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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학 강좌 제1강 – 성경 해석학의 목적, 바른 해석이 존재하는가?

1. 성경 해석학의 목적

지난 추석을 앞두고 광고를 했습니다. “다음 주일은 온 가족 예배로 드립니다.”라고 광고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부 안에는 추석 가정 예배 순서지까지 넣어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1부에 운행하시던 차량 기사분께서 가시면서 우리 권사님들에게 말씀하셨어요. “다음 주는 교회에서 안 모인답니다. 다음 주는 온 가족이 함께 집에서 예배드리랍니다.” 그래서 추석 주간에 주일 1부 예배 때, 차량 운행도 안 하시고, 우리 권사님들께서 집에서 예배드리나 보다 했습니다. 온 가족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는 것은 주일학교 학생들과 중고등부 학생들과 함께 이곳에서 같이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는 의미로 광고를 한 것인데, 그 광고를 듣는 분께서는 그 가운데 일부는 “다음 주일은 교회당에서 예배가 없구나. 가족들끼리 예배를 드리는 거구나.”라고 이해를 하신 것이죠.

어쩌면 우리들의 그 말과 우리들의 커뮤니케이션은 항상 오해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말하면, 말하는 의도를 제대로 잘 파악하기보다는,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내 나름대로 생각해서,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내 의도와는 다르게 불쾌해하기도 하고, 정말 실망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잘못된 그런 이해를 하게 되는 경우가 우리 실생활 가운데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말하는 사람의,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는 분의 그 의도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게 우리들의 과제이자, 우리들의 참 목표인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경을 주셨는데,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대로 이해해 버리고,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고, 듣고 싶은 대로 들어버려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목적대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대로, 우리가 그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잘 따르고 순종하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원칙이 무엇이겠습니까? 종종 우리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가감하지 말고,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문자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 맞을까요? 정말 그것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것일까요? 우리는 늘 혼란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때는 이대로 해서 문제가 되고, 어떤 때는 그 말씀대로 하지 않았다고 해도 별 문제가 안 되는 경우들을 만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군대 훈련이 있었어요. 사회에서 살던 맹구가 군대에 입대해서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교관이 명령을 하는 겁니다. 지휘관이 명령을 하는 거죠. “점심시간이다. 식판 들고 집합.” 그랬어요. 요즘에는 식당에 식판이 있으니까, 그럴 일이 없겠지만, 예전에는 식판을 들고 집합해야 될 때가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맹구는 그 지휘관의 말을 문자 그대로 들었습니다. 무엇을 들고 집합하라고? 식판 들고 집합하라고 했으니까, 식판만 들고 집합했습니다. 식판만 들고 집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냐하면 바로 조금 전에 지휘관으로부터 엄청나게 혼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는 왜 시키지도 않은 걸 하냐? 너 왜 이렇게, 네 마음대로 하냐? 내가 말한 것만 지켜.”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하면 안 된다고 엄청 혼났던 경험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 이걸 가져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고, 지휘관이 이것을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가지고 갔는데, 내가 가져오라고 말하지 않은 걸 가져왔다고 혼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지휘관의 말을 철저하게 잘 듣기로 한 겁니다. “식판 들고 집합” 그래서 식판만 들고 집합하는 것인데, 또 혼났습니다. 점심을 먹으려면 숟가락 갖고 와야지? 군대 숟가락 어떻게 돼 있는지 아세요? 숟가락에 포크식으로 돼 있어요. 젓가락이 따로 없어요.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밥으로 먹고, 숟가락 그걸로 포크처럼 찍어서 반찬 먹고, 싸우면서 젓가락 들었다. 숟가락 들었다. 어떻게 합니까? 숟가락에 이렇게 포크처럼 돼 있어서, 국도 떠먹고, 찍어 먹기도 하는 그 숟가락 가지고 가지 않았다고, 지휘관한테 엄청 혼난 거죠. 맹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어떤 때는 문자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고 혼나고, 어떤 때는 문자 그대로 했다고 혼나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런 일들이 군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웃사라고 하는 사람은 법궤가 땅에 떨어지려고 할 때, 즉시 그 법궤를 만졌습니다. 웃사가 법궤를 만진 것은 땅에 떨어져서 박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선한 의도를 가지고 만진 겁니다. 웃사가 나쁜 마음으로 법궤를 만진 게 아니고, 그 법궤를 보호하려고 하는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웃사를 향해서 진노하셨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성경 말씀의 레위기서의 말씀을 보면 법궤는 아무나 만질 수 없고, 오로지 제사장들만 만질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던 것이죠. 그래서 진노를 당해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제사장 아히멜렉이라고 하는 사람은 진설병을 다윗과 그 일행들에게 제공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진설병은 오로지 제사장들만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이 아닌 사람들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어긴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히멜렉을 심판하시지도 않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아히멜렉 제사장의 그 행동에 대해서 두둔하시며, 아히멜렉이 한 일이 잘한 일이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도대체 어디에다가 장단을 맞추어서 춤을 추어야 하는가? 우리도 늘 혼란스럽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제사를 철저하게 드렸습니다. 내 위기에 규정한 그대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는 양을 잡아서 드렸는데, 흠이 있는 것, 얼룩이 있는 것, 그 어느 것 하나님께 드리면 안 되고, 오로지 흠이 없는 정말 완벽한 양을 골라서 드려야 한다고 하는 그 규정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완벽하게 문법 그대로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규정에 맞게 드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진노하셨습니다. 