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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학 강좌 제2강 – 바른 해석의 장애물과 출발점. 성경은 무엇인가?

3. 바른 해석의 장애물

오늘은 우리가 바른 해석을 하는 데 있어서 장애물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깨달아야 할 텐데, 그렇게 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우리 장애물들을 알아야 되는데요. 그 장애물들을 우리가 잘 알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장애물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래서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잘못될 수 있구나”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것에 대한 장애물들을 살펴보게 되겠는데, “이 장애물 때문에 어렵다.” 이 장애물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 아주 참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우리가 해석이 쉽다. 좋다. 이렇게 긍정적인 얘기를 하면 참 좋겠는데, 먼저 부정적인 얘기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좀 안타깝습니다. 이것 때문에 어렵다. 저것 때문에 어렵다. 그런 장애물들을 이야기하려고 하는데요. 이렇게 장애물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그 장애물이 있는 줄 모르고, 우리의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장애물 때문에 잘못 해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해석한 게 맞다고 생각을 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무식하면 목소리가 커요. 무식하면 또 용감해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열정적이고, 또 과감하고 한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정작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이라고 하는 걸, 한번 질문을 던져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게, 가짜 뉴스에 의해서, 잘못 전달된 정보 때문에, “내가 지금 화가 나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잖아요? 안 그러면 우리가 손해를 보게 되는 것처럼, 성경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에게 어떤 장애물이 있어서, 그래서 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을 알아야, 그래야 바른 해석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장애물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장애물은 “시간적인 거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21세기입니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에 쓰여졌던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성경이 언제부터 쓰여졌죠? B.C. 주전 15세기경부터 쓰여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에 성경이 완성이 된 겁니다. 그런데 그만큼 시간적 간격이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언어적인 거리가 되겠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한국말입니다. 그리고 몇몇 분들은 한국어 외에도 영어나 불어나 독일어나 외국어를 읽을 수 있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무튼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말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성경은 한국말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라고 하는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언어의 차이가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심지어 같은 한국말이라도 이해하는 게 쉬운가요? 어렵습니다. 한국말도 그렇게 오해가 많아요. 지금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는 한국말도 오해가 많고, 심지어 100년 전에 쓰여진 글만 읽어도, 도대체 이게 무슨 내용인가 모를 정도이고, 세종대왕께서 쓰셨다고 하는 훈민정음을 읽어도, 도대체 무슨 뜻인지 학교에서 배워야 알지, 그냥 읽어서는 모르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 헬라어 히브리어 아람어로 되어 있는 성경 말씀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해서 우리가 그 번역을 읽고 있는데요. 사실 그런데 이 번역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겁니다. 번역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 아니죠. 왜냐하면 한쪽, 어떤 한 언어에서 다른 한 언어로 이렇게 번역할 때, 그 의미가 그대로 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한쪽 언어의 단어가 가지는 그 단어의 의미와 그 단어를 번역한 우리나라 말의 언어 사이에 의미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 자체가 굉장히 어려워요.

