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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 (히 12:18-29)

여러분들은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보신 적이 있습니까? 연예인을 만났다든가, 아니면 유명 정치인을 만났다든가, 아니면 유명한 스포츠 스타나 손흥민 선수와 같은 사람들, 혹은 밥 먹으러 갔다가 혹시 백종원 씨 같은 분을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혹시 계신가요? 고개를 끄덕이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럴 때 여러분들의 마음은 얼마나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기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아마 우리 아이들이 bts 그런 가수들을 만난다고 하면 놀라 까무러치고 좋아할 것 같습니다.

저는 한 번 연예인을 가까이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서울의 어떤 교회에 잠시 출석했었는데, 예배드리고 층계를 같이 내려오는데, 연예인 한 명이 올라오더라고요. 누구였냐 하면, 강석우 아십니까? 아주 아주 옛날 일인데요. 그 연예인이 올라오는 걸 봤는데, 텔레비전에서 보는 거하고 실물하고 확실하게 차이가 나는데, 얼굴이 조그마하더라고요. 아, 연예인은 그래서 연예인이 되는구나. 나는 안 되는 이유가 있구나. 실감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기쁘기도 하고 흥분이 되기도 하고 즐거울 텐데요.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요?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가 지금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되겠습니까? 기쁠까요? 행복할까요? 너무나도 좋아서 막 환호성을 지를 것 같습니까? 오늘 1부 예배 때 물어보니까, 너무나도 좋죠 꿈에도 그리는 우리 주님을 만나면 너무나도 좋겠다고 하는 그런 반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그렇지 못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기뻐서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순간, 무서워 벌벌 떨었습니다. 아, 큰일 났구나.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순간에, 자신의 죄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게 되는 것이죠. “내가 너무나도 더럽구나. 내가 너무나도 악하구나.”라고 하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님은 말하기를, 우리는 나 자신을 언제 잘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나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전에는 그냥 괜찮은 줄 알고, 전에는 그냥 내가 그런대로 그런대로 살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순간,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 “내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사람인가, 내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라고 하는 사실이 낱낱이 드러나게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이사야 선지자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환상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어전회의를 하고 있는 그 광경을 환상 가운데서 바라보게 되었는데, 그 모습을 본 이사야 선지자는 너무나도 좋아서 환호성을 지르면서, 너무나도 좋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울부짖었습니다. 이사야서 6장 5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때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더러운 내가, 너무나도 사악한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 완전하신 그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너무나도 무서워서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다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셔서, 그래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여정 가운데 있었습니다. 출애굽 여정을 우리가 한번 잠시 기억해 봤으면 좋겠는데요. 한번 지도를 보면서 여정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애굽 땅에 살던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되어서 홍해 바다를 건너 광야를 지나다가, 시내산에 이르렀습니다. 시내산의 위치가 시내 반도에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지역에 있다. 저렇다. 말들이 많이 있지만, 어디에 있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사건을 경험하고, 그리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난 다음에 저 가나안 땅까지 입성하게 되는 루트로 그렇게 이스라엘 민족이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인데요. 하나님께서 시내산 위에 강림하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 영이신 하나님이시니까 보이지 않잖아요? 우리 눈에 볼 수가 없는 하나님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림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 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자연 현상이 동반됐습니다. 하늘에서는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고, 나팔 소리가 울렸고, 하얀 연기와 불꽃이 일어났고, 그리고 온 산을 뒤엎는 그런 우레와 같은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게 되는, 그런 어마어마한 그런 엄청난 관경을 이스라엘 민족이 목격하면서, “지금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셨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민족들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경고해 주시기를 누구든지 이 시내산에 접근하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사람들도 죽을 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시내산에 접근하게 되면 즉사하게 될 것이라고 돌에 맞아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보면서 기뻐하고 좋아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두려워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으시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이 저 광야 애굽 땅에서 살면서 바로 왕을 섬기고 살았고, 바로 왕의 법을 지키며 살았고, 그리고 바로의 지배 가운데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서부터 해방되어서 나오게 되면서, 이제는 더 이상 바로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그 장면이 이 시내산에서 있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혼식을 하게 되면, 이번 주 토요일에도 결혼식이 있을 텐데요. 신랑과 신부가 결혼을 할 때는 꼭 서약을 하고 결혼을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향해서 신부가 신랑을 향해서 서약을 하는 거죠.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하고, 오로지 당신만이 나의 배우자로서 내가 정절을 지키며 신실하게 살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을 지킬 때, 결혼이 성사가 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스라엘 민족은 저 애굽 땅에서 해방되어 나와서,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하는 그런 언약식을 하게 되는 장면이 시내산에서 이루어지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 시내산에 접근하게 되었을 때 너무나도 무서워서, 하나님이 나타나는 그 장면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모세에게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모세시여, 우리들의 지도자시여,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직접 말하지 않게 해 주세요. 