너희가 드리는 그 제사를 내가 싫어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는 그런 제사를 내게 가져오지 말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규정하신 그 규정을 정확하게 지켰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를 싫어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가인과 아벨이 함께 똑같은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겁니까? 성경 말씀대로 순종했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기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 앞에 울며 회개했습니다. 시편 51편의 말씀 가운데서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만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한다면, 내가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고 하면서, 회개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했는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의 회개를 받아들이셨고, 정말 너무나도 끔찍한 그 파렴치범인 이 다윗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은 정말 완벽할 정도였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라고 해서 십일조를 드렸는데요. 일반 사람들은 그냥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을 뿐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일반인들이 흔히 지나치기 쉬운 것까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구별해서 십일조를 드렸어요. 늘 잊기 쉬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까지, 십일조를 내가 계산하지 않고 빠뜨린 것이 없는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새인들의 그 십일조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잘했다고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율법에 더 중한 것을 잊고 있다고 책망하신 것이죠.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지 최대한의 노력을 다 기울인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준수는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을 거역하고 안식일을 무시하는 것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제자들은 안식일만 어긴 것이 아니라, 정결법도 어겨서 정말 정결한 손으로 음식을 먹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결법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보시면서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을 용납해 주신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는데 지켰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정하신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해석학을 이번 학기에 배우려고 하는데요. 앞으로 몇 주간에 걸쳐서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같이 고민해 보려고 하는데, 이 성경 해석학 과목에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의 문자를 그대로 잘 해석하는 것 정도를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것이 성경 해석학의 진짜 목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리석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기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된 문자의 표현에 함정에 빠져버릴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불가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그 달을 바라봐야 되는데, 달을 바라보지 않고 손가락을 바라보면서, 왈가왈부하는 일들이 안타깝게도 우리 교회 내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라고 하는 제도를 만들어 놓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회개하는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죠. “내가 용서해 줄 터이니까, 이제는 더 이상 죄짓지 말고 살아라”라고 하는 그런 의미일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들은 제사 제도를 드리고, 그 이후에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내가 할 일 다 했으니까 됐다고 이야기한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셨던 회개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여전히 죄를 지었고, 여전히 이웃들을 향해서 악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탐욕적이고 또한 착취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정말 힘들게 만들면서 살아간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고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라고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경제생활을 할 때, 정직하게 돈을 벌려고 하는 그런 의미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돈이 나의 우상이 아니라, 돈이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진짜 하나님이시기에, 돈이 나의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의미에서, 10분의 1을 드리는 것이고요. 그래서 그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이고요. 그러기에 우리가 돈을 그냥 막무가내로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정직하게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처럼 살아야 하고, 이웃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면서 살아야 하는 그 모든 목적이 이 십일조의 규정 가운데 들어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런 민족 그런 목적들은 다 잊어버리고, 그저 십일조만 철저하게 계산해서 완벽하게 드리면, 내가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하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죠

안식일 규정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두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돈이 너의 우상이라고 생각해서,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자비하게 일을 시킬 게 아니라, 너희 집안에 있는 노예들이라고 할지라도 일주일에 하루는 쉬게 만들어 주어라. 그렇게 악착같이 돈 벌지 말고, 사랑을 베풀며 살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에게도 쉼을 주어야 하는 것이고, 그들의 가정과 그들의 삶의 복지를 위하여, 그리고 선을 베풀려고 하는 것인데, 그러한 의도는 다 망각해버린 것이죠. 그들도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게 만들고, 그들도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저 내가 악착같이 돈을 벌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고, 그냥 일주일에 하루만 예배드리면 된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죠.