예를 들어서 아빠라고 하는 헬라어가 있습니다. 아빠라고 하는 그 헬라어를 보면 한번 보여주면 좋겠네요. 아빠라고 하는 그 헬라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나라 말에서 아빠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죠? 아버지죠. 아버지인데, 그 아버지를 어린이가 친밀하게 허물없이, 이물 없이 부를 때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 아빠라고 하는 말이 우리나라 말에서는 그렇게만 사용되는 게 아니에요. 아내가 남편을 지칭할 때도 아빠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렇죠?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지칭할 때도 아빠라고 이야기를 해요. 아범이라고 얘기도 하잖아요? 아빠. 우리 손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 아빠, 남편을, 자기 아들을 지칭하는데, 아빠라고 쓰는 용례가 우리나라 말에는 있다 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 헬라어인 같은 단어라고 할 수 있는 아바의 아바라고 하는 말이거든요. 아바라고 하는 말은 물론 어린이가 아버지를 친밀하게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사용했는가? 이웃 어른한테도 아빠라고 불렀어요. 선생님한테도 아빠라고 불렀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아빠라고 하는 말을 아빠라고 하는 헬라어를 우리나라 아빠로 1 대 1로 번역할 수가 있겠는가? 그때그때마다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단어가 정확하게 똑같은 것이 아니라, 그 의미의 영역이 달라요. 다르기 때문에 번역 자체가 아주 깔끔한 번역 최상의 번역이라고 하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잘 된 번역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늘 그 의미의 영역의 차이로 인해서, 오해가 전달될 가능성들이 많이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책이라고 하는 단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블로스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요. 비블로스 하면 한국 말로는 책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헬라어의 비블로스는 뭐냐 하면, 족보를 의미하기도 하고, 성경을 의미하기도 하고, 노트를 의미하기도 하고, 책을 의미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비블로스라고 하는 것을 단순히 책으로만 번역할 수 없다 이 말이에요. 다른 단어로도 번역할 수가 있는 것인데, 번역자가 문맥을 보고 상황을 보면서, 적절하게 이 경우에는 아마도 족보라고 하는 의미이겠구나. 이 경우에는 성경이라고 하는 의미겠구나. 그때그때마다 번역자가 선택해서 번역을 해 주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죠.

비유라고 하는 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유라고 하는 말을 보면 “파라볼레”라고 하는 것이 헬라어로 비유라고 하는 말인데, 우리나라 말에서 비유라고 하는 것은 비유를 말하고, 풍자 은유 이런 것들을 비유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헬라어에서 “파라볼레”라고 하는 것은 속담을 의미하기도 하고, 조롱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수수께끼를 의미하기도 하고, 대조를 의미하기도 하는 등, 그 의미의 영역이 굉장히 다양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언어적인 차이가 있어서,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데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세 번째 장애물이 있다고 한다면 문화적인 차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 당시의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만 이해가 가능한 겁니다. 문화 속에서 언어가 존재하고, 문화 속에서 언어가 의미 있는 것이 되는 것이죠. 제가 한국에서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토플도 공부해서 토플 점수가 꽤 잘 나왔어요. 그래서 미국 유학까지 간 겁니다. 그런데 미국 가서 처음 미국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까, 대화가 통하지 않아요. 말이 통하질 않아요. 왜 왜 말이 통하지 않았을까요? 상황이 생소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상황 속에서 쓰는 말이 있어요. 식당에 가서 쓰는 말, 우리가 공항에서 쓰는 말, 그리고 자동차 운전하면서 쓰는 말, 그때그때 상황에서 쓰는 말들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말을 잘하느냐? 언어를 통달한 사람이 말을 잘하는 게 아니고, 상황을 빨리 캐치(catch)하는 사람들이 대화가 되는 거죠. 상황을 빨리 캐치하는 사람들은 손짓 발짓을 하면서 대화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알지 못하면, 무슨 얘기인지 아무것도 몰라요. 우리 한국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서로들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 가운데 없던 사람이 들어와 가지고 앉아 있으면, 한국말로 서로들 이야기하고 있는데 알아들어요?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들어요. 왜냐하면 지금 그 상황이 어떤 상황에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 상황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서로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 자리에 어떤 나중에 한 사람이 딱 들어가게 되면, 도대체 무슨 얘기가 오고 가고 있는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눈치를 보면서, 이렇게 딱 이렇게 보다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구나 상황이 이해되면, 그때 대화가 가능해지는, 그러니까 문화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성경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우리는 물어보는 거죠. 너 몇 살이야? 왜 만나서 몇 살인가를 물어보죠? 외국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해요. 근데 몇 살이에요? 민증 까보고, 그래서 우리는 그 문화가 뭐예요? 나이가 누가 더 많나? 위아래를 결정하고 나야, 그때서야 마음이 편해지고 대화가 된다 이 말이에요. 몇 살인지 확인이 확인돼야 되는 것이고, 우리는 만나서 밥 먹었냐고 물어봐요. 남이 밥을 먹었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런데 밥을 먹는 그걸 물어본단 말이에요. 왜? 우리는 밥 먹었는가를 물어보는 게 인사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문화를 알지 못하면, 한국말을 안다고 해서, 외국인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말의 대화를 알아듣는 게 아닌 겁니다. 단어의 뜻을 알고, 문장의 뜻을 안다고 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를 이해해야 알 수가 있는 것이죠.

