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성경 해석학 강좌 제3강 – 성경 전체를 고려하라

6. 성경 전체를 고려하라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지금 같이 공부해 나가고 있는데,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그런 원리들을 배우기에 앞서서, 서론 부분에서 다뤄야 할 부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기초가 쌓여야, 실제적인 원리로 들어가고, 본문들도 다뤄보고, 이렇게 할 수 있을 텐데, 서론을 하다 보면 재미가 없어요. 추상적이고 그래서,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원래 계획은 서론을 좀 이렇게 해놓고, 토대를 착 다져놓은 다음에, 그다음에 구체적인 원리로 이렇게 들어갔으면 좋겠다 생각을 했었는데, 그러면 재미가 없으니까, 가능하면 빨리 원리 쪽으로 구체적인 것 쪽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그래서 진행 순서를 좀 약간 바꿔서 진행해볼까 싶습니다.

일단은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성경 해석의 제일 중요한 원리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성경을 해석할 때, 내 앞에 있는 그 본문만 보면 되는 게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항상 생각하고, 그 성경 전체의 메시지 속에서 부분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하는 게,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렇지 않고 성경 일부분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부분만 보고 있다고 한다면,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우리가 살펴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잘못된 결론으로 갈 가능성이 굉장히 많은 겁니다.

이렇게 성경 전체를 한꺼번에 다 고려한 가운데 부분을 살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지난주에 우리가 배웠던 것처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성경이 어떤 개인이 쓴 책, 어떤 저자가 쓴 책, 물론 인간 저자들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그 인간 저자들이 여러 명이 있는데, 그 인간 저자들이 서로 유기적인 연관성이 없이, 그냥 독자적인 책들을 다 써냈다고 한다면, 이런 해석법을 적용할 수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성경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 독자들이 여러 명이 있지만, 저자들이 여러 명이 있지만, 여러 명의 저자들이 있어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섭리하는 가운데, 그 성경책이 만들어지고,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에게 전달되기를 원하셨다고 한다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 무엇이냐면, 그 성경 전체가 통일성을 가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전체적인 의도 속에서 성경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그 성경 전체의 가르침 속에서 그 부분 부분들을 살펴보아야,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원칙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해가 되셨습니까?

이러한 사실이 이러한 해석학적인 원리를 가리켜서 신앙의 유비(analogy of fiath)라고 합니다. 신앙의 유비. analogy of faith. 종교개혁자들이 한 말인데요. 이렇게 얘기해버리니까,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신앙의 유비”라고 하는 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 의미를 밑에 설명을 해놨습니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 “성경이 성경 자체의 해석자이다.” “성경의 어느 부분도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과 모순되는 방식으로 해석될 수 없다.”라고 하는 그 원칙이 “신앙의 유비”라고 하는 원칙입니다. 이런 신앙의 유비라고 하는 전문적인 용어는 모르셔도 되는데,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라고 하는 원칙은 여러분들이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하는 그 말을 여러분 신앙생활하시면서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많이 들어봤을 건데요. 많이들 하실 건데요. 말씀 많이 들었죠? 성경을 해석할 때, 우리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된다”라고 하는 말을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많이 하셨어요. 졸지 않으셨다고 하면, 들었어요. 아무리 이렇게 슬슬 가르치시는 목사님이라도, 그 말은 안 썼을 거예요. 성경을 해석할 때 어떻게 해석하느냐?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지, 다른 걸로 해석하면 안 된다”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아마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그게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성경의 유비라고 하는 원칙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 성경을 성경으로 푼다”라고 하는 그 말이 진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워보지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푼다고 하는 이야기는, 성경에 어느 구절에 이런 단어가 있고, 성경에 어느 구절에 이런 단어가 있으면, 그 이 구절과 이 구절을 연결시켜서 해석하는 걸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잘못 공부하신 거예요. 오해하신 거예요.

