여인이 나로 하여금 먹게 해서 먹게 된 겁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 저 사람 잘못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죄의 책임을 전가시킴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하는 경향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부터 숨어버립니다. 죄를 짓고 나면 그 죄로부터 죄를 지어 그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에게서부터 숨어버리는데요.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거니실 때 그들은 숨었습니다. 창세기 3장 8절 말씀이죠. “그날에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지라.” 우리 교인들도 보면 저랑 같이 밥을 안 먹으려고 그래요. 제가 하나님도 아닌데. 제가 어렸을 때 그랬어요. 내가 무엇인가 잘못을 하게 되면 집에 가지를 못해요. 엄마 아빠가 나를 바라보면, 내 죄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집에 갈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숨는 겁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자주 직면하게 되는 것은 죄를 지어놓고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기준을 대폭적으로 낮추는 것이죠. 마치 운전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요. 모든 운전하는 사람들이 다 과속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 과속을 하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내가 과속하는 것은 괜찮은 것이라고 스스로 안위하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기준을 낮춰버리는데요.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그렇게 주장하면서,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것이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미워하면서 사는 겁니다. 질투하면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높게 있지만, 그 기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서, 이런 정도는 괜찮은 것이라고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또 나가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심판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갤럽 조사에서 한국인의 종교의식을 물었는데요. 우리나라 국민 가운데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믿느냐? 그렇게 생각하느냐?”라고 하는 질문에 몇 명이 심판이 있다고 대답을 했을까요? 최후의 심판이 있다고, 60%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것과 심판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부정했습니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지, 심판은 없어. 하나님이 없어.”라고 이야기해야, 자신들의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고 나서 그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심판이 없다고 이야기해야,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들의 악한 것들이 없어지거나,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허물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시편 32편의 말씀에,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 그 허물을 용서받은 사람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 잘못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셔서, 그 용서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없고, 누군가는 실수를 하고, 누군가는 어떤 잘못을 하고, 우리가 연약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이라고 한다면, 누가 복이 있는가? 죄를 안 지은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안 지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누가 복이 있는가?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 복된 자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지 못하게 된다고 하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32편 3절 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종종 범인이 잡힌 뉴스가 방영이 될 때가 있는데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살인범이, 혹은 어떤 아주 악한 죄를 저질렀던 사람이 계속 숨어 다니고 도망 다니다가 그러다가 경찰에 잡혔습니다. 그래서 잡혀가지고 인터뷰를 할 때 그때 잡힌 범인이 뭐라고 인터뷰를 했는지,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보통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차라리 잡혀서 잘 됐어요. 도망 다니는 것이 괜찮지 않았던 겁니다. 안 잡혔지만, 그러나 그 죄가 그 사람의 양심을 짓누르고, 너무나도 힘들게 해서 차라리 죗값을 받아버리는 것이 내게 더 편하겠다고 하는 말을 하는 것이죠.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악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인데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나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용서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미쁘시다고 하는 말은 믿음직스럽다는 말입니다. 신실하다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부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의 흠을 찾아내서, 거부권을 행사해야 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경찰처럼 누구에게 죄가 있는가? 죄가 없는가를 따져보면서, 그 죄 있는 사람을 잡아다가, 감옥에 집어넣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경찰과 같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음주운전 단속하듯이 경찰들이 쭉 줄을 서고 있어가지고, 차들이 지나가는 차마다 살펴보면서 바람을 불어보라고 하고, 그래서 음주를 했으면 그 사람에게 벌칙을 때리는, 그런 그런 분과 같은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죠.