서로 입 맞추며 문안하라고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데, 왜 입을 맞추죠? 왜 성도들끼리 서로 입을 막 맞춰죠? 그 당시에 인사하는 법이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런 문화나 이런 것들을 잘 알지 못하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라고 하는 말이 나와 있으면, 왜 이런 말이 나와야만 했었는지, 그 당시에 문화가 무엇이었는지, 이런 것들을 제대로 잘 연구하고, 그 문화를 알아야 되는데, 모르면 그냥 문자, 문화와 문화와 그 문맥과 상관없는 그 문자에 매여서, 엉뚱한 이야기들만을 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문화가 다 달라요. 세겜 땅이었던가요?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아내의 묘를 쓰기 위해서 땅을 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땅을 살 때 물어봐요? 내가 이 땅을 사서, 그래서 내 아내를 장사하고 싶다고 이야기할 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사이에 무슨 돈을 계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땅값은 얼마지만, 그냥 가져가세요.” 그래요. 공짜로 준다는 얘기인가요? 예? 공짜로 준다는 것처럼 들려요? 그런데 그게 장사하는 대화예요. 대화. 얼마라고 값을 이야기하잖아요? 땅값이 얼마예요. 돈 내려면 이 정도 돈 내요. 그 가격을 제시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뭐라고 대답을 해야 돼요? 어찌 제가 공짜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땅값이 그만큼이라고 하는데, 그만큼은 다 못 드리고, 한 80%로 해 드릴게요. 그러면 “아.. 무슨 말씀이에요? 아.. 그러지 마세요. 그러면 그러면 90%에 드릴게요.” 흥정하는, 공짜로 주는 것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공짜로 준다는 얘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이 세상에 공짜로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땅을 팔아먹는 거죠. 그런데 그 사람 사이에 문화가 그런 문화가 있는 겁니다.

삼손이, 삼손이 혼인 잔치 때 퀴즈를 내는 거예요. 퀴즈 강한 자에게서 먹을 것이 나오고, 또 뭐죠? 먹는 것에서 단 것이 나왔다고 그러나요? 단 것에서? 아무튼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또 그거 가지고 막 그러잖아요. 그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우리 한국말로 읽는 사람들은 그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것이죠. 하지만 그 당시의 문화적 상황들을 좀 더 이해하게 된다고 하면, 좀 더 이해할 수가 있겠다 생각이 들고요.

우리가 바른 해석을 하는 데 있어서 또 다른 장애물이 있다고 한다면, 한국말 성경이 애매하게 번역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 번역을 한 사람들이 아주 훌륭한 학자들이고, 성경 원어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 번역을 했지만, 그러나 학자들의 의견이 다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학자들의 의견은 서로 다르게 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학자들이 그 번역한 번역자가 생각하기에 이런 뜻이라고 생각해서 번역을 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번역이 애매한 것들도 많아요. 오늘 본문의 말씀 보니까, 야고보서 5장에서도 다가올 “고생”으로 인하여, 고생? 고생이야 좀 참지. 뭐.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란 말이에요. 고생이 아니고, 다가올 재난, 다가올 그 비참한 상태, 그걸 이야기하고 있는데, 애매하게 번역된 것들이 종종 있어서, 어렵고, 더군다나 우리 한국말 성경은 언제 번역이 됐어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사람들이 선교사님들이랑, 그리고 그 선교사를 도왔던 사람들에 의해서 번역이 된 것이고, 그것에 기반한 성경이 약간씩 개정은 되고 수정은 됐지만, 그 원 근간은 크게 바뀐 것이었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도 어려운 것이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다고 한다면 선입견입니다. 우리가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죠.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면 어떻게 보여요? 저게 빨갛다고 생각하고 보면 빨개 보이는 겁니다. 파랗다고 생각하고 보면, 파래 보이는 겁니다.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다 좋아 보여요. 저 사람은 아주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면, 다 나빠 보여요. 똑같은 행동을 해도, 내가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완전히 달라질 수가 있는 겁니다. 이런 바른 해석의 장애물들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하는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있을 텐데, 그런 장애물들이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이죠.