예를 들어서, 성경에 포도나무라고 하는 게 나와요. 무화과 나무라고 하는 게 나와요. 그런데 포도나무라든지 무화과나무라든지 하는 것들이 성경의 어느 구절에 보면, 그게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됐어요. 예를 들자면 어디에 그런 게 사용되었죠? 이사야서에 보면, 나오잖아요? 내가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나무가 열매를 제대로 안 맺고, 그냥 들포도를 맺었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는 내용이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그 열매가 별 보잘것없다고 해서 한탄하시는 이 내용이, 농사 망쳤다고 하는 이 얘기예요? 무슨 얘기예요?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이야기잖아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참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고 계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고 그래 버리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는 내용이 바로 그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에 어느 구절에 포도나무가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걸로 사용되고,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걸로 사용됐으니까, 포도나무가 나오면 그걸 무조건 이스라엘 민족으로 대입해서 해석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아니죠.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때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잘 볼 수 있는 게, 포도나무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그랬지, 만일 예수님께서 대한민국에 사셨으면 뭐라고 말씀하셨겠어요? “나는 감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렇게 얘기하셨겠죠. 아무 나무나 다 대입해서 할 수 있는 말씀이지, 예수님께서 이 포도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의미한 게 절대 아니라 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라고 하는 말씀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인데, 무화과나무가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낸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독립한다는 얘기인가?”라고 해석을 했다 이 말이에요. 그렇게 해석을 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사셨으니까, 무화과나무를 대고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죠. 예수님께서 만일 대한민국에서 사셨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아이고, 이번엔 “개나리 꽃이 피고 , 벚꽃이 피고, 매화가 피면, 봄이 오고, 이제 곧 여름이 오는 걸 알지 않겠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지 않았겠어요? 그렇죠? 이건 이스라엘 민족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성경으로 푼다라고 하는 원칙, 이 원칙을 어떤 구절에 있는 단어가 성경에 있는 다른 구절에 나오는 단어가 똑같다고 해서, 무조건 대입해서 해석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너무나도 많아요. 우리 한국교회에. 그러면 제대로 된 해석이 나오겠어요? 엉터리 해석이 나오는 거죠. “예수님은 이스라엘이래. 이스라엘 민족이래. 이스라엘이 독립하면, 종말이 온대.” 등등과 같은 엉터리 해석들이 나오는 거죠. 이러한 엉터리 해석들이 많이 용인되다 보니까, 많이 있다 보니까, 그런 엉터리 해석들을 잘 써먹은 집단이 있어요. 누구겠습니까? 신X지예요. 신X지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한국교회의 토양에서 태어난 거예요. 한국교회 강단에서 사용했던 그런 엉터리 성경 해석의 방법을 그대로 차용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마태복음 13장에서 이야기했으니까, 다른 곳에 나오는 씨는 무조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면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겁니다. 똑같은 단어라고 할지라도, 문맥에 따라서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성경을 성경으로 푼다고 하는 원칙을 오해해서, 무조건 단어만 같으면 서로 연결시켜버리고, 해석을 하니까, 엉터리 해석이 나오는 것이고, 그런 엉터리 해석들이 교리라고 하는 그런 우산 아래에 있으면, 그나마 그래도 좀 안전하게 가지만, 그런 교리라고 하는 우산을 팽개쳐버린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무한대로 열려버리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해석 방법은 어떤 해석 방법이냐? 어느 날 갑자기 원숭이가 백두산이 되는 해석이에요. 그렇죠?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는 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긴 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른 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은 건 백두산. 원숭이가 어느 순간에 백두산이 되어 버리고 마는 엉터리 해석이 되고 마는 겁니다. LA에 있는 김 모 목사라고 하는 S 교회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한동안 굉장한 인기를 끌었는데, 그 사람이 쓰는 방법도 이와 똑같은 방법이에요. 성경에 나온 단어가 있으면 그 단어를 가지고 무조건 대입하는 겁니다. 여기서 이 말이 있으니까, 그것을 대입해다, 성경을 성경으로 풀려고 했으니까, 성경으로 성경을 풀다 보니까, 엉터리 해석들이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신앙의 유비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성경을 성경으로 푼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성경 일부의 본문의 구절들을 해석한다는 얘기입니다. 어느 한 구절, 어느 한 구절, 그 구절에 따라서, 내 교리를 세우는 게 아니라, 한 구절 읽어놓고 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절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절까지 다 살펴보고, 그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해석해야 제대로 된 해석이 나온다고 하는 게 “신앙의 유비”라고 하는 말이고, “성경을 성경으로 푼다”는 말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푼다”라고 하는 그런 해석 원칙이 되는 겁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푼다라고 하는 원칙이 오해되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같은 단어라고 하면 무조건 대입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천국에 누가 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천국에 가는 결과가 나옵니다. 