이것은 어리석은 남편들 같아요. 남편들에게 말을 하면 왜 이렇게 못 알아듣는지. “세탁기 돌려놔” 하면 세탁기를 돌려놓습니다. 이상하다. 세탁기 설치 잘했는데, 왜 돌려놓으라고 할까? 빨래가 지금 그 앞에 잔뜩 쌓여 있는데도, 남편은 생각하는 겁니다. 왜 세탁기를 돌려놓으라고 하지? 이상한데. 지금 잘 설치됐는데, 그래도 나중에 피곤하지 않으려면, 돌려놓자. 그러고 열심히 돌려놓는 겁니다.

그림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어떤 사람이 부인이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회사 갔다 오면, 창고에 들어가서 오토바이 고치고 수리하는 일에만 그렇게 시간을 다 보내느냐고, 왜 맨날 창고에만 있느냐고 성질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그 오토바이를 거실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어요. 그래서 오토바이를 그 안에서 열심히 수리하는 겁니다. 그 모습을 아주 째려보고 있는 그 아내를 향해서, 남편이 소리치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야?” 도대체 어떡하란 말이야? 처음에는 내가 창고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말하고 하더니만, 당신이 이제는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고 하고, 도대체 어떡하란 말이야? 문갑열 장로님도 그러시나요? 제가 그랬어요. 어리석은 남편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설거지 좀 해달라고 하는 이야기는 설거지만 해버리면 된다는 거 아니잖아요? 가라지에, 창고에 너무 많이 있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는, 거기에 있지 말고 다른 곳에 있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같이 이야기도 하고 대화도 하고,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 그런 의미인데, 우리는 그 말 표현만 보고, 살아가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문자의 함정에 빠져버린 경우가 너무 많은 것이죠. 문 닫고 들어와 그랬더니 문 앞에서 못 들어오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문 닫고 들어가지? 이상하다. 문 닫고 들어오라니, 방법을 찾지 못하던 그 남편이, “딱” 치면서, “아, 맞아. 창문으로 들어가면 되지.”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맹구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남편과 같은 사람이 되죠. 그런데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우리 전라도 사람들은 다 알아들어요. “거시기 있잖아.” 하면, 다 알아요. 그래서 전라도 사람들이 신앙이 좋아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분들이야. 우리가 성경 말씀을 잘 배우고 읽어야,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셨을까 알아가야 되는 것이죠. 그 방법을 우리가 배워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런 눈을 가져야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믿음이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믿음의 눈으로 들어야, 하나님의 마음이 보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말씀을 해 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잘 알아요. 그래도 하나님의 마음을 쉽게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더 알기 어려운 게 뭐냐면, 아기들의 마음이고 갓난아기들의 마음. 더 알기 어려운 것은 식물들의 마음이에요. 그런데 저는 잘 분간하지 못해요. 이 식물이 지금 물을 달라고 하는지, 공기가 필요하다고 말을 하는지, 저는 잘 몰라서 그래서 늘 죽여요. 그런데 우리 문갑열 장로님 오셔서, 매주 물 주시고 창문도 열어주시고, 그러니까 내 평생에 제 방에서 이렇게 식물이 잘 자라는 경우는 평생 처음 있는 일입니다. 지금 기적이 지금 제 방 안에서 막 일어나고 있어요. 왜냐? 세심하게 그 식물들을 알아가면서, 식물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한 애정의 마음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런데 역시 아이들을 돌볼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갓난아기들이 우는데, 배고파서 우는 건지, 기저귀 갈아달라고 우는 건지, 졸려서 우는 건지 저는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가면 더 울어요. 근데 제 아내가 가면, 어떤 때는 우유를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기저귀 갈아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얼래서 달래서 재우기도 하고, 그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때, 그 아기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사실 하나님의 그 마음을 잘 아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게 된다고 하면 말하지 않아도 다 통하는 겁니다. 30여 년을 살다 보니 제가 말하지 않아도 제가 먹을 먹을 그런 음식을 잘 알아서 미리 준비해 놓더라고요. 주문하지 않아도, 내가 미리 뭘 먹고 싶다고 말하지 않아도 주문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랑과 애정의 마음으로 바라본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좀 더 알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2. 바른 해석이 존재하는가?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게 성경 해석학의 목표라고 했는데, 그런데 도대체 그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정말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똑같은 것을 들려줘도 어떤 사람은 “바이든”으로 듣고, 어떤 사람은 “날리면”으로 들어요. 똑같은 것을 보여줘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보고 다른 사람은 저렇게 보는 겁니다. 원통이 있는데, 그 원통에 동그라미 면을 본 사람들은 동그라미로 보고, 어떤 사람은 네모면을 보고, 네모를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누구의 해석이 맞는 것일까요?