4. 바른 해석의 출발점

우리가 원통을 바라보게 되면 원통을 위에서 바라보면 동그라미잖아요? 그런데 옆에서 바라보면 네모인 겁니다. 내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똑같은 것도, 어떤 것은 동그랗게 보이고, 어떤 것은 네모나게 보이는 것이죠. 그런데 그때 내가 지금 이것을 바라보는 게 동그라미라고 생각을 했는데, 내가 바라본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지금 네모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요. 저기에 그 사람하고 싸워야 될까요? 아니요. 나는 동그라미인데 왜 저 사람은 네모라고 말할까? 한번 질문을 던져봐야 돼요. 혹시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내가 일부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를 질문을 해봐야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늘 어떤 우상에 사로잡혀 있어요. 어떤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래 가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항상 어떻게 출발해야 되는가? 내가 잘못 보았을 수도 있고, 잘못 해석했을 수도 있다고 하는 내가 잘못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출발해야 됩니다. 바른 해석의 출발점이 어디에 있어요? 내가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바른 해석이 출발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왜 바른 해석을 못하는가? 고집이 세서 그래요. 내가 맞다고 한 번 생각한 것은 이것은 정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늘 잘못된 데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동굴 속에서 저 밖을 바라본다고 한다면, 동굴 속에 있을 때는 저 밖에 있는 세상 뭐 조그만하고,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하지만 그 동굴 밖으로 걸어 나오면 어마어마한 세계가 쫙 딱 펼쳐져 있는 거죠. 그게 플라톤이 했던 동굴의 비유 아닙니까? 우리는 늘 동굴 속에서 우리만의 생각 속에 갇혀 있는 겁니다. 우리의 선입견 속에 갇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옳다라고만 생각하고 있고, 그리고 내 생각과 다르면 싸우려고 하고 다투려고 하고 있는데, 사실 그게 내 생각이 잘못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게, 그게 바른 해석을 위한 첫 출발점이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강한 확신 가운데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수행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크리스천들이 나타난 거예요. 크리스천들이 나타나서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 살아났다고 주장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사도 바울은 아직 회심하기 전에는 순 엉터리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옳았고 저 크리스천들은 잘못됐다고 생각을 한 것이죠. 하지만 그가 결국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깨달음이 무엇이에요? “내가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결국은 참된 진리로 돌아갈 수가 있게 된 것이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확신이지만 그러나 성경을 해석할 때 있어서 잘못된 확신을 끝까지 붙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6명의 소경이 코끼리를 만질 때 각각 만지는 부위에 따라서 다른 평가를 내놓을 겁니다. 하지만 그 평가들은 다 정답이 아니라 잘못된 대답이었고, 완전히 잘못된 대답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맞는 대답이었지만, 완전한 대답은 아닐 수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보다 큽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진리가 훨씬 더 커서, 그래서 우리가 우리 머릿속으로 진리를 다 집어넣을 수가 없는 거예요. 언제나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고 하는 그러한 겸손함이 그것이 바른 해석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고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 혹시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닌지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잠언서 12장 15절 말씀에 보면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어떻게 한다고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서 15장 22절 말씀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해야 되는 겁니다. 당신이 볼 때는 이게 뭐처럼 보였어? 어. 나는 동그라미로 봤는데, 나는 네모로 봤는데, 동그라미, 네모, 어떻게 서로 다른 대답이 어떻게 나왔지?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듣지 않을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 이게 동그라미도 있고, 네모도 있구나” 발견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부부가 필요한 거예요. 사람이 혼자 있으면, 일부만 보고 아무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망하는 겁니다. 그래서 온전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부부가 같이 있어서 서로 다른 면을 봐야 되는 것이고, 교회 공동체가 필요한 것은 내가 성경을 읽어나갈 때, 그냥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밀어붙이게 되면 어떻게 돼요? 망하는 거예요. 누구의 말을 들어봐야 돼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는 겁니다. 혼자만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일 가능성이 많은 거죠.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봐야 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꾸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만들어가야 되는데요.