왜? 어린아이라고 하는 똑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8장 4절에 말씀해 보면,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4장 14절에 보니까,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않게 하려 하니라.” 그렇다는 얘기는 이제부터는 우리가 천국에 안 들어가겠다는 뜻인가요? 어린아이가 천국 간다고 그랬는데, 에베소서에서는 어린아이가 안 되려고 한다. 천국 안 가겠다고 하는 말인가요? 네? 아니잖아요? 아니잖아요?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어린아이는 똑같은 단어이지만 다른 의미가 들어있는 겁니다. 하나의 의미는 그 어린아이가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기도 하고,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기도 하고, 신뢰하기도 하는 그런 게 어린아이인 겁니다. 하지만 반면으로 또 다른 어린아이의 내용이 어떤 내용이 있어요? 그 어린아이는 유치한 겁니다. 성숙하지 못한 겁니다. 자라지 못한 겁니다. 아직 완전해지지 못한 게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어린아이라고 하는 단어가 있어도, 마태복음 18장 4절에서의 어린아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아버지를 신뢰하듯이 신뢰하는 사람,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에베소서 4장 14절에서 어린아이라고 하는 말은 미숙한 사람, 잘하지 못한 사람, 뭔가 불완전한 사람, 그런 사람을 의미하는 어린아이인 겁니다. 같은 단어라고 해도 문맥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같은 단어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다 연결시켜버려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고 하는 그런 방법은 우리 한국 교회를 망치고 있는 가장 큰 주범 해석학적 주범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을 푼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어떤 의미라고요?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따라서,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고려하여, 성경의 부분들을 해석한다고 하는 것이 성경을 성경으로 푼다. 신앙의 유비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고 하는 것을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분명하게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려운 일이에요. 쉬운 일이 아니라, 어려운 일인 겁니다. 왜 전체를 알려면 뭘 알아야 돼요? 부분을 알아야 전체를 알 수 있잖아요? 부분을 부분 부분 부분 부분을 다 알아야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부분을 알기 위해서는 전체를 알아야 부분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해석학적 순환이 이루어지는 거죠. 알 수가 없어요. 전체를 알아야 되는데, 그 전체를 알려면 부분을 알아야 되고, 부분을 알려고 하면 전체를 모르면 부분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어려운 겁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학적 순환이 있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점점점점점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죠. 부분을 조금씩 알아가고, 전체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성경을 건전하게 해석해 나가면서, 우리의 이해가 점점점점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로 넓어져야 되는 것이고, 그 전체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서, 부분에 대한 이해도 더욱더 풍성해지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걸 통해서 많은 신앙의 훈련들을 해 나가야 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결론은 끝나고 가시면서 머릿속에서 분명하게 기억할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성경을 성경으로 푼다”라고 하는 원칙은 똑같은 단어가 나오면, 무조건 대입할 수 있다고 하는 게 아니고, 그건 잘못된 거라고 그랬어요. 그게 아니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성경 부분 부분을 해석해야 된다.” 이게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해석학적인 원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걸 가리켜서 라틴어로는 뭐라고 얘기했을까요? 토타 스크립투라(tota scriptura), “성경 전체로”라고 하는 원칙인 것이죠. 성경 전체로. 성경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성경의 일부분만을 바라보게 될 경우에, 어떤 참사가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여러분 알고 계셨습니까? 우리가 선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거라는 걸 아셨습니까? 이방인들에게, 외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건 하나님께서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 근거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명기 14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선택했지 이방인은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7장 4절에 보면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질 거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7장 1절 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있는 백성들을 살리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23장 3절에 보면 암몬 족속이나 모압 족속은 영원히 하나님의 종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시적으로만 못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못 들어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사마리아인들이나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가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 여인, 수로보니게의 여인을 향해서, “나는 이스라엘에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해외 선교를 한다고 이방인들에게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행위가 됩니다. 아셨습니까?