너무나도 무서우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너무나도 무서워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모세 둘이, 모세와만 이야기하고, 그 모세를 통해서 모든 걸 하고, 우리들에게 직접 말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출애굽기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하나님이 좋기는 좋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무서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12장 18절에서부터 29절까지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이 어떤 내용이다.” 이해가 되셨습니까? 아니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잘 안 되셨습니까? 아마 이해하기 힘드셨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오늘 본문은 정말 설교하기가 어려운 본문이고, 설명하기가 어려운 본문이어서, 정말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알아듣기 어려운 본문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어떤 본문이냐면, 바로 그 출애굽의 사건을 배경으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벌벌 떨었던 그 사건을 언급하면서, 지금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2절부터 24절 말씀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구약시대 때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 다가갔는데, 무서워 벌벌 떨었던 그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에, 히브리서를 기록한 기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구약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너희들은, 즉 우리들은 어디에 왔다? 시내산에 간 것이 아니라, 어느 산으로 왔다는 거예요? 시온산에, 시온산으로 왔다는 겁니다.

시온산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시온산,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 장자들의 모임, 교회, 하나님 의인의 영들, 중보자 예수, 더 나은 피 등등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러 표현들이 나오는데, 이 표현들은 각각 다른 대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같은 대상의 여러 가지 측면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텐데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주셔서, 그래서 세워진 교회에 다다른 것이고, 또한 우리는 저 하늘나라 하나님의 도성에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림을 보면서 한번 비교를 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가게 되었고, 그 시내산에서 만난 것은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을 만난 것이고, 율법을 받기는 받았지만, 너무나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경험을 했었다고 한다면, 지금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너희들은, 지금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신약의 성도들은 그런 시내산에 간 것이 아니라, 교회에 모이게 된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고, 하나님의 도성에 이르는 그 길에 이르게 되었다고 대조해서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과의 차이점을 이야기한다고 하면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구약의 백성들은 두렵고 무서운 마음 가운데,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무서웠던 반면에,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누구 앞에 나갔습니까? 무엇 앞에 나갔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앞에 나가게 되었고, 우리는 저 천국에 가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들의 죄를 다 씻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부터 해방시켜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저 하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구약시대 때 사람과 신약의 우리들을 대비시켜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게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면서 내리는 결론이 무엇일까요? 결론이 버킹검이 아니고, 결론이 히브리서 12장 25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일을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일을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일을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어쩌면 그 옛날에 시내산에서 나타났던 하나님과는 달리, 지금 우리는 은혜의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겁니다. 지금의 하나님은 무서워 보이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담대하게 나아가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무섭지 않으니까,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없는 것 같고,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 같아서, 번개가 꽝꽝거리고 천둥이 치고 엄청난 경고가 있었던 구약 시대와는 달리, 지금은 아무런 경고가 없는 것 같아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냥 함부로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게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다고 한다면 더욱더 순종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 즉, 은혜를 받자.” 감사함으로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겨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니까, 이제는 마음대로 악하게 살아도 괜찮다가 아니라, 더욱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순종하며 살아야 된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만히 세밀하게 살펴보면 약간 이상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미래형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르렀다고 표현을 해요. 완료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한번 이 문장의 헬라어를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너희가 시온산에 이르렀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에 이르렀다.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이르렀다. 이미 도착했다. “이미 그곳에 왔다”라고 완료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미래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니라, 완료형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특이한 것이고, 조금 약간 이상합니다.