저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느냐? 저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는가? 열심히 제가 유학도 하고, 공부를 해서 수많은 스킬(skill)들을 배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잘 깨달을 수 있었느냐?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의 여러 가지 저한테 툴(tool)을 주는 것이었는데, 사실은 제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깨달았느냐? 제 아내랑 이야기하면서, 제 아내의 관점을 들으면서, 아,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을 아는 거예요. 우리 교우들과 이야기하면서, 우리 성도님들이 하는 이야기를 통해 “이런 면을 내가 보지 못했었구나. 이게 있었구나”라고 하는 걸 깨닫는 거예요.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 없어요. 동그란 걸 보는 게 완벽한 겁니까? 네모를 보는 게 완벽한 겁니까? 서로 보는 위치가 다른 거예요. 내가 서 있는 입장에서 보는 것은 언제나 내 관점에서 보는 거예요. 그런데 내 관점이 아닌 다른 사람의 관점도 필요한 거잖아요?

노동자의 관점도 필요한 것이고, 사장의 관점도 필요한 것이고, 모든 사람의 관점들이 다 있어야 되는 것인데, 우리가 언제나 일방적인 한쪽 편에서의 관점만 바라보기 때문에, 그래서 이해가 잘 안 되는 거예요. 저는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는 겁니다. 그런데 누구의 관점도 필요해요? 여성의 관점도 필요해요. 여성이 바라볼 때, 이것을 어떤 마음으로 읽었는가를 봐야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게 있구나” 하면서, 서로 그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열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를 알아가는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지, 우리가 나 많이 옳다고 하는 독불장군이 된다고 한다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망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5. 성경이란 무엇인가?

자 성경을 해석해야 되는데, 성경을 해석해야 되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성경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서론이 너무 길죠? 서론은 좀 재미없어요. 죄송합니다. 실제적으로 구체적인 걸 들어가야 재밌는데, 근데 서론을 해야 돼요. 서론을 해야, 큰 조망을 가지고 봐야 되기 때문에, 일단 서론적인 면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성경 해석에 있어서 또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성경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알아야 되는 것이죠.

성경이 뭐죠?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거겠죠. 그런데 그 성경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전달됐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자. 여기 성경이다. 이거 받아라” 하면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들에게 툭 던져줬었나요? 어떻게 성경이 생기게 됐나요? 성경의 저자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모세 오경 같은 경우는 창세기 줄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같은 경우는 누가 썼다고 그러죠? 모세가 썼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이야기들 하잖아요? 모세가 썼다고 그래요. 모세가 기록을 한 겁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를 기록했을 것이고, 예레미아 선지자가 예레미아서를 기록했을 것이고, 다윗과 같은 사람, 솔로몬과 같은 사람, 이런 사람들이 시편을 썼을 것이고, 솔로몬이 전도서라든지 잠언서라든지, 이런 걸 많은 부분을 썼을 것이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성경의 저자들이 있고, 바울 사도가 썼고, 야고보가 썼고, 그리고 베드로가 썼고, 등등 성경의 저자들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의 저자들이 이 성경을 쓸 때 성경을 어떻게 썼겠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바울아, 베드로야,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대로 써라.” “하나님, 알겠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불러주시는 대로 필사만 했을까요? 아니면 그 사람이 썼을까요? 어떤 식으로 성경이 주어진 거예요? 마치 우리가 책을 쓰고, 마치 우리가 편지를 쓰듯이, 성경의 저자들도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만일 제가 성경의 저자라고 한다면, 만일 제가 성경을 썼다고 한다면, 제가 지금 잠깐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 우리 교회에 어떤 큰 문제가 생겼어요. 그러면 “아이고, 이 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지?” 장로님들이 저한테 연락을 합니다.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일들이 있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어떻게 해결하면 좋습니까?” 그럴 때 제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 장로님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장로님, 이 문제는 이렇게 해결하시고, 이 문제는 이렇게 하시고, 이 문제는 이렇게 해결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원리가 이렇고, 무엇이 이렇고 저렇고 해서, 이렇게 해결하십시오.”라고 하는 그 편지를, 제가 만일 멀리 출타 중에 있다가, 편지를 써서 우리 장로님들에게 보냈다고 합시다. 그 편지가 무엇이 됐어요? 성경이 된 거예요. 바울 사도가 쓴 편지들이 대부분 다 그런 것들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바울 사도가 고린도에 있는 교회 편지를 보내고,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의 편지를 보내고, 바울 사도가 그 교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해결책, 여러 가지 교훈들을 쓰면서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어떤 목회자가 쓴 사신이 아니라, 어떤 목회자가 쓴 개인 편지가 아니라,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해주신 말씀이라고, 성경으로 들어가 버린 거예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라고 하는 사람이, 마가 누가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좀 설명해 주세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좀 말해주세요. 그냥 설교만 하지 말고, 좀 글로 써가지고 각 교회에 좀 나눠줘서,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그렇게 정리 좀 해주세요”라고 하는 부탁을 받았을 때, 마태가 “그래요. 그러면 내가 하나 쓸게요.” 해가지고 예수님에 대해서 쭉 기록해가지고, 예수님의 일정에 대해서 기록해가지고 어느 교회에 보낸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 준 겁니다. 그게 성경이 됐어요.