고개를 흔드셨잖아요? 왜 아니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런 말씀도 있지만, 성경 전체의 말씀을 살펴본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온 민족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결론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에 보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20절 말씀에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들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너희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 말씀에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이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8장 11절 12절 말씀에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나라의 본 자손들은 쫓겨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심지어 구약성경에서도 룻이 모압 여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었고, 다윗의 조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사야서에도 보면, 마지막 때가 되면 많은 민족들이 하나님에게로 나아올 것이고, 시온산에 모여들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교는 하나님의 뜻이에요? 선교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이에요.

영원히 모압 민족과 암몬 민족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는 신명기의 말씀이 있는데, 모압 민족 암몬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없어요? 영원히 못 들어온다고 쓰여있는데, 들어올 수 있어요? 없어요? 들어올 수 있어요. 신명기 23장 3절만 보면 못 들어온다고 얘기해야 될 것 같아요. 그 구절만 보면, 하지만 룻기를 보니까, 들어왔어요. 그리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하나님이 누구신가”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게 될 때,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고,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신 거예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것은 모든 민족에게 제사장 나라가 되어, 그들도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복을 얻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엉뚱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방인 선교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몇 구절을 뽑아내면, 이방인 선교가 불가능한 일이 되는 겁니다.

목회자가 목회만 해야 됩니까? 자기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면서 목회할 수도 있습니까? 직업을 가질 수 있다. 얼마 전에 우리 합동 교단의 교단지인 기독신문에 광고가 이만한 광고가 하나 실렸습니다. 어떤 선교사라고 하는 분이 “이중직 반대합니다”라고 하는 구절을 써놓고, 그리고 그 밑에는 성경 구절만 적었습니다. 어디를 적었는가? 마태복음 6장 33절을 적었습니다. 뭐라고 적었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26절부터 29절도 적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하나님께서 이런 하찮은 것들도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왜 걱정하느냐?” 등등 그런 구절들을 써 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목회자가 일반 직업을 가지면 안 되고, 그것은 믿음 없는 것이 될까요? 야고보서의 말씀도 적어 놓은 겁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거라고 하는 그런 성경 구절도 적은 겁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절대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고, 일하면 안 되는 것이 맞을까요? 어때요? 그게 순 엉터리 해석이에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봐야죠.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어떻게 돼 있어요? 일하는 건 나쁜 거라고 돼 있나요? 바울 사도는 복음만 전한다고 나와 있나요? 일하기 싫어, 하나님의 일만 하고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 돼 있나요? 그게 아니라,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되어 있고, 우리가 일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부르시든지 간에, 그 모든 것들이 그 안에서 신실하게 사역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 보신다고 하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봐야죠.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안 보고, 몇 구절들만 보고 “문 닫고” 들어오라고 했으니까, 문 닫고 들어와야지. 왜 문 열고 들어와? 그렇게 따지는 일들이 놀랍게도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선교사라는 사람이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황당한 일들이 어디 있어요? 성경을 해석하는 제일 큰 원칙이 무엇인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봐야 하는 것이죠.

과거의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노예 제도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노예를 향해서 주신 바울 사도의 권면이 뭐냐 하면, 너희는 주인을 거부하고, 박차고 해방을 위해서 투쟁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가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주인을 마치 주께 하듯” 섬기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구절만 보고 노예 제도는 정당하다고