여러분 지금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까? 하나님의 성에 벌써 도성에 들어가셨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히브리서 12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하늘의 도성에 들어가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지금 천국에 들어간 게 아닌데, 아직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 게 아닌데, 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갔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다”라고 완료형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국에 대한 개념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천국의 개념이 약간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천국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천국의 개념,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가는 곳이, 천국이란 어디 있는가? 저곳에 있어서,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죽게 되면 가게 되는 것이 천국인 것이죠. 지난주에 우리 김춘수 장로님의 장례를 은혜 가운데 마쳤습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목소리가 참 생생하고, 아직 더 오래 사실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갑작스럽게 그런 비보를 듣게 되어서, 너무나도 슬펐고 참 그렇게 따뜻하게 웃어주는 장로님 미소가 예쁜 남자 아니었습니까? 너무나도 좋은 그런 장로님이셨는데, 그런 분을 잃게 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슬픈 일이고, 우리 교회로서도 아주 큰 손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를 치르면서, 그나마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이 세상의 모든 수고와 고통을 내려놓고, “이제는 천국에 가셨구나. 이제는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기 때문에, 그나마 위로를 얻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어딘가 우리가 죽으면 가는 곳이 한편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천국을 그렇게 죽으면 가는 곳이라고 하는 의미로, 장소적인 의미로 설명하기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한번 그림을 보면서 보면 좀 더 이해가 좋을 텐데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어딘가? 장소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곳이 아닌 저 어딘가에, 하늘 어딘가에 혹은 차원이 다른 어딘가에 천국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개념이 무엇이냐면, 성경적인 개념은 천국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천국이에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붙잡아주는 곳, 우리와 함께 있는 바로 그곳이 천국이라고 하는 게 성경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죽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하게 된다고 한다면, 100% 완벽한 천국이 되겠지만, 이 세상은 그러면 천국이 아니냐? 아니에요. 이 이 세상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한다면, 그 삶이 천국의 삶이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게 성경적인 개념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나중에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게 될 것이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지옥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그 순간,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계시고, 주님께서 우리의 삶과 동행해 주신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경험하며 살 수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국의 삶을, 나중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면, 그리고 그 순종하는 삶이 계속된다고 하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결국은 이 순종의 영역이 커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영역이 커지게 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맛보면서 미리 맛보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천국을 누리며 살 수 있는가? 돈을 많이 벌어야 되는 게 아니에요. 성공해야 되는 게 아니에요. 물론 제가 이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돈이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고요. 성공하지 말라고 하는 법도 아니에요. 기왕이면 성공하시고, 기왕이면 돈도 버세요.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 그게 천국의 삶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권면하고 있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이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에 포함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누리며 살라고 권면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요셉이라고 하는 이 청년은 노예로 끌려갔어요. 어느 날 갑자기 자기의 형들이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려서, 생면부지의 먼 타국으로 이끌려가서, 그곳에서 보디발이라고 하는 장군의 집에 노예로 일하게 됐습니다. 상황만으로 보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입니까? 하지만 그가 노예로서 살게 되었다고 해서, 요셉의 삶은 지옥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비록 노예로서 살았지만, 요셉은 천국을 산 것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나중에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되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 감옥도 그것이 지옥이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형통했고, 그 감옥에서의 삶도 천국의 삶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러 다니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됐어요. 그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하나님 이게 뭡니까? 왜 우리가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해야 됩니까? 한탄하며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찬송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사도행전 16장 25절의 말씀입니다. “한밤 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곳에 있는 모든 죄수들이 절망하고 있고, 그곳에 있는 간수들조차도 기쁨이 없는데, 놀랍게도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거예요. 하나님께서 동행하신 것을 깨달은 거예요. 그러니까 저절로 찬송이 나오는 거예요. 그냥 내가 억지로 찬송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바울에게 있어서는, 실라에게 있어서는 그 감옥이 지옥이 아니라 천국의 장소였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가 어디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정말 하찮은 기준을 들이밀면서, 우리로 하여금 교만하게 만들기도 하고, 절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조그만 것 더 많이 가지면 교만해지고, 조그마한 것 없어지면, 절망하게 되고, 여러 가지 기준과 성공의 기준들을 얘기하면서, 그래서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 성공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 등등 여러 가지로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게 그렇게 만들고 있는데,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과 함께 길을 걷는다고 하면, 그 자리가 천국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그 상황 가운데서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절망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곳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도, 하나님을 바라보면 거기가 천국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아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아주시면, 거기가 천국이 되는 거예요. 거기가 기쁨이 넘치는 곳이 되는 거예요. 예수께서 건너오셔서, 내 손을 잡고 건너가는 것, 내 평생소원이로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주님 손 붙들고 가면,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치고, 은혜가 넘치고 저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의 삶을 우리가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신 이유는,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에게로 이끌기 위하심이었습니다. 고아와 같이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아니하고, 그냥 내팽개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하는 것을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무서워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면 망할까 봐, 억지로 두려움 가운데, 그 옛날 구약 시대에 성도들이 무서움 가운데 신앙생활했던 것처럼,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그 기쁨이 너무나도 기쁘기에, 나에게 힘과 은혜가 되기에, 주님만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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