누가라고 하는 사람은 데오빌로 각하에게 편지를 쓰는 겁니다. 데오빌로가 누가한테 물어요.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야? 왜 기독교가 왜 이 모양 요꼴이야? 왜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 기독교가 뭔지에 대해서 나한테 설명해줘” 했을 때 누가는 편지를 쓰는 겁니다. “데오빌로 각하여, 내가 지금까지 연구한 바에 의하면, 내가 조사도 하고 증거도 수집하고, 모든 것을 다 수집해가지고, 그래서 사실만을 제가 적어서 보내겠습니다.” 하면서 글을 싹 쓴 게, 누가복음이 되고, 그다음에 사도행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냈는데, 그게 성경으로 편입이 된 거죠.

모세는 이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오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곧 놔두고 죽게 될 상황이란 말이에요. 내가 죽게 되는 상황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 말씀을 잘 지켰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그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려줄 그 율법을 다 일일이 기록한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달해주고 죽었단 말이에요. 그게 성경에 들어와 있고, 이사야 선지자의 경우에는 좀 더 특별하죠.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전달하라고 하는 그 내용들이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환상과 계시로 받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고, 그리고 이사야가 기록한 내용들도 있고, 역사가들이 쓴 글이 이 안에 들어와 있고 다 들어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성경이 어떤 성경이에요? 인간 저자가 있는 책이다 이 말이에요. 인간 저자가 있는 책,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석할 때,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는가? 우리가 어떤 사람의 편지글을 읽고 해석할 때 필요한 원리와 방법들이 성경에 똑같이 적용이 되는, 성경을 해석하는 게 어떤 신비한 영역이 아니라, 그냥 어떤 뭔가 특출한 신비한 영적인 의사를 받은 사람들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냥 편지를 받게 되면, 우리가 어떤 문서를 받게 되면, 누구든지 그 문서를 잘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것도 일반 문서를 해석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든지 초중고등학교만 제대로 잘 나오고, 맨날 나쁜 짓만 안 했으면, 그러면 어느 정도 성경을 해석할 만한 그러한 기본적인 자질들은 다 가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이 이렇게 사람들이 쓴 성경 말씀인데, 성경 전체에서 가르쳐주는 그 성경에 대한 가르침이 무엇이냐 하면,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인간 저자가 하는 그 모든 글, 쓰는 것 하는 그 모든 것들을 오류가 있도록 방치해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보호하셔서, 성령님께서 영감을 주셔서, 그 사람들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하셨다고 하는 것이 성 영감설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전적으로 또 한편으로는 100% 인간의 책이라고 하는 점을 보면서,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우리가 일반 문서를 해석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될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책만이 아닌 100% 하나님의 책이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면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게 뭐냐면, 성경에 통일성이 있다고 하는 원칙이에요. 그렇죠?