말을 한 겁니다. 그런데 그게 바른 해석일까요? 성경에 다른 구절은 안 보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을 향해서 저주하지 말라고 하시는 그 말씀이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이나, 이런 말씀들은 왜 안 보는 거예요? 그건 없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편할 때는 마음대로 어기면서 써요. 언제? 성경에는 세상에 나가서 세상 사람들의 법정에서 소송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쓰여 있는데, 그것은 또 안 지켜요. 다른 것은 성경 구절 한두 구절 들이대면서 그것을 꼭 지켜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모순된 행위를 할 게 아니라, 우리는 겸손하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구원받는 것 대신에 …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죄를 짓습니까? 짓지 않습니까? 짓잖아요? 그렇죠? 뭘 졌습니까? 그런데 구원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의인은, 주님을 영접한 의인은 죄를 안 짓는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왜? 요한일서 5장 18절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 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라고 하는 말씀이 요한일서 5장 18절에 있는 겁니다. 요한일서 3장 4절 말씀에도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이런 말씀을 보면, 죄인과 의인으로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는데, 죄인은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을 믿은 의인들은 절대로 죄를 지을 리가 없다고 하는 게 구원파의 주장인 것이죠. 그 구절만 보면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성경에 다른 곳에는 어떤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까? 뭐라고 돼 있죠? 요한일서 1장 8절에서부터 10절 말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고,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거라고 하는 말씀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 구절 한두 구절 보면서, 우리가 함부로 결론을 내리면 안 되는 것이죠.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누가 구원을 받죠?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갑니까? 예? 예? 선한 일을 해야 천국에 가요. 왜? 요한복음 5장 29절의 말씀에 뭐라고 돼 있어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되어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말씀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해야 천국에 간다고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천국에 가요? 선하게 행동한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거예요. 누가 지옥에 가요? 악한 일을 하면 지옥에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한 일을 해야 천국 간다. 악한 일을 하면 지옥 간다라고 결론을 내리면 되나요? 아니요. 왜? 성경 다른 곳에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나타났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우리가 전체적으로 살펴보지 않는다면, 일부 구절만을 빼서 그 구절만을 생각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잘못된 결론으로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잘못된 나온 결론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정말 그렇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마음대로 죄를 지으며 살아도 괜찮겠네. 천국에 가서 누가 물어봐요? 천국에 가서 천국의 문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물어보는 겁니다. 천사가 물어보는 겁니다. 베드로가 물어보나요? 아무튼 물어보는 거예요. “너 착한 일 했어? 나쁜 일 했어?”라고 물어요? 그게 아니라 “예수 믿어? 안 믿어?” 물어본단 말이에요. “예수 믿어” 그러면 “통과.” “예수님 안 믿어” 그러면 “지옥.” 그러니까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괜찮죠? 천국에 갈 때 안 물어본다며요? 예수님을 믿는가만 된다며요? 그런 또 결론을 그런 결론을 내리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또 무엇입니까? 야고보서의 말씀을 보면,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며,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게 믿음이 아니고, 교회를 다니는 게 믿음이 아니고, 믿음은 예수님을 나의 주로 모시는 것이고, 예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고 함께 영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괜찮겠다고 하는 그런 잘못된 결론으로 나가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불신자와 같이 교제해도 됩니까? 안 됩니까? 돼요? 크리스천은 불신자들과 거래를 해도 되나요? 불신자들의 물건을 사거나 팔거나, 아무튼 거래를 해도 될까요? 고린도후서 6장 14절 18절에서는 무슨 말씀을 하고 있어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또 빛과 어둠이 어디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그랬는데, 거래해도 돼요? 안된다고, “아이고, 된다고 자꾸”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는데, 돼요? 왜 이런 말씀도 있지만, 또 다른 말씀이 바로 옆에 쓰여 있구나. 그러니까 “된다. 된다” 그러죠. 바로 옆에 쓰여 있어요.