유엔본부 안에 들어가게 되면, 유엔 본부 안에 커다란 벽화가 양쪽에 있는데요. 페르낭 레제라고 하는 프랑스 작가가 그린 그림이 양 옆에 있습니다. un 본부에서 해설하는 그 해설사가 말하기를,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이 그림의 제목은 무제다 그랬어요.” 제목이 없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라는 겁니다. 정답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기만 하면 괜찮다. 그거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미국의 34대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은 말하기를 아 저건 꼭 계란 후라이 같이 생겼네요. 그랬어요. 뭐가 계란 후라이 같이 생겼어요? 저거 또 저걸 보고 저건 꼭 토끼처럼 생겼네요. 그랬어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보면 되는 겁니다. 시라고 하는 것, 예술품이라고 하는 것, 음악이라고 하는 것은 정답이 있다기보다는 나름대로 독창적인 해석을 하는 것에 박수를 쳐주는 것이죠.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똑같은 슈베르트의 곡을 치고, 모차르트의 곡을 쳐도 그 사람이 해석을 마음대로 해서 그 해석자가 내가 해석한 방식대로 연주를 하면, 연주한 대로 박수를 받고, 또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서 다르게 연주하면 다르게 해석해도 박수를 받는 것이죠.

그래서 현대 미학의 이론에 의하면, 모든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작가에게 매여 있는 종속적인 것이 아니라, 예술품이라고 하는 것은 작가에게 매여 있는, 종속적인 것이 예술품이 아니라, “예술품은 작가가 만드는 그 순간에 독립성을 띤다”라고 해요. autonomy를 가진다고 하는 것이죠. 자율성을 가진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작가가 이 예술품을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예술품이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것을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의미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답이라고 하는 게 없고, 그냥 내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내가 느끼는 대로 느끼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면 된다는 것이 현대 미학의 이론이기도 하고,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포스트모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가치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정답이 없다는 게 포스트모던의 가장 중요한 논지죠. “너, 그렇게 생각해? 오케이. 그래 좋아. 너는 그렇게 생각해. 나는 이렇게 생각할게. 그래, 너, 당신은 그렇게 생각해. 나는 이렇게 생각해. 좋을 대로 생각해. 우리 서로 싸우지 말자. 서로 너는 너고, 나는 나고, 그냥 우리 편하게 느끼는 대로 살자”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대를 이루고 있는 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그러한 현대적이고, 포스트모던적인 그런 사고가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도 들어와서,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도 정답이 없다고 하는 주장이 많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없다. 당신이 그렇게 해석했으면, 좋아. 그대로 해석해.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당신은 이렇게, 그냥 자기가 느끼는 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해석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경향이 오늘날 많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성경을 읽고 싶은 대로 읽고,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고, 그냥 내가 읽고 해석하면 괜찮은 것일까요? 어떤 것일까요? 최근에 성서유니온이라고 하는 곳에서, 최근도 아니네요. 벌써, 벌써 1년인가 지났을 것 같은데요. 성서유니온이라고 하는 곳에서 청소년 매일 성경이 발행되었었는데, 그 청소년 매일 성경에 발행된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구냐면, 재미 경제학자가 그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쓴 글의 내용이 뭐냐 하면, 달란트 비유를 해석하면서, 달란트 비유의 는 어떤 비유인가? 이 비유는 열심히 일해서 열심히 수고해서 최선을 다해야 된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처럼 열심히 일해야 된다”라고 하는 의미를 전달해 주는 게 달란트 비유의 의미가 아니라, 내가 볼 때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잘했다. 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당시의 경제 체제가 사악한 경제 체제라고 하는 것을 알고, 이 주인이라고 하는 것은 사악하고 포악한 그런 지주라고 하는 것을 알고, 그러한 지주에 순응하기보다는 항거하면서, 변혁을 이끌어낸 그런 종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분들도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이 시대의 그런 레짐(regime) 이 시대의 그런 가버너스(governance), 이 시대의 그런 구조의 스트럭처(sturcture)에 순응하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은 항거하며 새로운 세대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라고 하는 놀라운 해석을 거기다 적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의 엄청난 항의를 받고, 결국 성서유니온이 항복해 버려서, 더 이상 그 저자의 글을 싣지 않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었던 것인데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성경에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보면 이것도 맞고, 네가 저렇게 보면 저것도 맞고,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고, 내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해서, 그래서 나에게 유익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그런 관점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에 많이 퍼져 있어서, 그래서 무슨 이야기까지 하냐면,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른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이 이게 하나님의 뜻일 거다. 이게 하나님의 목적일 거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일 거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의견들이 다 다르지 않느냐? 과연 누구의 말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걸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건 너의 생각일 뿐이고, 그건 네 생각일 뿐이고, 난 아니야. 그러니 우리 서로 누가 누구의 의견이 맞는지 모르니, 우리는 그 실체적인 진리를 접근할 수 없다. 접근할 수 없으니, 그저 우리는 싸우지 말고 서로 약점을 얘기하면서,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느끼는 대로 느끼고, “해석하는 대로 해석하며 살자”라고 하는 그런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경향에 의하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정답이라고 하는 것은 없고, 그냥 자기가 마음에 끌리는 대로 해석하면 된다고 하는 그런 입장인데요. 성경이 정말 정답이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의도는 알 수 없는 것일까요? 알려지지 않는 것일까요? 어차피 알려지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왜냐하면 사람들은 늘 자기 입장에 서서 해석하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을 해석할 때, 내가 내가 객관적이고 공평하고 정말 완벽한 그런 상태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해석자인 내가 사실은 생각이 이미 굴절되어 있어요. 나 나름대로의 색안경을 끼고 있어요. 그러니까 해석자가 객관적인 객관성을 띠고 있는 해석자가 아니고, 무균실에 들어가 있고 진공 상태에 있는 해석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역사의 영향들을 많이 받고,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여러 가지 세계관과 가치관에 영향을 많이 받은 상태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정말 객관적이고 정말 절대적인 그런 해석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고, 그냥 서로서로 인정하며 살자라고 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바른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바른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알려질 수 없는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이 던져질 수가 있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른 해석이 알려지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바른 해석을 찾아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른 해석은 존재하며,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그냥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바른 해석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연구하고 깨달아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죠?