일반 사람들의 보통 책들은 통일성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이 사람이 쓴 말과 저 사람이 쓴 말 사이에 서로 차이가 있다 이 말입니다. 이 사람이 주장하는 말과 이 사람이 주장하는 말이 서로 다르단 말이에요. 그래서 통일성이 없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이 세상 모든 책들은. 하지만 성경은 무엇인가? 각각의 저자가 다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의 독특성들이 각권마다 다 다르지만, 그리고 표현도 다르고, 방식도 다르고, 다 인간 저자의 특성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무엇을 가지고 있다? 통일성이 있어서, 예를 들어서 바울 사도가 한 말과 야고보 사도가 한 말이 서로 상반되는 말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어떤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바라볼 수가 있어요? 이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통일되고, “뭔가 이게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전제 속에서 성경을 바라볼 수가 있는 것이죠.

특별히 예수님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실 거라고 하는 예언이 구약 성경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메시아로 오셨고, 그 메시아가 다시 오실 거라고 하는 이 커다란 창조와 구속과 그리고 타락과 구속과 그다음에 이 모든 재림과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 점을 보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게 아니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바라볼 때, 만일 성경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으면, 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일반 서적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거야 저자가 서로 다르니까, 서로 다른 이야기하고 있다”라고 쉽게 결론 내려버리면 되죠 하지만 성경은 무엇입니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도, 우리가 이것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고, 마치 원통의 동그라미와 네모처럼, 똑같은 것의 다른 측면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조화롭게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전제로 이 성경 말씀을 볼 수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성경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성경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접근을 해야 되는 것인데, 이것이 사람의 손에 의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어느 날 하나님께서 뚝 내려준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상황과 조건과 상황 여러 가지 형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이 그 당시 그때 어떤 의미였는가를 먼저 깨달아야 되고, 2차적으로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발견해 나가야 되는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성경에 있는 그 말씀이 일차적으로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인가요? 아니요. 아니오를 먼저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성경이 우리들에게 1차적으로 주신 말씀인가요? 아니요.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너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내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이 말씀은 누구에게 주신 말씀이에요?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지, 권사님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 말씀 믿고, 이사 가면 돼요? 안 돼요? 안 된단 말이에요.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에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랬으면 누구한테 준 말씀이에요?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그 여성들에게 주신 말씀이에요. 그래서 그때의 상황과 이 상황 가운데서, 왜 이런 말씀을 해 주셨고, 그리고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우리가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렇다고 한다면 이 말씀의 의미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대해서 2차적으로 분석해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인간 저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책이라고 하는 것들을 우리들이 종종 망각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냥 마치 맹구처럼 반응하는 일들이 교회 내에서 종종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맹구의 원칙이 뭐예요? 들리는 대로 행한다. 문자 표현대로 행한다. 그래서 그 문자 그대로 행동하면 되나요? 식판 들고 오라고 그랬다고, 식판만 들고 가면 되나요? 놀랍게도 성경은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고 여러 곳에서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진설병은 제사장들만 먹으라고 했지만, 아히멜렉은 그 문자에 메이지 않았던 겁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진지한 고민과 하나님의 마음을 안 것이죠.

저는 맹구와 같아서 꽃나무에게 물 주라고 했다고 하는 그 말을 듣고 열심히 줬습니다. 결국 꽃나무 죽였어요. 꽃나무에 물을 주란 얘기는 그냥 물만 주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꽃나무에 물이 필요할 경우에 한해서, 적당하게 물을 주라고 하는 그런 의미였어요. 그런데 저는 그 말을 못 알아들어가지고, 맹구와 같은 남편이라 물만 줬어요. 막 죽고, 죽여놓고, “나는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죽었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아니하면, 맹구처럼 행동하는 크리스천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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