고린도 전서 5장 9절 10절 말씀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내가 쓴 편지에 음행 하는 자, 사귀지 말라고 했지만, 그 얘기는 이 세상에 음행 하는 자들을 상대도 하지 말라. 속여 빼앗는 자들하고는 아는 채도 하지 말라. 우상 숭배하는 자들하고는 아예 관계 맺지 말라고 그렇게 말한 게 아니라, 그럴 수가 없다. 그러려면 우리가 지구를 떠나야만 가능한 일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불신자들과 함께 거래해야 되는 것이고, 장사도 해야 되는 것이고, 꽃을 사러 오면 꽃도 팔아야 되는 것이고, 먹을 것을 사러 오면 먹을 것도 팔아야 되고, 또 우리가 무엇인가 물건을 산다고 한다면, 불신자의 가게에서 이단의 가게에서 우상숭배자의 가게에서 사 와야 될 필요도 있는 것이고, 여러 가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지, 불신자들하고는 아예 상종을 하지 않으면서, 우리끼리만 사는 게 그게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고 고린도전서 5장 9절에서 10절 가운데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첫 시간에 첫 부분에 얘기했어요. 성경을 해석할 때 어떻게 해석하라? 부분만 보지 말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고려하라”가 오늘 배우는 원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뭔지를 여러분들 아셔요? 방대해서 모르잖아요?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그 방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이런 내용이다”라고 요약을 잘해 놨어요. 지금까지 2천 년의 역사가 흘러오면서,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이것은 이것이고, 저건 저것이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이게 맞는 것 같다. 저게 맞는 것 같다. 해가지고 신앙의 표준들을 다 그때그때마다 수립해서 지금까지 내려오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신앙의 표준들이 우리들에게 굉장히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성경을 읽으면서 나 혼자 이 이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맞는 게 아니라, 정말 내 생각이 맞는지 한번 들어봐야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표준들을 다 정해 놓았는데, 그 내용들이 아주 좋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배우고 알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성경 전체의 의미를 어느 정도 알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유익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지금까지 나왔던 여러 가지 신앙의 표준들을 한번 보여주세요. 325년에는 니케아 신조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져서 예수님도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때 신앙이 고백이 됐죠. 451년도에는 칼케돈 신조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져서, 예수님은 신성도 가지고 있고 인성도 가지고 있으면서, 참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참 인간이다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밝힌 신조가 칼케돈 신조입니다. 5세기의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확립해준 신조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이시고 동등한 하나님이시고, 세 분이지만 한 분이시고, 한 분이시지만 세 분이라고 하는 그런 삼위일체론을 표명한 것이죠. 그게 이것은 아타나시우스 신조까지는 가톨릭과 우리 개신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신앙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그 이후에 종교 개혁적인 그런 신앙 표준들이 만들어졌어요. 제네바 교리 문답은 칼빈이 만든 것으로서, 기독교강요라고 하는 엄청난 대작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고, 스위스에서 만들어진 헬베틱 신앙, 고백 독일에서 만들어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프랑스 위그노들 위그노라고 하는 사람은 세계사 배우신 분들 계십니까? 프랑스에서 박해를 받던 개신교인들을 가리켜서 위그노라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만든 갈리칼 신앙 고백, 네덜란드에서 만든 벨직 신앙 고백, 스코틀랜드에서 만든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 네덜란드에서 만든 도르트 신조, 도르트 신조의 예정론이 분명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1647년 영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안에는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행위 언약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고, 이중 예정,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를 미리 택하시고, 구원받지 못할 자도 미리 정하셨다고 하는 예정론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 표명되어 있고, 우리 인간에게 100% 완벽한 자유 의지가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고 하는 그런 자유 의지에 대한 정의도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 있고, 그것을 잘 문답 형식으로 만든 것이 대요리 문답 소요리 문답인데, 소요리 문답은 어린이들을 위한 문답, 대요리 문답은 어른들을 위한 문답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 한국 교회에는 어떤 신조가 있는가? 12 신조라는 게 있어요. 12 신조는 뭐냐? 미국의 장로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간단한 신조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해서 지금 현재 채용하고 있는 것이 12 신조인데, 그래서 이런 신앙의 표준들을 잘 이해하고 아는 것은 성경을 우리가 바르게 판단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그렇죠?

우리가 구원을 어떻게 받는가? 성경 말씀에 보니까, 착한 일을 해야 구원받는다고 쓰여 있거든요. 선한 일을 해야 구원받는다고 쓰여 있거든요. 그걸 보면서 우리가 착해야 구원받는구나라고, 쉽게 결론을 내리면 안 되는 이유가 뭐예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그게 아니니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고 되어 있으니까. 그런 결론을 함부로 내리면 안 되는 거죠. 근데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미리 우리들에게 정보를 주는 게, 이런 신앙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어서, 이런 표준들을 공부하고 참조하는 것은 아주 유익하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교회에서 있으면서, 신앙 고백서라든지 이런 표준 문서들을 강의를 별로 잘 안 했는데요. 안 했죠? 안 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싫어해서가 아니고, 맞는 문서고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문서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시대의 산물인가? 17세기 영국의 상황에서 만들어진 문서예요. 그 당시에 가톨릭과 그리고 개신교가 서로 싸우면서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고 있을 때, 우리 개신교회 성도들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 가톨릭의 주장과는 다르게 “우리는 이런 주장이다”라고 하는 것을 정리한 게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인 겁니다. 지금은 그런 질문들을 대부분 안 던져요.