시나 그림이나 음악이나 이런 예술품은 마음대로 해석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게 있어요. 무엇이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게 있죠? 부동산 매매계약서, 전세 계약서, 월세 계약서, 사업 물품 납품 계약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 되나요? 아니요.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계약하면 손해만 보는 겁니다. 내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데, 대출받을 때 3% 이자로 대출을 받기로 했어요. 3%면 싸다. 2%로 받기로 했어요. 2%면 싸다 해가지고 돈을 빌렸어요. 3%가 뭐야? 하고 아내가 물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그거 고정금리야. 고정금리 3%로 빌리는 거야. 그러면서 기분 좋아가지고, 막 내가 돈 잘 빌렸어. 이거 사업해가지고 갚자. 그랬어요. 그런데 계약서를 보니까, 고정금리가 아니라 변동금리라는 게 계약서에 있습니다. 써 있는 겁니다. 내가 고정금리라고 생각했다고 해서, 고정금리가 되나요? 아니요. 변동금리로 써있으면, 변동금리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자율이 5 몇 프로, 6프로, 7프로, 지금 몇 프로까지 갈지 모르겠어요? 망하는 겁니다. 돈 못 갚는 부도 사태가 나는 겁니다. 계약서는 내가 느끼고 싶은 대로 느낀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분명한 해석이 있고, 분명한 표현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정확하게 해석해야 손해 보지 않고 망하지 않는 겁니다.

성경은 무엇인가? 성경은 우리가 그냥 기분 좋은 대로 읽고 해석하고, 내가 느끼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느끼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 무엇이 관련이 되어 있어요? 우리의 전 인생이 관련되어 있고,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성경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그래서 바른 해석을 찾아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수많은 신학자들이 바른 해석이라고 하는 것을 찾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그냥 바른 해석은 뭔지 모르겠고, 그냥 마음대로 해석하자라고 하는 그런 분위기가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른 해석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고, 그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알아내가는 그런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죠.

이해가 되십니까? 여기까지만 할까요? 너무 어렵습니까? 너무 재미가 없습니까? 너무 지겹습니까? 졸려서. 여기까지만 합시다.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 시간에 또 계속해서, 그다음 주제들을 찾아가겠는데, 성경 해석학 강좌 첫 번째 시간이라서 제가 서론적인 이야기를 해서, 좀 이게 무슨 얘기인가 하셨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이제 이것을, 서론을 제가 조금 한 다음에, 이제 실제적으로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하나씩 하나씩 원리들을 살펴보고, 그 원리에 따라서 성경 본문들을 해석하는 훈련들을 하나씩 해나가는 걸 통해서, 앞으로 여러분들이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그런 영적인 그런 실력들이 우리 교우들 가운데 많이 넘쳐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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