제가 예전에 미국에 첫 유학을 가게 되었을 때 미국 공항에 내렸습니다. 미국 공항에 내렸는데 제일 첫 번째 관문이 어디냐면, 입국 심사하는 그런 관문이었습니다. 비록 이곳에서 입학 허가서도 받았고, 비자도 받았고, 모든 서류를 다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지만, 그러나 들리는 얘기가 무슨 얘기를 하냐면, 입국 심사관이 있는데 그 입국심사관이 받아들여주면, 미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안 받아들여주고 리젝트(reject) 해버리면, 거부해 버리면, 그 미국 땅에 가서도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 가지고 우리 두 아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입국심사대 앞에 서는데, 얼마나 벌벌벌 떨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입국심사관이 저를 딱 보면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딱 어 상냥하게 어서 왔냐고 이렇게 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영어도 서툰 저에게 딱 이렇게 팔짱 입고, 서류를 다 이렇게 살펴보면서 저한테 질문을 딱 던지는 거예요. 뭐라고 질문을 던지냐면, 미국에 와서 살 주소가 어디냐고 딱 물어보는 거예요. 주소를 몰라요. 제가 어디 살지 몰라서, 지금 집을 구하러 왔는데, 어디 살지도 지금 모르고 있는데, 어디 있을 거냐고 물어보니까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얼마나 불안에 떠는지 저 사람이 나를 흠 하나 잡아서 리젝트 해버리면, 못 들어갈 것 같아서, 너무나도 불안한 마음 가운데 그 앞에 섰던 그런 떨리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그런 이민 심사관, 입국 심사관처럼 제대로 됐느냐? 안 됐느냐? 따져가면서 우리들에게 조그만 흠이라도 있으면, “넌 지옥” “넌 빵점” 하면서, 지옥에 넣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서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로서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 그 죄를 보고, “너는 이런 죄를 지었으니까, 지옥” 해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왜 네가 그랬니?” 그 죄를 껴안고, 우리들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우리의 죄악을 싸매어 주시고, 그리고 다시 낫게 해 주시고 회복시키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안아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바로 우리 어머니와 같으신 분이에요. 우리 아이들이 밖에서 뛰놀다가 다리에 상처가 나면, “엄마 나 상처 났어” 하고 오면, “왜 그렇게 놀았니?” 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상처 난 곳에 소독약을 발라주고, 반창고를 발라주어서, 그래서 온전하게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 부모님의 마음처럼, 하나님께 우리가 우리의 그 고름들을 다 내어 보내고, 우리가 연약했던 모습들을 다 내어놓으면,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사,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우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시편 32편 5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알리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악을 사셨나이다.” 이 시편 32편을 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인가요? 다윗은 한마디로 말해서 파렴치범입니다. 도무지 용서하려야 용서할 수 없는 너무나도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이 다윗입니다. 사울이 더 나쁜 죄를 지었습니까? 다윗이 더 나쁜 죄를 지었습니까? 제가 볼 때는 다윗이 더 나쁜 놈이에요. 남의 여자를 취하고, 그 남편을 전쟁터 최전방에 보내서 교살된 그런 나쁜 놈이에요. 파렴치범이 사울보다 더 악한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다윗이 하나님 앞에 울며 애통하며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을 품으시고 안아주시며,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이 다윗은 그것이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해서, 하나님 앞에 찬송하며 나아오는 귀하고 복된 믿음의 고백을 하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하나님은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보호해 주셨습니다. 시편 32편 6절 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란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다.” 이것이 과분한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사실은 이 아무런 자격도 없는 다윗에게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사랑으로 보호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이 다윗은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사해서 찬양하는 것이고, 그것을 날마다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인생을 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11월은 감사의 달이고 다음 주일은 우리가 추수 감사 주일로 지키는데요. 오늘 우리들의 기도의 제목 우리들의 고백의 제목들도 다윗의 고백과 같은 것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도 역시 다윗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들의 더러운 모습들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셨고 또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번 한 달 지나는 동안에 감사할 제목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감사하며 살아가고, 주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기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감사할 것들을 찾아보면 참 많습니다. 하지만 눈 감아버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죠. 마치 우리 자녀들과 같은데요. 우리 자녀들이 어렸을 때 보면 부모님에게 “엄마 아빠 감사해요”라고 하는 말을 많이 합니까? 불만을 더 많이 터뜨립니까? 불만을 더 많이 터뜨리죠. 장난감 안 사준다고 떼를 쓰고, 왜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느냐고 그렇게 항의하고,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그 아이가 언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어요? 엄마 아빠의 집에서 살면서 그런 불만을 터뜨리는 거예요. 하루 세 끼를 먹여주고 좋은 옷으로 입혀주고 보호해 주고, 온갖 사랑을 베풀어서 그 아이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있는데, 그러한 감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가 원하는 것 하나 안 들어준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던, 그런 꼬마 아이들의 모습처럼, 혹시 우리들의 모습도 하나님의 은혜에 그런 걸 망각해 버리고, 우리가 불만과 불평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결론은 무엇입니까? 시편 32편 9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세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노새처럼 말처럼, 이것들은 짐승들은 굴레를 통해서 재갈을 통해서 끌어야만 끌어가는데, 그렇게 살지 말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가고 회개하며 나아가는 것이 그것이 우리에게 복된 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10절 11절 말씀 32편 10절 11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이번 한 달 동안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을 다시 한번 묵상하고 지금까지 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로 넣는 것 같지만, 그러나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계획과 목표가 있고 섭리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조건들을 많이 많이 발견하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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