옛날에는 뭐 때문에 싸운 줄 아세요? 성령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가? 이 문제로 서로 싸웠어요.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성부 성자 성령님이 계신데,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다. 성자니까. 성령님은 어떻게 나오시는가?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오시는가? 하나님과 예수님에게서 나오시는가? 그게 차이가 있어요? 없어요? 우리가 볼 때는 별 의미가 없는 논쟁이에요. 별 의미가 없는 논쟁인데, 그 옛날 5세기 6세기 때는 그것 때문에 피 터지게 교회가 싸웠어요. 그래 가지고 로마를 중심으로 한 천주교회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성령으로부터 발현된다”라고 신앙 고백을 했고, 그런데 러시아나 헬라나 이런 정교회 쪽 교회들에서는 그것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어지고, 성령님은 예수님에게서 발현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만 발현이 된다라고, 서로 싸우다가 결국 교회가 갈라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동방정교회와 서방 로마 가톨릭과 갈라지는 계기가 성령님이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냐? 하나님과 예수님에게서 나오느냐? 그 문제를 가지고, 그걸 소위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하는데, 그런 걸로 싸웠어요. 제가 지금 보면 그 딴 걸 가지고 왜 싸우고 있는지, 참 한심해 죽겠어요. 그 당시에 왜 그렇게 싸웠는지. 오늘날에는 그런 거 질문하지도 않고 대답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라든지, 소요의 문답은 그 당시에는 정말로 아주 중요한 문서들이었고, 표준 문서이고, 우리가 바른 길을 가도록 제시해주는 것이 맞아요. 잘못됐다고 하는 게 아니라, 맞아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던지는 질문들이 좀 달라요. 우리 아이들은 그런 문제를 던지는 게 아니라, 다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거든요. 왕따 문제라든가 뭐 등등 여러 가지 문제들 가지고 있는데, 그 아이들에게 그런 문제들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들을 해주고, 그들의 관심에 맞는, 오늘날의 우리의 관심에 맞는 대답들이 나와야 되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교조주의적인 그런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과거에 만들어 놓은 것을 무조건 답습하려고 하는 경향들이 있는 거죠. 그런데 과거에 만들어 놓은 걸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인가요? 아니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바르게 깨달아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사실은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신앙고백문을 다시 또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 시대의 필요에 맞는 그런 신앙 고백문들을 자꾸자꾸 써야 해요. 근데 제가 어떤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 학생을 봤는데, 신학생을 한번 봤는데, 저한테 신앙 고백서를 만들어서 보여줬어요. 근데 그 친구가 신앙고백서를 딱 썼는데, 과거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물론 답을 했지만, 오늘날 이슈가 되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자기가 답을 쫙해놨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저는 굉장히 기뻤어요. 왜냐하면, 이런 지금 신학 훈련을 하고 있는 이 친구가 오늘날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하려고 했다고 하는 그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좋았던 것이죠. 아무튼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따라서, 성경 일부를 살펴봐야 되는 것인데, 그런데 그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우리에게 내려오는 전통 표준 문서들이 우리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기 때문에, 그런 “표준 문서들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린 거예요.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또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그것만이 그것이 우리들에게 정답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과 똑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가 있어요. 우리 교단에서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가 성경과 똑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거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성경보다 아래에 있습니까? 예? 아래에 있어요. 아래에 있어요. 그래서 이 성경 신앙 고백서도 누구의 판단을 받아봐야 돼요? 무엇의 판단을 받아야 돼요? 성경 말씀의 판단을 받아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도 그 옛날 만들어진 신앙고백서가 거의 대부분은 잘 만들어졌어요. 아주 잘 만들어졌어요. 그 당시의 문제들에 대해서 아주 대답을 잘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항상 질문을 던져봐야 되는 거죠.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표준 문서였는가?”라고 질문을 던져보고 또 던져보지 않고, 그것을 성경과 똑같은 위치에 올려놓은다고 한다면, 잘못되는 거예요. 성경이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거예요. 설교도 마찬가지죠. 제가 하는 강의도 마찬가지죠. 제 강의가 성경 말씀보다 더 높이 있거나 성경과 똑같습니까? 아니요. 성경 아래에 있어요. 우리 교회의 수많은 강사 목사님들을 초대할 겁니다. 초대하고 있어요. 그런데 때로는 제가 검증을 못해서, 그냥 별로 좋지 못한 메시지를 전하는 목사님이 올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뭐 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로 목사님들이 올 수 있는데, 그 목사님들이 오면 무조건 다 받아들일 게 아니고, 항상 어떻게 해야 돼요? 성경 말씀에 의해서 메시지를 다시 한번 판단해봐야 돼요. 성경만이 가장 최고의 권위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통은 양날의 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전통은 전통이 우리들에게 안전한 길을 가이드해줍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을 안전한 길로 가게 만들 듯이, 그렇죠?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돼요? “여긴 가지 마. 저긴 가면 안 돼. 이 길로만 가.” 그렇게 할 수 있죠. 하지만 어린아이 때가 지나가면, 그때부터는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가 전통에만 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것인가를 또 검토해보지 않으면 안 되는데, 만일 그렇게 검토하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까? 전통이 성경을 앞서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거죠.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라고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그런 바리새인들의 길을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